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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 (夢みるように眠りたい / To Sleep so as to Dream)
1986 / 하야시 가이조



독특한 느낌의 영화이다.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제목처럼, 영화도 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1986년도에 제작되었지만, 일종의 무성영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부의 대사들은 음성으로 전달되지만, 그 예전의 무성영화들처럼 이 영화는 거의 모든 내용을 화면과 자막과 음악으로만 전달하고 있다. 하야시 가이조 감독의 무성영화에 대한 오마주라고 하는데, 이 영화의 독특한 내용에 이러한 형식이 잘 어울리는 듯 하다.

전체적으로 이야기는 3개의 층으로 전달된다. 먼저 첫번째 층은 주인공 우오츠카 탐정이 조수와 함께 납치된 소녀를 찾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조금씩 답에 근접하는 일반적인 추리물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중간에 슬랩스틱적인 코미디와 액션들이 적절하게 조화되어 흥미로운 전개로 이어진다. 또한 중간에 등장하는 의문의 3인조(오래된 필름에서 튀어나온 듯한) 역시 여기에 독특한 느낌을 더해준다. 그리고 다른 한 층은 영화 속 영화로 진행되는, 주인공 탐정과 조수가 나중에 보게되는 이야기이다. 여자를 구하기 위해 적들과 맞서는 주인공 흑두건이 등장하는 영화 속의 또 하나의 (무성)영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 흑두건의 이야기를 종이 그림극으로 구성하여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 세 가지의 다층적인 이야기가 영화의 마지막에는 하나로 통합되는 것에 있다. 이는 마치 영화 속의 영화가 그대로 스크린을 부수고 나와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와 통합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한편으로 보았을 때 영화 속 영화가 본 영화 그 자체와 이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본 영화 자체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우리들)을 다른 공간으로 이끄는 듯한 기묘한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단순히 이야기의 중첩적인 연결로만 가능했다라고 보기에는 모자란 측면이 있다. 여기에 한편으로 영화 속 회전목마나 회전하는 물체와 같은 독특한 씬들, 그리고 이 영화의 형식이 한 몫을 한다. 즉 영화 속 분리된 상태에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물체들(회전하는 물체들)과 그 물체들에 접근하는 카메라는 중첩되고 있는 이야기를 별 무리가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어떤 몽롱한 경험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즉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라는 말은 꿈꾸는 것처럼(즉, 그 꿈이 완성된 상태에서) 영원한 잠에 들었던 마지막 영화 속 여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꿈꾸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관객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 (友よ,靜かに瞑れ / Tomo yo shizukani nemure)
1985 / 최양일



이 영화는 왠지 다른 어떤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는 이 영화의 어떤 부분부분이 다른 영화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몇몇 장면들은 모두 이 영화보다 훨씬 후에 만들어진 영화들 속 장면이므로, 도리어 다른 영화들이 이 영화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설명에 있었던 말처럼 '이후 만들어진 하드보일드 영화들에 일종의 모델이 될 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80년대 하드보일드 영화의 최고 걸작'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튼 몇몇 장면들은 어쩐지 비슷한 느낌에 피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마지막 장면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를 떠올리게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분명히 이 영화를 보고 이 장면을 흉내냈을거야 하는 의심마저 든다.

아무튼 이 마지막 장면은 앞의 장면들을 모두 잊게 만들 정도로 인상적이다. 이상한 삼각형 구도. 나쁜 놈들(경찰)과 조금 더 나쁜 놈들(건설회사 측)과 주인공 신도와 그의 곁에 있는 친구의 아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길거리에서의 기묘한 삼각형. 여기에 경찰이 그간 붙잡고 있던 주인공의 친구 사카구치를 풀어주면서 이 삼각구도의 균형에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이어지는 총격씬과 떨어지는 레몬과 고개를 들어 그 장면을 보도록 하는 주인공 신도와 다시 급커브를 그리며 그 곳을 떠나는 신도와 레몬을 깨물어먹는 아이를 교차하여 보여주는 장면은 짧은 순간에 많은 것을 응축하여 보여준다. 이 싸움에는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는 것, 즉 시스템의 붕괴는 가능하지 않으며, 오로지 일시적인 균열만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언젠가는 저 아이도 세상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는 것(그러나 한편으로 그 승리가 가능한가(혹은 의미가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쉽게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장면 외에도 주인공 캐릭터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주변의 풍경들이 인상적이다. 외딴 마을에 들어온 주인공을 모두 외면하는 이상하게 적막해 보이는 마을 풍경과 그에 대비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폭력과 권력의 균형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공간을 균열시키는 하나의 점으로 주인공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말없는 이 캐릭터는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은 물론이고, 이를 보고 있는 관객들마저도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어떤 특유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가장 무서운 사람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지요."). 그리고 적막한 마을의 풍경과 대비되는 주인공이 머무는 호텔의 자유롭고 시끌벅적한(그리고 한편으로 따뜻해 보이는) 공동체의 모습은 이러한 주인공의 캐릭터를 더욱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하드보일드한 캐릭터를 창조시키는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화 속 적들의 모습이나 추격씬, 그리고 나중에 적의 중간 보스와 벌이는 결투 등, 수많은 클리셰들이 도사리고 있고, 한편으로 그 클리셰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장르적 굳건함이 유지되는 흥미로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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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0-06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다양하게 찾아서 보시고 좋은 글로 남겨주셔서
또 잘 읽었습니다.^^
둘 다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이는군요.

맥거핀 2009-10-07 11:59   좋아요 0 | URL
제가 잘 찾아서 본다기 보다는, 요새 여러 좋은 기획들이 많아서요.
좋은 영화들을 볼 수 있는 루트는 늘어나는데, 여유가 없어서 잘 못 보네요.^^

네..고전이 좋은것은 여러 번의 검증을 거쳤다는 이유때문이겠지요.
옛날영화들은 그래서 실패(?)할 확률이 별로 없습니다.
아무튼 두 영화 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약간 이상하게 보이는 부분들도 있지만,
말씀해 주신대로 또 매력적인 부분들도 많습니다.^^
 

어떤 영화제이건 간에, 영화제에 참여하는 것은 즐겁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영화제에 가면 영화제 특유의 웅성웅성하고 기대감에 찬, 관객들의 어떤 공유하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고, 어떤 영화라도 편견을 가지지 않고, 즐겁게 느끼고 가겠다는 그런 분위기.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영화제에서는 영화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외부의 풍경들,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근처의 색다른 먹을거리 등등. 물론, 이번 충무로국제영화제 같은 경우에는 그런 재미는 조금 반감된다. 가끔 한 두 번 씩은 가던 극장들이기 때문에, 극장 내 외부의 풍경들이란 빤하다. 그래도 빨간 옷의 자원봉사자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관객들을 대하는 것을 보는 것은 여전히 마음이 좋아진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내 경우에만 해당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영화제에서 보는 영화들은 거의 대부분 영화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제목만 보고, 한 두가지 사소한 이유로(예를 들어, 시간이 맞아서..) 선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영화를 색다르게 즐길 수가 있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영화 내용을 좀 자세히 살펴보고 영화관에 가는 편이다. 영화의 내용이 어떠한 내용인지, 평은 어떠한지,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은 어느 부분인지 읽어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이런 과정에서 필요 이상의 너무 많은 정보를 알게 되어, 영화의 재미가 약간 반감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뭔가를 많이 알고 영화관에 가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많이 알고 가면 갈수록 영화를 여러 겹의 형태로 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아무튼 그런저런 이유로, 이번에 충무로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들도 거의 우연적으로 선택되었다. 시간이 맞고, 약간은 나에게 흥미를 주는 요소가 있으며, 표가 남아 있던 영화들 위주로. 그리고 영화제에서 본 3편의 영화에 대한 약간의 코멘트.




레인 폴, 맥스 매닉스 감독

'씨네 아시아 액션' 섹션에 있던 영화다. 이번 영화제는 아시아 액션물에 대한 라인업이 괜찮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 섹션에 있던 영화를 많이 보고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2편 밖에 보지 못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영화는 그리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 일본에서 비밀 공작 활동을 벌이는 CIA가 추적하는, 국제적 킬러 존 레인(시이나 깃페이)의 활약을 그린 영화인데, 주인공 존 레인 캐릭터의 구축이 모호하여, 영화의 전체적인 매력도 반감되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명색이 액션 영화인데, 사실 그럴듯한 액션 장면도 별로 없다. 아무래도 액션 영화의 매력이란 주인공이 악당들과 맞서서, 혹은 냉혹한 운명에 맞서서 정면충돌을 벌이며,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이 매력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존 레인은 맨날 도망만 다닌다. 그리고는 같이 도망치는 여주인공에게 '경찰을 만났을 때 들키지 않는 법' 이런 강의나 하고 앉아있다. 그나마 건진 것이라곤, CIA 도쿄 지부장(?)으로 나오는 게리 올드먼의 많이 녹슬었으나 아직은 봐줄만한 연기다. 수십개의 CCTV 화면 속에서 도망치는 존 레인을 참 어지간히도 못 잡는 CIA 요원들의 활약을 보면서 분통을 터뜨리는 연기는 꽤나 즐길만 하다. (메가박스 동대문)



 

 

야수형경, 진가상 & 임초현 감독

예전부터 매니아 층의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여러 들었던 터라, 이번 영화제의 나름 기대작이었다. 위의 <레인폴>과 같이 '씨네 아시아 액션'에 있던 영화로, 기대한 만큼의 만족감을 준 영화다. 홍콩의 한 구역을 담당하는 형사들에게 새로운 리더가 오면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을 다룬 영화로, 전체적으로 유머가 아주 잘 살아있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여러 눈여겨 볼 만한 부분들을 던져주는 영화다. 하나는, 이 영화의 독특하고, 특이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그저 코믹스럽기만 한 그저그런 유머물인듯한 인상을 주는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갈 수록 점점 다른 면모를 드러내 보인다. 영화 시작부에는 조금 산만하게 여러 에피소드들이 툭툭 던져지는 듯 한데, 이것이 영화의 마지막에는 하나로 수렴되어 강렬한 액션으로 마무리 된다. 확실히 이렇게 이야기를 아우르는 능력은 그리 가볍게 볼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영화에 내리깔린 특유의 정서다. 처음에 주인공 동 형사(황추생)을 중심으로 한 이 경찰조직은 '뭐 이런 경찰조직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무질서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는 그런 동 형사에게 어느덧 동화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그를 지지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것의 질서가 유지된다는 것, 과연 어떤 것이 이곳에 더 필요한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황추생의 인상적인 연기가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세 번째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다. (롯데시네마 명동)






험프데이, 린 쉘튼 감독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단지'2009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이라는 문구에 끌려 보았던, 사실은 시간이 맞아서 본 영화다. 보고 나니, 충분히 상을 받을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벤과 앤드류라는 두 친구가 우연히 파티에서 아마추어 포르노 경연대회에 나가기로 결심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이들의 결심이란, 이성애자인 이들 두 남성이 섹스를 시도하는 과정을 포르노로 찍어보는 것.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이들의 이 일들은 점점 커진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어떤 아이러니한 질문을 자꾸 관객들에게 하도록 만든다. 그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이런 시도에 어떤 마초적인 경쟁 심리라는 것이 자꾸 개입된다는 것. 그리고 종국에는 관객들에게 어떤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 제공한다. 그것은 나도 혹시 동성애자가 아닐까(혹은 동성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질문들에서부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이 사회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성애라는 것만이 우리사회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거기에는 어떤 것들이 개입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까지.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어떤 동성애만을 무조건 옹호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영화는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한 가지 잣대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상황에서 웃음을 이끌어내는 능력은 발군이다. <덤 앤 더머>의 업그레이드 판. 이번 영화제의 개인적 발견작. (메가박스 동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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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9-03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제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어요.
여러가지 좋은 점들이 있군요. 생각지 않았던 덤도 있을 것 같구요.^^

맥거핀 2009-09-04 01:21   좋아요 0 | URL
아..영화제에 한번도 가보시질 못했다니 의외네요.
요즘에 사실 우리나라에는 너무 필요이상으로 영화제가 많아서요.
마음만 먹으면 365일 영화제만 다닐수도 있을 듯 싶어요.
네..한 번 가보시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실 듯 해요.^^
제 생각으로는 영화제에 가는 것은 딱 하나만 갖추면 된답니다.
어떤 영화라도 일단 도전(?)해 보겠다는 마음가짐..그러면 의외로 보석을 발견할 수도..
 
 전출처 : 맥거핀 > 데이빗 린치 감독전- 박찬욱 감독과의 시네토크 후기

데이빗 린치. 그의 영화들을 보는 것은 그리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불쑥불쑥 끼어드는 괴이한 장면들과 불친절한 이야기의 흐름과 가끔 깜짝 놀라게 하는 소리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을 보기로 하는 것은 '마음먹고' 해야 하는 일이다. 뒹굴뒹굴 구르다 채널을 돌리면서 봐도 되고, 배가 고프면 사과를 깎아먹고 와서 봐도 되는 어떤 영화들과는 매우 다른 지점에 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만은 피할 길이 없다. 친절한 알라딘에서 감사하게도 좋은 기회를 주었고, 무엇보다도 데이빗 린치와 박찬욱의 만남이 아닌가. 물론 박찬욱 감독님 스스로가 데이빗 린치의 열혈광팬임을 밝히고 있기도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의 어떤 부분은 데이빗 린치의 영화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니까. 불쑥불쑥 끼어드는 괴이한 장면들과 불친절한 이야기의 흐름과(물론 박찬욱 감독이 데이빗 린치보다는 훨씬 친절한 면이 있지만) 가끔 깜짝 놀라게 하는 소리들. 이 말은 그대로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에 가져와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감독전에 가는 길에 친구를 기다리며 잠깐 들른 교보문고에서 본 <데이빗 린치의 빨간 방>은 한편으로는 조금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씨네토크 시간에 박찬욱 감독님이나 김영진 평론가님이 말씀하신대로 나도 "이게 데이빗 린치가 직접 쓴 책인가?"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들에서 상상할 수 없는 조용하고 짤막한 이야기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조금은 데이빗 린치스러웠던 것이 짧은 글에서 강단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고집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그렇게 <데이빗 린치의 빨간 방>을 보다가 혹은 박찬욱 감독님의 책 <박찬욱의 오마주>를 보면서 다가올 시간을 기다렸다. (<박찬욱의 오마주>는 박찬욱 감독님의 평론가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책으로 이 책에는 곧 보게될 영화 <광란의 사랑>의 영화평이 나와있기도 하였다. 다른 부분 보다도 이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는 로드무비라고. 이것은 집 잃은 자들의 이야기라고.) 

친구가 서둘러 도착했고, 허겁지겁 저녁을 먹은 후 7시 30분 시간에 맞춰 씨네토크 및 영화상영이 진행되는 씨네큐브에 도착하였고, 8시부터 씨네토크가 시작되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조금 더 여유있게 도착시간을 말해주었어도 좋을 뻔 했다. 햄버거를 깨물어먹으며 서둘러 도착했는데, 30분 동안 하릴없이 기다려야 했으니까.) 씨네토크는 혼자 진행하기 버거워하시는 박찬욱 감독님의 요청으로 김영진 평론가님과 대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나름 영화 내외적인 내용을 고루 전달해주신 것 같다. 특히 영화 내부의 이야기들보다는 우연히 린치를 마주친 일이며,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여 심사위원장 카트린드뇌브 이하 모든 심사위원들과 함께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를 보러갔던 일 같은, 박찬욱 감독님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님이 린치와의 인연을 개인적인 회상으로 들려 주는 사이에 김영진 평론가님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린치의 작품 세계나 (최근에는 린치가 안드로메다로 갔다는 말씀 ㅋ) 린치의 작품에 얽힌 일화들 및 배경들을 들려주며 박찬욱 감독님의 이야기에 보완을 해 주었다. 

그리고 곧 이어 데이빗 린치의 1990년도 작품 <광란의 사랑 Wild At Heart>이 상영되었고, 마법의 110분이 지난 후 'Love Me Tender'가 울려퍼지는 속에서 니콜라스 케이지와 로라 던의 자동차 위에서의 익히 잘 알려진 키스신과 함께 엔딩크레딧을 보게 되었다.  

글쎄.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뭐 어쩌면 작품의 구조나 이야기,장면들의 분석, 영화가 가지고 있는 상징 및 함의를 쓰려고 한다면 몇 페이지에 걸친 긴 분석을 해야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능력도 안될 뿐더러, 여기는 영화평을 쓰는 공간도 아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를 가지고 이야기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나 스토리를 논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다. 물론 이 영화는 린치의 다른 영화들에 비하여(<스트레이트 스토리>를 제외한다면) 훨씬 구조가 눈에 드러나고 스토리도 눈에 보이는 영화이긴 하나, 이 영화에서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뭐 스토리라고 해봤자 결국은 여자친구 어머니의 반대 속에서 여러 고초를 겪으면서 감옥을 다녀오고도 사랑을 이루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것 밖에는.) 하기는 뭐 데이빗 린치는 매번 그래 왔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저 다만 몇 가지 것들만을 기억해두기로 하자. 시작 부분에 <Love Me>를 부르며 타인의 코를 박살내는 니콜라스 케이지와 다시 코를 얻어맞고 <Love Me Tender>를 부르며 사랑을 이뤄내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대구(對句). 그 당시에도 여전히 느끼해주시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눈빛 연기(!)와 뱀가죽 자켓(이런거는 어디서 팔죠?). 주라기 공원에서 애들을 보호하던 그 모습은 어디가고, 로라 던의 섹시한 망사그물스타킹(왜 혼자 있을 때 이런 걸 입고 있는지..)그리고 몇 가지의 데이빗 린치의 유머들. 예를 들어 시작부분의 그 세밀한 장소 묘사 자막하며, 니콜라스 케이지가 감옥에 있던 날들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 하며, 튜나 간판 뒤의 'fuck you'와 같은 것들. 그리고 우리의 바비 페루(윌렘 데포)와 그의 교정이 꼭 필요한 잇몸들(그의 악당 연기의 원형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훗날 다른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마지막 니콜라스 케이지의 'Love Me Tender'의 느끼한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속에서 자동차 보닛 위에서의 로라던과 니콜라스 케이지의 키스신을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았다는 사실만은 기억할 것 같다. 비록 그것이 가끔 비가 내리는 화면이었더라도 말이다. (영화사 관계자께서 화질 안 좋다고 무지 미안해하셨는데, 괜찮았어요. 옛날 영화가 이 맛이죠.) 

마지막으로 좋은 기회를 주신 알라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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