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

눈 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

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창 하나 제대로 열어놓아도 하늘 전부 쏟아져 오는 것을

- 도종환의 책꽂이를 치우며 -

 

슬프면 그냥 슬프고 기쁘면 그냥 기쁘고 그렇게 살려고 해. 요즈은 그래. 근사한 일이지. 너무 근사해...

- 시도니 카브리엘 콜레트의 여명 중에서 -

 

그러니까 겁이 많은 사람은 미래의 불행에 미리 젖어 현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돌보지 않게 된다. 이빨이 썩을까 봐 달콤한 초콜릿을 먹지 못하는 사람, 실연의 공포 때문에 프로포즈를 거부하는 사람, 시험의 공포 때문에 공연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 사고가 날까 봐 여행을 가지 않으려는 사람....한마디로 겁이 많은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결국 겁이라는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자신의 욕망에 몰입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자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 강신주의 감정수업 428쪽에서 -

 

온 종일 겨울이 녹아들만큼 따사로운 햇볕이 들었다. 겨울은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오늘은 마치 우연한 선물을 받은 듯 따뜻한 하루였다.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느긋한 기분으로 카페에 앉아 책을 뒤적이고 있다. 지금 내 가방에는 여명과 감정수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그리고 12색 색연필과 노트북이 들어 있다.

최근에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읽고, 그 책에 소개된 책들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먼저 읽어야겠지만 우선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있다. 대신 스피노자를 쉽게 해석한 '눈물 닦고 스피노자'를 구입했다.

강신주가 소개한 48권의 책 중 28권 정도는 이미 내가 갖고 있는 책이고, 나머지 책들은 요즘 구입하고 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펼쳐 들기 시작한 에릭 오르세나의 '오래 오래'는 3분의 1정도을 읽고 잠시 보류 중이다. 우선 내가 처음 생각했던 내용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 나오면서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물론 마음에 와 닿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았기 때문에 끝까지 완독할 계획이지만 오늘은 잠시 접어두었다. 대신 주말을 이용해서 읽을 수 있을 분량의 책으로 여명을 선택했다.

우선 작가의 삶 자체가 한 편의 소설이다. 책 뒷 부분에 나오는 작가 소개글부터 읽었는데 작가의 자전적 내용이라는 점과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는지 궁금하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이번 주말은 차분하게 이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 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 뜯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중에서 -

 

 

부제인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책을 종교 서적이라고 생각해서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읽지 않았지만 많은 알라디너들의 선택을 받은 책이고 책 읽기 자체의 혁명을 다룬다는 추천의 말도 인상 깊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들을 마무리하면 바로 읽고 싶다. 1월달에 읽을 에세이로 찜했다.

 

 

슬프면 그냥 슬프고, 기쁘면 그냥 기쁘고... 우울하면 그냥 우울하고 싶다.

감정에 특별한 근거나 이유가 있을까 ? 요즘은 그냥 단순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 밖에 없다.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들수록 삶이 복잡해진다. 최근에 내가 책에 집중하고 싶은 까닭도 생각으로 얽힌 곡선의 삶을 단순한 직선의 삶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다.

 

돌아보니... 삶은 거대한 것도 위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다.

내 삶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함부로 말하고 싶지도 않다.

힘들여 최선을 다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태하고 게으르게 살고 싶지도 않다.

지금은 적당히 살고 싶다.

 

 

 

 

토요일 밤... 카페 안에 모인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과 다양한 표정들을 만들어 낸다.

오후부터 여러 잔 마신 커피 때문인지 정신은 맑고 몸은 피곤한 밤... 여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야 겠다. 올 겨울 기회가 된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맛있는 커피를 찾아 다니고, 모든 연락을 끊어 버리고 그냥 책만 보며 하루를 보내고 싶다. 방해 받지 않는 절대 독서의 시간이 필요한데, 일상에 매여 있으니 쉽지 않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 정도 소원은 바로 예스하며 응답해 주지 않으실까....

 

1월의 첫번째 토요일 밤도 조용히 과거의 시간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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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1-05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날그날 읽을 만큼 읽으면서 하루를 즐거이 누리셔요.
종이책뿐 아니라, 삶에서 누리는 숱한 이야기도
모두 책일 테니까요.

꿈꾸는 사람은 늘 스스로 하고픈 일을 하며 살겠지요~

착한시경 2014-01-05 13:12   좋아요 0 | URL
스스로 하고 싶은 일...뭘까,,고민중이예요^^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상황과 관계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은거 같아요~즐거운 일요일 오후 되세요~

프레이야 2014-01-05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명,을 읽으며 새벽을 맞이했던 날이 생각나요. 카페 분위기가 아주 커피맛 제대로인 것 같은데요^^

착한시경 2014-01-05 13:14   좋아요 0 | URL
제가 동네에서 제일 좋아하는 카페...키브~ 개인이 하는 카페인데 정말 커피가 맛있어요~가까이 계시다면 제가 커피를 사드리고 싶어요~^^

서니데이 2014-01-05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도 사진으로 보면서 우아, 좋다~~ 그러면서 봤습니다. 집에서 편하게 책읽는 것도 좋겠지만, 여기처럼 분위기 좋은 곳에서 읽어가는 책읽기는 또 다른 느낌을 주겠지, 하면서요. 착한시경님 댁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곳이면 여기선 멀어서 가볼 수 없겠군요. 사진으로 보여주셔서 오늘도 구경하고 갑니다. 즐거운 일요일 보내세요.^^

아, 라온제나로 가는길, 이라는 서재이름이요, 라온제나는 무슨 뜻인가요? ^^;

착한시경 2014-01-05 16:56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은 어디 사시는지 궁금한데요...저는 자주 카페에 가서 책을 읽는 펀이예요..혼자 가도 어색하지 않고, 가장 저렴한 값에 긴 시간동안 편안히 있을 수 있어 좋아해요... 라온제나는 순 우리말로 즐거운 나~라는 뜻이랍니다^^

2014-01-05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5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 중 '경탄' 부분에 소개된 책을 주문했다.

"엘리자베트의 말처럼 관계가 범상함을 초월하려는 노력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말해 너절한 타성에 빠져 그저 생리적인 욕구나 채우려고 만나는 관계가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 대해 경탄의 존재로 남을 수 없게 된다.

- 강신주의 감정수업 52쪽에서 -

알라딘 종이박스에서 이 책을 꺼내면서 우선 책의 두께에 놀랐다. 무려 611쪽의 묵직한 두께감과 연두빛 표지가 참 마음에 들었다.

제목 '오래 오래'의 사전적 의미는 아주 긴 시간이 지나도록이다. 오래오래 어떻게 되었다는 뜻일까 ? 행복하게 살았다, 건강하게 살았다, 즐겁게 살았다, 갇혀 살았다... 다양한 문장들을 이어 본다. 두 남녀와 정원이야기라는 작품 해설을 보며 어떤 이야기일까 너무 궁금하지만, 맛있는 음식은 아껴서 두고 먹고 싶은 마음처럼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아껴 둘 것이다. 그리고 불현듯 소설이 읽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면 이 책을 제일 먼저 꺼내들고 싶다.

 

올해 마지막으로 나에게 배달된 알라딘 책들 중 다자이 오사무의 산문집 '나의 소소한 일상'이 눈에 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책 표지를 넘겨 목차를 보니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따뜻하다는 것(생활론)과 아직 말하지 못한 농담(작품론)...서론 아홉살에 자살로 삶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의 개인적인 생활이 담겨 있을 법 싶은 생활론에 더 관심이 간다. 내일부터 당장 가방에 넣어두고 다니며 한편씩 읽어보고 싶다.

"자기의 작품이 좋을지 나쁠지는 자기가 가장 잘 안다. 천에 하나라도 스스로 좋다고 인정한 작품이 있다면, 그보다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각자 자기 마음에 잘 물어볼지어다."

- 나의 소소한 일상 170쪽에서 -

 

 

 

연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대신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한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으로,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연민을 말한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 중 17쪽에서 -

심리 소설의 대가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유일한 장편소설로 500쪽에 달하는 분량이다. 초조한 마음은 어떤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 ?  적당한 긴장과 떨림이 있는 마음.. 아마도 조마조마한 마음쯤을 의미하는 것 같다. 빠른 시일 내에 읽고 싶은 소설이다.

 

2013년 12월 31일...알라딘에 마지막으로 주문한 책을 저녁에 배송 받았다. 오래오래와 초조한 마음은 소설, 나의 소소한 일상과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에세이로 모두 네 권을 주문했다. 네 권 모두 당장 읽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지만 지금 읽고 있는 책들을 마무리 한 후 시작해야 한다. 파란만장했던 2013년은 이제 과거형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한 해가 다시 내 앞에 찾아왔다.

12월 31일과 별다른 차이 없이 1월 1일은 조용하게 다가왔다. 시내 서점에 가고, 알라딘에 가고, 영화를 보며 소소한 일상을 즐겼다. 그리고 새해 맞이 기념 떡국을 끓여 먹었다.

 

 

 

 

 

 

 

 

 

 

 

 

 

 

 

2014년 알라딘 중고서적에서 구입한 첫 책들... 네루다의 시집과 세 권의 소설

그리고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아 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구입했다. 겨울은 밤이 길고 방학이 되면 시간의 여유도 생기니 열심히 읽어야 겠다. 기다리던 봄이 오면 햇볕 따뜻한 날을 골라 책을 정리해야겠다. 조용한 일상 속에서 시간은 흘러가고 봄은 따사로움을 안고 나에게 올 것이다.

 

 

 

 

오랫만에 영국의 록밴드 radiohead의 creep을 들었다. 나는 좋아하는 노래만 계속 듣는 버릇이 있는데 한동안 이 노래를 다운 받아서 수백 번쯤 들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오랫만에 creep을 무한 반복중이다. 이 노래를 듣다보면 이유없이 슬픈 마음에 빠져 든다... creep은 그냥 눈을 감고 조용히 듣는게 제일 좋다. 책도 덮어 버리고 계속 음악만 듣고 싶은 밤이다.

 

만약... 내일 아이를 깨워 학교에 보내지 않아도 된다면,, 내일 오후 일이 없다면 난 밤을 새우는 일을 밥 먹듯 할 수 있을 만큼 밤을 좋아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깊이 잠든 밤이 되면 나는 오히려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 이렇게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든다. 아침형 인간들이 보면... 자야 할 시간에 자지 않는 내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잠으로 보내기에 밤이 너무 아깝다. 그리고 지금은 추워서 열어 둘 수 없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청량한 새벽바람을 좋아한다. 밤이 되어야 인공적인 도시의 냄새에서 벗어나 진짜 바람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모든 것들이 단순해 지는 밤이 좋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시가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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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1-02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에 동네나 마을 한 바퀴를 살짝 돌면
참 다른 느낌을 받아요.

따뜻한 봄날에, 또 더운 여름날에
책을 하나 들고 살몃살몃 동네마실을 하면서
등불 밝은 곳에서 책을 읽어 보아도
새로운 맛이 되겠지요~

착한시경 2014-01-02 11:15   좋아요 0 | URL
함께 살기님이 사시는 곳은 밤이 더 적막하겠네요~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도시공원과는 차원이 다르겠지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되세요^^

프레이야 2014-01-03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하는 세가지^^ 마음에 들어오는 책 두 권 담아갑니다. 땡스투유^^

착한시경 2014-01-04 12:53   좋아요 0 | URL
어떤 책 두권을 담아가셨을까,,,궁금한데요~ 너무 화창한 토요일..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정말 색이 만질 수 있는 거라면 좋겠네요. 그런데 궁색한 위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색은 아주 적은 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눈은 말이죠. 느낌을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미묘한 색을 아주 단순하게 축소해서 본대요. 정말 게으른 녀석이죠?

- 책 32쪽에서 -

 

 

 

 

 

 

 

 

 

 

 

 

 

 

 

 

 

 

 

 

 

 

 

'악기들의 도서관'을 시작으로 해서 최근에 나온 '모든게 노래'까지 내가 소장하고 있는 김중혁의 작품은 모두 5권이다. 물론 아쉽게도 '악기들의 도서관' 이후 제대로 읽은 책은 거의 없다. 사실 악기들의 도서관도 제대로 읽었다기보다는 마음에 와 닿는 단편 몇 개를 읽었을 뿐이다.

물론 참신한 제목과 내용은 기억에 남아 작가의 다른 책들을 몇 권 더 구입했지만, 그다지 관심을 갖고 읽지는 못했다. 내가 책을 구입하는 방법 중 하나는 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을 모두 구입해 소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가의 작품에 인용된 작품을 다시 구입해 보는 것이다.

그물처럼 촘촘하게 그 작가에게 영향을 준 작품들까지 읽다보면 훨씬 더 깊이 있게 작가를 이해하게 되는데, 게으름때문에 책을 구입하는 것으로 그칠 때가 많아 늘 아쉽다.

 

올 겨울 가장 강력한 한파를 예고하는 뉴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움츠러든다.

나이를 먹으면서 날씨에 민감해지는 것은,  매서운 추위가 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덩달아 위축시키면서 우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봄 햇살이 저 뿌연 구름을 뚫고 나를 비춰 준다면 이 기분에서 좀 벗어날 수 있을까, 몇 번의 혹한을 지나야 봄은 오는 걸까 ? 본격적인 겨울은 이제 시작인데 나는 김영랑이 시처럼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매일 기다리는 중이다.

책을 쌓아 놓고 뒤적거리기를 반복하다가 오랫만에 소설책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빨간색의 밝고 환한 책 표지가 마음에 들었기 띠문이다.

 

 

'레스몰'이라는 작은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주인공은 소형 전자 제품을 전문으로 디자인하고 싶다는 희망을 갖고 있지만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자신의 디자인 사무실에 라디오 디자인을 의뢰한 메이비가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저는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세계 전체를 모래 알갱이만큼 작은 곳에다 압축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쓸모없는 것들이 많으니까요. 슈마허란 사람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지만 정말 작은 것들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 (책 17쪽에서)

 

기다란 막대 안테나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세상에서 가장 작은 라디오는 대성공을 거두고 나의 디자인 사무실은 유명세를 타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라디오를 의뢰한 메이비는 이번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라디오를 디자인해줄 것을 부탁한다. 인터넷 라디오 방송국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메이비는 청취자들에게 줄 선물의 디자인을 부탁한다.

 

어떤 디자이너의 말처럼 라디오란 '현세의 규칙 너머에 존재하는' 물체인 것이다. 규칙을 무시할 수 있고 시간을 넘나들 수 있고 공간을 건너뛸 수 있는 것이 바로 라디오다. (책 23쪽에서)

 

메이비에게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모든 상황들을 한 편의 영화처럼 실감나게 묘사하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으로 야구 중계를 본 나보다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들은 메이비가 훨씬 더 그 경기를 선명하게 기억해 설명하고 있다.

나는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이용해 라디오를 다지인하려 하지만 쉽게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던 중 메이비가 진행하고 있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인터넷 라디오에 접속하고 방송을 듣게 된다. 프로그램의 제목은 '메이비의 무용지물 박물관'이다.

무용지물이란 쓸모가 없는 사람이나 물건이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물은 무용지물일 수 있다. 볼 수 없는 자들을 위한 라디오 방송에서 메이비는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소리로 표현해 낸다. 하지만 메이비의 목소리를 통해 사물과 상황들은 새롭게 의미 부여 되며 재탄생한다.

 

밤늦게 라디오 녹음을 하고 나서 뒷정리를 하다 보면 밤을 꼬박 새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럴 땐 기분이 참 좋습니다. 뭐랄까, 새벽의 모든 것들에게 포위당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시계를 보고 아는 게 아니에요, 절대로 아니죠. 안개 같은 건데요, 블라인드처럼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죠. 제일먼저 느껴지는 건 어떤 소리들이에요. 풀벌레 소리일 때도 있고 자동차 소리일 때도 있죠. 밤 동안 사라졌던 소리들이 조금씩 살아나는 겁니다. 차가 하나도 없던 도로 위로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신문을 배달하는 자전거 체인소리가 침묵의 껍질을 툭툭 치기도 하고요. 그 소리들이 밤을 깨워놓고 나면 그제야 빨간 일출이 시작되는 겁니다. (책 31쪽에서)

 

메이비가 방송에서 설명하는 노란 잠수함을 떠올려 보려고 애를 쓰지만 이미 내 마음 속에 있는 잠수함의 이미지 때문에 소리를 통한 연상이 쉽지 않다. 시각 장애인은 빛이 허락되지 않는 절대적 어둠 속에서 목소리에 의지해 모든 사물을 추론해야 한다. 소리를 이용해 모든 사물을 디자인하는 메이비는 최고의 다지이너였다. 메이비가 묘사한 야구중계 장면이나 사물에 대한 묘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중, 시각은 가장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사물을 볼 때도 눈으로 복사를 하듯 받아들이고 뇌로 분석을 한다. 하지만 시각을 제한당한 사람들은 청각과 다른 감각으로 사물과 지식을 받아들인다. 오히려 눈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소설의 소재로는 새롭고 참신했지만 사실 암흑의 세계 속에서 소리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절망할 것 같다.  

 

나는 이 소설에 소재로 등장하는 라디오 이야기에 더 끌렸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삼성에서 나온 빨간색 마이마이 카세트를 선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아이들이 갖고 다니는 핸드폰이나 MP3에 비하면 무식할 정도로 큰 크기였지만, 그 당시로서는 정말 놀랄 만큼 작고 앙증맞은 디자인의 카세트였다.  나를 팝송의 세계로 인도했던 배철수의 음악캠프, 김희애의 인기가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김기덕의 두시의 데이트... 중.고등학교 시절 라디오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또한 오직 성우들의 목소리만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라디오 드라마 속 장면들을 생각하는건 늘 짜릿한 즐거움을 줬다. 겨울 방학이면 따뜻한 이불 속에 배를 깔고 누워 몇 시간이고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를 들으며 읽었던 모파상 단편집과 제인에어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소리를 듣고 상상하는 아날로그적인 라디오는 느리지만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스무 살 무렵은 더디고 더디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기 시작하면 도무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언덕 아래로 사정없이 미끄러지다가 쾅, 하고 박살나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속도를 줄이기 위해선 어쨌거나 조금은 가벼워야 할 필요가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책 37쪽에서)

 

첫째 날에는 .
나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이제껏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던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내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해 두겠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에는. 
먼동이 트며
밤이 낮으로 바뀌는 웅장한 기적을 보고 나서,
서둘러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을 찾아가,
하루 종일 인간이 진화해온 궤적을
눈으로 확인해 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겠다.
 
셋째 날에는.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큰길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오페라하우스와 영화관에 가 공연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어느덧 저녁이 되면,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와,
나를 이 사흘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헬렌 켈러가 그토록 보고자 소망했던 일들을,
우리는 날마다 일상 속에서 특별한 대가도지불하지않고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는 모릅니다.
아니 누구나 경험하고 사는 것처럼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래서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이면 귀가 안 들릴 사람처럼
새들의 지저귐을 들어 보라.
내일이면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사람처럼 꽃향기를 맡아 보라.
내일이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보라."고!  
 
내일이면
헬렌 켈러의 간절한 소망을
더 할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되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놀라운 기적 같은 일인지,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 헬렌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중에서 -

 

헬렌켈러가 쓴 유명한 수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통해 본다는 것과 듣는 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볼 수 있기 때문에 소홀히 놓쳐 버린 많은 부분들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늘 급하게 쫓기며 살았던 삶과 눈으로 보여지는 데로 행동하고 말하며 겪었던 많은 실수들이 떠올랐다. 우리가 본다고 하지만 그것이 진실일까 ? 허상들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살지 않았을까 ?

차라리 듣는다는게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겠다. 눈은 감고, 귀를 열며 살고 싶다.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볼 수 있는 혜안이 열리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경험을 쌓아야 하는 걸까 ? 짧은 소설 한편을 읽으며 잠깐 잡다한 생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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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2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하루 즐겁게 아름다운 빛을 보시고,
새해에는 또 새해대로 밝은 빛을 보셔요.

예전에는 몰랐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니
삼성카세트나 금성카세트 모두
일본 것을 베낀 모델이었더라구요.

저한테는 카세트가 없었지만,
내 동무들은 국산은 안 쓰고 다들
쏘니니 아이와니 파나소닉이니
되게 비싼 것들을 어머니를 졸라 사서 쓰더라구요...
흠~

착한시경 2013-12-28 23:30   좋아요 0 | URL
파나소닉, 소니, 아이와...전부 추억의 브랜드가 되었네요^^ 소설 속 라디오이야기를 들으니 그냥 문득 옛날 생각이 아련하게 들었어요...ㅎㅎ
함께 살기님께서도 평온한 밤 보내세요... 대전은 오늘 추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12-29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전도 춥군요 ? 여긴 정말 얼어죽을 거 같더군요. 밖에 몇 시간 그냥 이었더니 동상 걸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팽귄뉴스 반가운데요... 헛헛....

착한시경 2013-12-29 13:41   좋아요 0 | URL
겨울이 추운건 당연한건만,,,그래도 정말 추운데요~ 곰곰님...감기 걸리세요~ 넘 추운데 계시지 마시길~

프레이야 2013-12-30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날로그 라디오를 늘 가까이 두고 있어요. 주파수 돌려 맞추는 재미^^
시각과 청각이 차단된다면 어떨까요? 심안으로도 보고 여행하시는 분들도 있고.
얼마전 배리어프리 영화를 봤는데 시각과 청각을 가지고 보는 우리들의 감각을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답니다.

착한시경 2013-12-30 16:20   좋아요 0 | URL
저도 생각나요... 지방이라서 들을 수 있는 라디오 프로가 제한되었는데,,,운 좋게 주파수를 잘 맞추면 서울 방송도 들을 수 있었답니다. 찌찌직 거렸던 라디오 소리도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네요... 배리어프리라는 영화 저도 보고 싶어요...한번 볼께요^^
 

 

 

 

 

 

 

 

 

 

 

 

 

 

 

이 세상 모든 책들이

그대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지만

책은 남몰래 그대에게 지시한다.

그대 자신으로 돌아가도록

거기 그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왜냐하면 그대가 물어본 적 있는 그 빛은

그대 자신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대가 오래도록 찾았던

책 속의 지혜가

이제 책장마다에서 빛난다.

이제 그 지혜 그대의 것이 되었으므로

- 헤르만 헤서의 책 -

 

 

 

 

누군가 나에게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을 이야기하라면 단연코 '책'을 선택하겠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책을 선물 받아도 기쁠테지만,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책을 다시 선물 받는다해도 나는 기쁠 것이다. 그 사람도 나와 같은 감동으로 그 책을 읽었으리라 하는 마음의 공감이 느껴지니 행복한 일이다. 밥 한끼 값 정도의 돈으로 가장 오랫동안 소유의 행복을 주는 데는 책만한 것이 없다. 책에 관한 한 나는 절대 다다익선에서 벗어날 수 없을 듯 싶다.

자신의 집에는 3000권의 책이 있을 뿐, 나머지 5만권의 책을 보관하기 위해 따로 집을 구했다는 움베르트 에코의 서재처럼 나도 내 책을 여유있게 보관할 공간을 갖고 싶다는 작은 소원이 있다.

책장에 겹쳐져 꽂혀진 책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여유있는 공간을 언제쯤 갖게 될까 ?

이런 저런 생각 중에 책을 보관할 장소를 고민하기 보다는 책을 읽는 일에 더 시간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나는 정말 바쁜가 ? 의미없이 보낸 많은 시간들, 분주하기만 하고 정리되지 않은 여러가지 일들 속에서 늘 변명거리만 찾으며 살았다.

사는 일보다 읽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겠다. (하지만 정말 이 부분이 너무 힘들다. 사고 싶은 책은 너무 많고,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좋은 책들은 더 많다.)

 

 

 

 

커다란 창가에서 멀리 대청호가 내다 보이는 홍차카페 소정...

소정 앞 마당에서 책을 소재로 사진  몇 장을 찍으며 놀았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와 밤은 선생이다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책이고, 디어 라이프는 내 가방 속에 있던 책이다.

나는 카페에서 책을 놓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데, 책을 놓은 자리는 지적이며 아름답고 우아해진다. 책은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인테리어 소품이다. 아니...책을 놓으면 책이 주인공이 되고 나머지가 소품이 되버린다. 내 눈에는 그렇다. 요즘 카페에 가면 소품으로 책을 비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카페에서 좋은 책을 만나기 쉽지 않은 것도 참 아쉽다. 최근 여러가지 사정으로 텔레비전이 사라진 자리에 책을 쌓아두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인테리어가 된 셈이다.

 

 

 

 

홍차를 아직 잘 알지 못해서 소정 주인부부가 추천한 차를 마신다.

이번에는 쥬뗌므와 샹글릴라를 마셨다. 느긋함과 입안에 맴도는 달콤함을 즐기면서 마시는 홍차는 정말 매력적이다. 홍차와 책..화사한 꽃무늬 러너가 너무 잘 어울렸다.

사진찍는 기술의 부족이 아쉬울 뿐이다.

올해가 끝나기 전에 이 책 세 권을 모두 읽을 수 있을까 ? 차분하게 마무리 해야 할 것 같다.

분주한 금요일 오후... 홍차 한 잔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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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27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마음 담은 책을
언제나 즐겁게 읽으면서
어여쁜 삶과 사랑 키우셔요~

착한시경 2013-12-27 16:01   좋아요 0 | URL
와~감사합니다... 어여쁜 사랑과 삶을 키우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책 읽으면서 착하게 즐겁게 살께요...^^ 행복한 금요일 밤 되세요

2013-12-28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착한시경 2013-12-28 14:08   좋아요 0 | URL
와...반갑습니다...서니데이님^^ 저도 자주 서재에 놀러갈께요~이렇게 서재를 통해 새로운 분들을 알게 되니 재미있고 즐거운데요... 옥천 국도변에 있는 홍차카페인데,,그곳에서 영화를 찍었다고하네요...그후로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거 같아요..주인부부가 오랫동안 차를 배우고 연구해서 차린 홍차카페인데..저희 부부도 요즘 홍차 맛 때문에 가끔 찾게 되더라구요...앞으로 자주 뵈어요...
 

그렇다면 도대체 소로는 어떤 사람인가 ?

내가 말하는 사람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의미에서, 내 유년기와 이른 청년기의 친구이자 생사를 넘어 나를 도운 은인이다. 이런 도움에 감사하고, 그와의 추억에 경의를 베푸는 일은 당연한 의무라 하겠다. 더군다나 그의 이름과 며예, 삶과 가르침이 머스케타퀴드 근처에 사는 아이들만의 유산이 아니라 미국의 국가적 자신이 된 마당에는 더 그렇다.

- 소로와 함께한 나날들 중 23쪽에서 -

 

 

 

 

 

그는 또한 우리에게 숲 속에서의 예의범절을 가르쳤다. 숲은 소란한 자와 부주의한 자에게는 어떠한 보물과 지혜도 나눠주지 않는 법임을. 인간은 뱀이 흉측하다고 죽여서도 안되며, 놀라게 했다고 복수해서도 아니 됨을. 아무리 열심히 새알을 모으는 사람일지라도 대부분의 알을 어미새에게 남겨야 하며, 둥지를 보려 너무 자주 가서도 안된다는 이치를 알려주었다.

- 소로와 함께 한 나날들 중 20쪽에서 -

 

또한 그녀는 대단히 사려 깊었고, 얼마 안 되는 돈으로도 즐거운 가정을 꾸리는 데 비범한 재주를 가졌다. 검소한 식단과 소박한 식재료를 토속의 향미료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랑함으로 조리함으로써 맛나게 만들었다. 이 착한 부인은 일과 보살핌을 제자리에 둘 줄 알았으며, 삶과 사랑을 무엇보다 앞세울 줄 알았다. 가까운 이웃이자 친구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이 집안에서는 수년 동안 평일에는 차나 커피, 설탕, 그리고 다른 사치품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던 딸들을 위해 피아노를 사줄 수 있었고, 모든 아이들의 교육비를, 특히 둘째 아들의 대학 교육비를 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녀의 식탁은 항상 매력적이었으며, 음식은 풍족했고 맛깔스러웠다. 그녀에게는 두 딸과 두 아들이 있었는데, 헨리는 둘째 아들이었다.

- 소로와 함께 한 나날들 중 33쪽에서 -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만약 내가 나의 오전과 오후를 모두 사회에 팔아야만 한다면, 내게 살아갈 만한 가치를 느끼게 할 어떤 것도 남지 않게 되리라 확신한다. 나는 그렇게 한 사발 죽을 위해 생득권을 팔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 아주 근면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생계를 벌기 위해 자기 삶의 더 큰 부분을 소비하는 사람만큼 치명적인 실패자는 없다. 위대한 과업은 자기를 부양하는 일이다. 예컨대 시인은, 증기기관 대패가 깎아낸 대팻밥으로 보일러를 끓이듯이 시로써 자신을 부양해야 한다. 당신은 사랑으로 생계를 벌어야 한다."

- 소로와 함께 한 나날들 중 75쪽에서 -

 

소로와 같은 마을 이웃으로 살았던 저자 에드워드 월도 에머슨이 바라본 소로 이야기... '소로와 함께 한 나날들'을 읽고 있는 중이다.

소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풀어보려는 저자의 의도보다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더 마음을 끌었다. 월든과 시민 불복종으로 너무나 유명한 소로... 그런 소로와 이웃하며 따뜻하고 순수한 우정을 나눈 저자가 부러울 따름이다. 아직 읽고 있는 중인데 좋은 문장들이 많아 열심히 밑줄을 긋고 있는 중이다.

 

갖가지 질병과 낙담, 그리고 황폐함의 근원은, 자신의 나날들이 어떻게 지니가는지 멀리 떨어져 조망할 여유도 없이, 모두가 그러하듯이 순간순간 살아가고, 그리하여 하루가, 일 년이, 한 평생이 오로지 살기 위한 준비 속에 지나가버린다는 사실이다. 제대로 살게 되는 시간은, 적어도 지상에서는 결코 오지 않게 된다. 소로는 이런 삶을 살 수 없었다. 그는 지상을 조망하고 방향과 거리를 재는, 또 다른 의미의 측량기사였기 때문이다. 월든에서의 그의 삶은 수단과 목적이 적정의 관계에 있게 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그는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 소로와 함께 한 나날들 중 74쪽에서 -

 

 

옥천에서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 외딴 국도변을 지나는 중 차에 치여 도로 한 복판에 죽어 있는 고라니를 발견했다. 차 창 밖으로 차디찬 도로 한가운데 고개가 꺾인 채로 누워 있는 고라니가 보였다. 요즘 국도변이나 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이런 동물들의 죽음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그들과 함께 공존할 방법은 없는 걸까 ?

인간의 편리를 앞세운 무분별한 개발 논리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동물들을 보니 안타운 마음 뿐이다. 자연과 공존을 추구했던 동양과는 달리 서양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놓고 자연을 인간이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산과 강이 있던 자리에 도로가 만들어지고, 인간의 거주 공간이 자연 속으로 확장되어 가면서 점점 그들은 설 자리를 잃어가게 되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 잠깐 마주한 모습이지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차를 돌려 죽은 고라니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미 해가 어둑 어둑해지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고라니를 발견하지 못한 차들은 무참하게 그 여린 몸을 밟고 지나 갈 것이 뻔한 일이었다. 비록 이미 죽어 식어가는 몸이지만 그 몸이 형태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짓밟힌다면...그건 한번의 죽음이 아닌 것이다.

마음같아서는 땅을 파서 묻어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우선은 추위에 언 땅을 팔 도구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남편이 고라니를 도로 갓길로 옮겨 놓고 있는 중, 마을 주민인 듯한 아저씨 두 분이 오셔서 뒷 처리를 해주겠다고 하셨다.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마을 주민 분이신 것 같았고,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죽은 고라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

그 고라니에게도 가족과 친구가 있지 않을까 ?

어미 고라니는 돌아오지 않은 새끼를 얼마나 기다릴까 ?

왜 산에서 도로로 내려왔을까 ? 고라니가 살았던 산에는 먹이가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

여러가지 생각에 마음이 심란했다. 작은 여린 고라니의 선한 눈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오늘 '소로와 함께 한 나날들'을 읽으며 어제 우리가 만난 고라니와 소로의 삶이 떠올랐다. 앞으로만 나가려는 속도의 법칙을 버리고 뒤를 돌아봐야 할 것 같다. 멈춰야 보이고, 천천히 보아야 차세히 볼 수 있다. 그래야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 작은 것은 아름답고 모든 것은 소중하다. 자연의 작은 소리와 몸짓에도 귀 기울린다면... 고라니의 불행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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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2-27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게 고라니였군요.
제 책상에 앉아있으면 창문을 통해 바깥 낮은 언덕이 보이는데 어느 날 창문 밖을 내다보니 저렇게 생긴 동물이 휙 지나가는 거예요. 아마 먹이를 찾아 내려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는지. 저게 무얼까 했는데 고라니였네요. 그 고라니는 차가 다니는 길까지 내려가는 일이 없어야할텐데.

착한시경 2013-12-27 09:42   좋아요 0 | URL
자연과 함께 상생할 방법을 모색하는데...요즘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요. 하지만 늘 이론만 있을 뿐 실제 제 삶도 그렇지 못해 부끄러워요,,,
차가운 도로에 죽어있는 고라니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서 마음이 아프네요...
나인님말처럼 이런 일이 없어야 할텐데...저두 그 생각 뿐...

플라타나스 2013-12-27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은 참으로 소중한 울타리이죠...
돌아오지 않는 새끼 고라니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미 고라니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집니다..

바쁘게 앞으로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걷던길을...
이제는 잠시멈추어 주변을 바라보는 여유가 필요할 때입니다..

소중한 사람, 소중한 가족, 소중한 자연....
이 보다 더큰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진정 아름다움은 이 모든것을 지키고 보호할때
비로소 가치가 있겠지요..

착한시경 2013-12-27 09:44   좋아요 0 | URL
새끼 고라니는 왜 혼자 큰길까지 내려온걸까요 ? 어미 말을 듣지 않고 호기심에 세상으로 내려온걸까 ? 아니면 먹이가 없어 찾으러 내려온걸까 ?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늘 감탄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진 않았던 것 같아 부끄럽네요...

appletreeje 2013-12-2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와 함께한 나날들>은 저도 즐겁게 읽었는데 착한시경님의 좋은 글로
다시 읽으니, 더욱 반갑고 좋네요~

이 글을 읽으며 유홍준님의 <북촌-까마귀>속
작가의 '어느 살생자(殺生者)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은 자서전에도
'고라니의 죽음'에 대한 많은 아픈 이야기가 나오는데...시경님의 고라니 이야기를
읽으니 또 그 이야기들이 떠오르고 더욱 마음이 아프네요..
그나저나, 차를 돌려 죽은 고라니를 갓길로 옮겨놓고 오신 두 분의 마음에
고맙고 따스함이 흐르는 시간입니다.

착한시경님! 오늘도 좋은 글 덕분에 또 우리가 함께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생각케 해주셔서 감사해요.^^
오늘도 아름답고 좋은 날 되세요~*^^*

착한시경 2013-12-27 16:03   좋아요 0 | URL
트리제님은 벌써 읽으셨구나,,, 저도 오늘 마무리될수 있을 것 같아요~
고라니는 지금도 맘이 짠하고~ 뭔가 근본적인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유홍준의 책도 한번 꼬옥 읽어보고 싶어요~ 따사로운 금요일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