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바람에 실려, 날숨과 들숨에 실려 세상을 떠돈다.
어느날 사랑이 찾아 왔을 때, 우리는 변한다. 어느 날 사랑이 떠났을 때도 , 우리는 변한다. 되찾은 사랑 앞에서도, 다시 잃은 사랑 뒤에서도 우리는 변한다. 사랑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사랑의 움직임을 좇아 우리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사랑은 우러만진다. 사랑은 할퀸다. 상처를 내는 것도 사랑이고, 상처를 아물리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은 약이면서 독이다. 사랑은 두사람의 코뮤니즘이다.
- 고종석의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개정판 서문 중에서 -
인간의 뇌는 애초부터 책 읽으라고 설계된 것이 아니다. 문자가 등장하는 역사는 5000년, 지금 같은 형태의 종이인쇄 책의 역사는 600년에 불과하다. 자연선택이 사냥과 채집 같은, 인간종의 생존에 필요한 다른 여러 기능들을 수행하도록 설계한 뇌 건축물의 부수적 파생 효과 가운데 하나가 책을 쓰고 책을 읽는 기능이다. 말하자면 그 능력은 덤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덤'이 참으로 중요하다.
- 고독한 성찰과 불안한 의식의 극장 중에서 -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다음 번엔 좀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를테다.
덜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하련다.
좀 더 편해질 것이며
지금보다 더 가득할 것이다.
진짜로, 심각한 일은 조금만 만들 것이며
덜 깔끔 떨련다.
위험을 더 감수할 것이며
더 많은 곳을 여행할 것이며
더 많은 석양을 볼 것이며
더 많은 산을 오를 것이고
더 많은 강에서 헤엄치련다.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갈테다.
아이스크림을 더 먹을 거고,
콩은 조금만,
더 많은 (진짜) 근심거리를 가지고,
상상만 하는 일은 조금만 하련다.
나는 매 순간을 신중하고 풍성하게 살아갈 사람 중의 하나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즐거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시 되돌아 갈 수만 있다면 좀 더 좋은 순간을 위해 노력하련다.
인생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 모른다면,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지어니
나는 체온계와 보온물병 그리고 우산과 낙하산 없이는
어느 곳도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다시 살 수 있다면, 밝은 곳으로 여행할 것이다.
내가 다시 살 수 있다면,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맨발로 일해 볼 것이다.
손수레도 더 끌어볼 것이다.
좀더 많은 일출을 바라보고, 더 많은 아이들과 놀테다.
내게 인생이 더 허락된다면 - 하지만 난 85세이다.
- 그리고 내가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봄비가 꽃비와 함께 내리는 날...
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개나리꽃과 흰 벚꽃들이 온통 도로 위를 수 놓았다. 가을비에 젖은 낙엽을 밟으면 왠지 모를 우울에 빠져 드는데, 봄꽃들을 밟고 걸어야 하는 거리는 아쉬움 속에서도 생명이 느껴진다.
꽃을 먼저 피우는 벚꽃은 단연 봄의 전령사이다.
꽃을 살피면 소박하고 수수하지만 나무 전체를 바라보면 그 화려하고 화사한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특히 벚나무가 줄지어 선 도로를 지나다 보면 당장이라도 창문을 내리고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해마다 벚꽃길을 걸으면 기억 저편에서 불현 듯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초록 지붕 2층 작은 창문에 턱을 괴고 혼자 아름다운 상상에 빠져 있는 앤이 벚꽃과 함께 기억 속에서 살아난다.
대청호 가는 길...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전군가도를 자전거로 달린 김훈을 떠올렸다.
속수무책으로 온 천지에 떨어지는 벚꽃을 맞으며 온 몸을 작게 웅크리고 쩔쩔 매었다는 김훈의 봄을 생각했다. 이 봄...나를 쩔쩔매게 하는 건 무엇일까 ? 사쿠라 꽃이 피면 여자 생각이 난다는 김훈의 문장을 읽으며 짜릿한 전율과 함께 절망했다.
김훈보다 더 고급스럽고 관능적이까지 한 봄의 문장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고운 벚꽃 잎이 바람에 흩어져 가는 풍경을 한없이 바라본다. 절정을 이루고, 절정에서 죽고, 절정에서 떨어져 내린다는 벚꽃...찰나의 운명을 지닌 벚꽃들이 아름답고 슬퍼서 오랫동안 바라봤다. 봄비가 절정으로 치닫아가는 봄을 한숨 돌리게 한다. 자기 열정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달리던 봄이 비를 만나서 숨을 고르며 느긋하게 우리 옆에 머물러 주기를 바란다.
4월 첫주...봄꽃은 절정인데 봄바람의 끝은 매섭다. T.S 엘리엇이 말한 잔인한 4월의 시작은 뒤늦은 꽃샘 추위와 함께 찾아왔다. 죽었던 땅에 봄비와 봄볕이 와 닿으면 생명이 불어 넣어진다. 그 생명의 틈새로 땅은 녹고, 꽃은 핀다. 예전에도 내가 이렇게 봄을 좋아한 적이 있었던가 ? 자연의 변화에 예민해졌고, 그 작은 움직임에도 눈길이 간다. 지난 주에 대청호 둘레길로 두 번이나 벚꽃 구경하고 왔는데도 떨어지는 꽃잎은 늘 아쉽다. 일요일 오후..시내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구입했고, 커피를 마셨다. 지난 주에 알라딘에서 새책처럼 깨끗한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9권을 구입하며 당분간 책을 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사벨 아옌데의 수필집 '모든 삶이 기적이다'와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에세이 '보통의 독자'가 어느새 내 책상에 놓여 있다. 이 책을 언제 다 읽을 것인가 ? 대답은 언젠가는... 하워드진의 교육을 말한다와 필립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 그리고 허밍웨이의 단편선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길의 충만한 행복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 최근에 내가 가장 관심있게 읽고 있는 책은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다.
내가 그 동안 왜 이런 작품을 몰랐을까 ? 더 한심한 일은 이 작가의 책이 내 책꽂이에 두 권이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무분별한 구매가 불러온 부작용이다.
마르코 폴로와 칸의 대화를 통해 접하게 된 신비롭고 아름다운 도시들의 아포니즘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소설과 시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름다운 문장들과 환상 속에 존재하는 도시들을 머릿 속에 그려본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걔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 보이지 않는 도시들 208쪽에서 -
보이지 않는 도시를 마무리하며 칼비노의 책을 알라딘 장바구니에 모조리 담아뒀다. 이 책을 읽고나니 작가의 나머지 책들이 너무 궁금했다. 교외로 나가는 시간보다 훨씬 더 즐거운 일요일 오후였다. 아메리카노 한잔과 오천원짜리 책 한권으로 세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아름다운 책을 만난 오늘 이 순간 나의 삶은 풍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