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색이 만질 수 있는 거라면 좋겠네요. 그런데 궁색한 위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색은 아주 적은 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눈은 말이죠. 느낌을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미묘한 색을 아주 단순하게 축소해서 본대요. 정말 게으른 녀석이죠?

- 책 32쪽에서 -

 

 

 

 

 

 

 

 

 

 

 

 

 

 

 

 

 

 

 

 

 

 

 

'악기들의 도서관'을 시작으로 해서 최근에 나온 '모든게 노래'까지 내가 소장하고 있는 김중혁의 작품은 모두 5권이다. 물론 아쉽게도 '악기들의 도서관' 이후 제대로 읽은 책은 거의 없다. 사실 악기들의 도서관도 제대로 읽었다기보다는 마음에 와 닿는 단편 몇 개를 읽었을 뿐이다.

물론 참신한 제목과 내용은 기억에 남아 작가의 다른 책들을 몇 권 더 구입했지만, 그다지 관심을 갖고 읽지는 못했다. 내가 책을 구입하는 방법 중 하나는 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을 모두 구입해 소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가의 작품에 인용된 작품을 다시 구입해 보는 것이다.

그물처럼 촘촘하게 그 작가에게 영향을 준 작품들까지 읽다보면 훨씬 더 깊이 있게 작가를 이해하게 되는데, 게으름때문에 책을 구입하는 것으로 그칠 때가 많아 늘 아쉽다.

 

올 겨울 가장 강력한 한파를 예고하는 뉴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움츠러든다.

나이를 먹으면서 날씨에 민감해지는 것은,  매서운 추위가 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덩달아 위축시키면서 우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봄 햇살이 저 뿌연 구름을 뚫고 나를 비춰 준다면 이 기분에서 좀 벗어날 수 있을까, 몇 번의 혹한을 지나야 봄은 오는 걸까 ? 본격적인 겨울은 이제 시작인데 나는 김영랑이 시처럼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매일 기다리는 중이다.

책을 쌓아 놓고 뒤적거리기를 반복하다가 오랫만에 소설책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빨간색의 밝고 환한 책 표지가 마음에 들었기 띠문이다.

 

 

'레스몰'이라는 작은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주인공은 소형 전자 제품을 전문으로 디자인하고 싶다는 희망을 갖고 있지만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자신의 디자인 사무실에 라디오 디자인을 의뢰한 메이비가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저는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세계 전체를 모래 알갱이만큼 작은 곳에다 압축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쓸모없는 것들이 많으니까요. 슈마허란 사람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지만 정말 작은 것들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 (책 17쪽에서)

 

기다란 막대 안테나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세상에서 가장 작은 라디오는 대성공을 거두고 나의 디자인 사무실은 유명세를 타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라디오를 의뢰한 메이비는 이번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라디오를 디자인해줄 것을 부탁한다. 인터넷 라디오 방송국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메이비는 청취자들에게 줄 선물의 디자인을 부탁한다.

 

어떤 디자이너의 말처럼 라디오란 '현세의 규칙 너머에 존재하는' 물체인 것이다. 규칙을 무시할 수 있고 시간을 넘나들 수 있고 공간을 건너뛸 수 있는 것이 바로 라디오다. (책 23쪽에서)

 

메이비에게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모든 상황들을 한 편의 영화처럼 실감나게 묘사하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으로 야구 중계를 본 나보다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들은 메이비가 훨씬 더 그 경기를 선명하게 기억해 설명하고 있다.

나는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이용해 라디오를 다지인하려 하지만 쉽게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던 중 메이비가 진행하고 있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인터넷 라디오에 접속하고 방송을 듣게 된다. 프로그램의 제목은 '메이비의 무용지물 박물관'이다.

무용지물이란 쓸모가 없는 사람이나 물건이다. 시각장애인들에게 눈으로 볼 수 없는 사물은 무용지물일 수 있다. 볼 수 없는 자들을 위한 라디오 방송에서 메이비는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소리로 표현해 낸다. 하지만 메이비의 목소리를 통해 사물과 상황들은 새롭게 의미 부여 되며 재탄생한다.

 

밤늦게 라디오 녹음을 하고 나서 뒷정리를 하다 보면 밤을 꼬박 새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럴 땐 기분이 참 좋습니다. 뭐랄까, 새벽의 모든 것들에게 포위당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시계를 보고 아는 게 아니에요, 절대로 아니죠. 안개 같은 건데요, 블라인드처럼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죠. 제일먼저 느껴지는 건 어떤 소리들이에요. 풀벌레 소리일 때도 있고 자동차 소리일 때도 있죠. 밤 동안 사라졌던 소리들이 조금씩 살아나는 겁니다. 차가 하나도 없던 도로 위로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신문을 배달하는 자전거 체인소리가 침묵의 껍질을 툭툭 치기도 하고요. 그 소리들이 밤을 깨워놓고 나면 그제야 빨간 일출이 시작되는 겁니다. (책 31쪽에서)

 

메이비가 방송에서 설명하는 노란 잠수함을 떠올려 보려고 애를 쓰지만 이미 내 마음 속에 있는 잠수함의 이미지 때문에 소리를 통한 연상이 쉽지 않다. 시각 장애인은 빛이 허락되지 않는 절대적 어둠 속에서 목소리에 의지해 모든 사물을 추론해야 한다. 소리를 이용해 모든 사물을 디자인하는 메이비는 최고의 다지이너였다. 메이비가 묘사한 야구중계 장면이나 사물에 대한 묘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중, 시각은 가장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사물을 볼 때도 눈으로 복사를 하듯 받아들이고 뇌로 분석을 한다. 하지만 시각을 제한당한 사람들은 청각과 다른 감각으로 사물과 지식을 받아들인다. 오히려 눈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소설의 소재로는 새롭고 참신했지만 사실 암흑의 세계 속에서 소리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절망할 것 같다.  

 

나는 이 소설에 소재로 등장하는 라디오 이야기에 더 끌렸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삼성에서 나온 빨간색 마이마이 카세트를 선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아이들이 갖고 다니는 핸드폰이나 MP3에 비하면 무식할 정도로 큰 크기였지만, 그 당시로서는 정말 놀랄 만큼 작고 앙증맞은 디자인의 카세트였다.  나를 팝송의 세계로 인도했던 배철수의 음악캠프, 김희애의 인기가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김기덕의 두시의 데이트... 중.고등학교 시절 라디오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또한 오직 성우들의 목소리만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라디오 드라마 속 장면들을 생각하는건 늘 짜릿한 즐거움을 줬다. 겨울 방학이면 따뜻한 이불 속에 배를 깔고 누워 몇 시간이고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를 들으며 읽었던 모파상 단편집과 제인에어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소리를 듣고 상상하는 아날로그적인 라디오는 느리지만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스무 살 무렵은 더디고 더디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기 시작하면 도무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언덕 아래로 사정없이 미끄러지다가 쾅, 하고 박살나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속도를 줄이기 위해선 어쨌거나 조금은 가벼워야 할 필요가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책 37쪽에서)

 

첫째 날에는 .
나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이제껏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던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내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해 두겠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에는. 
먼동이 트며
밤이 낮으로 바뀌는 웅장한 기적을 보고 나서,
서둘러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을 찾아가,
하루 종일 인간이 진화해온 궤적을
눈으로 확인해 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겠다.
 
셋째 날에는.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큰길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오페라하우스와 영화관에 가 공연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어느덧 저녁이 되면,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와,
나를 이 사흘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헬렌 켈러가 그토록 보고자 소망했던 일들을,
우리는 날마다 일상 속에서 특별한 대가도지불하지않고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는 모릅니다.
아니 누구나 경험하고 사는 것처럼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래서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이면 귀가 안 들릴 사람처럼
새들의 지저귐을 들어 보라.
내일이면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사람처럼 꽃향기를 맡아 보라.
내일이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보라."고!  
 
내일이면
헬렌 켈러의 간절한 소망을
더 할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되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놀라운 기적 같은 일인지,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 헬렌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중에서 -

 

헬렌켈러가 쓴 유명한 수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을 통해 본다는 것과 듣는 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볼 수 있기 때문에 소홀히 놓쳐 버린 많은 부분들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늘 급하게 쫓기며 살았던 삶과 눈으로 보여지는 데로 행동하고 말하며 겪었던 많은 실수들이 떠올랐다. 우리가 본다고 하지만 그것이 진실일까 ? 허상들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살지 않았을까 ?

차라리 듣는다는게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겠다. 눈은 감고, 귀를 열며 살고 싶다.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볼 수 있는 혜안이 열리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경험을 쌓아야 하는 걸까 ? 짧은 소설 한편을 읽으며 잠깐 잡다한 생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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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28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하루 즐겁게 아름다운 빛을 보시고,
새해에는 또 새해대로 밝은 빛을 보셔요.

예전에는 몰랐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니
삼성카세트나 금성카세트 모두
일본 것을 베낀 모델이었더라구요.

저한테는 카세트가 없었지만,
내 동무들은 국산은 안 쓰고 다들
쏘니니 아이와니 파나소닉이니
되게 비싼 것들을 어머니를 졸라 사서 쓰더라구요...
흠~

착한시경 2013-12-28 23:30   좋아요 0 | URL
파나소닉, 소니, 아이와...전부 추억의 브랜드가 되었네요^^ 소설 속 라디오이야기를 들으니 그냥 문득 옛날 생각이 아련하게 들었어요...ㅎㅎ
함께 살기님께서도 평온한 밤 보내세요... 대전은 오늘 추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12-29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전도 춥군요 ? 여긴 정말 얼어죽을 거 같더군요. 밖에 몇 시간 그냥 이었더니 동상 걸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팽귄뉴스 반가운데요... 헛헛....

착한시경 2013-12-29 13:41   좋아요 0 | URL
겨울이 추운건 당연한건만,,,그래도 정말 추운데요~ 곰곰님...감기 걸리세요~ 넘 추운데 계시지 마시길~

프레이야 2013-12-30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날로그 라디오를 늘 가까이 두고 있어요. 주파수 돌려 맞추는 재미^^
시각과 청각이 차단된다면 어떨까요? 심안으로도 보고 여행하시는 분들도 있고.
얼마전 배리어프리 영화를 봤는데 시각과 청각을 가지고 보는 우리들의 감각을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답니다.

착한시경 2013-12-30 16:20   좋아요 0 | URL
저도 생각나요... 지방이라서 들을 수 있는 라디오 프로가 제한되었는데,,,운 좋게 주파수를 잘 맞추면 서울 방송도 들을 수 있었답니다. 찌찌직 거렸던 라디오 소리도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네요... 배리어프리라는 영화 저도 보고 싶어요...한번 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