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휴 기간동안 가족들과 본 영화 -
봄은 어디쯤에서 움트고 있는걸까 ? 오후부터 겨울비가 봄비처럼 내렸다.
주부된 이후로 명절은 마음의 부담이나 엄청난 노동의 시간이니 특별히 반가울 리가 없다. 오죽하면 명절 증후군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싶은데 시댁 식구들과도 오랜 시간이 흐르니 좀 편해졌다고 해야 할까 ? 이제는 특별히 좋다, 싫다의 감흥조차 무뎌졌다.
내가 이번 설에 살짝 우울한 마음이 들었던 이유는 건강때문이었다.
연휴 시작하는 날부터 소화가 되지 않아 미슥거림이 계속되더니 시간이 갈수록 두통까지 더해져 정말 너무 힘들었다. 몸이 아프다고 설날 음식 준비에 빠질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시댁에 가서 전을 부치고 만두를 빚었다. 시댁은 큰집인데다 친척도 많고 명절날 아침이면 늘 오촌까지 모여 함께 식사를 해야 하니 준비하는 음식의 종류도 정말 많다.
떡국에 쓸 사골을 우려내고, 나물을 미리 씻어 데쳐두고, 종류별로 전을 부쳐야 하고, 고기를 손질해 양념을 재워야 한다. 물론 나는 서열상 막내이기 때문에 아직 시댁에서 한 번도 칼을 잡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가장 고달프다는 설거지를 주야장천해야 한다. 하루종일 이것 저것 나오는 그릇들을 씻다보면 저녁 때 쯤되면 손끝이 쪼글쪼글해질 정도이니 가히 식당 설거지 쯤 된다.
소화가 되지 않아 굶고 계속 약을 먹었는데 갑자기 서글픈 맘이 왈칵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몸이 좀 안 좋으면 하루 정도 푹 자거나 쉬면 절로 나아지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제 약을 먹어도 좀처럼 괜찮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자주 아프다. 정말 신체 나이는 극복하기 힘들다. 친정이나 집이었으면 잠시 일을 미뤄두고 쉴 수도 있겠지만 시댁이니 도통 쉬는 것도 내 맘대로 할 수없다.
내 몫의 만두는 남편이 대신 빚어주고 심지어 내가 해야 하는 설거지도 남편이 대신했다.
꼬박 이틀 정도 앓고 나니 조금 나아져서 정상적인 식사가 가능해졌다. 설날 음식도 완전히 그림의 떡이었다. 이제 맛있어도 소화가 잘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많이 먹는게 부담스럽다. 이래서 늙는건 슬픈거다.... 도통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말이다.
설날 저녁, 몸이 좀 회복되어 남편과 커피를 마시러 외출을 했다가 우연히 안경원에 들렸다.
얼마 전부터 이유없는 두통이 심심찮게 반복되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력검사를 했는데...이건 또 웬 청천벽력 같은 소리... 검사 결과 난시에 안경을 써야 한단다. 20대 초반까지 1.2 정도의 시력을 유지했고 그 후에도 누구보다 눈이 좋다고 자부했다. 또 내 눈으로 보는 세상은 늘 환하고 화창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시력에 맞춘 안경을 쓰니 정말 세상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시력이 떨어지면서 눈이 피로해 두통이 올 수 있다고 하니 안경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눈도 노화가 온 것이다...
물론 나는 아직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안경을 맞추는 것을 하루 늦추고 돌아왔다.
나이 먹는 게 이런 기분일까... 아주 확 늙어 버린 기분이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 박범신의 은교 중에서 -
청춘 사진관에서 곱게 화장을 하고 영정사진을 찍던 70대 할머니 오말순이 주변 사람들은 그대로 인체 혼자만 20대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설정,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 오드리햅펀의 이름을 따서 오두리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20대의 삶을 살아간다.
버스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며 경악하는 오말순 여사가 자신이 누려보지 못한 20대를 신나게 누려가는 모습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었다. 특히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가 로데오 거리에서 옷을 사는 장면을 패러디한 듯한 오두리 변신 모습 그리고 자기가 정말 하고 싶어했던 가수의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 오래 전 유행했던 노래를 다시 듣는 것도 반갑고 좋았다.
늙음과 젊음이 무엇인가 ? 최근 갑자기 늙어버렸다는 기분에 좀 슬펐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위로를 받은 느낌이다. 물론 오두리가 하얀나비를 부르면서 과거의 삶을 회상하는 부분과 늙은 아들과 20대의 모습을 한 엄마가 만나는 부분에서는 마음이 먹먹해져서 보는 내내 엄청 울었다.
울다가 웃다가 두 시간 동안 아무 생각없이 즐겁게 봤다.
겉모습은 20대, 경험과 정신은 70대로 살 수 있다면 난 뭘 할까 ? 영화 속 말순할머니처럼 내가 20대에 이루지 못했던 꿈을 향해 신나게 가 볼까 ? 아니면 인생 뭐 별거 있어 이러면서 정말 신나게 놀아볼까 ?
이런 영화가 이렇게 마음에 확~ 와 닿는걸 보면 나도 늙은게다....
연휴 기간동안 책 세권과 세렌디피티 DVD를 구입했다.
읽지 못한 책은 여전히 쌓여가고, 최근에는 보지 못한 영화까지 같이 쌓여 간다. 내일 안경을 맞춰야 하나, 아니면 좀 더 참아야 하나를 고민 중이다.
노화가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운동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정신의 노화를 막기 위해서는 역시 밀린 책을 열심히 읽어야 겠다. 물론 영화도,,음악도 들으면서 말이다.
설날 아픈 몸으로 우울하게 보냈는데, 영화 한 편으로 너무 즐거워졌다.
역시 행복은 이렇게 소소한 일상에서 오는 게 맞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