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방동 카페 '엘리먼트 랩'에서 마신 핸드드립커피 케냐 AA)

 

저녁을 먹고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 입지않고 김치냄새가 좀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불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자식하고만 사랑을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으랴..
영원이 없을 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여도 좋고 남성이여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생길 필요도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있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나라,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을 그 많은 구경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만약 내가 한 두곳, 한 두가지만 제대로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되새겨질 자신이 돼 있을껄...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 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닦으며 살기를 바라지 않고, 내 친구도 성현 같아지기를 바라진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자라서 탄로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바랄 뿐이다. 

나는 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 싶을테고, 내가 더 예뻐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 눈속 침대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데에 더 매력을 느끼려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베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해도  우리의 향기만은 아름답게 지니리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되 미친 듯,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구름을 바라보다가, 까닭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그도 그럴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시킬때는 여왕처럼 품위있게, 
군밤은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때는 백작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위해 하기싫은 일을 하지않을 것이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않고 살고자 애쓰며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 사람을 사랑한다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의 꽃을 사서 그에게 들려줘도 
그는 날 주책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게다. 

나 또한 더러 그의 눈에 눈꼽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추가루가 끼었다고 해도 
그의 숙녀됨이나 신사다움을 의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여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 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주리라. 

그러다가, 어느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

 

(친구가 준 수제 크리스마스 쿠키...)

 

지초와 난초의 교제라는 뜻으로, 벗 사이의 맑고도 고귀한 사귐을 일컫는 말...지란지교를 떠올리는 하루였다. 연이어 계속되던 추위가 주춤하고 오늘 낮은 제법 따스한 기온을 느낄 수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까지 비추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들이었겠지만, 이제 초겨울이니 포근한 기온에도 만족해야 한다.

한동안 환한 햇빛을 본 적이 없어 우울하다는 친구의 말을 떠올려 보니, 화창한 하늘을 본 기억에 아득하기만 하다.

높고 맑은 하늘, 따뜻한 기운을 몰고 오는 바람 그리고 마음까지 비춰줄 것 같은 투명한 햇살이 좋은 가을은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복잡한 생각 속에 우왕 좌왕하며 혼란스러워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다시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내가 오늘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오래된 수필을 떠올린 것은 사랑하는 두명의 친구들때문이다. 나이가 같거나 비슷한 사람을 친구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친구의 범주 안에는 들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한명은 나와 다섯 살 차이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여섯 살 차이가 난다.

하지만 나와 가깝고 오래 사귄 사람을 친구라고 일컫는다면 그들은 가장 귀한 벗들이다.

흔히들 나이를 먹을수록 좋은 친구를 만들기 힘들다고 하지만, 이 두명은 친구들은 모두 30대에 만나 긴 시간을 함께 하고 있으니 특별한 인연임에는 틀림이 없다.

 

친구 사이에 진정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일은 쉽지 않다. 많은 시간 속에 신뢰가 쌓여야 하고, 치졸한 이기심과 시기, 욕심을 버려야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법인데,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조건없는 사랑과 우정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우정을 이야기하는 글이나 노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깊은 우정을 나누는 일이 쉽지 않음을 뜻하고. 모든 인간은 그런 우정을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에게 내면의 소통이 가능한 친구들은 내 삶의 가장 큰 축복이며 자랑이다.

신은 나에게 큰 고민과 시련을 주셨지만 동시에 그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도 허락하셨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괴로워했을까 ? 홀로 극복할 수 있었을까 ? 

나를 염려하고 위로 했던 목소리들...한 순간도 나를 외롭게 만들지 않았던 그들의 배려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고마운 일이다.

   

(카페에 장식되어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사람을 알기보다는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또한 나의 인간관계가 풍요속의 빈곤이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을 함께 나누는 소박한 관계를 꿈꾼다.  

 

셋이 함께 만나 점심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빨간색 코트와 책 그리고 늙어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최근 함께 구입한 김운하의릴케의 침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진지한 책의 내용을 자기 식으로 재미있게 풀어 내거나  혹은 자신의 경험대로 각색해 버리는 한 친구 때문에 정신없이 웃었다

 

특히, 나는 이런 특별한 재능을 지닌 친구를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꾸밈없는 웃음때문이다. 어떤 고민도 그녀와 나누면 웃음이 되어 버리는데 난 그 가벼움을 사랑한다. 울면서 찾아가도, 헤어질 때는 꼭 나를 웃게 만드니...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그리고 11년을 늘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나를 바라봐주는 또 한명의 친구...

나는 그녀의 변함없는 마음과 이성적인 판단에 늘 감탄하고 놀란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그녀는 언제나 내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해 준다. 그 판단의 밑바탕에는 나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음을 잘 알고 있으니 그 마음이 고맙다.

 

 

함께 점심을 먹고, 한끼 밥 값만큼 하는 핸드드립 커피를 마셨다.

사투리에 웃고, 빨간 매니큐어에 웃고, 곰보다 못한 모성애를 운운하며 웃었다.

파 다듬는 일과 다듬은 파를 사는 일 중 나는 다듬은 파를 사는게 어울린다며 웃었고,

고난 4종 세트에 대해 이야기 하며 웃었다.

그리고 내 독특하고 대책없는 가치관에 다들 이제 익숙해져 그냥 웃어 버렸다.

시간이 흐르며 모든 것들이 즐거운 웃음의 소재가 되니 이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다.

 

헤어지며...다음 만남에는 속이 쓰릴 만큼 매운 칼국수를 먹고, 커피를 마시자는 약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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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 동안 내린 눈이 아파트 뒤...계족산을 하얗게 덮었다. 오후의 옅은 햇살은 도로 위의 눈을 녹게 했지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섭기만 하다.

늦가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눈이 반갑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가을을 보내야 하는 아쉬움과 속절없이 보낸 시간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다짐했던 수많은 계획과 각오들....

특히 100권의 책을 읽겠다는 무모한 계획은 정말로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마흔이라는 생의 전환점에서 100권의 책을 한꺼번에 구입하는 대책없는(?) 일을 저질렀고, 그 무모함 속에는 책 속에서 길을 찾아 보리라... 그래서 후회없는 40대를 보내리라는 간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올해 가장 많은 책을 구입했고, 가장 적게 읽었다.

 

한 달 남짓한 시간동안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을까 ?

밀린 숙제 앞에서 시계를 보며 쩔쩔매는 아이처럼 마음이 조급해 진다.

수전 손택의 일기는 25살에 머물러 있고, 읽고 싶은 마음에 미리 다 구입해 버린 파스칼 키냐르의 책은 책상에 쌓여있다. 이런 중에 나는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의 책을 뒤적이던 중 갑자기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 잡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 손에 있는 책은 시집 두 권이다.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마음은 생기 넘치는 은방울꽃들로 가득 차 있다.

저녁이 나의 길 위해서

푸른 촛불처럼 별에 불을 붙였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빛인지 어둠인지 ?

무성한 숲 속에서 노래하는 것이 바람인지 수탉인지 ?

어쩌면 들판 위에 겨울 대신

백조들이 풀밭에 내려앉는 것이리라.

 

아름답다 너, 오 흰 설원이여 !

가벼운 추위가 내 피를 덥힌다 !

내 몸으로 꼭 끌어안고 싶다.

자작나무의 벌거벗은 가슴을.

 

오, 숲의 울창한 아련함이여 !

오, 눈 덮인 밭의 활기참이여 !

못 견디게 두 손을 모으고 싶다.

버드나무의 허벅지 위에서.

 

-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의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

 

랭보와 견주어지는 천재 시인 예세닌... 미국 여자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과의 사랑, 결혼 그리고 이어지는 이혼으로 결국 자살을 선택하며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안녕, 나의 친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다정한 친구, 그대는 내 가슴 속에 살고 있네.

우리의 예정된 이별은

이 다음의 만남을 약속해 주는 거지.

 

안녕, 나의 친구, 악수도 하지 말고,

작별의 말도 하지 말자.

슬퍼할 것도, 눈썹을 찌푸릴 것도 없어

삶에서 죽음은 새로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삶 또한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지.

 

-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의  이별의 시 -

 

잉크가 없어 칼로 자신의 팔목을 그어 피로 쓴 마지막 시....

두서없이 읽다가 발견한 시 한편에 눈길이 갔다. 사실 시인보다는 시인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던 연상의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의 이야기가 먼저 눈에 띄였다.

자동차 뒷 바퀴에 스카프가 걸리면서 목 골절로 죽음을 당한 비운의 무용수 던컨과 불같은 사랑에빠졌던 젊은 시인 예세닌...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시들 속에서 자연에 대한 경외, 사물에 대한 깊은애정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오래 전... 첫 눈을 간절히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눈이 오면 만나자는 유치한 약속을 하기도 했고... 우연히 첫 눈을 함께 보게 되는 날이면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기도 했다.

늙는다는 건... 경험해야 하는 것보다 기억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는 날... 나는 혼자 커피를 마셨고, 하릴없이 많은 책들을 뒤적였다.

 

 

이 해가 가기 전... 수전손택의 책을 마무리 해야 하고, 은밀한 생을 통해서 키냐르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지금은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를 읽다가 잠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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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1-29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상당히 재미있어요.

착한시경 2013-11-29 19:46   좋아요 0 | URL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있어요^^ 즐거운 금요일 밤 되세요~
 

 

 

 

라온제나는 오래 전에 읽었던 공지희 장편동화 "영모가 사라졌다"에 나오는 판타지의 세계이다.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아버지를 피해 어느 날 사라져 버린 영모,

영모가 친구 병구 그리고 고양이 담이와 함께 간 곳이 라온제나이다.

순 우리말로 "즐거운 나"라는 뜻을 가진 라온제나...

라온제나, 라온제나... 입안에 맴도는 이 말이 너무 좋아 알라딘 내 서재의 이름이 되었다.

즐거운 나로 가는 길... 

이미 첫눈이 내렸고, 스산한 바람과 쉽게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은 겨울이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음을 알리는 증거이다.

 

주말을 함께 보낸 가족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 간 월요일 아침...

나는 즐거운 나를 찾기 위한 길을 나선다.

새벽부터 내린 비에 낙엽은 젖어 길가에 쌓여있고, 출근 시간이 지난 도로는 한산하다.

여름 내내 푸르름을 자랑하던 가로수의 무성한 잎도, 나란히 우산을 쓰고 그 길을 걸어 학교로 향하던 아이들도,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등산을 하는 초로의 노인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 흩어지는 비가 내려 창문마저 열어 놓을 수 없는 버스 안은 비릿한 냄새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의 세계에 빠져 있다.

                                             

  

 

 

 

 

 

 

 

 

 

 

 

 

 

                                                                

314번 버스를 타고 가는 30분...

가방 속에는 두 권의 책이 들어 있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반복해서 들려온다.

밀린 숙제처럼 내 맘을 무겁게 하는 수전손택의 "다시 태어나다"와 가볍게 읽기 위해 넣어 가지고 다니는 송정림의 "내 인생의 화양연화"

버스 안에서 읽기에는 내 인생의 화양연화가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폈다.

물론 좀 더 조용하게 생각할 수 있는 장소였더라면 수전손택의 책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가겠다는 마음은 이성적 의지일뿐 나는 버스 안에서의 대부분의 시간을 바깥 풍경을 보는데 쓰고 말았다.

우울한 날씨는 사람의 마음마저도 서글프고 아련하게 만들어 버린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혹은 세 번정도 시내 서점을 찾아간다.

즐겁고 기쁜일을 기념하기 위해 책을 사고, 속상하고 슬플 때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책을 산다.

서점에 있는 책들의 표지를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책을 훒어보다가 못내 좋으면 집으로 가져온다. 최근에는 서점에 더 자주 가는 편인데 마음이 심란하고 울적할 때 찾아가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진다. 그리고 내가 갖고 싶은 책을 찾았을 때는 고민마저도 잊고 흥분한 마음이 된다.

늘 같은 자리에서 말없이 나를 위로해주는 책들...

그들의 너그러움과 아름다움 앞에 나는  겸손해진다.

 

특히, 내가 알라딘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길에 언제나 나를 반갑게 마중하는 작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빈집 중에서) ... 내가 사랑하는 시인 기형도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풀 중에서)... 시인 김수영 그리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와 칼의 노래 김훈이 보인다.

선한 미소를 가진 이해인과 박완서 그리고 박경리가 그곳에 있다.

 

 

 

월요일 오전... 알라딘에는 클래식이 흐르고, 수많은 사연을 담고 그 자리에 머무는 헌 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따스한 사람들의 사연을 담은 헌 책들... 이미 누군가의 손길이 지나간 책장을 넘기며 이 책의 주인을 상상해 본다. 서가에 빼곡하게 꽂힌 책들 중에 특히 나를 사로잡은 몇 권의 책...

문학동네와 열린 책들 그리고 시공사에서 나오는 세계 문학을 모으는 중인데 오늘은 열린 책들과 시공사 책이 새로 나와 기쁜 마음으로 구입했다. 그리고 서가 한 켠에서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파스칼 키냐르의 책을 발견했다.

 

모든 책들에는 작가의 사연도 담겨져 있지만, 그 책을 구입한 사람들의 사연도 함께 쌓여 가는 것

같다. 욕심대로 7권의 책을 모두 구입해 돌아오는 길.... 여전히 날씨는 흐리고 추웠지만 책이 주는 깊은 위로에 감사하며 돌아왔다.

 

그리고 오후 일상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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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1-27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한 시경님, 저랑 같은 동네 사시는군요. 글만 읽어오다가 반가와서 오늘은 댓글도 한줄 남겨봅니다 ^^

착한시경 2013-11-27 08:20   좋아요 0 | URL
와~ 정말 신기하네요^^ 선비마을 사시나요? 가까운 곳에 이렇게 반가운 분이 사신다니...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동네에서 마주쳤을 수 있겠네요~ 비 오는 아침 반가운 댓글 감사해요~

그렇게혜윰 2014-03-04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동화 읽은 후로 라온제나를 좋아해요. 서재 들를 때마다 혹시....했는데 역시!였네요^^
 

 

 

 

 

 

 

 

 

 

 

 

 

 

 

 

 

 

 

 

 

 

 

 

 

 

 

토요일... 오랫만에 설탕을 듬뿍 넣은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메리카노가 도회적이고 세련된 맛이라면,  일회용 맥심커피는 촌스럽지만 정겨운...그리고 가끔 못견디게 그리운 옛 친구 같은 맛이다.
가만히 책상에 앉아 내가 보낸 일주일의 삶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바로 어제 무엇을 했는지도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심지어 지난주에 했던 기억들과 중첩이 되면서 혼란스러움마저 느꼈다.

오후와 저녁은 늘 같은 모양으로 반복되니 특별히기억될 것이 없다.  하지만 오전에는 약속이나 내가 개인적으로 해야할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시간들이니 조금씩은 변화가 생긴다.  
차분하게 기억속에 잊혀져가는 시간들을 다시 돌려보자,,,
월요일 오전은 자주가는 카페에 앉아 수전손텍의 일기를 읽고 잠깐 서점에 다녀왔다.
화요일에는 혼자 시내 서점과 카페에 다녀왔다.
수요일에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시내에 나가 혼자 커피를 마셨고,  친구와 만나 점심을 먹었다.
목요일 오전에는 전화로 친구와 폭풍 수다를 떨었고,  예배모임에 참석했다.
금요일에는 친한 언니와 함께 시내서점에서 만나 책을 봤고,  꼬물거리는 우중충한 날씨에 어울릴법한 매운 칼국수를 먹었다.
역시 머릿속으로만 더듬을때는 떠오르지 않던 파편된 기억들이 글로 정리하니 하나의 장면으로 선명하게 떠오른다.
 
난 이번주에 네 번 서점에 다녀왔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그리고 중고서적을 통해 10권의 책을 구입했다.  최근 내가 가장 관심있게 보는 작가는 파스칼 키냐르인데 은밀한 생,  심연, 세상의 모든 아침,로마의 테라스, 옛날에 대하여, 섹스와 공포,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빌라 아말리아 그리고 떠도는 그림자들을 구입했다.
번역된 책은 거의 다 소장한 편인데...문제는 아직 제대로 읽은 책이 한 권 밖에 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무모한 욕심은 늘 화를 부르지만 책에 대한 나의 대책없는 과도한 욕망은 늘 멈춰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키냐르를 전작 독서하겠다는 발칙한 계획까지 세워본다.  기약없는 계획이고 약속이지만이런 내가 밉지 않고 싫지 않다.

알라딘 중고서적에서 우연히 발견한 비행공포도 잠깐이지만 나를 기쁘게 했다.  서가를 헤매던 중 우연찮게 눈에 띈 책인데 얼마 전 친구가 읽기를 권한 책이라 반가움이 컸다.  그리고 정가보다 저렴한 가격에 새책만큼이나 깨끗한 책을 구입했고, 나머지 돈으로 내가 책만큼 사랑하는  커피를 마셨다. 

로맹 가리의 소설 두 권...자기 앞의 생과 새벽의 약속 그리고 정말 충동구매해 버린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의 명시 1,2권
질문의 책 이후에 정말 오랫만에 시를 읽었다.  프랑시스 잠의 시....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첫 장에서 이 시를 읽는 순간 나는 시인의 겸허한 삶의 태도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가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시들이 너무 궁금했다.

이번주에 나는 수전손택의 일기 다시 태어나다를 읽고 있고,  자투리 시간에는 녹색평론과 한겨레 21를 뒤적이고 있는 중이다.
독서에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집중해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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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한 밤... 착잡한 밤이다.

개학 첫 날부터 시무룩해 돌아온 아들 녀석... 하루 종일 머리가 아팠다며...보건실에서 약까지 먹었다고 한다.

체력적으로 많이 약한 편인데... 새학년,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친구들과 적응해야 하는  첫 날부터 지친 것 같다.

이런 날이면 특히 밤에 잠까지 쉽게 이루지 못하는 예민한 아들...

옆에서 바라보는 마음도 서글프다.

마음을 다해 위로해 보지만.... 내 말들이 무슨 힘이 될까 싶기도 하고...

자랄수록 아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한 살 때는 해야 할 일이 한 가지라면... 다섯 살 때는 다섯가지 쯤이 되는 것 같고...

열 다섯 살 아들은 지금 열 다섯가지 일을 스스로 해야 하는데... 좀 버거운 것 같다.

잠도 오지 않고... 민규가 개학하면 열심히 읽으려고 미리 구입해 둔 책들을 넘겨 보고 있다.

무슨 책부터 읽을까 ? 이제 겨우 행복한 진로학교 한 권을 읽었을 뿐이다.

다 잊고... 박범신을 따라 터키로 갈지... 아니면 오소희를 따라 남미로 갈지가 고민이다.

아니면 이병률의 시 속으로 푹 빠져 버릴지...

늦게 잠든 아들을 위해... 오늘 밤은 시간이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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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3-0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치요..아이가 힘들어 할 때 너무 마음이 아프지요.
저는 그저 모자르나마 기도만 해 줄 뿐이지요.

착한시경 2013-03-07 00:24   좋아요 0 | URL
결국 다음 날...아이는 조퇴를 했구~괜시리 제 마음이 우울한 하루였어요~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는데...늘 걱정만 앞서는 부끄러운 엄마네요

숲노래 2013-12-15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기운을 내도록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다독다독
사랑해 주면
아이는 날마다 새롭게 기운을 차리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