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도대체 소로는 어떤 사람인가 ?
내가 말하는 사람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의미에서, 내 유년기와 이른 청년기의 친구이자 생사를 넘어 나를 도운 은인이다. 이런 도움에 감사하고, 그와의 추억에 경의를 베푸는 일은 당연한 의무라 하겠다. 더군다나 그의 이름과 며예, 삶과 가르침이 머스케타퀴드 근처에 사는 아이들만의 유산이 아니라 미국의 국가적 자신이 된 마당에는 더 그렇다.
- 소로와 함께한 나날들 중 23쪽에서 -
그는 또한 우리에게 숲 속에서의 예의범절을 가르쳤다. 숲은 소란한 자와 부주의한 자에게는 어떠한 보물과 지혜도 나눠주지 않는 법임을. 인간은 뱀이 흉측하다고 죽여서도 안되며, 놀라게 했다고 복수해서도 아니 됨을. 아무리 열심히 새알을 모으는 사람일지라도 대부분의 알을 어미새에게 남겨야 하며, 둥지를 보려 너무 자주 가서도 안된다는 이치를 알려주었다.
- 소로와 함께 한 나날들 중 20쪽에서 -
또한 그녀는 대단히 사려 깊었고, 얼마 안 되는 돈으로도 즐거운 가정을 꾸리는 데 비범한 재주를 가졌다. 검소한 식단과 소박한 식재료를 토속의 향미료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명랑함으로 조리함으로써 맛나게 만들었다. 이 착한 부인은 일과 보살핌을 제자리에 둘 줄 알았으며, 삶과 사랑을 무엇보다 앞세울 줄 알았다. 가까운 이웃이자 친구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이 집안에서는 수년 동안 평일에는 차나 커피, 설탕, 그리고 다른 사치품을 사용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던 딸들을 위해 피아노를 사줄 수 있었고, 모든 아이들의 교육비를, 특히 둘째 아들의 대학 교육비를 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녀의 식탁은 항상 매력적이었으며, 음식은 풍족했고 맛깔스러웠다. 그녀에게는 두 딸과 두 아들이 있었는데, 헨리는 둘째 아들이었다.
- 소로와 함께 한 나날들 중 33쪽에서 -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만약 내가 나의 오전과 오후를 모두 사회에 팔아야만 한다면, 내게 살아갈 만한 가치를 느끼게 할 어떤 것도 남지 않게 되리라 확신한다. 나는 그렇게 한 사발 죽을 위해 생득권을 팔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 아주 근면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생계를 벌기 위해 자기 삶의 더 큰 부분을 소비하는 사람만큼 치명적인 실패자는 없다. 위대한 과업은 자기를 부양하는 일이다. 예컨대 시인은, 증기기관 대패가 깎아낸 대팻밥으로 보일러를 끓이듯이 시로써 자신을 부양해야 한다. 당신은 사랑으로 생계를 벌어야 한다."
- 소로와 함께 한 나날들 중 75쪽에서 -
소로와 같은 마을 이웃으로 살았던 저자 에드워드 월도 에머슨이 바라본 소로 이야기... '소로와 함께 한 나날들'을 읽고 있는 중이다.
소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풀어보려는 저자의 의도보다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더 마음을 끌었다. 월든과 시민 불복종으로 너무나 유명한 소로... 그런 소로와 이웃하며 따뜻하고 순수한 우정을 나눈 저자가 부러울 따름이다. 아직 읽고 있는 중인데 좋은 문장들이 많아 열심히 밑줄을 긋고 있는 중이다.
갖가지 질병과 낙담, 그리고 황폐함의 근원은, 자신의 나날들이 어떻게 지니가는지 멀리 떨어져 조망할 여유도 없이, 모두가 그러하듯이 순간순간 살아가고, 그리하여 하루가, 일 년이, 한 평생이 오로지 살기 위한 준비 속에 지나가버린다는 사실이다. 제대로 살게 되는 시간은, 적어도 지상에서는 결코 오지 않게 된다. 소로는 이런 삶을 살 수 없었다. 그는 지상을 조망하고 방향과 거리를 재는, 또 다른 의미의 측량기사였기 때문이다. 월든에서의 그의 삶은 수단과 목적이 적정의 관계에 있게 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그는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 소로와 함께 한 나날들 중 74쪽에서 -
옥천에서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 외딴 국도변을 지나는 중 차에 치여 도로 한 복판에 죽어 있는 고라니를 발견했다. 차 창 밖으로 차디찬 도로 한가운데 고개가 꺾인 채로 누워 있는 고라니가 보였다. 요즘 국도변이나 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이런 동물들의 죽음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그들과 함께 공존할 방법은 없는 걸까 ?
인간의 편리를 앞세운 무분별한 개발 논리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동물들을 보니 안타운 마음 뿐이다. 자연과 공존을 추구했던 동양과는 달리 서양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놓고 자연을 인간이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산과 강이 있던 자리에 도로가 만들어지고, 인간의 거주 공간이 자연 속으로 확장되어 가면서 점점 그들은 설 자리를 잃어가게 되었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 잠깐 마주한 모습이지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차를 돌려 죽은 고라니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미 해가 어둑 어둑해지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고라니를 발견하지 못한 차들은 무참하게 그 여린 몸을 밟고 지나 갈 것이 뻔한 일이었다. 비록 이미 죽어 식어가는 몸이지만 그 몸이 형태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짓밟힌다면...그건 한번의 죽음이 아닌 것이다.
마음같아서는 땅을 파서 묻어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우선은 추위에 언 땅을 팔 도구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남편이 고라니를 도로 갓길로 옮겨 놓고 있는 중, 마을 주민인 듯한 아저씨 두 분이 오셔서 뒷 처리를 해주겠다고 하셨다.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마을 주민 분이신 것 같았고,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죽은 고라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
그 고라니에게도 가족과 친구가 있지 않을까 ?
어미 고라니는 돌아오지 않은 새끼를 얼마나 기다릴까 ?
왜 산에서 도로로 내려왔을까 ? 고라니가 살았던 산에는 먹이가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
여러가지 생각에 마음이 심란했다. 작은 여린 고라니의 선한 눈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오늘 '소로와 함께 한 나날들'을 읽으며 어제 우리가 만난 고라니와 소로의 삶이 떠올랐다. 앞으로만 나가려는 속도의 법칙을 버리고 뒤를 돌아봐야 할 것 같다. 멈춰야 보이고, 천천히 보아야 차세히 볼 수 있다. 그래야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 작은 것은 아름답고 모든 것은 소중하다. 자연의 작은 소리와 몸짓에도 귀 기울린다면... 고라니의 불행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