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6년 7월 XX일
시보다 시작노트가 좋은 경우가 많아요. 시 쓸 때는 시작노트 쓰듯이 하라는 말도 있지요. 쓴다는 의식이 있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부자연스러운 말을 하게 돼요. 피아니스트의 뒷모습을 보면 어떤 소리가 날지 알 수 있다고 하지요. 골프나 테니스에서처럼 시도 어깨에 힘이 빠져야 ‘원 샷’으로 갈 수 있어요.(129쪽) - 이성복 저, <무한화서>에서.
나도 쓴다고 의식하지 않고 어깨에 힘을 빼고 써 보려고 했다.
시에서 철학은 숨어 있어야 해요. 독자한데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태도는 시와는 거리가 멀어요. 시는 한 수 배우겠다는 거예요. 심각한 폼 잡지 말고, 잡생각과 헛소리에 의지하세요. 그러면 철학도 따라와요.(128쪽) - 이성복 저, <무한화서>에서.
나도 심각한 폼 잡지 않고 잡생각과 헛소리에 의지하여 써 보려고 했다.
사진으로 말하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폼 잡지 않고 자연스럽게 찍은 스냅 사진 같은 글이 좋다는 것이지. 문제는 멋진 스냅 사진을 찍기 힘들 듯이, 멋진 스냅 문장을 쓰기 힘들다는 것이지.
2. 2016년 7월 XX일
중복이 지났으니 여름의 반은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축구 경기로 말하면 전반전이 끝났고 후반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여름은 빠르게 흘러갈 것이므로 아무리 더워도 지낼 만하겠다. 지금이 ‘5월 말’이라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앞으로 몇 달을 더운 날씨 속에서 지내야 하잖아. 지금이 ‘7월 말’인 게 얼마나 좋은가.
그만 뜨거워라, 더워 죽겠다, 하는 마음으로 여름을 살면 안 된다. 더 뜨거워라, 그래야 벼가 잘 익어서 내가 일 년 동안 맛있는 밥을 먹을 수가 있는 거다, 하는 마음으로 여름을 살아야 하는 것.
얼마든지 더워도 좋다고 생각하겠다. 왜냐하면 난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끝낼 적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더위를 잊을 테니까. 이러면서 무더운 여름을 보낼 테니까.
3. 2016년 8월 X일
어제 소나기가 내려 좋았다. 땅의 열기를 식혀 줄 것 같아서, 더운 공기를 식혀 줄 것 같아서, 먼지가 씻어질 것 같아서. 꼭 그렇지 않더라도 여름의 소나기는 서늘한 환상을 갖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좋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창문을 통해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는 것을 보니 여름의 지루함이 반 토막 나는 것만 같아 좋았다. 유쾌했다. 무더운 날씨가 아니었다면 맛보지 못할 유쾌함이었다.
4. 2016년 8월 X일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자녀의 교육비나 자녀의 성형 수술(쌍꺼풀 수술 같은) 비용은 투자라고 생각하며 아끼지 않으면서 혹시 자신에게 투자하는 비용은 아끼며 사는 건 아닐까?
얼굴 마사지를 받으러 다니다가 너무 더워서 쉬고 있다. 더워서 쉬는 건지 돈이 아까워서 쉬는 건지 잘 모르겠다. 겸사겸사해서겠다. 요즘은 집에서 마스크 시트로 대신한다. 간편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마사지 효과를 내니 좋다. 어제도 얼굴에 마스크 시트 한 장을 붙이고 누워 있었다. 20분 뒤에 떼면 끝이다. 내가 이렇게 외모 가꾸기에 관심이 많은지 몰랐다. 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함. 늙기 싫어서 발악을 하고 있음.
내면 가꾸기를 위한 투자로 책값을 치른다면, 외면 가꾸기를 위한 투자로 마사지 비용을 쓰는 거지. 인생에서 가장 소홀하기 쉽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라는 것을 상기하며.
그런데 이상한 건 말이지, 책값은 하나도 아깝지 않은데 마사지를 받으러 다니는 비용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마사지 10회분 비용을 선불로 내고 나면 잘한 일인지 고민하게 된단 말이야.
아, 내가 반성할 게 있다. 예전에 대중목욕탕에서 오이 마사지를 전신에 받는 여성들을 보면 마음속으로 (오이를 아깝게 왜 먹지 않고 몸에 바르는 거야?, 하면서) 흉을 본 적이 있는데 취소한다. 취소, 취소. 내가 그땐 뭘 몰라서 그랬던 거야.
내가 흉을 보거나 비난했던 사람들의 행동을 나도 언젠가 따라하며 살게 된다는 것. 값진 깨달음일세. 인간의 어리석음.
5. 2016년 8월 X일
일기를 쓸 때 계획을 세우고 결심을 할 때가 있다. 실천이 안 되면 또 계획을 세우고 결심을 한다. 내가 결심하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오늘 알았네. 어떤 책에서 읽어 알았네. ‘결심이라는 집에서는 다들 잠을 잘 잔다.‘라는 페르시아 속담이 있다고 하네. 어떤 일을 할지 말지 망설이다가 마침내 결심을 하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진다는 뜻이란다. 나도 그 홀가분함을 느끼고 싶어서 그랬던 것.
그거였군. 영화를 보면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 생길 때 아무도 모르게 상대에게 복수하여 완전범죄로 끝내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꼭 상대에게 미리 말한단 말이야. “내가 당신을 가만둘 것 같아? 당신을 가만 두지 않겠어.” 이렇게 말함으로써 복수하기로 결심하며 홀가분함과 통쾌함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지. 복수 계획에 대해 선언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이지. 선언은 곧 결심인 것. 일단 중요한 건 선언하고 싶다는 자기 마음이거든. 그 결과 나중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용의자로 지목이 되더라도 말이야. 난 이런 인간 심리가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