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춘문예의 계절이 왔구나

 

 

바야흐로 신춘문예의 계절이다. 요즘 신춘문예 공모에 응모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겠다. 경향신문은 2015년 12월 7일까지, 한국일보는 12월 4일까지 공모 마감이라고 하니 다른 신문사들도 그와 비슷하겠다. 당선작은 2016년 1월 1일에 발표.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다른 무엇을 쓰든 ‘신춘문예’를 겨냥해서 글과 씨름했을 ‘문학 지망생들’이 읽는다면 공감할 글을 옮겨 본다. 이성복 저, <고백의 형식들>에 있는 글이다.

 

 

“지금까지 나는 문학 때문에 행복했고 문학 때문에 좌절했다."(147쪽)
- 이성복, <고백의 형식들>에서.

 

 

문학이 없었다면 행복도 없었겠지만 문학이 없었다면 좌절도 경험하지 않았을 듯.

 

 

"나는 그놈의 문학 때문에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문학은 목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나를 불편하게 했다."(147쪽)

 

 

늘 문학을 그림자처럼 달고 그 그림자에 집중하며 사는 삶. 행복일까, 불행일까?

 

 

"문학과의 신접살림은 첫 시집을 내기까지 삼 년 쯤이나 계속 되었을까. 그 이후로는 불화와 별거의 연속이었다."(147쪽)

 

 

불화와 별거의 연속이되 끝까지 이혼을 하진 않겠지. 고통스러워지더라도 죽을 때까지 문학과 이별을 하진 않겠지. 문학에 매료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

 

 

"지금 나에게 문학은 내 아이를 배고 있으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랑하려 하면 할수록 더 멀어지는 그런 여자와 같다."(147쪽)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일 가능성이 많은 게 우리 인생이다.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간절히 원하지도 않았겠지.

 

 

(나는 여기서 '문학'을 '글쓰기'로 바꿔 읽었다.)

 

 

글 잘 쓰는 작가도 이렇게 문학을 짝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라고 생각하면 왠지 위안이 되네.

 

 

 

 

 

2. 접속사에 대한 거부감

 

 

산문집인 <고백의 형식들>에는 소설도 담겨 있는데 소설 속에서 이런 글을 발견했다.

 

 

요즈음 내 문장의 접속사들은 자동차 브레이크 밟는 소리, 쥐 울음소리 같은 구역질나는 소음을 냅니다. 괴로워요. 사실 나의 광기와 퉁명스러움은 바로 그 때문이에요.
- 이성복, <고백의 형식들>, 24쪽.

 

 

접속사에 대해 거부감이 있다는 말로 해석했다. 글쓰기를 지도하는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되도록 접속사를 쓰지 말라고 한다. 꼭 필요할 땐 접속사를 넣어야겠지만 빼도 문맥에 문제가 없다면 빼는 게 좋기 때문이다. 나도 글을 쓰고 나서 검토할 때 접속사를 빼는 작업을 한다. 

 

 

간단한 문장으로 예를 들면 이렇다.

 

 

(1) 학교에 가다가 친구를 만났다. 그래서 반가웠다.
(2) 학교에 가다가 친구를 만났다. 반가웠다.

 

 

(1)번보다는 (2)번의 문장이 좋다고 생각한다.

 

 

(1) 가을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가을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번보다는 (2)번의 문장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을 쓰는 경우가 있긴 한데, 문장이 긴 경우에 읽는 사람이 이해가 빠르도록 하기 위함일 때만 그렇게 한다.

 

 

 

 

 

 

 

 

 

 

 

 

 

 

 

 

 

 

 

 

 

 


3. 정의를 부탁하는 책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다. 이기는 게 정의다.’ 이 지랄 같은 상식을 깨는 건 슈퍼 히어로 한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어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우린 결국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해야 하는 존재다.
- 권석천, <정의를 부탁해>, 415쪽.

 

 

그래서 책 제목이 ‘정의를 부탁해’인 듯.

 

 

 

 

 

 

4. 특이한 구성

 

 

이 칼럼집에서 특이한 구성의 칼럼 한 편 읽었다. ‘메르스가 폭로한 권력의 누아르’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으로, 메르스와 페스트의 유사한 점에 초점을 맞추어 쓴 글이다. 글 사이사이에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뽑은 인용문을 넣었는데, 글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글이란 문단과 문단의 연결이 중요한 법인데 이런 형식으로도 문맥이 자연스러워 놀랐네.

 

 

저자가 <페스트>에서 인용한 것을 그대로 옮긴다.

 

 

칼럼에 쓴 첫 인용문.

 

 

“명령이 있어야 그렇게 하지.‘ 메르시에가 말했다... 시 당국은 자진해서 무엇을 해볼 생각도 전혀 없었고 아무런 대책도 없었지만 논의를 위해 일단 회의부터 소집하기로 했다.”(26쪽)
- 권석천, <정의를 부탁해>, 30쪽.

 

 

놀라운 것은 페스트가 있던 과거의 시간에서나 메르스가 있던 오늘날의 시간에서나 병 이름만 다를 뿐이지 똑같은 상황이 펼쳐졌다는 것.

 

 

이 칼럼은 이런 인용문으로 끝난다. 마지막 인용문.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지도 않으며...인간들에게 불행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396쪽)
- 권석천, <정의를 부탁해>, 33쪽.

 

 

멋지네. 나도 인용문으로 끝나는 칼럼을 써 봐야겠어.

 

 

 

 

 

 

5. 이 책에 대해 단번에 알 수 있는 글

 

 

이 글로 이 책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나는 공권력이란 말이 되도록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건 권력이 아니다. 권한이다. 권한權限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 진짜 공권력이란 것이 있다면, 아니 있어야 한다면 다른 노력을 다한 다음에, 신중하게 등장하길 바란다. 먼저 투입돼야 할 것은 소통의 정신이다. 정부의 소통은 듣고 또 듣는 것이다. 작고 잊혀진 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 권석천, <정의를 부탁해>, 75~76쪽.

 

 

덧붙임. 권석천 저자는 과거에 김수영과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집을 뒤적였다고 한다. 나랑 똑같잖아, 하는 생각에 반가웠다. 내 글에 세 작가의 글을 인용한 적이 있다는 게 그 증명이다. 글 잘 쓰는 사람과 내가 책 취향이 비슷하다고 느낄 때 반갑다.

 

 

 

 

 

6. 특별히 재밌는 것도 아닌데

 

 

김도언 저, <소설가의 변명>이란 산문집을 읽다가 든 생각. 이 책은 특별히 재밌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들춰 보게 만드는 거야? 하고 생각하다가 아마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내 맘에 든 모양이야 하고 생각했다. 이 작가의 위대한 점은 13쪽에서부터 266쪽까지 딱 한 쪽 분량으로 글을 완결해 썼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주제와 하나의 제목으로 한 쪽 분량의 글을 254편이나 만들어 냈다는 말이다. 따라 해 보고 싶네.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임을 굳게 믿게 해 주네.

 

 

 

 

 

7. 소설가의 조언

 

 

<소설가의 변명>을 읽다가 ‘소설가의 조언’이란 제목의 글에서 이런 걸 읽었다.

 

 

“소설을 쓰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좋은 소설가가 될 가능성이 별로 없으니,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 김도언, <소설가의 변명>, 135쪽.

 

 

 그러니까 소설을 쓰는 것보다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게 더 재밌다든지 소설을 쓰는 것보다 요리하는 게 더 재밌다든지 하면 소설을 쓰지 않는 게 현명하단 말이지?

 

 

이 말을 들은 누군가의 항변. “지금 이 순간 가장 바라는 것이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노는 것도 아니고 요리를 맛있게 만드는 데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칼럼을, 에세이를, 일기를, 단상을 맛깔나게 쓰고 싶다면 글쟁이로 살아도 되는 거지요? 현명하지 못한 게 아니지요?”

 

 

 

 

  

8. 어느 독서광의 조언

 

 

‘소설가의 조언’을 읽은 어느 독서광이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책과 친하지 않은 당신이 앞으로 책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면 당신은 두 가지를 지켜야 한다. 첫째, 책이 당신을 처음부터 행복하게 해 주리라는 기대를 하지 말 것. 둘째, 어떤 책을 읽든지 읽기 시작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것. 아무리 유명한 책이라도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를 만족시켜 주진 않는다. 어느 부분에선 지루하고 어느 부분에선 시시하고 심지어 어느 부분에선 책을 덮고 싶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참고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 김치를 처음 먹어 본 아이는 김치가 매워서 뱉어 내며 운다. 매워서 괴로운 것을 참고 김치를 많이 먹어 봐야 김치의 참맛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책도 많이 읽어 봐야 그 참맛을 알게 된다. 당신이 내가 말한 두 가지를 잘 지켜서 나중에 수많은 모래 속에 파묻힌 보석 같은 명문장을 찾으려는 기대로 책을 펼치는 날이 온다면, 당신은 독서광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쯤 되면 나는 당신에게 더 이상 해 줄 말이 없을 것이다.”

 

 

 

 

 


9. 녹색평론선집2

 

 

2015년엔 내가 얼마나 책을 구입했을까? 알아보니 1월부터 10월까지 총 25권이었다. 직업상 필요한 책을 빼고, 딸들이 보려고 구입한 책도 빼고, 순전히 내가 개인적으로 관심 있어서 구입한 책만 세었다. 내가 한 해에 구입하려고 계획한 책은 36권이었다. 한 달에 세 권씩인 셈. 그런데 25권이라면 앞으로 11권은 더 구입해도 되는 것이렷다. 그래서 지난달에 몇 권을 더 구입했다. 


 
내가 2015년에 구입한 책 중에서 구입하길 잘했다고 여겨지는 책 다섯 권만 뽑으라고 한다면 <녹색평론선집2>를 꼭 넣을 것 같다. 이 책을 영양가 있는 책으로 주저하지 않고 선정할 수 있겠다.

 

 

어제 이 책에서 인상 깊게 읽은 글은 러시아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가 쓴 일기 <시간 속의 시간>에 담겼다는 글이다.

 

 

카스타네다의 《돈 후앙의 가르침》을 다시 읽었다. 경탄할 만한 책이다! 그리고 매우 진실한 책이다.
그 이유는 ㅡ
“1. 세계는 겉으로 드러난 대로의 것이 아니다.
2. 어떤 상황하에서는 세계는 전혀 다르게 될 수 있다.”
- 김종철 엮음, <녹색평론선집2>, 446쪽.

 

 

타르코프스키가 카스타네다의 <돈 후앙의 가르침>에서 인용한 글을 보고 나 깜짝 놀랐다. 내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아서다. 지금 보여지는 게 전부가 아니고 지금 느껴지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내가 쓴 색안경을 벗고 나면 세계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다는 것. 이런 나의 표현과 같아서다. 다르게 표현하면 세계는 새롭게 밝혀져야 할 무엇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인다는 것. 베일에 가려 있다는 것.

 

 

내가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독창적이지 못하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과거의 시간 속에서 누군가가 생각했던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걸 새삼 확인한다. 

 

 

글이 맘에 들어서 타르코프스키가 쓴 책을 사고 싶어 검색해 보니 품절이거나 절판이었다.

 

 

 

 

 

 

 

 

 

 

 

 

 

 

 

 

 

 

 

 

 

 

 

10. 소박한 행복

 

 

며칠 전에 읽은 동화를 기억하기 위해 기록해 놓는다.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결코 행복하지 않은 왕이 있었다. 왕은 유명한 마법사에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왕의 질문에 마법사는 대답했다. “그야 간단하죠. 임금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입으시면 됩니다.” 그래서 왕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신하들은 각자 세상에 나가 유명한 장군, 학자, 부자 등을 만났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행복한 사람을 찾아 헤매던 한 신하의 귓가에 아주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피리 부는 사람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의 피리 소리는 아주 아름답고 행복하게 들립니다. 당신의 마음도 그렇게 행복합니까?” “그럼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합니다.” 신하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당신의 속옷을 내게 파시오. 돈을 얼마든지 주겠소.” 그런데 사내의 대답은 신하를 무척 실망하게 했다. “당신은 지금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소. 어제 지나가던 벌거벗은 거지에게 마지막 남은 속옷을 적선하고 말았다오.”

 

 

행복이란 많은 것을 갖고 사는 삶에 있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며 사는 삶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한 토막으로 잘 보여 주네.

 

 

이런 글이 생각난다.

 

 

“넌 일단 시작하면 빠르잖아. 빨리빨리 해치우면 편할 텐데.” 상식적인 친구들이 충고를 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싫어. 그렇게 일하면 부자가 되는 걸.” “부자 되기 싫어?” “응, 싫어. 근근이 먹고사는 게 적성에 맞아. 부자들 보면 얼굴이 비쩍 말랐잖아. 돈이 많으면 걱정이 늘어서 안절부절못하는 거라고.”
- 사노 요코, <사는 게 뭐라고>, 65쪽.

 

 

이런 글도 생각난다.

 

 

(...) 성실하고 정확하게 물건을 가져다주는 택배 배달부들, 길에서 만난 노인들의 깊은 퇴행이 보여주는 삶에 대한 은유, 개들의, 언제나 지나친 구애, 일본 사람들이 비행기까지 타고 와서 사 먹는다는 북촌 피냉면집이 회사에서 걸어서 3분.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이제는 확실해졌어.
- 김도언, <소설가의 변명>, 78쪽.

 

 

 


..............소박한 행복을 아는 두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며 이 글을 끝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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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1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1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5-12-1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마디로 무엇인가에 순정을 바쳤다는 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똑같은 것 같아요.
온전히 끌어 안을 수도 없고 내팽개칠 수도 없고.
이성복 작가는 그게 문학이었던 셈이겠죠.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 대본을 썼다는 게 족쇄가 되서 열심히 쓸 수도 없고
안 쓰자니 그렇고.ㅠㅠ
고종석도 그런 말을 하더군요. 가급적 접속사를 쓰지 않는 게 좋은 것 같다고.

정말 신춘문예의 계절이 왔군요. 요즘엔 문학상이 하도 많아 신춘문예는
별로가 되어버린 것 같아요. 예전엔 정말 신인작가의 등용문이었는데 말이죠.

언니가 소개한 책은 다 읽어보고 싶은데 저도 읽는 책이 있는지라 늘 군침만 흘리고
있어요. 가끔 언니의 글을 읽고나면 난 지금 뭐하고 있지? 그런 생각을 해요.ㅋ


페크pek0501 2015-12-11 17:31   좋아요 1 | URL
하하~~ 몸이 시원치않아 좀 앓았습니다.
독서, 저도 계획한 만큼 못하고 있어 늘 아쉬움을 느낀답니다.
마음은 앞서고 몸은 따라주질 않아요. 무리하면 병이 나고요.
그래도 우린 늘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걸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독서광이 아니라 책광이라서 문제지만 말이죠...ㅋㅋ

서니데이 2015-12-11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문장을 비교해서 읽어보니, 접속사가 없는 문장이어도 의미를 이해하는데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여요. 불필요한 접속사를 생략하는 것이 읽는데도 괜찮네요.
잘 읽었습니다.
pek0501님, 행복한 금요일 되세요.^^

페크pek0501 2015-12-11 17:33   좋아요 1 | URL
예, 감사합니다.
글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수학적이에요. 붓이 가는 대로 쓰는 게 절대 아니라서
부담스러운 작업이기도 합니다.

서니데이 님도 행복한 시간 가지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마녀고양이 2015-12-11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다시 정치에 열을 올리고 있어서 국민이 준 것은 권력이 아니라 권한이라는 말이 확 다가오네요.

속옷마저 나누어주는 것
휴, 전 아직도 물건을 마아니 갖고 시프니~^^

언냐 정말 엄청나게 읽으셨네요
인용된 책이 몇권이예요!

페크pek0501 2015-12-12 13:21   좋아요 0 | URL
아, 마고 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저는 님이 쉬고 계신 줄 알았어요.ㅋ
예전만큼 글을 올리시지는 않는 것 같아요.

엄청나게 읽지 못하고 있어요. 워낙 같은 책을 여러 번 인용해서 그렇게 생각하셨을 거예요. 위의 다섯 권 중에서 네 권이 중복 인용이에요. 같은 책으로 각각 다른 글을 인용했어요.
다독하고 싶지만 실천이 안 되고 있는 1인이올시다.
반가웠어요. 또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