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몇 년 전, 숲 속에 있는 아파트에 사는 친구네 집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숲이 보이는 아파트가 뭐가 좋단 말인가. 밤에 숲을 보면 적막할 텐데. 우리 집처럼 찻길이 가까이 있어서 움직이는 자동차를 볼 수 있는 게 좋지. 적막하지 않고 활력을 주잖아.’라고. 이 생각을 다른 친구에게 말하기도 했다. (찻길엔 밤 깊은 새벽에도 차가 다녀 적막하지 않다.)
그런데 이번에 찻길의 아파트에서 다른 곳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보니 뒷산이 있는 집이었다. 부엌에서 숲이 보였다. 거실에서 부엌으로 갈 적마나 큰 창을 통해 푸른 숲이 큰 그림처럼 눈에 들어와 절로 감탄하게 된다. 와우 멋져라, 하고. 밤에 봐도 숲이 적막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안방에서 거실로 나오면 숲의 새들의 소리가 아침을 연다. 어떤 때엔 ‘뻐꾹’ 하고 새소리가 나기도 하고 매미 울음소리가 나기도 한다. 잠자리가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이 집은 나에게 어떤 집인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내 대답은 이렇게 되리라.
아무리 더워도 푸른 자연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게 만드는 집. 푸른 나무들이 내 눈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 여름이 덥다는 사실보다 우위에 두고 푸름을 만끽하게 만드는 집.
우리 집이 숲 속의 집이라니까 한적한 시골을 연상케 하는데 사실 우리 집은 예전에 살던 역세권 번화가에서 많이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이사 온 이 집에서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만 가면 은행, 병원, 극장, 각종 가게 등이 줄지어 있는 역세권 번화가이다. 의외로 서울엔 산이 많고 이 집처럼 뒷산을 끼고 있는 아파트가 많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2.
며칠 전, 친구가 전화를 해서 우리 집에 오겠다고 하자 내가 이런 말을 했다.
“응 와서 봐. 깜짝 놀랄 거야. 숲 속에 있는 아파트야. 마치 설악산에 있는 별장 같아.”
전화를 끊고 나서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 이중인격자 같잖아. 한 입으로 두말하다니.
몰랐다. 이 집에 살게 되면서 별장 같다고 감탄하는 며칠 동안, 내가 숲 속의 아파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숲을 보면 적막하다는 이유로 싫어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또 생각나는 게 있다. 오래전에 내가 찻길에서 떨어진 아파트에 살 때가 있었는데 그때 산책하면서 찻길 가까이에 있는 아파트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차 소리가 시끄럽지도 않나? 어떻게 이런 데서 살지?‘ 그리고 이 생각을 아마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막상 차 소리가 들리는 아파트에 살고 보니 불편한 줄 몰랐다. 창문을 닫으면 차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기껏해야 여름 석 달 정도만 문을 열고 살 뿐이었는데 창문을 열어 놔도 차 소리에 익숙해져서인지 시끄러운 줄 몰랐으니.
이 글의 핵심은 이렇다. 차 소리가 들리는 아파트가 싫었는데 내가 살아 보니까 좋아졌고, 숲이 보이는 아파트가 싫었는데 내가 살아 보니까 좋아졌다는 것.
결과적으로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마다 진실했다. 내게 죄가 있다면 마음의 진실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내가 한 말을 잊어버리고 그것과 다르게 느낀 대로 말했다는 게 죄라면 죄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을 무조건 신뢰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기에 한 입으로 두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시간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걸 어쩌란 말인가.
지인에게서 들었다. 두 딸 중 한 애가 행동이 굼뜬데 자기가 그런 편이라 혼내지 않고 넘어간다고 한다. 만약 자기가 행동이 굼뜬 편이 아니라면 그 애가 자기한테 많이 혼나면서 컸을 것이라고 한다.
(여러분도 그걸 아시는지요?) 인간은 어떤 사람에게서 자기와 닮은 점을 보면 그것이 나쁜 점이라고 해도 관대해진다는 것을. 왜냐하면 자기와 닮아서 이해하게 되니까요.
결론은 뭐냐고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을 나는 이해한다, 가 되겠습니다요. 왜냐고요? 내가 그런 적이 있으니까요. 나를 통해 인간의 어떤 점을 이해하게 되었으니까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비유적으로 말해 ‘이중인격자’라고 한다. 마음속과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 이에 해당하겠다. 그럼 나처럼 시간에 따라 또는 환경에 따라 다르게 말하는 사람도 이중인격자인가? 아마 이런 나를 관찰한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고 할 것 같다.
3.
왜 인간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가?
이에 대해 내 나름대로 해석해 봤다.
해석 1) 인간은 늘 변하기 때문.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내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감정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늘 똑같은 감정이라면 그게 인간이니?”라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사람의 맘은 고정적이 아닙디다. 유동적으로 환경을 따라서 늘 변합디다.”
- 최서해 저, ‘전아사’에서.
내가 찻길에 있는 집을 싫어하다가 찻길에 있는 집에 살게 되자 좋아지고 숲이 있는 집을 싫어하다가 숲이 있는 집에 살게 되자 좋아진 것은 인간의 감정(또는 생각)은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고 늘 변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해석 2) 인간은 자기만족에 빠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
자기 자신이나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흡족하게 여기는 것이 ‘자기만족’이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도 자기만족에 빠져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
필립이 보기에, 빈민 계급을 돕는 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도 같은 처지에 빠지면 괴로우리라 생각하고 그 상황을 개선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그 상황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전혀 괴롭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환기가 잘 되는 커다란 방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영양가 없는 음식을 먹고, 혈액순환이 나쁘기 때문에 추위를 많이 탄다. 그래서 커다란 방에서 오히려 썰렁한 느낌을 받는다. 석탄도 되도록 아껴야 한다. 한 방에서 여럿이 자더라도 전혀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 편을 더 좋아한다.
- 서머싯 몸 저, <인간의 굴레에서 2>, 425~426쪽.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보다 간섭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것이다. 남편에게 일정한 일자리만 있으면 그것으로써 생활에 불만이 없을 뿐 아니라 거기에도 낙이 없지 않다. 잡담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고, 하루의 일을 끝낸 후 맥주라도 한 잔 들이켤 수 있다면 기분이 최고이다. 거리에 나가면 즐거운 위락 거리가 얼마든지 있고, 뭔가 읽고 싶으면 <레이널즈>지나 <세계의 뉴스>를 읽으면 된다.
- 서머싯 몸 저, <인간의 굴레에서 2>, 426쪽.
내가 찻길에 있는 집을 싫어하다가 찻길에 있는 집에 살게 되자 좋아지고 숲이 있는 집을 싫어하다가 숲이 있는 집에 살게 되자 좋아진 것은 인간은 자기만족에 빠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해석 3) 인간은 ‘생각’과 ‘실제’가 다르기 때문.
어떤 이가 그의 생각과 반대가 되는 행동을 한다고 느낄 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상해.”
왜 인간은 자신의 생각(또는 철학이나 가치관)과 다른 행동을 할 때가 있을까?
평소의 생각으론 전쟁에 출정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뜻밖에도 전쟁에 출정하는 결정을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생각’과 ‘실제’는 달랐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을 이처럼 제 삶의 철학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평소의 헤이워드라면 야만인들이 서로를 살육할 때 한 걸음 비켜서서 미소를 띠고 지켜봐야 마땅하지 않는가. 사람이란 어떤 알 수 없는 힘의 손에 놀아나, 이리 하라면 이리 하고 저리 하라면 저리 하는 꼭두각시와 같다. 그러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성을 동원하기도 한다. 정당화가 불가능하면 이성 따위는 무시하고 행동해 버리고 만다.
“사람이란 이상해요. 난 선배님이 기병을 지원해 전쟁에 나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거든요.”
- 서머싯 몸 저, <인간의 굴레에서 2>, 304~305쪽.
내가 찻길에 있는 집을 싫어하다가 찻길에 있는 집에 살게 되자 좋아지고 숲이 있는 집을 싫어하다가 숲이 있는 집에 살게 되자 좋아진 것은 (나의) ‘생각’과 ‘실제’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늘 변하기 때문.
2) 인간은 자기만족에 빠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
3) 인간은 ‘생각’과 ‘실제’가 다르기 때문.
이 세 가지가 인간의 특성이기도 하겠다. 나는 나를 통해 인간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서머싯 몸 저, <인간의 굴레에서 1>, <인간의 굴레에서 2>
이 소설을 읽으며 인간에 대해 많이 배웠다. 내가 알기론 소설가는 인간에 대해 자신이 통찰한 무엇을 보여 주기 위해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
아무것도 아닌 일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느낀 것’을 쓰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좋아하는 나이가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