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은행에 대해 무지하구나

 

 

어머니와 함께 어느 은행에 간 적이 있다. 어머니가 들어 놓은 예금이 만기가 되어 다른 금융 상품으로 계약을 하러 간 것이다. 어머니가 내게 같이 가 달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어머니보다 젊은 내가 따라가면 더 현명한 계약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은행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다.

 

 

30대 후반(또는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팀장이라고 하면서 인사를 하며 자기의 방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그리고 새로 계약하면 좋을 금융 상품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는데 꽤 똑똑하게 말을 잘했다. 그 많은 상품에 대해 어떻게 외워서 그렇게 잘 말할 수가 있는지 감탄스러웠다. 그 사람이 가진 ‘직업적 유능함’이란 무기가 화려한 빛을 뿜어내어서 나를 기죽게 만들었다. 키가 작은 편이고 약간 뚱뚱한 체격으로 미인은 아니지만 그녀는 내 눈에 무척 멋있어 보였다. 각 금융 상품 마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잘 생각해서 선택을 해야 하는데, 나는 잘 몰라서 어머니에게 어떤 조언도 해 줄 수가 없었다. 펀드상품이나 신탁상품을 비롯하여 내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것들도 많아서 뭐가 뭔지 잘 몰랐다. 거치식펀드와 적립식펀드의 차이, CMA통장의 장점 등 그 팀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아, 내가 이렇게 무지하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결국 어머니는 그 팀장이 권하는 금융 상품으로 계약을 했고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에게 아무런 조언을 하지 못하고 공연히 발품만 팔았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직업적 유능함이란 게 그렇게 멋있는 것이구나, 자기 방도 따로 있고 멋지네.’하고 생각하면서 나 자신의 초라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논술에 대해선 논술 강사인 나보다 모를 거야, 논술은 내가 전문이잖아.’하고 생각해 보았는데, 그래도 초라함에 대한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글을 떠올리고 나선 위로가 되었다.

 

 

내게 위로가 된 글은 버나드 쇼(1856~1950)의 글이다.

 

 

 

우리 중 최고라는 사람도 99퍼센트는 군중에 속하고 1퍼센트만 적임자에 속한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몇 가지가 다인 줄 알고 자기가 모르는 수많은 것들은 받아들일 여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자만’이라는 천박한 질병에 시달린다. 나는 몇 가지는 매우 잘한다. 하지만 그 밖의 분야에서 구제불능의 얼간이나 다름없는 내 모습을 보며 나의 자부심은 산산조각나고 만다. 결국 군중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나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는 셈이다.

- G. 버나드 쇼 저, <쇼에게 세상을 묻다>, 51쪽~52쪽.

 

 

 

교육에 대한 언급에선 겸손한 자세를 배운다.

 

 

 

교육은 유년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나는 올해로 미수(米壽, 88세)에 접어들었지만, 내가 가진 미약한 능력으로도 아직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 G. 버나드 쇼 저, <쇼에게 세상을 묻다>, 315쪽.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이자 극작가인 버나드 쇼도 88세에 아직 배워야 할 게 많다는데 나는 얼마나 배워야 할 게 많을 것인가. 내가 은행에 대해 무지한 것은 당연한 일임에도 그것에서 초라함을 느꼈다면 이것이야말로 나의 자만이 아닐까.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한 것이므로 나의 자만이 아닐까.

 

 

나의 무지를 깨닫기도 하고 나의 자만을 깨닫기도 하였다.

 

 

 

 

 

 

 

**********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버나드 쇼의 지적인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이 책은 ‘모르면 당하는 정치적인 모든 것'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세상일에 대해 분석적으로 설명하고, 우리 인간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명쾌하게 해석해 준다.

 

 

 

 

 

(끝)

 

(이 페이퍼는 여기서 끝날 뻔했다. 그러나...)

 

 

 

 

 

 

2. 내가 내 감정에 대해 무지하구나

 

 

그러나 며칠 뒤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팀장이 멋있어 보였던 건, 또 내가 초라함을 느꼈던 건 그녀의 ‘직업적 유능함’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내가 놓친 부분이 있었다. 그녀는 뽀얀 피부의 얼굴에 분홍색의 볼터치가 돋보이는 화장을 해서 화사한 얼굴이었고, 투피스 정장의 옷차림이었는데, 그런 모습에서 보기 좋게 부티가 흘렀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한 것인지 몰랐다. (그녀에 비해 나는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었고 정장의 옷차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날 나를 기죽게 만든 건 그녀의 화장한 얼굴과 정장의 옷차림이었나, 만약 화장기 없는 얼굴에 정장이 아닌 옷차림이었어도 그녀가 멋있어 보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저, <새로운 무의식>에 따르면 작화증(作話症)이라는 용어는 보통 꾸며낸 말로 기억의 빈틈을 메우면서 그것을 사실로 믿는 상태를 뜻하는데, 인간은 누구나 감정에 대한 지식의 빈틈을 작화하듯이 메우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나 친구들에게 “왜 그 차를 타니?”, “왜 그 남자를 좋아하니?”, “왜 그 농담에 웃었니?”와 같은 질문들을 던지며 스스로 그 답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모를 때가 많다. 누군가 이유를 대보라고 하면, 일종의 자기 성찰과도 같은 숙고를 통해서 진실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아무리 잘 안다고 믿더라도, 실은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를뿐더러 그 무의식적 기원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가 많다. 우리는 대신에 그럴싸한 설명을 지어내고, 아예 틀렸거나 일부만 옳은 그 설명을 믿어버린다.

-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저, <새로운 무의식>, 259쪽~260쪽.

 

 

 

 

이런 오류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것은 어쩌다 우연히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고, 규칙적이고 체계적인 현상이며, 모두가 공유하는 사회적, 감정적, 문화적 정보의 저장고를 기반으로 삼아서 벌어지는 활동이라고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설명할 때 머릿속에 저장된 문화적 규범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져서 가장 그럴싸한 설명을 골라낸다는 것이다.

 

 

이것을 ‘채용’으로 예를 들면 이렇다.

 

 

 

만약 당신이 사람을 채용해보았다면, 내가 왜 저 사람을 옳은 선택으로 여길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정당한 대답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런가? 여전히 그때 생각했던 그 이유로 그 사람을 골랐다고 믿는가? 어쩌면 당신의 추론은 거꾸로였을지도 모른다. 상대에게서 받은 느낌으로 먼저 선호를 형성한 다음에,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규범을 끌어들여서 그 감정을 설명한 것이다.

-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저, <새로운 무의식>, 261쪽.

 

 

 

이 책에서 재밌는 실험이 하나 소개된다. 바위투성이 땅으로부터 70미터 위에서 흔들거리는 나무판 다리에 있는 남자들을 각각 한 여성과 인터뷰를 하게 했다. 그 남자들은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이 아래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험성 때문에 많이 긴장하게 될 것이다. 이때 그들은 빠른 맥박 등 아드레날린의 효과를 느끼게 되는데, 이런 자신의 신체 반응이 나무판 다리 때문임을 자각했을 텐데도, 그것을 성적 공감대에 의한 반응으로 착각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실험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는 이유가 위험한 나무판 다리 때문이 아니라 그 매력적인 여성 때문인 것으로 착각한다는 결과가 나오는 실험이다.

 

 

이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당신이 친구나 동료와의 갈등 때문에 신체적으로 교란된 상태라고 하자. 어깨와 목이 딱딱하고, 머리가 아프고, 맥박이 빨라진다. 그 상태를 유지한 채로 그 감각을 야기한 갈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과 대화할 때, 당신은 그 감정이 눈앞의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저, <새로운 무의식>, 255쪽.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잘 안다고 믿는다. 누군가가 어떤 것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자신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잘 정리하여 설명한다. 하지만 그런 설명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종종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이 책이 그걸 증명하고 있으므로.

 

 

다시 생각해 본다. 그날 은행의 그 팀장이 내 눈에 멋있어 보였던 이유는 뭐였을까. 각 금융 상품을 막힘없이 설명하는 그녀의 직업적 유능함 때문인가, 자기의 방을 따로 가질 수 있는 그녀의 사회적 위치 때문인가, 화사한 얼굴 때문인가, 정장 옷차림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가. 나는 모르겠다.

 

 

<새로운 무의식>에 따르면, 인간에겐 ‘감정적 착각’이란 게 종종 일어난다. 그러니 자신의 어떤 감정에 대한 확신은 금물이다.

 

 

이 글의 마지막은 다음의 글로 마무리한다.

 

 

 

마음에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블레즈 파스칼)

-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저, <새로운 무의식>, 19쪽.

 

 

 

 

 

 

 

 

**********

‘무의식’이라고 하면 프로이트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 당대에는 무의식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았다. 오늘날엔 fMRI가 등장함으로써 뇌에서 벌어지는 일을 더 많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엮은 것이 <새로운 무의식>이란 책이다. 무의식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심리학에 관심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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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3-03-2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정적 착각. 스스로 깨치셨군요. 단기적 판단 수단에서 장기적 판단 수단으로 (본능)-감정-이성이 있고, 그 나름대로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페크pek0501 2013-03-26 13:53   좋아요 0 | URL
책을 읽어서 좋은 점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책에서 읽은 내용을 현실에 대입해 볼 수 있다는 점이에요. 뭐 그래서 제가 더 똑똑해지는 건 같지 않고(오히려 책을 읽을수록 비현실적인 바보가 되어가는 걸 느껴요.) 그저 마음의 위로를 받게 되는 경우는 많은 것 같아요.
독서가 삶을 특별히 이롭게 하는 건 없고 다만 정신 건강엔 좋은 것 같아요, 제 경우에는요.

두 번째 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프레이야 2013-03-26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좋은 책 두 권 담아갑니다.
인간이란 참 이해불가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이해가능한 동물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드네요. 새삼, 단순하게 가는 것도 좋을 듯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일상에서 진지한 생각을 건져 조근조근 들려주시니 참 좋습니다.
느긋한 봄날 하루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13-03-26 13:55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단순하게 살고 싶은 1인이에요.
또 일상에서 진지한 생각을 건지고 싶은 1인이에요.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우리의 삶이라는 것...쯤은 알게 된 나이에 있네요.
오늘 햇살이 푸짐한 날이네요. 창문 열고 이불을 털고 청소를 잽싸게 하고
(청소하는 시간이 아까워요.ㅋㅋ) 봄날의 푸짐한 햇살을 받으러 밖에 나가야겠어요. 많이 걸어야겠어요. 뭐 살 것도 있고요.

세 번째 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종이달 2022-05-20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22-05-24 12: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