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11) 높은 사람들의 횡포


1. 높은 사람들의 횡포


요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저지른 부끄러운 언행들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얼마 전에 서울대 음대 교수의 제자 폭행사건이 있었고, 고려대 의대 교수는 조교에게 폭언과 협박을 했다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다음엔 민주당 소속 시의원이 주민센터의 동장에게 폭언한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 동장은 “큰 충격을 받아 이틀 동안 병원에 다녔다. 사람들 있는 데서 그렇게 모욕을 주다니 생각만 하면 손이 덜덜 떨린다”며 눈물을 흘렸다(국민일보, 2011. 4. 7.)고 한다.


혹시 그들은 사람을 둘로 나누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과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자신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어서 무시해도 좋을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권력자는 남을 무시해도 되는 자리인가. 이런 사건들을 알고 나니 사람을 이렇게 둘로 나누어야 할 것 같다. 상처를 주는 사람과 상처를 받는 사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사람과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중요한 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정말 잘못인지를 깨닫는 일이다. 깨달을 때 반성할 수 있다. 그런데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만약 잘못을 하고서도 잘못을 깨닫지 못한 채 산다면 자신으로 인해 불행한 사람들도 생기지만 자신 또한 불행해진다. 좋은 인간관계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 안에서만 기쁨을 기대할 수 있다(생텍쥐페리)’라는 말이 있다. 모든 불행의 원천 또한 ‘인간관계’에서 생긴다. 모든 감정의 그 기저에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깔려 있다. 인간이 완전히 홀로 산다면 사랑도 미움도 상처도 분노도 없을 터이니 불행도 없을 것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에겐가 상처를 준 적이 없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낮은 자리의 사람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그릇된 인식은 남에게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마저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남의 인격에 대한 무시는 반드시 부메랑 효과를 낸다(서양속담)’라는 말이 있다.



2. 이 글과 관련한 책들

  

<좋은 지도자에 대하여>


노자는, 좋은 지도자는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것이라고 했다.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합니다. - 노자, <도덕경> 56쪽.


백성 위에 있고자 하면

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하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하면

스스로 몸을 뒤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위에 있어도 백성이 그 무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앞에 있어도 백성이 그를 해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즐거이 받들고 싫어하지 않습니다.

겨루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겨루지 못합니다. - 노자, <도덕경> 279쪽.





 노자는, 지도자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 - 노자, <도덕경> 83쪽.





이에 따르면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라고 한다. 아마도 그런 지도자는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지도자일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한 사람을 겨냥한 악의적 댓글이 그 당사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작은 고통으로도 목숨을 끊을 수 있다. 아니 작은 고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제삼자의 관점에서 봤기 때문이고 당사자에겐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로 여겨지는 일도 자신의 일이 되고 보면 큰 일이 될 수 있다. 또 사람에 따라 고통의 느낌엔 차이가 있어서, 어떤 사람에겐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엄청난 고통이 되기도 한다.


만약 작가가 소설에서 사회적 강자가 사회적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폭언을 해서 고통을 받는 사람을 그렸다면, 그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런 세상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하고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다. 그 고통에 독자가 공감하며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때 바람직한 세상이 되기 위한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공감하고 얼마나 슬퍼할 수 있을까. 남의 고통은 그저 남의 고통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게 아닐까.


수전 손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처음에는 독자로서, 나중에는 작가로서 문학이라는 기획에 제가 몰두하게 된 것은 문학이 다른 자아, 다른 영역, 다른 꿈, 다른 언어, 다른 관심사에 대한 공감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 202쪽.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공감과 새로운 관심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과 다르게 더 나아지려는 열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하는 일입니다. -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 210쪽.

 



우리는 문학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영역이 아닌 타인의 삶의 영역에까지 관심을 갖게 되어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을 품고 좋은 변화를 꾀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그 고통은 그저 타인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과 연결된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로 이어질 수 있다.


조세희가 쓴 소설에 이런 글이 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

 




삶의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하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그 전쟁에서 날마다 이기는 사람들은 가진 게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둘로 나눠져 승자가 되거나 패자가 된다. 작가는 난장이로 상징되는 못 가진 자가 패자가 되어 고통을 받고 사는 세상이 과연 옳은 세상인지를 묻고 있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그 부당함을 깨닫게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 가진 자들의 ‘죄’와 못 가진 자들의 ‘고통’이 대립하는 이 소설은 사랑이 없는 욕망을 비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

 



 그는 폭력에 대해 일침을 가하듯 이렇게 썼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폭력이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

 


작가는 타인의 고통을 방관하는 것도 ‘폭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물며 타인에게 직접 고통을 주는 폭력이나 폭언은 어떠한가.




 

소개한 책
  

노자, <도덕경>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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