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인생의 역사>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 ‘강간’에 대해 저자가 쓴 글이다.


불행하게도 “때”가 왔다. 당신은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했다. 알지만 안다고 말하기 어려운 그 남자가 근무하는 경찰서에 가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끔찍한 범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즉각적인 보호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그게 아니다. “당신은 그에게 자백을 해야만 한다.” 자백은 죄를 지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왜 피해자인 당신이 그것을 하고 있는가. 이 기괴한 상황의 아이러니를 리치는 역설의 수사학으로 적발해낸다. “당신은 당신이 당한 그 범죄에 대해 유죄이므로.”(58~59쪽)



어떤 말의 종류는 그것을 듣는 사람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번들거리는” 것은 그가 당산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느낀 게 고통이 아니라 쾌락이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건의 “세부사항”을 듣기 원하고 그것을 포르노그래피처럼 즐긴다. 당신의 고통이 초래한 “격렬한 흥분hysteria”조차 그의 쾌락을 위해 소비될 때, 어느새 당신은 무고誣告를 행하는 자가 되어 있다. 무고가 아님을 증명해야 할 책임은 이제 당신에게 있고, 당신은 자신의 고통이 진실한 것임을 필사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 모든 가족들”을 포함한) 이웃들의 눈이 경찰의 눈을 닮아갈 것임을 예감하며 심리적으로 고립된다.(58~59쪽)



제목은 ‘강간’이지만 이 시는 ‘강간 이후’의 상황만을 보고한다. 피해자를 피의자로, 진술을 자백으로 바꿔버리는 남성적 권력의 개입 역시 ‘강간’이라 불러야 마땅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메시지를 이렇게 정리해야 할까. ‘모든 강간은 두 번 일어날 수 있다.’ 육체적 강간과 정신적 강간, 혹은 개인적 강간과 사회적 강간. 40년도 더 된 시다. 자신을 희생하며 싸워온 이들 덕분에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시 안에는 ‘지금’과 ‘여기’가 있고, 무엇보다도 내가 있다. 구조가 폭력적일 때 그 구조의 온순한 구성원으로 살아온 사람은 축소해 말해도 결국 ‘구조적 가해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 점을 자인하는 부끄러움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으리라.(61쪽)


⇨ 이 글은 ‘모든 강간은 두 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글을 나는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남성에게 강간을 당한 여성이라면 육체적 강간과 개인적 강간이 이미 있었던 것이고, 그다음에 경찰서에서 피해자인 여성이 진술할 때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정신적 강간과 (세상에 공개되는) 사회적 강간이 일어난다. 육체적 강간과 개인적 강간이 첫 번째 강간이고정신적 강간과 사회적 강간이 두 번째 강간이다. 그러므로 ‘모든 강간은 두 번 일어날 수 있다.’ 


가슴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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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3-06-19 2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렇군요. 피해자인데도 진술을 해야하는 과정에서 두번의 강간이라니 가혹합니다.
담당하는 경찰계에서도 이런 고통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규칙이나 제도를 개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헤아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낮엔 뜨겁더니 저녁이 되어서 시원해졌네요. 건강한 여름 나시길 바랄게요. 페크님.^^

페크pek0501 2023-06-20 12:32   좋아요 3 | URL
여성 피해자가 진술을 해야 할 때 여성 경찰관이 업무를 보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해요.
교사나 경찰관은 인성 검사가 필수여야 할 것 같고요.
저자가 남성임에도 이런 글을 썼다는 점이 참 좋습니다.
모나리자 님도 건강한 여름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