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낱말을 듣고 떠올리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 ‘바다’라는 낱말을 떠올려 보자. 어떤 이는 피서, 즐거운 물놀이, 신나는 보트를 떠올릴 수 있지만 어떤 이는 거센 파도, 공포, 바다의 무서운 깊이를 떠올릴 수 있다. 전자는 바다를 즐거운 여행과 연결해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고, 후자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사고와 연결해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다. 이렇게 사람에 따라 낱말의 이미지가 다른데도 우리는 말을 할 때 서로 같은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다고 여긴다. 이것이 누군가와 말을 할 때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 듯하다.
‘모두들 추석을 즐겁게 보내십시오.’라는 글을 내가 6일 전에 서재에 올렸는데, 이 글을 받아들이는 게 사람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기혼 여성들은 ‘추석이 어떻게 즐거울 수 있어? 추석을 보내느니 회사에 출근하는 게 나아.’ 또는 ‘어차피 치를 추석이니까 잘 보내야겠지.’라고 받아들일 수 있고 기혼 남성들은 ‘여자들만 힘든 게 아니야 우리 남자들도 고단한 추석이라고.’ 또는 ‘회사를 가지 않아 추석 연휴가 좋구나.’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노총각들과 노처녀들은 친척들이 자기한테 언제 결혼하느냐고 묻지 않는 추석이길 바라며 내 글을 봤을지 모른다. 추석을 잘 지냈냐는 물음에도 역시 각자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각자 자기 처지에서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해석하며 사는 게 우리의 인생인 것 같다. 그러니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건 삶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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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끼는 책 중 하나가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이 책에서 내 글과 관련한 글을 하나 골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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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민족에게 선이라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다른 민족에게는 웃음거리나 치욕으로 여겨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많은 것들이 여기서는 악이라고 불리고 저기서는 자줏빛 영광으로 장식됨을 보았다.
일찍이 그 어떤 이웃이 다른 이웃을 이해한 적은 결코 없었다. 한 민족의 영혼은 이웃 민족의 망상과 악의를 언제나 이상하게 여겼다.
민족은 저마다 가치의 표지판을 자랑스럽게 내걸고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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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추석 연휴가 끝났습니다.
오늘에야 글을 올릴 여유가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