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118103034&Section=07 

-> 카이에 뒤 시네마와 필름 코멘트에서 2000년대 최고의 영화를 선정했다. 

 다음은 두 잡지가 영화평론가들에게 의뢰해 선정한 2000년대 최고 영화 순위이다. 

(본 것 표시해 봐야지. 본 게 별로 없다..아 게을러진 나..ㅜ.ㅜ 반성하자)

<카이에 뒤 시네마 >

1. 멀홀랜드 드라이브 /데이빗 린치/미국/2001년
2. 엘레펀트 /구스 반 산트/ 미국 /2003년
3. 열대병 /아핏차퐁 위라세타쿤/태국/2004년
4. 괴물 /봉준호/한국/2006년
5. 폭력의 역사 /데이빗 크로넨버그/캐나다/2005년
6. 종자와 노새 /압델라티프 케시케 /튜니지아/2007년
7. 철서구(鐵西區) /왕빙/ 중국/2003년
8. 우주전쟁 /스티븐 스필버그/미국/2005년
9. 뉴 월드 /테렌스 맬릭/미국/2005년
10. 텐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2002년

<필름코멘트>

1. 멀홀랜드 드라이브 /데이빗 린치
2. 화양영화 /왕자웨이/홍콩/2000년
3. 하나 그리고 둘 / 에드워드 양/대만 일본/2000년
4. 징후와 세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태국 오스트리아 프랑스/2006년
5. 데어 윌 비 블러드 /폴 토머스 앤더슨/미국/2007년
6. 라자레스쿠의 죽음 /트리스티 푸이우/루마니아/2005년
7. 폭력의 역사 /데이빗 크로넨버그
8. 열대병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9. 4개월, 3주, 그리고... 2일 /크리스티앙 문주/루마니아/2007년
10. 뉴 월드 /테렌스 맬릭
11. 플랫폼 /지아장커/홍콩 일본 프랑스/2000년
12. 조디악 /데이비드 핀처/미국/2007년
13. 침입자 /클레르 드니/프랑스/2004년
14. 아들 /장 피에르 &뤽 다르덴형제/벨기에 프랑스/2002년
15. 도그빌 /라스 폰 트리에/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영국 독일 네덜란드/2003년
16. 히든 /미카엘 하네케/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2005년
17. 킹스 앤드 퀸 /아르노 데스플레셍/프랑스/2005년
18. 엘레펀트 /구스 반 산트
19. 로얄 타넨바움 /웨스 앤더슨/미국/2001년
20. 비포 선셋 /리처드 링클레이터/미국/2005년
21.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 /일본 /2001년
22.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아녜스 바르다/프랑스/2000년
23. 안녕 용문객잔 /차이밍량/대만/2003년
24. 세계 /지아장커/중국 일본 프랑스 /2003년
25. 그녀에게 /페드로 알모도바르/스페인/2002년
26. 인랜드 엠파이어 /데이비드 린치/미국 프랑스 폴란드/2006년
27. 스틸라이프 /지아장커/중국 홍콩/2006년
28. 행진하는 청춘 /페드로 코스타/프랑스 포르투갈 스위스/2006년
29. 러시아 방주 /알렉산데르 소쿠로프/러시아 독일 /2002년
30. A.I. /스티븐 스필버그/미국/2001년
31. 사랑의 찬가 /장 뤽 고다르/프랑스 스위스 /2001년
32. 이터널 선샤인 / 미셸 공드리/미국/2004년
33.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조엘&에단 코엔/미국 /2007년
34.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벨라 타르/헝가리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2000년
35. 그리즐리 맨 /베르너 헤어조크/미국 캐나다/2005년
36. 쓰리 타임스 /허우샤오셴/대만/2005년
37. 카페 뤼미에르 /허우샤오셴/대만/2003년
38. 평범한 연인들 /필립 가렐/프랑스/2005년
39. 친애하는 당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태국/2002년
40. 아임 낫 데어 /토드 헤인스/미국 독일 /2007년
41. 2046 /왕자웨이/중국 홍콩 프랑스/2005년
42. 바르다의 방 /페드로 코스타/포르투갈 독일 스위스 /2000년
43. 로스앤젤레스 플레이스 잇셀프 /톰 앤더슨/미국/2003년
44. 밀레니엄 맘보 /허우샤오셴 /프랑스 미국 스페인 그리스 /2001년
45. 라 코뮌(파리 1871) /피터 왓킨스 /프랑스 /2000년
46. 허트로커 /캐슬린 비글로/미국/2009년
47. 밀리언 달러 베이비 /클린트 이스트우드/미국/2004년
48. 거기는 몇 시인가요 /차이밍량/대만 프랑스 /2001년
49. 데몬러버 /올리비에 아사야스/프랑스 /2002년
50. 머리없는 여인 /루크레시아 마르텔/아르헨티나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2009년
51. 갇힌 여인 /샹탈 애커만/프랑스 벨기에 /2000년
52. 에스더 칸 /아르노 데스플레솅/프랑스 영국 /2000년
53. 아워 뮤직 /장 뤽 고다르/ 프랑스 스위스/2004년
54. 디스탄트 / 누리 빌게 세일란/터키/2002년
55. 사라반드 /잉그마르 베리만 /스웨덴/2003년
56. 홀리걸 /루크레시아 마르텔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2004년
57. 이 투 마마 /알폰소 쿠아론/ 멕시코 /2001년
58. 브로크백 마운틴 /이안/미국/2005년
59. 칠드런 오브 맨 /알폰소 쿠아론/일본 영국 미국/2006년
60. 텐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 프랑스 미국 /2002년
61. 사일런트 라이트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멕시코 프랑스 네덜란드/2007년
62. 높 /루크레시아 마르텔/아르헨티나 스페인/2001년
63. 더 차일드 /다르덴 /벨기에 프랑스 /2005년
64. 스타 스프랭글드 투 데스 /켄 제이콥스/미국/2004년
65. 붉은 풍선 /허우샤오셴 / 대만 프랑스 /2008년
66. RR /제임스 베닝/미국/2007년
67. 하우스 오브 머스 /테렌스 데이비스/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2000년
68. 25시 /스파이스 리/미국/2002년
69. 35럼 샷 /클레르 드니/프랑스 독일 /2008년
70. 서머 아워스 /올리비에 아사야스/프랑스/2009년
71. 괴물 / 봉준호/한국/2007년
72. 어댑테이션 /스파이크 존스 /미국 /2002년
73.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소피아 코폴라/미국 일본 /2003년
74. 게리 /구스 반 산트/미국/2002년
75. 공공장소에서의 개인적 공포 / 알렝 레네/프랑스 이탈리아/2006년
76. 마이 위니펙 /가이 매든 /캐나다/2007년
77. 펀치 드렁크 러브 / 폴 토머스 앤더슨/ 미국/2002년
78. 팻 걸 /캐서린 브레이야/프랑스 이탈리아 /2001년
79. 디파티드 / 마틴 스코세즈/미국 홍콩/2006년
80. 파 프롬 헤븐 /토드 헤인스/미국 프랑스/2002년
81. 도니 다코 /리처드 켈리/미국/2001년
82. 무라데 /우스만 셈베네/ 부르키나 파소 모코코 튜니지아 카메룬 프랑스 /2004년
83. 해변의 여인 /홍상수 /한국/2006년
84. 살인의 추억 / 봉준호/한국/2003년

85. 철서구 /왕빙/중국/2003년
86. 웬디와 루시 /켈리 레이처드/미국/2008년
87. 트러블 에브리데이 / 클레르 드니/프랑스 독일 일본 /2001년
88. 팜므파탈 /브라이언 드 팔마/미국 프랑스 /2002년
89. 2층의 노래들 /로이 안데르손/스웨덴 /2000년
90.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클린트 이스트우드/ 미국 /2006년
92. 겁쟁이 로버트 포드에 의한 제시 제임스의 암살 /앤드류 도미닉 /미국/2007년
93. 라스트 데이스 /구스 반 산트/미국/2005년
94. 과거가 없는 사나이 / 아키 카우리스마키/핀란드 독일 프랑스 /2002년
95. 둑이 무너졌을 때 /스파이크 리 /미국/2006년
96. 베스트 오브 유스 /마르코 튤리오 지오다나/이탈리아/2003년
97. 생활의 발견 /홍상수/한국/2002년
98. 24 시티 /지아장커/중국 홍콩 일본 /2008년
99. 인 더 시티 오브 실비아 /호세 루이 게린/스페인 프랑스 /2007년
100. 하얀 리본 /미카엘 하네케/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2009년 

 + <아바타>가 결국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감독상을 가져갔구만. 카메롱 형님이 다시 킹 오브 더 월드를 외칠려나, 오스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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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2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ㅣ 한국 현대사 산책 1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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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정권은 피로 얼룩진 정권 이미지에 부드러운 가면을 씌우고 국민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각종 화려한 이벤트와 조치를 양산해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5일간 열린 '국풍 81'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이것이었을까? '5공화국의 태평성대'를 선전하기 위한 대대적인 대중조작 이벤트였다. 일본의 극우에 심취한 허문도가 일본의 카미카제 정신을 본따 이름을 붙이고 적극 밀어붙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국풍이었다. -48쪽

신현준은 "한마디로 80년대의 문화정책은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방향은 대체로 '규제완화'의 방향을 취했다"면서 "문제는 이런 규제완화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가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먼저 지적할 것은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완화가 선별적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한 예로 영화검열 완화의 경우 주로 '저급한' 영화에만 선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즉, '불온한' 문화의 금기는 여전했고, 1981~83년 사이에는 이전보다 더욱 강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온한' 반대자들이 '3s정책'(스포츠, 스크린, 섹스)이라고 불렀던 표현은 당시 정책의 새로운 기조를 말해준다. 70년대의 문화정책이 원칙적으로 외래 퇴폐문화를 금지하면서 실제로는 모든 문화에 대한 규제를 단행했던 반면, 80년대는 퇴폐문화에 대한 선별적 해금을 실시하면서 이런 조치가 체제와 그리 불편하지 않게 어울리도록 관리하는 양상을 취했다. 즉, 정책담당자가 보기에 '퇴폐적'이지만 별달리 '위협적'이지 않은 한도 내에서는 방치한다는 것이 당시의 문화정책의 이데올로기로 보인다. 70년대와 비교한다면 정책의 지배적 원리가 금지의 논리에서 방치의 논리로 전화-54쪽

한 것이다. '국풍 81'을 비롯한 관제행사들은/새로운 문화적 '모델'을 제공하지 못했다. 이를 통해 '문화의 탈정치화를 통한 정치적 이용'이라는 80년대 문화정책의 기조가 형성되었다는 '성과'를 빼면 말이다."(신현준, <1980년대 문화적 정세와 민중문화운동> 재인용) 5공은 '퇴폐'를 부추기면서도 또 그로 인한 결과를 빌미로 '통제'를 시도하는 이중적인 대중문화정책을 구사하였다. 그래서 이른바 '국민정신개혁운동'이라는 '정화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음반의 마지막 트랙에 건전가요를 삽입하는 것과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애국가를 틀어주는 것이 '정화운동'의 이름으로 행해진 대표적인 것들이었다.(신현준,<1980년대 문화적 정세와 민중문화운동> 재인용)-54~55쪽

1945년 9월 7일 미 군정치하에서 미군사령관 하지의 군정포고 1호로 시작된 통행금지가 그로부터 36년만인 1982년 1월 5일 밤 12시를 기해 전방 접경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해제되었다.-83쪽

통금해제 후, 해방감을 만끽하고자 했던 보통 사람들이 즐겨 찾은 곳은 심야극장이었다. 컬러tv 방송으로 불황에 시달리던 영화계가 통금해제 후 영화계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이트 쇼'라는 이름으로 시사회를 여는 등 심야극장 판촉에 공을 들인 결과이기도 했다. 통금이 해제된 지 꼭 한 달 뒤인 2월 6일, 첫 심야 상영영호인 <애마부인>이 개봉됐다. -88쪽

"탱크로 광주를 깔아뭉개며 등장한 전두환정권은 폭압과 자유화라는 양날의 정책을 썼다. 교복과 통행금지 폐지 그리고 두발 자유화는 전두환정권의 선물이다. 충무로에 대한 전두환정권의 선물은 에로영화에 대한 검열완화였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낮에는 전두환의 폭압정치에 맞서 돌을 던지고 밤에는 전두환의 자유화정책에 발맞춰 싸구려 에로영화를 보며 킬킬댔던 것이다."(심산, <애마부인의 아버지> 재인용)-91쪽

이문열의 '교양주의'는 대학생 수가 늘어난 것 못지않게 '교양'을 찾게 된 중산층의 부상으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서구적 교양을 원하는 중산층 말이다. 물론 이문열의 교양주의는 서구적 교양주의이며, 이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사대주의와도 잘 맞아떨어졌다.-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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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에 대학원 종합시험에서 시험비용을 내지 않을 생각이다. 이 문제를 갖고 몇 친구들이 학교측에 항의를 했지만, 결국 무성의한 답변만 듣고 말았다. 

종합시험을 내기 위해 드는 비용은 총 6만원이라고 한다. 각 항목 당 출제비용 및 조교 감독비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종합시험이라는 것이 엄연히 정식 학기 내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왜 이 시험을 보는데 비용이 지불되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렇다. 

내가 다니는 대학원은 원래 두 대학원이 통합되어, 이전의 일반대학원이었던 A대학원이 특수대학원으로  바뀌었다. 일반대학원이었던 A대학원은 종합시험 비용을 그동안 내지 않았는데, 특수대학원으로 변화, 통합되면서, 기존의 A대학원생들은 종합시험 비용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작년에 뜻있는 A대학원생 한 분이 용기를 내어, 교학과측에 정당한 항의를 했지만, 교학과측은 나몰라라 하는 투로, 대충 알겠다는 어조로 얼버무렸으며, 다음 학기 때부터는, 종합시험비용을 내지 않을 수 있다는 답변도 들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결국 그 답변은 묵과되었고, 이번에도 종합시험비용을 내게 된 상황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친구들이 종합시험비용을 왜 내야 하는지, 교학과 측에 따졌으나, 교학과 측은 웃기게도,학교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의 선물을 사기 위해 비용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정말 이 상황에서 분노를 안 느낄 사람이 있을까. 학교 측은 지난 번에  등록금 항목에 학생들이 모르는 내역이 붙었을 때도, 그것을 공개하라는 나의 항의에 대해 성의없는 자세를 보였다. 학교 홈페이지에 가서 항목을 확인해 보라는데, 그것은 대학정보공개제도를 통해 나타나는 개략 정보였던 것이다.  

대학원사회는 다들 알다시피, 정치가 없다. 진보니, 좌파니, 민주주의니, 신자유주의니, 논문에는 수업시간에는 신랄하게 그리고 열정적인 태도로, 자신의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이 결국 현실에서는 그게 뭐야라고 조용히 있다. 이건 단순한 돈 문제가 아니라는 건 입이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나는 대학원 사회의 이 한심한 상태에 대해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바닥까지 가는 각성과 성찰을 해야 함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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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잘코군 2010-01-1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대학원 다니던 시절에, 내야 했던 각종 비용들 아주 아깝습니다. 종합시험본다고, 논문심사한다고, 지도한다고 별도로 돈이 들어가는데, 화나더군요. 마지막에는 졸업 까운까지 돈 내라고 해서 까운 안 입고 사진도 안 찍었습니다. 졸업장만 낼름 받아가지고 왔죠. 대학원 비용도 장난이 아닌데, 여러 항목으로 돈을 뜯어먹으려 드네요.

얼그레이효과 2010-01-17 18:55   좋아요 0 | URL
아프락사스님, 저도 졸업 때 그럴려고 합니다.^^;

qualia 2010-01-1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강도가 따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준)불법적인 작태가 대학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그것도 대학생/대학원생들을 상대로, 벌어지고 있다는 게 정말 분노스럽습니다. 불의에 끝까지 항거하시고, 절대로 시험비용 내지 마시길 바랍니다. 제발 저린 놈들은, 뒤가 구린 놈들은, 분명 따로 있고, 적법하고 준열하게 항의하고 파고들어가면, 저놈들 분명 깨갱거리고 꼬리를 내릴 것입니다. (준)사기고, (준)불법이고, 엉큼한 편법입니다. 대체 대학본부 측은 뭐한답니까? 대학이라는 곳도 이제는 지성이고 양심이고 정의고 진리고 나발이고 간에 별별 부정부패와 협잡질이 판치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부조리한 세상입니다. 부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싸워주시길(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얼그레이효과 2010-01-17 18:56   좋아요 0 | URL
제가 그리 거창한 사람은 못되지만..의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선, 마음 먹고 실천해보겠습니다.

2010-01-17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7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10-01-1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놀랍고 놀라운 행태네요!
등록금은 건물 짓는데다 쓰나보죳!!

얼그레이효과 2010-01-19 06:32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보헤미안 2015-10-01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번에 종합시험을 보는 대학원생으로 의문이 들어서 검색을 했더니 좋은 글을 보고 투지가 불타오르네요
4학기중 외국어시험 2번만 3만원씩 내고 봤는데..토익도 아니고 그냥 해석정도의 일반 영어고요...이번에 종합시험인데
그것도 돈내라고 하는데...정말 부조리한 생각이 드네요

얼그레이효과 2015-10-12 22:27   좋아요 0 | URL
답장이 늦어 죄송합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등록금 투쟁은 실패했지만, 당시 종합시험비용은 결국 안 받는 것으로 결과를 받아냈어요. 그 이후 후배들도 종합시험비용 안 내고 계속 그대로 시험 본다는군요. 보헤미안 님에게 좋은 기운 전달되기를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53

 박권일의 <'공부의 신'도 못 따라 갈 현실>을 읽고, 몇몇 단상을 정리해 본다.  

  <공부의 신>에서 김수로와 함께 말썽꾸러기들을 천하대로 보내는 것을 돕게 된 배두나는, 오래 전 드라마 <학교>에서 제도권에 저항하던 아이콘이었다. 감히 격세지감이라는 말을 붙여도 될까. 김수로는 1화에서 과감하게 말한다. 천하대에 가서, 너희들이 그렇게 비뚤게 바라보는 사회의 룰을 바꾸라고. 그 룰을 바꾸는 건, 결국 사회가 인정하는 최정상에 올라가야 하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고.   

갑자기 그 장면을 곱씹어보다가, 매년 수능 때만 되면, 1인 시위를 하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피켓엔 학벌로 인한 차별을 반대하며, 수능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것을 비판하는 그들의 소망이 달려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 사람들은 이런 소망, 이런 희망이 담긴 시도를 환영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하라고 외친다. 작년에도 어김없이 수능을 비판하던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덧글에는 그들을 비난하는 어투로 넘쳐났고, 그나마 정성스럽게 반응을 보여준 사람들중엔 너희들이 바꾸고 싶은 게 있으면, 서울대 들어가서, 바꾸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개무시 당한다는 공통된 반응이 제법 있었다. <공부의 신>에서 김수로가 학생들에게 외친 그 몇 마디는 드라마에만 적용되는 대사는 아니다. 그렇다. 이 대사는 현실을 깊숙 찌르면서, 이제 사람들에게 제도를 바꾼다는 것, 제도에 일탈하여, 그 제도의 틀 자체를 바꾼다는 건 별 소득이 없다는 걸 공인한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 그 대사는 공명의 기운을 뻗친다. 

<공부의 신>의 압권은 드라마가 끝나고 나오는 '내신 잘받는 방법'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귀여운 공포'를 체감했다. 설마 이 장면을 보면서, 배우들이 제시하는 방법론을 수첩에 깨알처럼 적는 부모와 학생은 없겠지? 그런 상상을 했다. 이 상상의 곁에서 점점 커져가는 건 이제 '교육 혁명'이라는 건 기대하기 어렵나, 하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 사회는 이제 혁명을 문화 속에서만 체험한 채, 그것에 안주하는 것으로 삶을 잘 살고 있다고 할 지 모르지, 그 오래된 우려가 자연스러운 문화적 코드로, 진부하게, 그것도 매우 친숙하게 유머라는 코드와 섞어 나왔을 때, 나는 이 드라마를너무 우울해서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보여준 자살의 절규는, 우리 사회에 어떤 공명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그 절규는 그 누군가에게는 한심한 자의 어리석음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의 친구들은 죽음으로까지 우리 시대의 교육이 보여주는 모순을 상징화하는 것에 그 어떤 애도를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애도의 가능성을 대신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이 생존의 의지 가운데서, 우리는 '편안하게 스며드는 사회적 불안'이란 가스에 몽롱해지고 있음을 꾹 참은 채, '일단 살아간다'. 천하대에 가기 전에, 우리 아이들은 이미 힘이 다 빠졌다. 영리해져라, 정신차려라, 일단 잘해보고 봐라. 이 3계명을 부여잡은 채. 부들부들. 더 안타까운 건 이런 소리 자체를 '헛소리'로 잠식해버린, 이 사회의 현실이다. '공부의 신'이 다시 알려준 어떤 현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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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의 위기는 문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와 함께 늘 대두되던 문제였다. 이제 영화전문기자라든가, 영화평론가들은 알아서 기는 듯, 아니면 진짜 풀이 죽은 듯, 상당히 '타인지향형'적인 기사와 비평을 양산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의 위기가 우리에게 주는 최대한의 효과가 '혁신'이기보다는, 약간의 '각성'정도로만 다가올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늘 체험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위기담론의 위기를 내놓으며, 또 종언담론의 종언을 주장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는 남아있지 않겠냐라는 안타까운 옹알이를 해댄다.  <씨네21>의 최근 몇몇 글 중 나는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아바타>에 대한 평자들과 글쟁이들의 시각을 보면서, 감히 '이 정도 밖에 안되는 영화비평'의 어떤 수준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 수준을 생각하면서, 나는 <아바타>를 통해 그들이 제시하는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그런 영화의 미래를 제시하는 그들의 미래를 고심해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울하기 짝이 없다고 해야 하나.  이런 우울함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부족한 소견 몇 개를 끄적여보면 다음과 같다.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9&article_id=59314  

-> 김중혁, 카메론의 시간은 거꾸로 가나 

엄밀히 말하자면, 김중혁은 전문적인 영화평론가는 아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한국 문단에서 나름 유익한 발견이라는 칭호를 부여할 수 있는 작가이다. 작가의 생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중의 지각을 인식하며 그 지각에 자극을 주는 스토리텔링을 고민하는 꾼이다. 그래, 이 측면에서 그가 <아바타>에 느끼고 있는 실망감의 타겟. 바로 이야기의 허술함을 꼬집는 건 이해해주겠다. 그런데,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이번 글은 이 좁디 좁아진 영화잡지에서 엄하게 큰 두 페이지를 책임질 수 있는 내용으로선 최하의 레벨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아바타>를 대하는 시선은 늘 이럴 때 나오는, 내가 '홍대주의'라 부르는 특유의 스노비즘이다. 그는 마치 모두가 다 환호하는 것에 나는 그 환호가 그리 대단하지 못하겠다라고 하는 90년대식 홍대형 스노비즘을 보여준다. 근데 그의 이런 시선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늘 이럴 때 나오는' 어떤 관행으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영화에 나타나는 어떤 측면, 그 측면이 갖고 있는 새로움이 사실상 별 새롭지 않다는 류의 지적은 내가 보기엔 어떤 '문화적 고집'으로서 갖는 비평의 지향이 아니라, 마치 7080담론의 과잉이나, 90년대 대중문화에 대한 향수 과잉에 머무른 지양되어야 할 평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지양되어야 할 시각은 <씨네21>에 <아바타>를 평한 이들이 모두다 한 걸치고 있는 그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이 '호들갑스러움'의 스펙터클을 좀 차분히 보기 위해서 이런 비평의 수사를 활용한다. "사실 <아바타>가 보여준 면모들은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이지요". 결국 평자들은 영화적 교양주의를 다시 챙겨, <아바타>를 정리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우려하는 것은 그렇게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이어서, <아바타>를 "이미 예전에 나타난 것" 그 위치에서만 머무르게 한다면, 그것은 '창조력' 제로인 비평이라는 점이다. '창조력 제로'인 비평의 위치에 근접한 평자들이 쓰는 어설픈 '영화적 교양주의'로 결국 영화세계사 책을 다시 끄집어 내게 하여, <아바타>에 숨어 있는 다른 영화들의 기시감을 언급하는 수준으로만 끝나는 비평들은 폐기처분해야 마땅하다.  

그나마 허문영이 737호에서 <놀라운 현실감 갖춘 퇴행적인 동화>란 비평에서, <아바타>를 둘러싼 '수정주의 서부극'이란 형태의 시각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 수정주의 서부극이란 용어를 제대로 알고 써라라고 말하는 점은, 오히려 권장할만한 것이다. 어설픈 영화적 교양주의가 하나의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작품의 특징을 해부하면서, 주는 쾌감은 기껏해야, "내가 이 영화를 예전에 알았나, 봤나"정도로 마무리되는 '정보 차원'의 언급이다. 그러한 언급은 영화를 성찰할 수 있는 '진정성'의 에토스를 확보할 수 없다. 단지 내가 <아바타>를 통해 얼마나 많은 옛 영화를 알고 있다는 '스노비즘'에 머무른 채, 아무런 발전 없는 시각에 머무르고, 그 머무름을 머무르지 않음으로 착각하는 위치까지 나아가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다. 

가장 실망스러운 글은 736호 <아바타, 과연 혁명적인 대작인가>라는 제목의 4인 대담이다.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제법 괜찮은 것 같은데, 이 선수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다가와, 영화를 자극했을 때, 우리가 고수하고 있는 영화적 본질이란 지켜보자라는 구태의연한 자장 안에 눌러 앉은 시선으로 영화를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혁명'이란 수사 앞에서, 평자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아바타>의 '혁명'이, '혁명이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과정에서, 자신의 비평적 시선이 '혁명이지 않음'을 보여주고 만다.  

영화 평론가들의 게으름을 탓하고 싶다. 영화가 새롭다, 혁명적이다 라는 것을 평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에 기반한 자세가, 퇴행적이어야 하나. 그리하여, 혁명적임을 조금 누그러뜨려, 그 퇴행이 아바타를 둘러 싼 광풍 어린 혁명이란 수사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만약 과감하게 외치는대로, 아바타가 그리 혁명적이지 않은 영화라면, 그들마저 혁명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맞불을 놓을 필요는 없었다. 즉, 그들은 아바타의 혁명이란 수사를 영화가 갖고 있는 어떤 역사적 본질이란 견고한 덩어리로 무너뜨리려 했는데, 그 역사적 본질의 틀이 과연 영화를 둘러싼 불변의 진리인지는 의문에 붙여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의문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퇴행적 비평으로 혁명이란 수사를 깨뜨리려는 우를 범한다.  

흑백 영화에서 칼라 영화로,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의 전이, 그 전이의 공포가 준 역사적 체험이 있었다. 그리고 영화평론가들은 그 역사적 체험의 교훈에 찰싹 붙어, 그 교훈이 주는 사례들은 지나치게 모범적으로 따르는 듯하다. 물론 <아바타>가 가진 테크놀로지의 혁신이, 영화판의 엄청난 변혁을 도모하진 않으리라 본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제3의 지점을 찾아보려 하지 않은 영화평자들의 자세가 안타깝다. 기술의 다가옴, 영화와의 접촉, 그리고 이어지는 기술에 대한 부정과 영화가 갖고 있는 본질의 고수. 이 안에서 호불호가 갈리고, 그 호불호를 깨는 새로운 틀의 시각은 시도조차 않는다. 

그러면서, 오히려 늘어나는 것은 영화의 내부가 아닌, 영화의 외부다. 어떤 '경제주의'에 침윤된 일련의 현대 영화비평이 갖는 위험성을 여기서 바라본다. <디 워>의 난분분한 비평 장이 그랬듯이, 결국 <아바타>를 수놓는 돈다발, 그것을 촉발한 테크놀로지와 영화의 커넥션. 그러면서 늘어나는 것은 영화가 아닌, 영화를 둘러싼 숫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숫자 안에서 멀티 플렉스와 아이맥스, 입체안경 등의 수용 환경과 문화 산업은 영화 내부에 대한 심층적 해석의 자리를 강탈한다.  

우리가 여기서 봐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아바타>를 통해 보는 우리 사회의 과학에 대한 게으른 그리고 정체된 그 무엇의 시선을 느낀다. 과학과 사회, 그리고 과학과 문화이 접촉하는 그 지점 안에서, 나오는 반응들, 그리고 그 반응들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자들이 내놓는 시선의 정체와 퇴행은 비평의 시간이 갈수록 거꾸로 가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다시 새겨 넣게 만든다.  

그들은 비평 속에서 실컷 과학과 영화를 매개하는 새 시대의 영화철학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결국 그들이 고수하는 것은 영화에 내재된 '인문주의'를 어설프게 옹호하면서, 각자가 어설프게 공유하려는 듯한 영화적 교양주의를 설파하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한다. '영화는 영화다'라는 명제 안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두려움을 고작 지금의 수준에서 활용한다면, 나는 영화의 미래보다 비평의 미래가 더 불확실함을 과감히 말하고 싶다.  

지금 그들이 보여주는 '영화적 고집'이 오히려 평자로서의 강인한 고집이라기보다, 대중들이 자신들의 시선을 더 이상 보지 않으려한다는 기죽음에서 발생한 '타인지향적 고집'이기때문에, 그들이 보여준 고집의 시선은 더 퇴행적으로 느껴진다. 깔려면 더 새롭게 까고, 옹호하려면 더 진득하게 옹호해라. 죽도 밥도 아닌 눈치 보는 비평을 하지 말고,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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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1-15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시는 부분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창조적 비평'이란 정말 가능할까요. 어떤 비평이 창조적일때, 왕왕 텍스트는 그 비평을 위한 재료로서만 제약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형태가 될 때, 비평은 비평에서 벗어나 새로운 담론으로 들어서고, 그럼 면에서는 작품분석을 넘어서 철학적 텍스트로 비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요컨데 비평이라고 부르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글 읽고 몇 자 적고 싶어서 빈약한 댓글 남겼습니다. 건필하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1-1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부터, '꿈'보다 '해몽'을 좋아한 터라, 비평이 가져야 할 야망의 파이에 대해서 나름 희망을 갖고 있나봅니다.^^' 부족한 글에..덧글 고맙습니다.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는 비평의 지점은 텍스트 안에서 적확하게 놀아야겠지만, 비평의 자장은 그 텍스트를 넘어서는 무엇이라 생각해서요. 거기서,,창조적이라는 수사에 대해 고민을 해봅니다. '해몽'이 꿈보다..다만..그 꿈을 허황되지 않게..꿈을 존중하는 해몽이..환호받는 세상이 되길 고대해봅니다. 그런 점에서..작품을 넘어설 수 없는 현실과의 거리에서..작품을 가끔 넘어설 수 있는 이상을 체감할 수 있는 가능성의 비평이..바로 창조적 비평과 가장 근접한 무엇이 아닐까..지금으로선 그 정도 소신을 갖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아직 머나먼 무엇이지만요..덧글덕분에..신중하게 되네요. 지적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