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안타까운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괜찮은 사람이었다가도, 괜찮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통화. 참 싫다. 학벌에 대한 문제 또한 그렇다. 더 정확하게 범위를 좁혀보자면, 학벌을 둘러싼 무의식 같은 거다. 난 학부는 3류를 나왔어, 그래서 편입을 생각해. 혹은 좋은 네임 벨류의 대학원으로 가려 해. 이건 지난 번에 '죄인 게임'이란 글에서 간접적으로 언급을 했다. 내가 말하는 건, 3류라고 간주되는 대학을 나와서, 대학원은 사회가 속된 말로 '쳐주는 곳'을 나온 사람들의 불쑥 튀어나오는 피해의식 같은 거다.  

난 사회에서 말하는 평가 기준으로 볼 때, 좋은 대학교를 나오진 못했다. 하지만 대학원은 -또, 사회에서 말하는 평가 기준으로 볼 때, 좋은 곳을 다닌다.(하지만, 이 '좋은 곳'의 의미와 범위는 과연 무엇일까?-'진부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갈치를 먹다 걸린 가시같은 질문이다) 그러다,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선배들이나 몇몇 지인들이 전화를 하면, 대뜸 난 묻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먼저 "선생이 좋아야 해. 대학원 이름이 좋은 게 다가 아니라구."란 말은 한다. 그러면서, "아, -예전에 다닌- '우리'대학에 대학원 있었으면 편히 다닐텐데."란 말로 친절하게 자신의 심리를 설명한다.  혹은 '결국 사회에서 쳐주는 건, 학부 학벌이더라구. 대학원 학벌이 아니더라.'는 말을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꺼내는 대학원 선,후배들이 있다.  왜 그런 말을 나만 만나면 먼저 하는 것일까. 나는 2년 전부터, 누적된 이런 경험에 신경질이 나서, 그냥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또 다른 안타까운 풍경은, 대학원 내에서, 자신의 대학교 학벌이 좋지 않다는 것을 공부에 대한 자신감 결여로 짊어지고 가는 대학원 친구들이다. 간접적으로 많은 위로와 자신감 불어넣기를 해주고 싶은데,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그런 이야기를 타인을 통해 들을 때, 그 안타까움은 더해간다. 그러한 '결정주의'가 "난 솔직히, 이 대학원 온 거 그런 목적도 좀 있단다..'라는 말과 엮어질 때, 그 모호한 분위기는, 공부한다는 것의 외부와 내부는 무엇인지 고민을 하게 만든다. 그 풀기 어려운, 현실과 이상의 고리와 벽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런 시선이 이른바 권력을 비판하고, 그것에 나는 좌파요와 진보요를 꼭 표시하거나 들먹거리는 친구들의 입에서 나올 때, 자신들이 다니던 옛 대학을  '지성의 온정적 향수 공간'으로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다니는 대학의 정체성, 그 정체성을 보존하는 교수들의 지성을 존중하는 것은 좋으나, 그 대학의 외부 현실에 대해서는, 이상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를, 대학 사회의 더러움으로 환원시킨다. 그 더러움 안에, 자신이 다녔던 학교는 좋은 선생이 가득하고, 다른 곳은 속물이 가득한 곳으로 인식하며, 지성의 정수를 훼손시키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몰아가는 의견들이 있다.  

그런 이들 중  공부보다, 공부 외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교수들의 신상 캐기에 더 바쁜 것이 씁쓸하다. 그러면서, 자신 스스로 그러한 담론의 감옥을 만들어 놓고, 그 감옥 안에서 학문의 순수와 불순의 경계를 만들어버리려는 '의로움으로 포장된 것 같은 지적 분노'가 불편하다. 한편으론, 하나의 이슈를 꺼내면, 그 이슈에 이상한 지적 참조를 달면서,  자신은 열등한 인간이 아니라는 투로 지적 전투에 임하는 친구들도 안타깝다.  

그러면서, 공부가 좋아서, 선택한 곳으로서의 대학원은 이데올로기에 복속되고, 나는 그런 선택의 자유에 대해 늘 사회가 간주하는 현실 세태의 눈 안에서 분석된다. '좋은 대학원 가니 좀 나아진 게 있던가?'라는 호기심, 그리고 그 질문에서 새어 나오는, 전도된 학문 세계에 대한 비판 의식. 과잉된 분노가, 과장된 비난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진중권-되기'의 열망으로, 이름 알리기에 열심인 친구들도 있다. 텍스트에 무조건 정치라는 말을 넣기 좋아하고,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너무 '저널리즘적'으로 보려고 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래서, 깊이 있는 텍스트에 시의성의 개입을 시도하고, 그 텍스트를 쉽게 풀어쓰고, 타인에게 전달하고, 그 타인의 반응에 힘을 쏟는 친구들. 나는 그런 친구들이 대학원을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될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이건 내가 우석훈의 책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북 리뷰에서 '이름값 효과에 대한 단상'으로 돌아본 적이 있는 내 주위 현상이다.)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네 지도교수가 누구냐, 묻고. 아, 그 교수.. 그리고 이어지는 현황 공개와 분석. '잘 지내니'라는 말 뒤에 바로 나오는 그런 말들로 귓가를 따갑게 만드는 지인들의 안부 인사가 참 싫다.

편하게 공부를 하고 싶다. 사람들을 제대로/깊이 안 만난 지 2년이 넘었다. 참고로, 2년은 내가 대학원을 다닌 기간이다.  

학문을 가십거리로 만드는 이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기간이기도 하다.  

학벌과 학문을 섞어 만든 칵테일을 권하는 이들의 이름을 휴대폰에서 지운 기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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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3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집과 자존심이 멋진 얼그레이님의 홀로서기!
ㅎㅎ홧팅!!!

얼그레이효과 2010-05-13 21:5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학회 일정표를 봤는데, 대학원생들을 위한 자리는 여전히 빈곤한 상태였다. '이단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생'들을 종으로 여기지 않고, 평등한 관계에서 학문을 이야기하게 만들겠다던, 그 말은 결국 '액세서리'에 불과하단 걸 매년 배신감 느끼듯,느끼게 된다. '이단'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이단적인 공부 공간과 시간,그리고 연대의 자리.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그런 자리가 필요한 곳이 한국의 커뮤니케이션학이 아닌가, 다시 마음을 잡게 된다. 헤르만 헷세의 말처럼, "실천의 결과가 고민이 아닌, 고민의 결과가 실천인 게 낫다"는 그 말을, 지킬 시간을 만들고, 다가오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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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3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스스로 만들고 찾아가시는군요?
믓쪄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살려고 노력중입니다. 하도 과거를 게을리 살아서요.^^;
 

이상길(2005).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사'를 위하여: 연구방법론에 관한 성찰을 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이론 2005년 겨울. 

120-121 

사회(경제)사 연구들이 보여주듯, 사료의 계량화 노력 또한 매우 중요하다. 비록 근래 신문화사와 미시사의 강력한 부상과 더불어 회의적 시선이 많아지긴 했지만, 증거의(120) 다원성과 수렴에 의해 상대적으로만 입증되는 역사람론의 성격상 계량화 작업은 몇 가지 점에서 여전히 중요성을 가진다. 먼저 그것은 현상을 간명하게 기술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다음으로 통계분석은 여러 가능한 명제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그럴듯한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검증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의 가능태의 공간을 구성할 수는 있는 것이다.(Grenier,1995,p.183) 

124 

* 미디어 문화 생산 

사적 성격의 자료 : 언론인과 문화 생산자들의 회고록, 자서전,일기,편지 등 

공적 성격의 자료 : 기관의 공식 문서, 정책자료, 공식 통계, 신문잡지의 관련 기사,광고 등 

* 미디어 문화 수용 

사적 성격의 자료 : 미디어 인물이나 장르, 내용과 관련된 메모,스크랩북, 일기,사적인 편지 등  

공적 성격의 자료 :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 신문/잡지의 관련 기사, 광고 등

124-125  

미디어의 물리적 특성 또한 중요한 사료로서 인식될 필요가 있다. 미디어는 무엇보(124)다도 하나의 사물이며,그것의 물질성은 복잡한 사회적,기술적 환경 안에서 조건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예컨대 유성기나 레코드,라디오의 기기적 특징,장식,크기,디자인 등은 여러 겹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그것은 공간적 배치의 가능성과도 관련이 있으므로,미디어 활용의 구체적 맥락(개인용,가정용,업소용 등)으로 알려주기도 하고, 다양한 활용방식(집단경험의 매게체,근대성 과시의 표현수단, 가정의 장식품,가족애나 경제적 여유를 자랑하기 위한 상징 등)을 일깨워준다. 

130 

구성주의적 시각은 사료의 원작자가 사료를 생산한 '진정한 주체'라든지,둘 사이의 관계가 투명하다든지,사료가 지시대상의 '충실한 반영'을 전제를 의심하며,특정한 사료의 존재 못지않게 (그로 말미암은)다른 사료들의 암묵적 부재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제 비판의 주된 의의는 사료가 실재와 일치하는 정도를 확인하는 데 있기보다 사료의 내적 특징들을 평가하고,역사가가 거기에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의 영역을 한정하는 데 있게 된다. 

132 계량화와 동질화의 문제를 고민하기. 

133 자료생산에 이용된 범주와 도구의 역사성에서부터 자료 생산과정과 맥락,권력 효과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장. 

134 시각자료의 현실 효과 강화를 비판적으로 고민하기. 

- 과잉해석에 대한 고민 시도.  

윤태진.이창현.이호규(2003). 새로운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도입과 '시/공간'및 '공/사'개념의 변화. 방송연구,2003년 겨울호. 

180 

사회적 필요에 의해 테크놀로지가 개발되어 애초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으나,현대의 많은 테크놀로지는 만들어진 이후에 사회적 기능이 부가적으로 생성되는 경우가 많다.새로운 미디어의 출현도 마찬가지이다.애초의 미디어 개발목적이 일원적이지도 명시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미디어의 도입이 보편화된 이후의 결과는 항상 예측 불가능하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순기능을 만들어내기도 하고,반면에 예상하지 못했던 윤리적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184 

전화의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이제는 '전화로'이야기한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한'사실이 중요해졌다. 이렇듯 우리들의 삶의 양식에 테크놀로지가 깊이 내재화될수록 테크놀로지의 실체를 파악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더 이상 테크놀로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88  

텔레비전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시간적으로 구속할 뿐 아니라 행동양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인데,이를 달리 표현하면 초기의 '일상생활 지향적 방송편성'이 이제는 '방송지향적 일상생활'리듬으로 시간의 재조직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방송지향적 일상생활 리듬에 따라 시청자의 시간의식이 형성되어지고 있으며,행동의 시간적 규제 또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김창남(2007).한국의 사회변동과 대중문화.  진보평론 제32호. 2007년 여름호. 

70쪽 

마니아의 등장은 민주화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민주화 이전, 군사정권의 권위주의 통치하에서 문화 전반이 정치적 통제 아래 놓여 있을 때에는 다양한 취향이 발전하기도 어려웠거니와 각 개인들이 자신의 독특한 취향을 계발하기도 어려웠다. 대중이 선택할 수 있는 문화상품 자체가 획일적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수입 문화상품도 적었으며 그나마 억압적 검열기제에 의해 제한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또 대중의 삶 자체가 경제주의의 사회동원 체제에 얽매여야 했고 여가와 문화생활을 통해 삶의 질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삶의 질에 대한 관심 ,여가에 대한 관심이 대중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것도 90년대이며 마니아의 등장은 그런 사회적 변화와 함께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재원,나보라(2009). 올드미디어는 뉴미디어를 어떻게 재현하는가? :텔레비전와 인터넷 관련 신문 보도를 중심으로.언론과 사회.17권 2호. 

3쪽 

올드미디어로서의 신문은 여전히 사회적 담론 생산의 한 축을 차지하면서 뉴미디어의 등장에 대한 갖가지 전망을 내놓는가 하면, 때로는 뉴미디어와의 융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는 필연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그 과정에서 고유의 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올드미디어와 새로운 위치를 점유하고자 하는 뉴미디어 간의 권력투쟁이 발생하게 된다.이러한 과정에서 올드미디어는 담론생산의 주도적 위치를 이용하여 뉴미디어를 특정한 형태로 프레이밍하고자 하며,미(3)디어 수용자들은 뉴미디어의 초기 단계에서 올드미디어가 재현하는 담론을 중요한 정보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Briggs and Burke,2005). 

16쪽 

우리보다 앞선 서구의 텔레비전을 소개할 때도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프로그램에 대한 경계성 기사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는 기술적 부분에서는 서구를 지향하되 내용적 측면에서는 보수적인 한국의 전통적 가치를 추구하는 신문의 이중적 태도를 보여주는 단면으로 해석된다. 

18쪽 

텔레비전 기술의 도입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콘텐츠의 개방에 대해서는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특히 텔레비전으로 인해 야기될 개방적 성의식에 대해서 경계하는 기사가 많다.또한 해외 선진국 중에서도 오락적인 텔레비전 시청보다는 신문이나 책을 읽는 국민들에 대한 소개를 통해 텔레비전에 열광하는 한국 국민들을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기사도 발견할 수 있었다. 

21쪽 

'선정성','폭력성'등과 같은 텔레비전의 유해성 담론에 대해서는 '가족','대화'등이 대립항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바대로 텔레비전 미디어가 개인 중심의 매체가 아닌 가족 중심의 매체라는 전제하에 생성되는 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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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아티클 소개.   



2001년도에 나온 <Keyframes:Popular cinema & Cultural Studies>란 책이 있습니다. 대중영화와 문화연구의 관계를 모색하고, 실제 분석 사례를 다양한 저자들의 참여로 엮어낸 책입니다. 영화를 흥미롭게 연구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유익한 해외원서가 되리라 싶습니다.(아직 번역되어 나오진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의 눈을 끄는 아티클은 Ina Rae Hark가 쓴 "Daddy, where's the FBI warning?"입니다. 80년대부터 활발하게 보급된 VCR을 통한 영화소비문화를 다룬 이 글에서, 저자는 영화 <나홀로 집에(1990)>를 흥미롭게 분석합니다. 저자는 이 영화가 당시 미국에서 비디오 문화가 어떤 식으로 소비되었고, 이 소비가 미국의 사회문화 현상, 또 정치적 현상과도 관계가 있음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비디오'는 중심적인 문화 소재가 됩니다.  

크리스 콜럼버스가 감독하고, 매컬리 컬킨이 애띤 소년 케빈으로 나온 이 영화를 아마 거의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국내에서도 큰 히트를 쳤고, 미국이야 말할 것 없구요. 저자는 이 영화를 설명하기 전에 80년대 헐리우드 영화 문화에서,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에 대한 해석을 시작합니다. 뭐, 우리가 아는 <E.T>, <백 투 더 퓨처>같은 영화들이 있겠지요.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이런 영화들의 히트작 중, 가족의 배경은, (좀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표현이지만)'정상가족'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흔히 우리 사회가 간주하는, 이성애적 관계에서 비롯된 부부, 아빠,엄마, 그리고 귀여운 아들과,딸. 그 관계에서 아버지가 부재하거나, 어머니가 없는 형편. 그 안에서 아들 혹은 딸들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모험의 과정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지요. Hark는, <나홀로 집에>를 보면서, 케빈의 아버지, 어머니의 역할을 보라고 합니다. 아마 가정 내 역할이겠지요. 그러면서 그는 80년대 레이건 정부의 정책을 좀 되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미디어학자 제니스 팩의 <오프라윈프리의 시대>라는 문화비평서에 잘 나와 있지만,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절, 미국에서 가장 강하게 정부쪽으로부터 확산된 담론은, 내 가정 지키기였습니다. 고로 가정 안과 밖의 경계는 분명해졌지요. 단란하고 소박하며, 행복한 가정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들은 그래서 더 심한 낙인의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위협의 대상이었고, 가족 내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이상적인 '홈'을 지키기 위해, 방어막들, 특히 정신적 측면에서 잘 준비해야 했지요. 집에 대한 '순수의 이미지'가 확보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집 밖의 이미지는 '불결'한 것이어야 했죠. 그래서 타자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 공포에 대한 경계선이 강하게 작동했습니다. 

저자는 <나홀로 집에>의 정치성을 위의 맥락 안에서 해석했습니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정상가족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소년은 '아버지의 자리'를 위임받게 됩니다. 실수로 자신을 두고 크리스마스여행을 떠난 가족들, 그리고 텅 빈 저택. 누군가 이  저택을 노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케빈은 이 저택을 지켜야 합니다. 그에게 혼자 즐거움을 만끽한다는 건 잠시입니다. 그 즐거움과 가까이 한 가정에 대한 보호의 의무가 부과된 것이지요. 특히, 저자의 말처럼, 케빈이 다니엘 스턴과 조 페시라는 두 도둑(앞 이름들은 배우 이름입니다.)으로부터 큰 저택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것은, 총이나 칼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가정 테크놀로지였죠. 케빈은 집 안에 있는 친밀한 사물들을 이용해, 도둑들을 무찌릅니다. 저자는 이것을 두고, 케빈이라는 젊은 소년이, 자신의 집 안에 있는 사물의 유용성을 익히고, 그 메뉴얼을 습득하는 과정을 통해, 집을 지키는 어른의 위치에 있게 된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 안에, VCR(비디오)가 있습니다. 저자의 해석으론, 80년대 VCR의 대표적인 문화 기능 중 하나는 위험한 타자가 존재하는 가정 외부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VCR이 갖는 방어막이라는 상징성입니다. 즉, 아이들이 위험한 곳에서 난처해지지 않도록, 집 안에서 그들의 오락을 보장해줬던 것이지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VCR은 아이들에게 오락이 되었고, 또 교육이 되었습니다. 영화에서  VCR은 집 안에 유약한 아이가 있다는 걸 감추어주는 역할을 하죠. 케빈은 이 VCR을 마음껏 조종하면서, 피자 배달원이 자신을 얕보지 않도록 하고, 두 도둑에게 이 집은 사람이 있는 곳이라고 표시하는 기능도 합니다. 

장면을 하나 하나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족들이 떠나고, 집에 홀로 남은 케빈이 첫 날 한 일은, 부모님이 보지 말라고 했을 폭력영화를 보는 것입니다. <Angels with Filthy Souls>란 작품인데요. 



케빈이 재생한 이 작품은 실제로 존재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바로 마이클 커티즈 감독의 1939년도 작품 <Angels With Dirty Faces>를 패러디한 것인데요. 



저자는 케빈이  첫 날 한 일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실제 미국 가족 문화 안에서, 부모님과 아이들의 문화적 실천의 문제를 고민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지만, '음화'라는 이미지로 덧씌워진 비디오라는 기기를 통해, 아이들이 폭력물과 야한 영화를 보지 않도록 부모들의 '오바스러운'태도가 존재했지요. 케빈은 바로 그 해방을 만끽하고 싶었던 겁니다. 케빈은 혼자서 가족들이 자신에게 먹지 말라고 했던 아이스크림, 과자들, 식품을 먹으면서, '규제'의 시선에서 벗어났음을 스스로에게 선언합니다. 



케빈은 그러나, 잔인한 장면이 나오자, 이내 무서움에 치를 떱니다. 하지만, 결국 이런 무서움을 극복하고, 그리고 적응하여, 이 vcr을 비롯한 다양한 가정 테크놀로지 /문화 테크놀로지를 통해, 자신의 집을 지키게 되지요. 케빈이 피자를 시킬 때, 그가 그림 속에 보이는 리모콘을 가지고 패스트포워드(FF)로, 화면을 이리저리 건너띄면서, 집 안에 어른이 있음을 가장하는 장면은 그런 면에서 단순한 기발함을 넘습니다. 집 안에 있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케빈은 임시 가장 역할을 하게 되고, 그는 기술에 대한 번뜩이는 임시적 애호가 / 요령있는 '남자'가 되지요. 저자는 이러한 케빈에게 Em-powered boy-child라는 호칭을 붙여줍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폭력적인 영화가 가정에 주는 '유해'의 이미지는 케빈의 지혜로운 기술 소비를 통해, 케빈과 케빈의 가정에 대한 '존재론적 안전'을 책임지게 되는 것으로 변환되지요.

# FBI의 경고는, 집에서 비디오를 보는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죠. (이는 미국 문화에 해당하지만) 하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땐, 이 표시는. "극장 안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으로 변해 있습니다. 저자가 소개한 사례에서, 딸은 묻죠. 아빠, 왜 영화 시작하기 전에, FBI의 경고가 안 떠? 이는 곧 저자가 비디오 문화와 극장 문화의 차이를 말하기 위해 요약한 인용 사례입니다.   그만큼 아이들은 당시 VCR에 친숙했다는 증거이겠죠. 제가 바로 이 세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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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2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잼있어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2 10:0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10-05-12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 세대군요 ㅎ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5-12 10:08   좋아요 0 | URL
아하!^^

비로그인 2010-05-1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세대' ㅎㅎ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5-12 15:33   좋아요 0 | URL
아이구, 반갑습니다.^^

비로그인 2010-05-12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님의 서재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어려운 공부를 하시는 분이군요.
가끔 들르면 제 특기인 '남의 어깨 너머로 하는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건강하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2 15:33   좋아요 0 | URL
아구, 어려운 공부가 아닌데, 제가 늘 어렵다고 블로그에 징징대지요. ㅡ.ㅜ 후와님의 리뷰 읽고, 저도 시간 있을 때, 소설 탐독을.^^

빵가게재습격 2010-05-1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 님도 슬슬 알라딘에 중독되어 가시는 군요......반갑습니다.
(조심하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곧 의존증으로 변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13 02:20   좋아요 0 | URL
요즘 하는 일 때문에, 생활 리듬으로 인하여 우연치 않게 글을 업뎃 많이 하게 되었네요. 하하. 이러다가 또 잠수탈 겁니다.
 

어제,오늘 apouge님이 쓰신 <인문학의 죽음, 그리고 대학의 죽음에 대해>란 글을 잘 읽었습니다. "대학이 죽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정확한 표현이다.대학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학엔 (과거의) 대학이란 유령만이 떠돌 뿐이다."라는 제 나름대로 명명하자면, 이 급진적인 회의주의 형태의 수사에서, 우리는 현실의 절망을 다시 한 번 체감할 수 있고, 또 그런 체감과 더불어 오는 자극에 따라, 더 나은 희망 한 움큼을 쥘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마운 글이었습니다. 다만, 저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에서, 이 대학의 모순을 교수와 학생의 관계로만 설정할 것인가에 고민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대학 사회 내 분명한 '적대'로, 교직원의 문제를 꼽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는 교수와 학생 관계에서 오는 교육의 모순을 은폐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저는 좀 더 미시적이고, 경험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미천하지만, 몇 년간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이 경험이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 사회에서 총장보다 왕은 '교직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직원'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교직원이 갖는 그 애매모호함이 오히려 학생들을 곤란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냥, '서비스'차원에 머무른, '보조'의 차원에 머무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들알다시피 교직원이 갖는 그 모호함, 보이지 않음의 권력은, 교육에 대한 신성함의 추락을, 교수와 학생들 간의 관계만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특히, 교직원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토대로, 학생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을 꺼려 합니다. 예로 들어, '등록금 문제'가 있겠지요. 소위 '교육 투쟁'이라는 것 안에서 늘 제기되는, 등록금 문제에 있어, 학생회 측은 주로 교직원들을 상대로 학교 측 예산의 투명성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산설명회를 촉구하거나, 예산 내역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만, 교직원들은 너희가 평소 잘 모르는 용어가 많다, 모르는 부분이 많다며, 또 행정 상 비밀이 되는 것이 많다며, 공개하기를 꺼려합니다. 주로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라는 식으로 나오지요.  

더 문제는, 그런 전문적인 문제를 공부해와서, 다시 문제를 제기하면,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전문성'을 너희들이 뭔 데 문제삼느냐며, 행정일을 맡는 교수를 이용해서, 학생들에게 '(교직원 그들의 )  권위'를 보호해달라고 부탁하는 대리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가집니다. 그렇게되면, 교수와 학생의 관계에서 오는 그 교육을 매개로 한 예기치 않은 불편함은, 대학 사회 내 구조를 파악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사기를 꺾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일례로 저는 2009년에, 대학원 내 문제이긴 하지만,  제가 원하지도 않은 명목이 등록금 항목에 책정되어, 방학 중에 교직원을 상대로 질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직원은 이 때, 이러한 예산 책정은 '본부에서 하는 것이라며, 자신들은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는 말이 가진 여리고 동정심 느껴지는 언어 속에서, 권력의 생기는 솟구칩니다. 저는 그것을 '평상심의 권력'이라고 제 스스로 부르고 있습니다.)저는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다시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저는 성의있는 답변을 원했습니다만, 돌아온 것은 학교 홈페이지에 가면, 대학 정보 공개 문서가 있으니, 그걸 참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2008년 말이었나요. 그때부터 시행된 제도인데, 그 공개 정보는 그렇게 정확한 내역이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돌아온 것은 비간접적인 경로였지만, 교직원 그들의 심기가 불편하단 뒷말이었습니다. 게시판을 통해, 뉴스 내용을 언급해가며, 이런저런 구조적 문제를 제기해도, 그 문제에 대한 답보다는, 나중에 대리자를 통해 '학생인데, 자신들이 하는 일과 그 전문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죠.  

하나는 교직원과 학생들이 갖는 '친밀성'과 '내밀성'의 문제입니다. 이런 친밀성과 내밀성의 일반화 속에서 제가 경험했던 것은, 제가 '예비역 권력'이라고 명명한 현상이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오고 나서, 학생회를 맡으면서, 또 예비역 출신 학생회장, 임원들을 보면서, 그들이 결정적으로 학교 부패에 저항하지 못하고, 현실의 모순에 타협하게 되는 걸, 저는 많이 봐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직원들의 고의적 전략이라고 무리하게 해석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뭐랄까요. 이건 한국적 현상이라고 할까요. 저도 군대를 갔다오면서, 그런 우를 많이 범했지만, 일이 서투른 친구들을 욕하게 되고,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친구들이 개혁과 혁명을 이야기하는 걸, 교직원들과 함께 구경하면서, '으이그, 세상 물정 모르는 놈, 네가 군대에 갔다 와봐야 알지'같은 말을 서로 공유하게 되지요. 그런 친밀한 관계에서, 대학 내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는 시기, 그 모순을 실천으로 변혁해보려고 하면, 부딪히는 것이, 그런 친밀성에서 오는 양보입니다. "야, 그냥 이번엔 넘어가자. 알 사람 다 아는 걸..뭐. 유연하게 행동해." 이런 우연치 않은 친밀성의 고리가, 그들만의 내밀한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이건 비단 예비역들의 정체성을 훼손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고리가 우연하게 만들어지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의리와 정, 인연 때문에, 옳음의 순간을 양보하게 되지요. 그런 '일반적인 인맥'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 겁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건 수많은 연관성 중에 하나겠지요.

이 안에서, 부딪히는 모순. 교직원과 교수의 관계 문제이겠죠. 뻔히 잘 아는 관계 안에서, 학생들의 '태클'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갈라지는 건. 87년 민주화 때, 상징적인 활동을 하며, 국가의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도, 학내의 민주화에 대해선 조용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 표현은 그냥 비유일 뿐입니다. 바깥에서 진보를 외쳐도, 학교 문제에는 꿀먹은 진보인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교수들에게 그런 부담을 너무 줄 수 없는 문제 아니냐는 반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동의합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건, 그 연결고리죠. 이 세상에 대학이 썩었다는 걸 모르는 교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대부분 썩었지만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라고 생각하고 모순의 연결고리를 부여잡고, 학생들에겐, "너희가 좀 양보해라..어쩔 수 없는 문제야..", 교직원들에겐, "그런 그렇게 처리하면 될 것 같아요. 제가 그 학생 잘 말할께요. 염려하지 마세요."  결국 교수들 그리고 삶의 희망을 갖고 온 학생들은 이단들을 위한 자리(http://dangbi.tistory.com/52-> 이 포스트에서 인용했습니다.)를 만들 용기를 포기하게 되겠지요.  

이 포기와 양보의 순간은 생각보다 너무나 조용한 일상성 속에서 그냥 퇴색됩니다. 그리고 그 포기와 양보는 앞으로 다가올 학생들의 저항과 변화의 몸부림을, 또 하나의 관행으로 치부해버리는 공포 효과로 환원되는 것 같습니다. 그 효과가 뿌리잡은 곳에서 남은 건, 너무나 좋은 봄 날씨. 흩날리는 벚꽃, 나도 모르게 지어지는 안락한 공간들, 그리고 정상성의 독재입니다. 요구하고 저항하면, 나를 비정상으로 몰아버리는 이 정상성의 독재. 그 안에서 가장 조용하게 도사리고 있는 각각의 요인들. 그 요인들 중에서 오늘 하나, 교직원이라는 존재에 대해 부족한 잡글로 돌아봤습니다.  

 

좀 다른 형태의 <호모 아카데미쿠스>를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그 성찰성의 방향과 미래에 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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