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일정표를 봤는데, 대학원생들을 위한 자리는 여전히 빈곤한 상태였다. '이단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생'들을 종으로 여기지 않고, 평등한 관계에서 학문을 이야기하게 만들겠다던, 그 말은 결국 '액세서리'에 불과하단 걸 매년 배신감 느끼듯,느끼게 된다. '이단'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이단적인 공부 공간과 시간,그리고 연대의 자리.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그런 자리가 필요한 곳이 한국의 커뮤니케이션학이 아닌가, 다시 마음을 잡게 된다. 헤르만 헷세의 말처럼, "실천의 결과가 고민이 아닌, 고민의 결과가 실천인 게 낫다"는 그 말을, 지킬 시간을 만들고, 다가오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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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3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스스로 만들고 찾아가시는군요?
믓쪄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살려고 노력중입니다. 하도 과거를 게을리 살아서요.^^;
 

이상길(2005).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사'를 위하여: 연구방법론에 관한 성찰을 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이론 2005년 겨울. 

120-121 

사회(경제)사 연구들이 보여주듯, 사료의 계량화 노력 또한 매우 중요하다. 비록 근래 신문화사와 미시사의 강력한 부상과 더불어 회의적 시선이 많아지긴 했지만, 증거의(120) 다원성과 수렴에 의해 상대적으로만 입증되는 역사람론의 성격상 계량화 작업은 몇 가지 점에서 여전히 중요성을 가진다. 먼저 그것은 현상을 간명하게 기술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다음으로 통계분석은 여러 가능한 명제들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그럴듯한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검증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의 가능태의 공간을 구성할 수는 있는 것이다.(Grenier,1995,p.183) 

124 

* 미디어 문화 생산 

사적 성격의 자료 : 언론인과 문화 생산자들의 회고록, 자서전,일기,편지 등 

공적 성격의 자료 : 기관의 공식 문서, 정책자료, 공식 통계, 신문잡지의 관련 기사,광고 등 

* 미디어 문화 수용 

사적 성격의 자료 : 미디어 인물이나 장르, 내용과 관련된 메모,스크랩북, 일기,사적인 편지 등  

공적 성격의 자료 :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 신문/잡지의 관련 기사, 광고 등

124-125  

미디어의 물리적 특성 또한 중요한 사료로서 인식될 필요가 있다. 미디어는 무엇보(124)다도 하나의 사물이며,그것의 물질성은 복잡한 사회적,기술적 환경 안에서 조건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예컨대 유성기나 레코드,라디오의 기기적 특징,장식,크기,디자인 등은 여러 겹의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그것은 공간적 배치의 가능성과도 관련이 있으므로,미디어 활용의 구체적 맥락(개인용,가정용,업소용 등)으로 알려주기도 하고, 다양한 활용방식(집단경험의 매게체,근대성 과시의 표현수단, 가정의 장식품,가족애나 경제적 여유를 자랑하기 위한 상징 등)을 일깨워준다. 

130 

구성주의적 시각은 사료의 원작자가 사료를 생산한 '진정한 주체'라든지,둘 사이의 관계가 투명하다든지,사료가 지시대상의 '충실한 반영'을 전제를 의심하며,특정한 사료의 존재 못지않게 (그로 말미암은)다른 사료들의 암묵적 부재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제 비판의 주된 의의는 사료가 실재와 일치하는 정도를 확인하는 데 있기보다 사료의 내적 특징들을 평가하고,역사가가 거기에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의 영역을 한정하는 데 있게 된다. 

132 계량화와 동질화의 문제를 고민하기. 

133 자료생산에 이용된 범주와 도구의 역사성에서부터 자료 생산과정과 맥락,권력 효과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장. 

134 시각자료의 현실 효과 강화를 비판적으로 고민하기. 

- 과잉해석에 대한 고민 시도.  

윤태진.이창현.이호규(2003). 새로운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도입과 '시/공간'및 '공/사'개념의 변화. 방송연구,2003년 겨울호. 

180 

사회적 필요에 의해 테크놀로지가 개발되어 애초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으나,현대의 많은 테크놀로지는 만들어진 이후에 사회적 기능이 부가적으로 생성되는 경우가 많다.새로운 미디어의 출현도 마찬가지이다.애초의 미디어 개발목적이 일원적이지도 명시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미디어의 도입이 보편화된 이후의 결과는 항상 예측 불가능하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순기능을 만들어내기도 하고,반면에 예상하지 못했던 윤리적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184 

전화의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이제는 '전화로'이야기한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한'사실이 중요해졌다. 이렇듯 우리들의 삶의 양식에 테크놀로지가 깊이 내재화될수록 테크놀로지의 실체를 파악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더 이상 테크놀로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188  

텔레비전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시간적으로 구속할 뿐 아니라 행동양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인데,이를 달리 표현하면 초기의 '일상생활 지향적 방송편성'이 이제는 '방송지향적 일상생활'리듬으로 시간의 재조직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방송지향적 일상생활 리듬에 따라 시청자의 시간의식이 형성되어지고 있으며,행동의 시간적 규제 또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김창남(2007).한국의 사회변동과 대중문화.  진보평론 제32호. 2007년 여름호. 

70쪽 

마니아의 등장은 민주화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민주화 이전, 군사정권의 권위주의 통치하에서 문화 전반이 정치적 통제 아래 놓여 있을 때에는 다양한 취향이 발전하기도 어려웠거니와 각 개인들이 자신의 독특한 취향을 계발하기도 어려웠다. 대중이 선택할 수 있는 문화상품 자체가 획일적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수입 문화상품도 적었으며 그나마 억압적 검열기제에 의해 제한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또 대중의 삶 자체가 경제주의의 사회동원 체제에 얽매여야 했고 여가와 문화생활을 통해 삶의 질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삶의 질에 대한 관심 ,여가에 대한 관심이 대중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것도 90년대이며 마니아의 등장은 그런 사회적 변화와 함께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재원,나보라(2009). 올드미디어는 뉴미디어를 어떻게 재현하는가? :텔레비전와 인터넷 관련 신문 보도를 중심으로.언론과 사회.17권 2호. 

3쪽 

올드미디어로서의 신문은 여전히 사회적 담론 생산의 한 축을 차지하면서 뉴미디어의 등장에 대한 갖가지 전망을 내놓는가 하면, 때로는 뉴미디어와의 융합을 시도하기도 했다.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는 필연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그 과정에서 고유의 영역을 지키고자 하는 올드미디어와 새로운 위치를 점유하고자 하는 뉴미디어 간의 권력투쟁이 발생하게 된다.이러한 과정에서 올드미디어는 담론생산의 주도적 위치를 이용하여 뉴미디어를 특정한 형태로 프레이밍하고자 하며,미(3)디어 수용자들은 뉴미디어의 초기 단계에서 올드미디어가 재현하는 담론을 중요한 정보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Briggs and Burke,2005). 

16쪽 

우리보다 앞선 서구의 텔레비전을 소개할 때도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프로그램에 대한 경계성 기사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는 기술적 부분에서는 서구를 지향하되 내용적 측면에서는 보수적인 한국의 전통적 가치를 추구하는 신문의 이중적 태도를 보여주는 단면으로 해석된다. 

18쪽 

텔레비전 기술의 도입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콘텐츠의 개방에 대해서는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특히 텔레비전으로 인해 야기될 개방적 성의식에 대해서 경계하는 기사가 많다.또한 해외 선진국 중에서도 오락적인 텔레비전 시청보다는 신문이나 책을 읽는 국민들에 대한 소개를 통해 텔레비전에 열광하는 한국 국민들을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기사도 발견할 수 있었다. 

21쪽 

'선정성','폭력성'등과 같은 텔레비전의 유해성 담론에 대해서는 '가족','대화'등이 대립항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바대로 텔레비전 미디어가 개인 중심의 매체가 아닌 가족 중심의 매체라는 전제하에 생성되는 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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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아티클 소개.   



2001년도에 나온 <Keyframes:Popular cinema & Cultural Studies>란 책이 있습니다. 대중영화와 문화연구의 관계를 모색하고, 실제 분석 사례를 다양한 저자들의 참여로 엮어낸 책입니다. 영화를 흥미롭게 연구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유익한 해외원서가 되리라 싶습니다.(아직 번역되어 나오진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의 눈을 끄는 아티클은 Ina Rae Hark가 쓴 "Daddy, where's the FBI warning?"입니다. 80년대부터 활발하게 보급된 VCR을 통한 영화소비문화를 다룬 이 글에서, 저자는 영화 <나홀로 집에(1990)>를 흥미롭게 분석합니다. 저자는 이 영화가 당시 미국에서 비디오 문화가 어떤 식으로 소비되었고, 이 소비가 미국의 사회문화 현상, 또 정치적 현상과도 관계가 있음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비디오'는 중심적인 문화 소재가 됩니다.  

크리스 콜럼버스가 감독하고, 매컬리 컬킨이 애띤 소년 케빈으로 나온 이 영화를 아마 거의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국내에서도 큰 히트를 쳤고, 미국이야 말할 것 없구요. 저자는 이 영화를 설명하기 전에 80년대 헐리우드 영화 문화에서,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에 대한 해석을 시작합니다. 뭐, 우리가 아는 <E.T>, <백 투 더 퓨처>같은 영화들이 있겠지요.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이런 영화들의 히트작 중, 가족의 배경은, (좀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표현이지만)'정상가족'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흔히 우리 사회가 간주하는, 이성애적 관계에서 비롯된 부부, 아빠,엄마, 그리고 귀여운 아들과,딸. 그 관계에서 아버지가 부재하거나, 어머니가 없는 형편. 그 안에서 아들 혹은 딸들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모험의 과정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지요. Hark는, <나홀로 집에>를 보면서, 케빈의 아버지, 어머니의 역할을 보라고 합니다. 아마 가정 내 역할이겠지요. 그러면서 그는 80년대 레이건 정부의 정책을 좀 되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미디어학자 제니스 팩의 <오프라윈프리의 시대>라는 문화비평서에 잘 나와 있지만,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절, 미국에서 가장 강하게 정부쪽으로부터 확산된 담론은, 내 가정 지키기였습니다. 고로 가정 안과 밖의 경계는 분명해졌지요. 단란하고 소박하며, 행복한 가정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들은 그래서 더 심한 낙인의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위협의 대상이었고, 가족 내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이상적인 '홈'을 지키기 위해, 방어막들, 특히 정신적 측면에서 잘 준비해야 했지요. 집에 대한 '순수의 이미지'가 확보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집 밖의 이미지는 '불결'한 것이어야 했죠. 그래서 타자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 공포에 대한 경계선이 강하게 작동했습니다. 

저자는 <나홀로 집에>의 정치성을 위의 맥락 안에서 해석했습니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정상가족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소년은 '아버지의 자리'를 위임받게 됩니다. 실수로 자신을 두고 크리스마스여행을 떠난 가족들, 그리고 텅 빈 저택. 누군가 이  저택을 노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케빈은 이 저택을 지켜야 합니다. 그에게 혼자 즐거움을 만끽한다는 건 잠시입니다. 그 즐거움과 가까이 한 가정에 대한 보호의 의무가 부과된 것이지요. 특히, 저자의 말처럼, 케빈이 다니엘 스턴과 조 페시라는 두 도둑(앞 이름들은 배우 이름입니다.)으로부터 큰 저택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것은, 총이나 칼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가정 테크놀로지였죠. 케빈은 집 안에 있는 친밀한 사물들을 이용해, 도둑들을 무찌릅니다. 저자는 이것을 두고, 케빈이라는 젊은 소년이, 자신의 집 안에 있는 사물의 유용성을 익히고, 그 메뉴얼을 습득하는 과정을 통해, 집을 지키는 어른의 위치에 있게 된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 안에, VCR(비디오)가 있습니다. 저자의 해석으론, 80년대 VCR의 대표적인 문화 기능 중 하나는 위험한 타자가 존재하는 가정 외부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VCR이 갖는 방어막이라는 상징성입니다. 즉, 아이들이 위험한 곳에서 난처해지지 않도록, 집 안에서 그들의 오락을 보장해줬던 것이지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VCR은 아이들에게 오락이 되었고, 또 교육이 되었습니다. 영화에서  VCR은 집 안에 유약한 아이가 있다는 걸 감추어주는 역할을 하죠. 케빈은 이 VCR을 마음껏 조종하면서, 피자 배달원이 자신을 얕보지 않도록 하고, 두 도둑에게 이 집은 사람이 있는 곳이라고 표시하는 기능도 합니다. 

장면을 하나 하나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족들이 떠나고, 집에 홀로 남은 케빈이 첫 날 한 일은, 부모님이 보지 말라고 했을 폭력영화를 보는 것입니다. <Angels with Filthy Souls>란 작품인데요. 



케빈이 재생한 이 작품은 실제로 존재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바로 마이클 커티즈 감독의 1939년도 작품 <Angels With Dirty Faces>를 패러디한 것인데요. 



저자는 케빈이  첫 날 한 일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실제 미국 가족 문화 안에서, 부모님과 아이들의 문화적 실천의 문제를 고민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지만, '음화'라는 이미지로 덧씌워진 비디오라는 기기를 통해, 아이들이 폭력물과 야한 영화를 보지 않도록 부모들의 '오바스러운'태도가 존재했지요. 케빈은 바로 그 해방을 만끽하고 싶었던 겁니다. 케빈은 혼자서 가족들이 자신에게 먹지 말라고 했던 아이스크림, 과자들, 식품을 먹으면서, '규제'의 시선에서 벗어났음을 스스로에게 선언합니다. 



케빈은 그러나, 잔인한 장면이 나오자, 이내 무서움에 치를 떱니다. 하지만, 결국 이런 무서움을 극복하고, 그리고 적응하여, 이 vcr을 비롯한 다양한 가정 테크놀로지 /문화 테크놀로지를 통해, 자신의 집을 지키게 되지요. 케빈이 피자를 시킬 때, 그가 그림 속에 보이는 리모콘을 가지고 패스트포워드(FF)로, 화면을 이리저리 건너띄면서, 집 안에 어른이 있음을 가장하는 장면은 그런 면에서 단순한 기발함을 넘습니다. 집 안에 있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케빈은 임시 가장 역할을 하게 되고, 그는 기술에 대한 번뜩이는 임시적 애호가 / 요령있는 '남자'가 되지요. 저자는 이러한 케빈에게 Em-powered boy-child라는 호칭을 붙여줍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폭력적인 영화가 가정에 주는 '유해'의 이미지는 케빈의 지혜로운 기술 소비를 통해, 케빈과 케빈의 가정에 대한 '존재론적 안전'을 책임지게 되는 것으로 변환되지요.

# FBI의 경고는, 집에서 비디오를 보는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죠. (이는 미국 문화에 해당하지만) 하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땐, 이 표시는. "극장 안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으로 변해 있습니다. 저자가 소개한 사례에서, 딸은 묻죠. 아빠, 왜 영화 시작하기 전에, FBI의 경고가 안 떠? 이는 곧 저자가 비디오 문화와 극장 문화의 차이를 말하기 위해 요약한 인용 사례입니다.   그만큼 아이들은 당시 VCR에 친숙했다는 증거이겠죠. 제가 바로 이 세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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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2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잼있어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2 10:0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10-05-12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 세대군요 ㅎ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5-12 10:08   좋아요 0 | URL
아하!^^

비로그인 2010-05-1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세대' ㅎㅎ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5-12 15:33   좋아요 0 | URL
아이구, 반갑습니다.^^

비로그인 2010-05-12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님의 서재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어려운 공부를 하시는 분이군요.
가끔 들르면 제 특기인 '남의 어깨 너머로 하는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건강하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2 15:33   좋아요 0 | URL
아구, 어려운 공부가 아닌데, 제가 늘 어렵다고 블로그에 징징대지요. ㅡ.ㅜ 후와님의 리뷰 읽고, 저도 시간 있을 때, 소설 탐독을.^^

빵가게재습격 2010-05-1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 님도 슬슬 알라딘에 중독되어 가시는 군요......반갑습니다.
(조심하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곧 의존증으로 변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13 02:20   좋아요 0 | URL
요즘 하는 일 때문에, 생활 리듬으로 인하여 우연치 않게 글을 업뎃 많이 하게 되었네요. 하하. 이러다가 또 잠수탈 겁니다.
 

어제,오늘 apouge님이 쓰신 <인문학의 죽음, 그리고 대학의 죽음에 대해>란 글을 잘 읽었습니다. "대학이 죽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정확한 표현이다.대학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학엔 (과거의) 대학이란 유령만이 떠돌 뿐이다."라는 제 나름대로 명명하자면, 이 급진적인 회의주의 형태의 수사에서, 우리는 현실의 절망을 다시 한 번 체감할 수 있고, 또 그런 체감과 더불어 오는 자극에 따라, 더 나은 희망 한 움큼을 쥘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마운 글이었습니다. 다만, 저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에서, 이 대학의 모순을 교수와 학생의 관계로만 설정할 것인가에 고민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대학 사회 내 분명한 '적대'로, 교직원의 문제를 꼽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는 교수와 학생 관계에서 오는 교육의 모순을 은폐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저는 좀 더 미시적이고, 경험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미천하지만, 몇 년간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이 경험이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 사회에서 총장보다 왕은 '교직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직원'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교직원이 갖는 그 애매모호함이 오히려 학생들을 곤란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냥, '서비스'차원에 머무른, '보조'의 차원에 머무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들알다시피 교직원이 갖는 그 모호함, 보이지 않음의 권력은, 교육에 대한 신성함의 추락을, 교수와 학생들 간의 관계만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특히, 교직원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토대로, 학생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을 꺼려 합니다. 예로 들어, '등록금 문제'가 있겠지요. 소위 '교육 투쟁'이라는 것 안에서 늘 제기되는, 등록금 문제에 있어, 학생회 측은 주로 교직원들을 상대로 학교 측 예산의 투명성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산설명회를 촉구하거나, 예산 내역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만, 교직원들은 너희가 평소 잘 모르는 용어가 많다, 모르는 부분이 많다며, 또 행정 상 비밀이 되는 것이 많다며, 공개하기를 꺼려합니다. 주로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라는 식으로 나오지요.  

더 문제는, 그런 전문적인 문제를 공부해와서, 다시 문제를 제기하면,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전문성'을 너희들이 뭔 데 문제삼느냐며, 행정일을 맡는 교수를 이용해서, 학생들에게 '(교직원 그들의 )  권위'를 보호해달라고 부탁하는 대리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가집니다. 그렇게되면, 교수와 학생의 관계에서 오는 그 교육을 매개로 한 예기치 않은 불편함은, 대학 사회 내 구조를 파악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사기를 꺾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일례로 저는 2009년에, 대학원 내 문제이긴 하지만,  제가 원하지도 않은 명목이 등록금 항목에 책정되어, 방학 중에 교직원을 상대로 질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직원은 이 때, 이러한 예산 책정은 '본부에서 하는 것이라며, 자신들은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는 말이 가진 여리고 동정심 느껴지는 언어 속에서, 권력의 생기는 솟구칩니다. 저는 그것을 '평상심의 권력'이라고 제 스스로 부르고 있습니다.)저는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다시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저는 성의있는 답변을 원했습니다만, 돌아온 것은 학교 홈페이지에 가면, 대학 정보 공개 문서가 있으니, 그걸 참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2008년 말이었나요. 그때부터 시행된 제도인데, 그 공개 정보는 그렇게 정확한 내역이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돌아온 것은 비간접적인 경로였지만, 교직원 그들의 심기가 불편하단 뒷말이었습니다. 게시판을 통해, 뉴스 내용을 언급해가며, 이런저런 구조적 문제를 제기해도, 그 문제에 대한 답보다는, 나중에 대리자를 통해 '학생인데, 자신들이 하는 일과 그 전문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죠.  

하나는 교직원과 학생들이 갖는 '친밀성'과 '내밀성'의 문제입니다. 이런 친밀성과 내밀성의 일반화 속에서 제가 경험했던 것은, 제가 '예비역 권력'이라고 명명한 현상이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오고 나서, 학생회를 맡으면서, 또 예비역 출신 학생회장, 임원들을 보면서, 그들이 결정적으로 학교 부패에 저항하지 못하고, 현실의 모순에 타협하게 되는 걸, 저는 많이 봐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직원들의 고의적 전략이라고 무리하게 해석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뭐랄까요. 이건 한국적 현상이라고 할까요. 저도 군대를 갔다오면서, 그런 우를 많이 범했지만, 일이 서투른 친구들을 욕하게 되고,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친구들이 개혁과 혁명을 이야기하는 걸, 교직원들과 함께 구경하면서, '으이그, 세상 물정 모르는 놈, 네가 군대에 갔다 와봐야 알지'같은 말을 서로 공유하게 되지요. 그런 친밀한 관계에서, 대학 내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는 시기, 그 모순을 실천으로 변혁해보려고 하면, 부딪히는 것이, 그런 친밀성에서 오는 양보입니다. "야, 그냥 이번엔 넘어가자. 알 사람 다 아는 걸..뭐. 유연하게 행동해." 이런 우연치 않은 친밀성의 고리가, 그들만의 내밀한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이건 비단 예비역들의 정체성을 훼손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고리가 우연하게 만들어지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의리와 정, 인연 때문에, 옳음의 순간을 양보하게 되지요. 그런 '일반적인 인맥'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 겁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건 수많은 연관성 중에 하나겠지요.

이 안에서, 부딪히는 모순. 교직원과 교수의 관계 문제이겠죠. 뻔히 잘 아는 관계 안에서, 학생들의 '태클'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갈라지는 건. 87년 민주화 때, 상징적인 활동을 하며, 국가의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도, 학내의 민주화에 대해선 조용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 표현은 그냥 비유일 뿐입니다. 바깥에서 진보를 외쳐도, 학교 문제에는 꿀먹은 진보인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교수들에게 그런 부담을 너무 줄 수 없는 문제 아니냐는 반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동의합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건, 그 연결고리죠. 이 세상에 대학이 썩었다는 걸 모르는 교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대부분 썩었지만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라고 생각하고 모순의 연결고리를 부여잡고, 학생들에겐, "너희가 좀 양보해라..어쩔 수 없는 문제야..", 교직원들에겐, "그런 그렇게 처리하면 될 것 같아요. 제가 그 학생 잘 말할께요. 염려하지 마세요."  결국 교수들 그리고 삶의 희망을 갖고 온 학생들은 이단들을 위한 자리(http://dangbi.tistory.com/52-> 이 포스트에서 인용했습니다.)를 만들 용기를 포기하게 되겠지요.  

이 포기와 양보의 순간은 생각보다 너무나 조용한 일상성 속에서 그냥 퇴색됩니다. 그리고 그 포기와 양보는 앞으로 다가올 학생들의 저항과 변화의 몸부림을, 또 하나의 관행으로 치부해버리는 공포 효과로 환원되는 것 같습니다. 그 효과가 뿌리잡은 곳에서 남은 건, 너무나 좋은 봄 날씨. 흩날리는 벚꽃, 나도 모르게 지어지는 안락한 공간들, 그리고 정상성의 독재입니다. 요구하고 저항하면, 나를 비정상으로 몰아버리는 이 정상성의 독재. 그 안에서 가장 조용하게 도사리고 있는 각각의 요인들. 그 요인들 중에서 오늘 하나, 교직원이라는 존재에 대해 부족한 잡글로 돌아봤습니다.  

 

좀 다른 형태의 <호모 아카데미쿠스>를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그 성찰성의 방향과 미래에 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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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극장의 형성  

박은아,우석봉(2008), <한국인이 미디어와 소비 트렌드>, 커뮤니케이션북스. 를 읽고 나서. 

주요 자료: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실시한, 전국규모 6000명의 대상. 2005년 소비자행태조사(Media&Consumer Research:MCR) 

1. 문화생활에서 '검약적 소비'라는 실천. 

2. 소비의 목적에서 '효용성 추구'와 '감성적 만족'이라는 것

:영화 소비에 대해 생각해보기. 싼 값에 영화를 보기. 영화의 물질성. 영화의 내용을 소비하지만, 그 소비 과정 속에서 투자의 정도는 과한 것? 혹은 적당한 것? 되도록 싼 것?  

합리적 소비, 여가의 합리화.

71쪽 

혼자서 혹은 함께 

"한국인의 대표 여가활동인 tv시청을 누구와 함께하는지 살펴보았다. TV를 시청하는 방식을 홀로 시청,배우자와 시청,그리고 가족과 시청의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보았는데, 전체적으로 약 30%의 사람들이 혼자서 TV를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이는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가정의 TV가 개인 미디어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쾌락 소비(Hedonic consumption)라는 것에 대해 

117쪽 실용적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품의 구입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백욱인(1994). 대중 소비생활구조의 변화. 경제와 사회 94년 봄호.제21호. 

58쪽 표 참고하기. 1973~1991

60쪽. "특히 개인교통비와 교양오락비,가구가사비의 지출 증가가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승용차와 오락내구재,가전내구재의 소비지출이 1980년대 하반기에 급속한 속도로 증가함에 있어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61쪽. 가정오락내구재와 가사노동을 대체하는 효과를 갖는 가정내구재를 포함한 내구재 비중은 1973년의 2.1%에서 1991년에는 6.5%로 늘어났다. 

61쪽. 노동력재생산과 관련된 상품긴요도를 기준으로 하여 각 상품을 필수재와 선택재로 구분할 경우 필수재 구성비는 1983년의 79.9%에서 1987년에는 75.3%로, 91년에는 66.8%로 감소하고 있는 반면 선택재는 1983년의 20%에서 1991년의 33.1%로 늘어나고 있다.선택재의 증가율은 1983~87년간에 23.2%가 늘어난  

62쪽 데 비해 1987~91년에는 34.3%가 증가하여 1987 이후의 증가율이 더 높다. 

내구소비재 확대 

그 이유 : 62쪽, "1980년대에 이르어 중간제계층의 일부와 노동자계급 상층에 대해서는 내구소비재 중심의 생활상의 포섭이 제한된 수준이기는 하지만 빠른 속도로 행해지고 있다. 상대적 가격안정 / 할부판매제도를 통한 소비능력증대/국내수요와 시장확대 / 포디즘적 소비규범정착 요인에 의해 확대. 

남은영(2007). 1990년대 한국 소비문화: 소비의식과 소비행위를 중심으로 . 사회와 역사 제76집. 한국사회학회. 

189쪽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내 말까지가 '소비사회의 형성기'라고 말할 수 있다면,  198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는 '소비사회의 성숙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중반 1인당 국민소득이 10,000달러에 도달하며 표준화와 몰개성화를 강조하는 대중소비로부터 개성화,차별화,다양화를 추구하는 소비성숙단계로의 변화가 발생했다. 따라서 1990년대 한국에서는 소비문화의 뱐화 및 식생활,의생활,그리고 주생활 영역에서 양적 소비로부터 질적 소비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191쪽 

한국사회는 1960년대 이후 진행된 급속한 경제성장과 과학기술의 고도화,개인소득의 향상으로 1980년대 이후 소비영역이 급팽창하며 대중의 소비패턴과 생활양식의 변모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왔다. '3저 호황(저금리,저환율,저유가)'으로 인하여 이 시기에는 중산층의 저변 확산이 이루어지면서 경제적 풍요와 함께 대중소비시대,마이카-외식문화-여가의 시대로 변화하게 된다.

193쪽 

"80년대에는 실용성에 초점을 맞춘 제품들이 히트상품 대열에 올랐으나 90년대의 경우 차별화된 기능과 편의성,소비자들의 고급화 및 개성화 취향에 부응하는 제품들이 히트상품으로 선정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이 시기의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비의 글로벌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90년대에 들어 시장개방정책이 가속화되었고,가격파괴를 내세운 창고형 할인점 등장으로 인한 국내유통시장의 구조개편,그리고 사회구성원들의 전반적인 소비행태의 고급화 추세가 맞물리면서 국내외 소비시장의 경계가 급속히 허물어지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기호소비에 대하여. 

218-219쪽 

경제적인 조건에 의해 실질적인 소비행위는 환경에 적응하여 신속하게 변하지만, 사람들의 태도나 관심은 경제적(218)인 상황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실제적인 소비행위는 현실조건에 따라 적응하여 변화하지만, 사람의 취향이나 선호는 일단 형성이 되면, 객관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고 보인다. 

 권호영,이종원(),한국 수용자의 소득과 미디어 지출 추세에 관한 실증적 분석(1966-1997).한국방송학보 14-1호.  

분석기간 : 1966~1997.  

62쪽 

상대적 불변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였을 때 기존 미디어에 대한 지출 변화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한 매체에 대한 지출이 증가할 때 다른 매체에 대한 지출이 감소해야 상대적 불변성은 성립된다. 

62쪽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컬러 텔레비전과 VCR의 보급으로 인한 하드웨어에 대한 지출이 급격히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출이 현저히 감소하는 미디어는 없었다. 소득에 대한 영화의 지출 비율이  1979년의 0.16%에서 1987년의 0.064%로 감소하기는 하였지만 하드웨어에 대한 지출의 증가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였다. 

김성재(2003). 가족과 커뮤니케이션 - 가족 간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변화 - 사회연구 1호.  

92쪽. 도시 형성 시대의 가족 커뮤니케이션 

극장형 담론의 특징. 

이 구조에 해당되는 예는 극장 그 자체뿐만 아니라,학교의 교실, 콘서트홀,특히 부르주아 가정의 거실이다. 송신자의 등 뒤에 위치한 오목한 벽과 반원형으로 분포된 수신자들을 연결하는 채널이 이 구조의 특징이다. 오목한 벽은 외부 소음을 차단하는 우산 역할을 함과 동시에 송신을 위한 확성기 기능을 수행한다. 송신자는 분배될 정보가 저장되어 있는 기억이다. 채널은 정보 분배에 사용되는 코드의 운반체다.(전통적인 극장에서는 소리를 나르는 공기),수신자는 분배받은 정보가 나중에 계속 전달될 수 있기 위해(정보를 발전시키기 위해)분배된 정보가 저장되어 있는 기억들이다. 

(중략) 

극장형 담론은 대화를 위해 개방되어 있고, 언제라도 다시 대화로 발전될 수 있기 때문에 원래의 정보가 수신자의 기억을 송출하 (92)는 잡음에 의해 감염될 수 있는 위험을 항상 동반한다. 간단히 말하면, 극장형 담론은 분배된 정보를 받는 수신자들에게 이 정보에 대한 책임을 떠맡게 하고 그들을 미래의 송신자로 만드는 기능을 수행하는 데 탁월한 구조다. 이 구조에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주인을 중심으로 정보가 분배되기 때문에 가부장적 제도가 확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부분적으로 항의가 허용되지만,가정의 주인이 정보 흐름의 중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93쪽. 

 

원형극장형 담론의 특징  

93~97쪽 요약. 

아버지는 공장에 나가 일하는 임금노동자로 변하고,어머니는 가족 구성원들의 영양과 자식들의 가정교육을 책임지며,자식들은 국가적 의무교육의 도입과 함께 학교교육의 수혜자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보낸다. 이제 가족간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도시형설 시대의 아버지와 자식들 중심의 극장형 담론에서 어머니와 자식들 중심의 극장형 담론으로 변화된다. 낮에는 상품생산을 위해 공장에서 일하고,밤에만 혜성처럼 나타나는 아버지의 빈자리는 어머니가 자식들을 상대로 훈육하는 거실로 대체되고,침대 머리에서 어머니가 동화를 읽어주는 어린이 침실이 대신한다.  

이 때 어머니가 들려주는 동화는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가치를 형성시킨다. 이 가치는 산업화 과정에서 생산된 재화의 획득과 증식 그리고 미화와 관련된 것이다. / 94쪽 

산업사회의 성숙과 함께 진행된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위에서 언급된 담론구조를 크게 변화시킨다. 이제 텔레비전 수상기가 어머니의 위치를 차지한다. 텔레비전은 그림으로 암호화된 정보를 배분하는 담론 매체의 기능을 떠맡게 되고,극장형 담론의 조개를 깨트림으로써 어린이 방과 거실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사방으로 송출하는 '원형극장형 담론'의 장소로 전환시킨다. 텔레비전 화면이 동화책을 대체함으로써 문자 코드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국어는 그 위상이 낮아지고 더 이상 국가주의와 역사적 의식을 프로그램화 하지 못한다.  

이 스케치는 극장형 담론에서 오목형 벽이 제거되고,무경계 또는 '우주적 개방성'의 담론 구조를 묘사한다. 이 담론 구조의 예로는 신문,텔레비전,플래카드와 같은 소위 대중매체가 있다. /95쪽 

이 구조는 본질적으로 단 두 가지 요소로만 이루어져 있다. 첫째, 분배될 정보가 계획되어 있는(95) 기억으로서 빈 공간 속에서 떠다니는 송신자와,둘째 이 구조에 맞게 특별히 완성되어 정보 분배 코드를 운반하는 송출 채널들이 그것이다. 채널들이란 신문지,헤르츠 전파, 혹은 필름 등을 의미한다. -96쪽. 

97쪽 

산업화 시대에 거의 모든 가족은 원형극장담론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가족간의 정보를 생산할 수 있는 대화는 점점 더 후퇴하고,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분배하는 담론이 승리의 행진을 계속한다. 그 결과 거실의 한 가운데 놓인 텔레비전은 과거 부모가 가지고 있었던 역할과 위상을 넘겨받는다. 이로써 가족간의 대화는 사라지고 담론만이 유일한 커뮤니케이션 형식으로 남게 된다.  

임종수(2008). 1970년대 텔레비전, 문화와 비문화의 양가성.언론과 사회.2008년 봄 16권 1호. 

52쪽.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인쇄매체의 텔레비전 비평이 대체로 비판적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이는 매체간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이 글 전체의 해석상의 주의를 요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놀로지에 대한 특정 담론이 지배적이었다는 점은 다른 한편으론 그런 인식이 당대에 무척이나 설득적이었음도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73쪽. 

텔레비전은 가정 외적인 사회적 공간에도 영향을 미쳐 사회적 삶과 권력 관계도 크게 변화시켜 놓았다. 텔레비전은 당산나무 그늘 아내라 촌장집과 같은 전통적인 공적 담화 공간의 힘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공간을 지배하고 공론을 이끌어가던 촌장의 지위도 함께 약화시켰다. 대신 다방,전파사,약국 등에 놓인 텔레비전이 단순히 볼거리 차원을 넘어 그 자체로서 새로운 공적 담화의 공간이자 주요 출처로서 대신했다.  

1970년대 영상 퇴폐주의와 부추겨진 데카당스라는 표현에 대한 생각. 

임종수(2004). 1960~70년대 텔레비전 붐 현상과 텔레비전 도입의 맥락. 한국언론정보학보.48권 2호. 

81쪽. 

텔레비전 도입의 맥락으로서 텔레비전이 위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과 그러한 텔레비전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의 심리 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텔레비전은 개발 연대의 유용한 수단으로서 근대화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근대화의 물결에서 가장 손쉽게 개인의 삶을 근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91쪽.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신기효과는 그 자체의 신기로움뿐만 아니라 외양적 세련됨과 더불어 새로운 콘텐츠가 창출하는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중략)따라서 미디어의 신기효과는 확산 초기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확산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재창출된다고 할 수 있다. 

94쪽  

텔레비전이 본격적인 대중화 단계에 들어선 이 시기의 가장 성공적인 장르가 드라마(일일극)였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96쪽 

주류문화 편입의 기제 측면 고민. 

102쪽 

결국 1960~70년대 텔레비전 도입에는 국가권력의 발전주의 전략,텔레비전 신기효과가 보여주는 유용성,주류문화에의 편입 심리 등이 상호작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이는 텔레비전이 근대화라는 역동적 변화가 요구하는 일상생활에서의 정상적인 삶을 위한 중심적 표상체였음을 의미한다. 

임종수(2003). 텔레비전 안방문화와 근대적 가정에서 생활하기.언론과 사회.2003년 겨울 12권 1호.   

110쪽-111쪽 

거실이 남긴 갑작스런 넓은 공간,갑작스런 넓은 벽면은 아래 최정호의 지적처럼, 가족의 이력과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갖가지 물건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대규모(110)로 발굴된 각종 문화재와 장서,사진,그리고 피아노와 같은 세련된 서양악기 역시 그 집안과 가족의 이력을 보여주는 유용한 장신구였다.여기에 온 가족이 이용하는 텔레비전이 자리잡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문화에서 낯설기 짝이 없는 대청(거실)에 텔레비전을 보는 자리라는 뚜렷한 기능이 부여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이게 거실은 가족 구성원이 공유하는 가족실임과 동시에 주택의 중앙에 위치함으로써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이동로이자 외부 세계로 연결된 탈출구였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에게 보여지는 지극히 공적인 공간이 공존했다. 

 

 126쪽 

안방극장은 텔레비전과 사적 세계의 결합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용어였다. 텔레비전의 다른 말로 통용된 안방극장은 안방이 가족들이 공유하는 가족실로 기능하였음을 보여준다. 물론 새로이 들어서는 문화주택에서의 거실 공간이 안방의 기능을 점차 대체해 오고는 있지만(이와 더불어 개별 시청화되고 있다) 이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안방은 한국인들이 사적으로 가장 내밀한 영역으로 지향했던 공간이었다.따라서 텔레비전이 안방에 놓였다는 것은 텔레비전이 외부와 차단된 가족들만의 정서적 공동체성을 공유할 수 있게 해준 대표적인 테크놀로지였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중략) 

드라마를 중심으로 한 텔레비전은 사적 세계의 가족 구성원들이 가장 많이 의존하고 즐기는 근대 오락이었던 것이다.  

김수정(2010). 수용자연구의 해독모델과 존 피스크에 대한 재평가.언론과 사회 봄 18권 1호. 

31쪽 

중요한 것은 능동적 수용자와 수동적 수용자를 가르는 일이 아니라, 또는 수용자가 얼마나 능동적인가라는 문제보다,수용자의 능동성이 발현되는 방식과 상황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텍스트와의 교섭과정 내 어떠한 계기에서 수용자는 특정 담론을 불러 들어오게 되며, 수용자의 이해와 논리를 특정 방식으로 구성하게 되는가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면 수용자를 본질적으로 취급할 위험이 있는 '능동적 수용자'와 '수동적 수용자'의 개념보다는, 일정 정소 습관성을 가진다고 해도 맥락과 관심에 따라서 변화될 수 있는 '능동적 해독방식'과 '수동적 해독방식'이라는 개념화가 더 유용하다고 판단된다. 

37쪽 

필자는 국내 수용자연구에서 흔히 발견되는 연구자의 과도한 이데올로기적 관심이 수용자연구의 지평을 너무나도 이데올로기 문제로 축소시키고, 수용자의 '해독을 해독'하는데 장애로 작용한다고 판단한다. 

38쪽 

저자의 과도한 규범적 기대라는 표현에 대해 고민하기. 

39쪽  

지배이데올로기의 단순성과 복잡성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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