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오늘 apouge님이 쓰신 <인문학의 죽음, 그리고 대학의 죽음에 대해>란 글을 잘 읽었습니다. "대학이 죽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정확한 표현이다.대학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학엔 (과거의) 대학이란 유령만이 떠돌 뿐이다."라는 제 나름대로 명명하자면, 이 급진적인 회의주의 형태의 수사에서, 우리는 현실의 절망을 다시 한 번 체감할 수 있고, 또 그런 체감과 더불어 오는 자극에 따라, 더 나은 희망 한 움큼을 쥘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마운 글이었습니다. 다만, 저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에서, 이 대학의 모순을 교수와 학생의 관계로만 설정할 것인가에 고민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대학 사회 내 분명한 '적대'로, 교직원의 문제를 꼽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는 교수와 학생 관계에서 오는 교육의 모순을 은폐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저는 좀 더 미시적이고, 경험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미천하지만, 몇 년간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이 경험이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 사회에서 총장보다 왕은 '교직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직원'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교직원이 갖는 그 애매모호함이 오히려 학생들을 곤란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냥, '서비스'차원에 머무른, '보조'의 차원에 머무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들알다시피 교직원이 갖는 그 모호함, 보이지 않음의 권력은, 교육에 대한 신성함의 추락을, 교수와 학생들 간의 관계만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특히, 교직원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토대로, 학생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을 꺼려 합니다. 예로 들어, '등록금 문제'가 있겠지요. 소위 '교육 투쟁'이라는 것 안에서 늘 제기되는, 등록금 문제에 있어, 학생회 측은 주로 교직원들을 상대로 학교 측 예산의 투명성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산설명회를 촉구하거나, 예산 내역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만, 교직원들은 너희가 평소 잘 모르는 용어가 많다, 모르는 부분이 많다며, 또 행정 상 비밀이 되는 것이 많다며, 공개하기를 꺼려합니다. 주로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라는 식으로 나오지요.  

더 문제는, 그런 전문적인 문제를 공부해와서, 다시 문제를 제기하면,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전문성'을 너희들이 뭔 데 문제삼느냐며, 행정일을 맡는 교수를 이용해서, 학생들에게 '(교직원 그들의 )  권위'를 보호해달라고 부탁하는 대리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가집니다. 그렇게되면, 교수와 학생의 관계에서 오는 그 교육을 매개로 한 예기치 않은 불편함은, 대학 사회 내 구조를 파악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사기를 꺾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일례로 저는 2009년에, 대학원 내 문제이긴 하지만,  제가 원하지도 않은 명목이 등록금 항목에 책정되어, 방학 중에 교직원을 상대로 질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직원은 이 때, 이러한 예산 책정은 '본부에서 하는 것이라며, 자신들은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는 말이 가진 여리고 동정심 느껴지는 언어 속에서, 권력의 생기는 솟구칩니다. 저는 그것을 '평상심의 권력'이라고 제 스스로 부르고 있습니다.)저는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다시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저는 성의있는 답변을 원했습니다만, 돌아온 것은 학교 홈페이지에 가면, 대학 정보 공개 문서가 있으니, 그걸 참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2008년 말이었나요. 그때부터 시행된 제도인데, 그 공개 정보는 그렇게 정확한 내역이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돌아온 것은 비간접적인 경로였지만, 교직원 그들의 심기가 불편하단 뒷말이었습니다. 게시판을 통해, 뉴스 내용을 언급해가며, 이런저런 구조적 문제를 제기해도, 그 문제에 대한 답보다는, 나중에 대리자를 통해 '학생인데, 자신들이 하는 일과 그 전문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죠.  

하나는 교직원과 학생들이 갖는 '친밀성'과 '내밀성'의 문제입니다. 이런 친밀성과 내밀성의 일반화 속에서 제가 경험했던 것은, 제가 '예비역 권력'이라고 명명한 현상이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오고 나서, 학생회를 맡으면서, 또 예비역 출신 학생회장, 임원들을 보면서, 그들이 결정적으로 학교 부패에 저항하지 못하고, 현실의 모순에 타협하게 되는 걸, 저는 많이 봐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직원들의 고의적 전략이라고 무리하게 해석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뭐랄까요. 이건 한국적 현상이라고 할까요. 저도 군대를 갔다오면서, 그런 우를 많이 범했지만, 일이 서투른 친구들을 욕하게 되고,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친구들이 개혁과 혁명을 이야기하는 걸, 교직원들과 함께 구경하면서, '으이그, 세상 물정 모르는 놈, 네가 군대에 갔다 와봐야 알지'같은 말을 서로 공유하게 되지요. 그런 친밀한 관계에서, 대학 내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는 시기, 그 모순을 실천으로 변혁해보려고 하면, 부딪히는 것이, 그런 친밀성에서 오는 양보입니다. "야, 그냥 이번엔 넘어가자. 알 사람 다 아는 걸..뭐. 유연하게 행동해." 이런 우연치 않은 친밀성의 고리가, 그들만의 내밀한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이건 비단 예비역들의 정체성을 훼손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고리가 우연하게 만들어지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의리와 정, 인연 때문에, 옳음의 순간을 양보하게 되지요. 그런 '일반적인 인맥'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 겁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건 수많은 연관성 중에 하나겠지요.

이 안에서, 부딪히는 모순. 교직원과 교수의 관계 문제이겠죠. 뻔히 잘 아는 관계 안에서, 학생들의 '태클'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갈라지는 건. 87년 민주화 때, 상징적인 활동을 하며, 국가의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도, 학내의 민주화에 대해선 조용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 표현은 그냥 비유일 뿐입니다. 바깥에서 진보를 외쳐도, 학교 문제에는 꿀먹은 진보인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교수들에게 그런 부담을 너무 줄 수 없는 문제 아니냐는 반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동의합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건, 그 연결고리죠. 이 세상에 대학이 썩었다는 걸 모르는 교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대부분 썩었지만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라고 생각하고 모순의 연결고리를 부여잡고, 학생들에겐, "너희가 좀 양보해라..어쩔 수 없는 문제야..", 교직원들에겐, "그런 그렇게 처리하면 될 것 같아요. 제가 그 학생 잘 말할께요. 염려하지 마세요."  결국 교수들 그리고 삶의 희망을 갖고 온 학생들은 이단들을 위한 자리(http://dangbi.tistory.com/52-> 이 포스트에서 인용했습니다.)를 만들 용기를 포기하게 되겠지요.  

이 포기와 양보의 순간은 생각보다 너무나 조용한 일상성 속에서 그냥 퇴색됩니다. 그리고 그 포기와 양보는 앞으로 다가올 학생들의 저항과 변화의 몸부림을, 또 하나의 관행으로 치부해버리는 공포 효과로 환원되는 것 같습니다. 그 효과가 뿌리잡은 곳에서 남은 건, 너무나 좋은 봄 날씨. 흩날리는 벚꽃, 나도 모르게 지어지는 안락한 공간들, 그리고 정상성의 독재입니다. 요구하고 저항하면, 나를 비정상으로 몰아버리는 이 정상성의 독재. 그 안에서 가장 조용하게 도사리고 있는 각각의 요인들. 그 요인들 중에서 오늘 하나, 교직원이라는 존재에 대해 부족한 잡글로 돌아봤습니다.  

 

좀 다른 형태의 <호모 아카데미쿠스>를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그 성찰성의 방향과 미래에 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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