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다니는 대학원을 상대로, 나름의 문제의식을 갖고 몇 가지 문제를 제기했었습니다. 학교 측 답변이 없어, 우울했었는데, 제기한 두 가지 문제 중 하나, 종합시험비용은 결국 학교 측이 학생들에게 부담지우지 않는 걸로 결정을 했다는 답변을 방금 읽었습니다. 

두렵고 그랬지만, 알고 지내는 알라디너분들께 기도 부탁드리면서, 그 응원 덧글들 읽고 힘을 냈습니다. 또 그 응원 덕분때문에 성과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얼그레이효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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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4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0-06-03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그나마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시네요.

얼그레이효과 2010-06-04 00:2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0-06-04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쓰신 만큼의 성과를 얻은 것도 반가운 일이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셈할 수 없는 귀한 경험을 하신 셈이네요.
제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단 있고 강한 분이신 모양이에요 ㅋㅋ
암튼 축하드립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6-04 13:0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후와님. 제가 고집이 좀 있습니다.ㅎ
 
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현대 예술의 거장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지음, 한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6월
구판절판


1. 비밀 속의 어린 시절,1932~1946 중 / (전략)이 시기부터 그의 주요 피신처는 스크린, 즉 캄캄한 영화관이었다. "인생, 그것은 스크린이었다"(각주 4: 이 표현은 또한 트뤼포의 '영화광 시기'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에릭 로메르가 사용하기도 했다)는 트뤼포의 문구는 이 유년 시절의 열정을 잘 요약하고 있다. 관객으로서의 트뤼포에 대한 첫 각인, 즉 조숙하고 비밀스럽고 날카롭다는 인상은 이 마법의 장소, 바로 앙리-모니에의 아파트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외로프 광장의 연속 상영영화관에서 형성되었다. -51쪽

점령기의 프랑스 영화에 대한 애정은-예컨대 1940년대 중반 어린 트뤼포가 남긴 수첩 기록에 의하면, 그는 <까마귀>를 14번, <인생 유전>을 9번, 클로드 오탕라라의 <연인Douce>를 7번 보았다-1946년 여름부터 시작된(53) 미국 영화의 대대적 상륙에 따라 또다른 천체의 발견, 즉 감독과 뱅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면서, 때때로 증오로 바뀌기도 했다. 전쟁이 시작된 시기에 모니크 이모를 따라 처음 간 이후, 트랑스아 트뤼포는 친구 로베르 라슈네, 클로드 티보다와 어울리면서 동네 영화관을 휩쓸고 다녔다.클리시 광장과 로슈슈아르 가 사이에는 20개가 넘는 영화관이 있었다. 클리시,아르티스티크,트리아농,게테 로슈슈아르, 팔레 로슈슈아르,록시,피갈,시네아크 이탈리앵 외에도 6,000석의 객석을 자랑하는 유명한 고몽 팔라스 극장도 있었다. 전쟁 기간 동안,점령기의 속박과 궁핍을 잊게 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이 꿈의 장소들을 에워쌌다. 다른 종류의 삶처럼 보이는 이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는 젊은 시네필에게 학교나 가족, 또는 사회보다 더욱 풍요롭고 자극적이며 매력적인 것이었다. 부모들은 점령기의 환경을 감수하면서 영화관,극장,쇼 무대를 찾아-53,54쪽

꿈속으로 도피했지만,자식들은 더 이른 낮 시간대에 바로 같은 장소에 틀어박혀 모의하고 학교 수업에 빠지고 가족과의 식사를 멀리했다. 트뤼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처음 본 200편의 영화는 학교를 빠지거나 돈을 내지 않고 슬쩍 영화관에 들어가 몰래 본 것들이다. 나는 이 멋진 즐거움에 대한 대가를 심한 복통이나 소화불량으로 치렀다. 이 증상은 모두 죄의식으로 인한 공포감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죄의식은 영화가 야기하는 감정을 증대시킬 뿐이었다. 나는 또한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구를 간절히 느낀 나머지 점점 더 화면 가까운 쪽에 앉음으로써 영화관의 존재를 잊을 수 있었다."부모가 연극 구경을 갈 때면 12세의 소년은 잠든 척 남아 있다가, 영화 시작 부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동네 영화관으로 달려갔고, 때로는 부모보다 먼저 집에 도착하기 위해 영화가 끝나기 전에 빠져 나왔다. -54쪽

13세 때 그는 피갈의 영화관에서 나올 때마다 누군가에게 미행당하는 일을 겪었다. "그 남자들은 해질 무렵 명확한 이유도 없이 어린이들을 노리고 뒤쫓는 것 같았다. 그것은 상당히 음산한 느낌이었다. 두렵기도 했지만 우리는 이 두려움을 즐겼다."트뤼포에게 숨어서 본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형성된 영화보기의 조건이기도 했다. 당시의 문화 상황 안에서 영화애는 이때부터 레지스탕스의 게토와도 같은 것이 되어간다. 다시 말해 반문화라는 조직망을 결성하고 비밀장치와 암거래 등으로 조금씩 사적인 일기장의 형태를 갖춘 뒤, 충실한 입문자들과 그 내용을 공유하는 비밀스러운 공동체 바로 그것이었다.-55쪽

정성일의 추천사 중 /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사상 최고의 감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영화사상 가장 영화를 사랑한 감독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그 유명한 테제,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고, 결국 세 번째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을 한 다음, 그 말을 실천한 사람이다. 트뤼포는 영화의 모든 것을 시네마테크에서 배운 첫 번째 세대이다.그는 본 영화를 보고 또 보았다.그는 학교에 거의 다니지 않았으며, 그런 다음에도 책의 도움을 빌리지 않았다.하지만 트뤼포는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모든 것을 걸었다. – 6쪽 -6쪽

청소년기의 프랑수아 트뤼포는 하루 3편의 영화를 보고, 일주일에 3권의 책을 읽는 일에 명예를 걸었다. 혼자서든 친구와 함께든 상관은 없었지만 판단만은 스스로 내려야했다. 트뤼포는 라슈네에게 독학자의 극단적 자세를 옹호하는 고백을 했다.(중략) 영화에 대해 더 잘 알기 위해 트뤼포는 즉시 분류 방식을 습득해 각각의 영(72)화감독을 대상으로 하는 파일을 만들었다."그것은 프랑스 감독 마르셀 아부케르에서 시작해 미국 감독 프레드 지네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이 파일 속에는 그는 <에크랑 프랑세>,<시네비>,<시네 보그>,<시네 미루아르>,<파리 시네마>,<시네 다이제스트>,<시네 몽드>등의 잡지에서 오려낸 기사를 정리해놓았다. 나바랭 가 아파트의 작은 붙박이장은 트뤼포가 쌓아놓은 자료로 금세 꽉 차버렸다. 1947년 가을 부모의 꾸지람을 들은 그는 자료를 로베르의 방으로 옮겼는데, 이 자료는 여기서도 방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곳에서 두 소년은 자료와 책들에 둘러싸여 생활했다. 이것은 그들의 포위된 정신구조에 대한 공간적 은유이자 축적된 지식의 물리적 증거였고,또한 1950년대와 1960년대 '시네필'의 황금기를 특징짓는 영화 리스트 작성, 등급-72,73쪽

매기기, 필모그래피 수집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숭배 현상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트뤼포는 전후 영화 주간지 가운데 내용이 충실했던 <에크랑 프랑세>에서 지식의 공백을 채울 또 하나의 수단을 찾아냈다. 1948년 4월 13일부터 12월 7일 사이의 독자 투고란에는 '파리 나바랭 가 33번지 f 트뤼포'라고 서명된 글을 15편 이상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의 펜을 빌려주세요'라는 이름의 이 독자 투고란은 33세의 젊은 평론가 장 샤를 탸겔라가 담당하고 있었다. 타겔라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나에게 집요하게 질문을 했고 새로운 작품 소개를 끝없이 요청했다. 나는 그의 열정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당시 생활의 절반은 영화해설 일로, 나머지 절반은 영화관 안에서 보내고 있던 나로서는 최고의 독자를 발견했던 것이다. 최소한 그 열정은 엄청났으니까."-73쪽

이런 형태의 수련은, 당시 젊은 영화광들과의 경쟁에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친구들 사이에서 곧 놀랄 만한 '인간 시네마테크'로 간주되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73쪽

더 어리고 더 반항적이고 더 가난한 트뤼포는 이 까다롭고 폐쇄적인 작은 시네필 집단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무언가를 증명해보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 즉 더 많은 영화를 보고 자신의 충동을 어는 정도 절제한 후 토론을 거쳐 확신을 세우고 최종 자료 분석과 글을 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연구 능력에 있었다. 그는 시네마테크 상영회에 리베트, 두셰,고다르,쉬잔 클로샹들레르와 함께 가장 충실히 참석했을 뿐 아니라,기사와 자료를 오려내 분류해 모아놓거나, 전문지를 읽고 많은 주석을 다는 일에 욕심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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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참참의 소개로, 뒤늦게 <인생은 아름다워> 보는 재미에 빠졌다. 필관해야 한다는 에피소드 20회,21회 분을 보고, 가슴이 이상하게 아파서 잠시 소파에 누운 채,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김해숙같은 '엄마'보다는, 김해숙같은 '형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철없는 삼촌 윤다훈에게 눈물로 장남의 커밍아웃을 힐난하지 말것을 호소하는 장면보다는, 큰 삼촌 김상중에게 차근차근 우회적으로 껍질을 벗기면서 하나, 둘 사실을 이야기하는 그 장면에서, 이상하리만치 묘한 매력을 느꼈다. 그 장면 자체에 대해서 말이다.  

어쩌면 내가 외동아들이라, 그런 풍경을 실제론 느낄 수 없다는 '비극'(?)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그 누군가에게 형수라는 호칭을 써보게 될까.  

드라마에서나, 쿨럭.  

개인적인 이유로 명절날 친척들을 잘 보러가진 않지만, 가끔 어머니의 전화기로 들려오는 삼촌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머니는 김해숙과 같은 역할을 실제로 하고 계신 것 같다. 삼촌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한 고민을 조용히 털어놓고, 어머니는 인자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삶에 대한 맥을 짚어주신다. 또 당신이 읽으셨던 책구절을 인용하시며, 그것을 삶의 한 구절로 사용해보라고 설득도 하시는 듯하다. 당신은 늘 온화했지만, 강하셨다. 지금도 물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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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02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해숙 정말 연기 잘하죠.
이 분 참 좋드라요.^^

얼그레이효과 2010-06-04 00:21   좋아요 0 | URL
김해숙 씨 짱입니다!
 
평론가 매혈기 - 글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킨 한 평론가의 농밀한 고백
김영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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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문화원 막내 세대 중 - 영화에 관심이 옅은 관객이라면, 굳이 극장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아니, 취향이 독특한 관객일수록 점점 극장에 가는 것이 귀찮아지는 시대를 맞고 있다. 영화를 꼭 영화관에서 보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되면서 영화관에 모여 일종의 동지에를 갖고 영화를 즐기는 것이 점점 어려운 일이 돼가고 있다. 영화를 DVD 플레이어나 컴퓨터로 보는 것이 일상화되면서 특정한 영화공동체도 사이버 공간으로 상당 부분 옮겨갈 것이다. 이럴 때 영화는 특유의 주술적 마력, 집단 최면의 감흥을 잃어버리는 대신 단속적인 관람이 가능한 다른 매체가 돼버린다.-17쪽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듯이 컴퓨터로 영화를 보다가 화면을 정지시킨 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메모를 할 수 있고, 보다가 흥이 떨어지면 다음에 볼 수도 있다. 서가에 꽂혀 있는 dvd는 책과 같은 기능(17)을 부여받은 채 주인의 처분을 기다리게 된다. 이것이 영화의 미래를 위해 불행한 현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어쩌면 이렇게 변화된 환경에서 대안의 영화를 꿈꾸는 이들의 또다른 창작수용공동체가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각자 발품을 팔아 특정한 시간에 특정 공간에 모여 영화를 보는, 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적극적인 관람의지는 당장은 드러나지 않아도 장차 형성될 영화 문화의 에너지를 위해선 여전히 중요한 행위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17,18쪽

개인적인 체험으로는, 스무 살을 전후해 거의 출근하다시피 프랑스 문화원에 드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80년대 초중반 무렵에는 영화를 보러 따로 갈 데가 마땅치 않았고 저질 시비에 휘말린 한국 영화나 <람보>류의 헐리우드 상업영화를 제외한 다른 영화를 볼 데라곤 외국문화원이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지금은 제작자가 된 모 시가 그 당시 프랑스 문화원에서 일하면서 토요일마다 일종의 시네클럽 비슷하게 모임을 운영했고 기술적으로 열악한 누군가의 단편영화를 상영한 뒤 그 자리에 참석한 청년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고 소아병적인 관념의 성찬이 대다수였지만 그때 그곳에 드나들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영화계로 유입돼 90년대 이후 한국 영화계의 일부를 차지했다. -18쪽

그 당시에 관한 기억은 꽤 많다. 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들어온 어느 선배가 소중히 품에 지니고 들어온 오손 웰스의 <위대한 앰버슨가> 비디오테이프를 프랑스 문화원의 조그만 강당에서 프로젝트로 상영하고 난 후 자막도 없이 본 그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교환하느라 허름(18)한 중국 음식점방에서 술과 혼탁한 말들로 보낸 밤은, 훗날 돌이켜보면 허접한 말의 수준 때문에 창피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지만 좀더 시간이 지난 후엔 미숙한 각자의 관념을 정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했던 귀중한 시간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것이다. -18,19쪽

그때 영화를 좋아하고 심지어 나중에 영화로 밥을 먹고살 욕심이 있었던 또래들 사이에선 영화 지식과 정보를 거의 백과사전 수준으로 지니고 있는 몇몇 청년들에 관한 전설이 돌고 있었고 문화원 시사실에서 그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면 과연 그들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궁금해 솔깃 귀를 세워 엿듣곤 했다. -19쪽

그 당시의 내게 외국 문화원은 일종의 시네마테크였다.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바로 이렇게 극장 안에서, 그리고 극장 바깥에서 조금씩 쌓이는 공동체의 우정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훗날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화인들이 20대 초반 시절 시네마테크에서 함께 영화를 보며 내공을 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느낀 동질감도 이와 비슷했다. 세상은 몰라주는 영화를 우리들만 발견한 것 같은 그 은밀한 희열의 축적 속에서 일종의 영화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이다.-21쪽

천대받던 미국 영화를 제멋대로 재평가하고 주류 언론에서 크게 대답하지 못했던 막스 오퓔스와 같은 감독에 열광하면서 새로운 비평적 기준을 세웠던 1950년대의 프랑스 청년들이 글로, 영화로 자신들의 영화관을 증명하고 발전시키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영화에서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영화를 발견하는 일, 거기서 새로운 의미와 감성을 건져내는 일, 그걸 오늘의 감성으로 번역해 재창조하는 일이 바로 이런 시네마테크,또는 그와 유사한 극장 체험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21쪽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은 서울아트시네마이지만 자주 가보지는 못한다. 그곳 프로그래머인 김성욱 씨와 사적으로 친하다면 친한 사이여서 사역 비슷하게 상영작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자리에 곧잘 불려나가는데도 그렇다. 가끔 그곳에서 관객들과 대화하면서 문득 현재의 시네필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동시에 그들이 부럽기도 하다. 영화에 관한 평을 쓰는 것이 직업이 되면서, 그리고 가정사에 매달린 생활인이 되면서 예전보다 훨씬 영화(21)를 덜 보게 된 자신을 알기 때문이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기보다는 집 서가에서 챙겨봐주길 기다리고 있는 dvd와 비디오에 더 눈이 가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시점부터 이런 영화관람 공동체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렸던 것이다.-21쪽

영화를 정말 열심히 보던 시절,나는 프랑스 문화원이나 서강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극장에 걸리는 영화 이외의 다른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은 문화원밖에 없었으니까. 서점에 가면 옛날 영화진흥공사에서 발간한, 오자투성이의 엉터리 번역 영화이론서가 한 줌밖에 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까. 대학 도서관에 서구의 영화이론서가 수백 권 꽂혀 있는 데가 별로 없었으니까. 나는 다분한 지적 허영기로 뜻도 모르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꽤 열심히 훑어보기는 했다.그때 몸에 받아둔 지식과 정보가 훗날 90년대 초에서 중반에 이르는 영화비평의 계몽주의 시대에 쓸 만한 먹고살 거리가 됐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이제는 영화지식과 정보의 독점보다는 해석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영화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35쪽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고 있다. 감독도,관객도 함께 변하고 있다. 미국 영화계의 '신동 세대'를 대표했던 스필버그가 이제 할리우드의 어른이 됐다. 그 세대만 해도 전통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 데이비드 린의 영화와 겨루고 싶다는 야심 말이다.이제는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는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있다.나는 좀 애매하게 걸쳐 있는 인간이다. 60년대가 영화가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대라고 생각하며 그 시대의 감독에게서 오히려 동질감을 느낀다.-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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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관이 아닌 곳에서 텔레비전, 비디오, 그리고 이제는 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네필'과 '영화광'을 섞어 쓰지만, 사실 영화사적으로, '시네필'은 고유의 의미를 지켜줄 필요가 있는 개념이다. '영화관에 가는 체험'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시네마'라는 개념 안에서, 영화광의 원초가 되는 '시네필'들은 늘 영화관에 '가는' 체험을 강조해왔다. 모두가 잘 아는 프랑소와 트뤼포의 전기를 보면, 그가 극장에 '가는'것으로 느끼는 행복감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담겨 있다.  

온라인 세상에 머무는 시간이 오프라인보다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요즘. 선거를 앞두고 유명 정치인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인증을 하는 것을 보면서, 소멸하는 정치적 열정을 걱정하는 내 마음을 씻어버리는 수많은 이들의 어떤 열광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그래 차라리 온라인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이 기운을 이어나가기 위해 인터넷으로 전자 투표하는 세상을 빨리 만들자구!하는 상상. 그런데, 조금 더 생각을 가다듬어보니, 영화는 영화관에 가서 보는 게 제 맛이요, 투표는 투표장에 가서 하는 게 제 맛인 것 같다. 

'시네필'들은 단순히 영화관 안의 어둠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봤던 연인들의 그 은밀한 동작들부터, 수많은 영화평론가, 그리고 영화감독들이 증언하는 영화관 문화 안의 흔적들.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기, 티켓을 끊기, 옛날 분들은 오징어를 직접 구워 검은 봉지 안에 땅콩과 함께 넣어 갔을 것이며, 더 옛날엔 좌석에 붙은 껌딱지를 밟아 영화를 놓치고, 화장실 오줌 지린내에 기분을 잡친 채로 영화의 본모습을 잊고 나오는 추억도 있었을 것이다.  

'투표장'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영화관만큼 흥미로운 추억은 없겠지만, 줄을 서고, 약간 후덥지근한 날씨 안에서 선거로 인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사람들의 안내를 받고, 내 신분증을 보여주며, 투표용지 안에서, 누구를 찍을 지 이름을 확인하기. 그리고 몇 번을 접어, 투표함에 손수 넣어보기. 그리고 나오면서 느끼는 얇은 책받침같은 두께의 추억들 혹은 그것보다 더 두터운 스스로의 뿌듯한 보람이 담긴 추억으로서의 한 풍경. 

투표, 그 '시네필'적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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