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1993). 하재봉의 비디오천국. 우리문학사.   

10쪽 

아직도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진정으로 권하고 싶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캄캄하게 불을 켜놓고, 차가운 얼음 주스나 혹은 진한 커피 한 잔을 타 들고, 천천히 <파리,텍사스>속으로 걸어들어가보라고. 일단 한 번 그 속으로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면, 그리하여 두 시간이 흐른 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스태프와 캐스트의 명단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할 때면, 당신은 이제 다시는 방안의 불을 켤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이미 삶의 온갖 비밀과 그 치유할 수 없는 쓸쓸함을 알아채버렸기 때문이다.

71쪽 ~72쪽

(전략) 지금은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 친구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원래 6시간 필름인데, 일본/미국용으로 4시간으로 재편집을 해서 시장에 내놓았으며,국내에서 상영된 것은 흥행을 위해 그것을 다시 자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 친구에게서 4시간용으로 만들어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비디오 테이프를 한 벌 복사해서 보았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번에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극장에서 내가 본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였다. 분명히 같은 영화였는데, 전혀 다른 영화였던 것이다. 아무리 영화를 수입해서 들여올 때 국내 관객들의 수준을 생각한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사막의 라이온> 같은 대작 영화도 하루 5회 상영하기 위해 2시간 남짓으로 여지없이 칼질당한 전례가 있었지만, 이처럼 앞뒤가 제 마음대로 편집되어서 상영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상업적인 목적 이전에 영화라는 예술 장르에 대한 분명한 도전이고 중대한 침해라고 생각한다.  

극장 상영용 영화는, 본래의 필름을 2시간 40분 정도의 시간에 맞게 원본의 회상 장면 같은 것을 없애고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었으며, 중요한 대목을 가위질한 것이었다. 내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몇가지 의문들이 비디오 테이프를 보면서 비로소 풀렸다. 줄거리가 이어지지 않았고, 꼭 나와야 될 인물들의 행적이 후반부에 묘연해지는 것(예를 들어 로버트 드니로의 애인이었다가 나중에 제임스 우즈의 정부가)(71) 되는 데보라의 행적)도 실마리가 풀렸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것은 다행히 240분으로 된, 원본 영화이다. 그런 점에서 비디오는 극장 상영 시간으로 생각하고 흥행을 걱정해야 되는 영화적 특성에서 얼마만큼 자유로울 수가 있으며, 그것 또한 비디오 테이프의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78쪽, 80쪽 

우리 시대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뛰어난 영화 작가중의 한 사람인(78)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작품이, 드디어 비디오를 통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사건이다. (이 작품이 일반 비디오숍에 과연 몇 개나 진열될 수 있을까? 싸구려 중국 영화와 3류 에로물,폭력물 사이에서 이처럼 수준 높은 영화가 버티기란 정말 힘들다. 영세적 규모와 한정된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 비디오숍에서, 다양한 특징을 지닌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비디오 체인점으로 현재의 비디오 시장은 점차 변모되어가야 한다. 그것만이 비디오를 영화의 하위 개념으로 종속시키지 않고 독자적인 비디오 문화를 싹틔울 수 있는 방법이다. 오락물 비디오에서 일반 교양, 다큐멘터리, 아트 비디오로 관심이 옮겨지기까지는 물론 지난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미리부터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자극적인 쾌락과 향락에 맡겨버리는 것이 된다.) 

162쪽 ,164쪽

비디오는 나에게 무엇인가? 마그네틱 테이프로 옮겨진 영화를 시청하기 위한 단순한 매개물에 불과한 것인가? 내가 비디오와 연결된 TV 모니터를 통해 보는 거슨, TV방송국에서 제작한 드라마나 쇼 대신,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잔혹한 액션물이나 예술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저급 포르노 필름이 아닌가? 나는 비디오를, 재생 영화를 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 이외에 또 무엇이 있나? 내가, 롯셀리니 감독의 <칼리큘라>를 이야기하면서 비디오의 사용에 대한 의문을 꺼내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나의 개인적 경험이 <칼리큘라>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품으로 비디오숍에 배급되어 있는 <칼리큘라>의 러닝 타임은 104분. 그러나 그것은 원본에서 40분 정도 잘려나간 것이다. 다행이라면 기본 줄거리는 그럭저럭 연결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소위 비품으로 보았다. 87년의 일이다. 내가 단골로 다니던 가게에서는, 비품을 별도로 라면박스 속에 숨겨놓고 빌려주고 있었는데(지금은 철저한 단속으로 비품이나 불법 복제가 거의 사라졌지만), 그 중에서도 포르노 테이프는 제목을 붉은 글씨로 써놓아 쉽게 구별이 되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붉은 글씨 속에서 CALICULA라는 글자를 발견하였다. 포르노 테이프를 보지 않는 나였지만, 카뮈의 인상 깊은 동(162)희곡을 기억하고 있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빌려와서 그것을 보았고, 곧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혀버렸다.  

나는 지금도, 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비디오 테이프보다, 당시 비품으로 보았던 <칼리큘라>가 내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고 확신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검열은 사라져야 한다. 정품으로 나와 있는 테이프에는, 충격적인 그룹 섹스나 수백 명의 성기가 거리낌없이 노출되는 정사 장면, 얼굴만 남기고 땅 속에 몸을 묻어놓고 칼로 목을 베는 잔혹한 살해 장면 등 다 잘려져 있지만, 그러한 장면들은 삶의 본질적 의미를 탐구해가는 깊이 있는 주제 아래 계산된 예술적 영상들인 것이다.  

 203쪽 -204쪽

나는 비디오 중독자다. 방안에서 이것저것 장난지차 더 이상 나를 자극하는 것이 없을 때, '비디오나 빌려볼까?' 생각한다. 내가 아는 어떤 여자는 스트레스가 쌓일 때, 비디오를 빌려본다는 것이다. 하룻밤에 세 개 정도는 보통이다. 휴일에는 일곱 개까지 '때린'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래야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것이다. 신경통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란다. 그렇다면, 비디오 테이프는 현대판 만병 통치약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슬리퍼를 끌고 집 나온 개처럼 어슬렁거리며 집 앞의 비디오 가게에 나가면, 수천 개의 비디오 테이프가 화려한 사각 상자에 갇혀 빼곡히 꽂혀 있다. 어떤 녀석들은 눈을 뱀처럼 뜨고 나를 노려보기도 한다. 나는 사열대 앞을 지나가는 장군처럼 그들을 일벌하다가 하나를 뽑아든다. 집에 돌아와서 비디오테이프의 직사각형 몸체를 들고 VCR 안으로 집어넣는 순간의 쾌감은, 섹스보다 뛰어나다. 가볍게 녀석의 몸을 손끝으로 밀면, 검은 기계는 그것을 삼킨다. 내 눈앞에서 비디오 테(203) 이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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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 비디오드롬
박찬욱 지음 / 삼호미디어 / 1994년 4월
절판


한국판 비디오에는 셀리나가 캣우먼으로 변신하는 과정이 빠져 있다. "여보, 나 왔어요...아 참, 난 독신이지"의 독백이 처절한 느낌으로 되풀이되고, 평범하 여성의 행복과 희망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파괴되고, 스스로 PVC의 상을 지어 입는 과정들 모두가 생략되었으니, 이야기 진행에 무리는 없으되 가장 의미심장한 표현 한 묶음이 사라진 꼴이다. 특히, 네온 싸인으로 벽면에 쓰여진 문장 '안녕 hello there'의 두 글자가 깨지면서, '여기는 지옥 Hell Here'으로 변하는 재치는 더욱 아까운 것. 단지 두 시간짜리 카세트에 영화를 구겨넣기 위해 이런 악행까지 서슴지 않는 상흔이니 만큼, 마지막에 붙어 있는 멋진 주제가 [face to face]역시 남아나지 못했음은 당연하다.[팀 버튼,배트맨 2]-89쪽

고다르는 평소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였던 [조용한 미국인](조셉 맨키위츠 감독)이 성우들의 더빙 때문에 그 다중언어의 묘미가 사라진 것에 심한 혐오감을 가져왔다. 그래서 그는 제작자의 여비서를 4개 국어 동시 통역자로 설정함으로써 영,불,이, 독어의 뉘앙스를 온존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노력마저도 이태리,미국 개봉판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배급업자들이 한 나라 말로 모두 통일시켜 더빙해 버렸던 것. 미국판을 수입해 찍어낸 한국 비디오는 그래서 엉터리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이들이 그림에도 손을 댔다는 사실이다. 있을 장면은 다 있으되, 지루함을 피한답시고 몇 초씩 줄여낸 쇼트들 때문에 배우들의 동작은 마구 튄다.[고다르, 사랑과 경멸]-112쪽

시작부터 서부극 팬은 배신 당한다. 광활한 평원의 아이드 스크린 - 물론 한국 비디오로는 TV 연속극과 다름이 없는 종횡비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으로 펼쳐지면 우리는 잠시 느긋하게 그 롱쇼트의 풍경과 곧이어 따라나올 장중한 남성합창을 감상할 준비를 하게 된다.[세르지오 레오네,석양의 무법자]-128쪽

최근에 [스팔타커스]는 오리지널 196분으로 복원, 전미 재개봉되었다. 여기에는 감독 의사와 무관하게 무식한 제작사에 의해 삭제되었던 부분이 추가되었는데, 그 내용은 로렌스 올리비에[크랏수스]가 자기의 노예 토니 커티스[안토나이너스]를 성적으로 유혹하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이다. 권력의 본질에 관한 큐브릭의 이 야심적인 해부가 우리나라 비디오판에는 당연히 없다.[스탠리 큐브릭,스팔타커스]-148쪽

경찰서 장면을 눈여겨 보면, 짐이 형사의 방으로 옮겨가면서 넥타이 길이가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영화에서 가장 저질러지기 쉬운 실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튿날 등교길의 짐이 실내에서는 넥타이를 매고 있다가 집밖으로 나올 땐 노타이 차림인 것까지 실수로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실수이다. 실내 마지막 쇼트 끝에서 짐은 넥타이를 풀면서 프레임 아웃한다. 다만 화면이 좌우로 잘려나가는 바람에 그 동작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부르주아 가정의 억압적 분위기에 대한 짐의 반항심을 표현하는 중요하는 코드가 비디오업자의 무지에 의해 파손당한 경우, [반항]은 무엇보다도 시네마스코프 미장센의 탁월함으로 유명한 작품이므로 마땅히 '우편함'처리를 했어야 옳았다.[니콜라스 레이, 이유없는 반항]-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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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비평>을 다시 읽는다. 오늘은 첫번째 시간, 1997년 조세희 선생님의 창간문 몇 구절을 담아 본다.  



<창간호를 내면서>- 무산된 꿈, 희망의 복원 / 조세희(1997년 9월) -16p~17p

누구든 아주 조금만 생각해도 속으로 눈물 날 바로 이 1997년에 우리는 긴급한 마음으로 <당대비평>을 내놓는다. 시작은 셋이 했다. 우리는 이미 여름 기운이 느껴지는 어느 날 밤 아주 심각하고 또 더할 수 없이 비장한 마음으로 편집회의를 시작했는데,그 자리에서 우리가 결정하고 다음 날부터 급히 청탁에 들어가 만들어낸 것이 물론 미흡한 점이 수없이 많을 이 창간호이다.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해주시고, 차근차근 준비해 알찬 내용의 책을 경제 상황이 나아질지 모르는 겨울이나 내년 봄, 또는 아예 1년 뒤에 내라는 분들의 충고도 있었지만, 좀더 많은 사람들과의 합의나 계획, 대안, 그리고 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는 1997년이 가하는 정신적 압박이 크니까 우선 그것에 저항하고 보자고, 우리는 생각했었다. 나 개인은 1995년에 시작해 1997년까지 이어진 두 나라 노동자들(두 나라는 한국과 프랑스, 얼그레이효과 설명)의 투쟁, 즉 신뢰할 수 없는 권력이 결정하는 조건에 따르지 않겠다는, 미래를 위한 당당한 저항에서 배운 것이 많았다. 실제로 우리가 책을 만드는 시간에도 지난 긴 세월동안 우리를 지배하고 절망으로 이끈 구독재체제의 또 다른 얼굴들이 21세기까지 점령해버리겠다는 음모,거래,암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지난 독재시절 이들 하나하나가 사실은 자기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자유인이 아니었다.  

내가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 더욱 그랬던지, 나에게 그들은 손에 국민의 피를 묻힌 권력자 밑에서, 또는 그 권력자와 제휴한 또 다른 독재자 밑에 들어가 노예의 삶을 산 종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안겨다주었던 갖가지 절망이 지금 나로 하여금 이런 글을 쓰게 한다. 

20세기를 우리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보냈다. 백 년 동안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이 헤어졌고, 너무 많이 울었고, 너무 많이 죽었다. 선은 악에 졌다. 독재와 전제를 포함한 지난 백 년은 악인들의 세기였다. 이렇게 무지하고 잔인하고 욕심 많고 이타적이지 못한 자들이 마음놓고 무리져 번영을 누렸던 적은 역사에 없었다. 다음 백 년의 시작, 21세기의 좋은 출발을 위해서라도 지난 긴 세월의 적들과 우리는 그만 헤어져야 한다.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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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 자유주의자들 - 요한복음 ㅣ 복음서와의 낯선 여행 1
김진호 지음 / 동연출판사 / 2009년 12월
품절


특히 현대신학은 <요한복음>의 종말론적 입지를 '실현된 종말론' 혹은 '실현되어가는 종말론'으로 이해함으로써, 종말론적 신앙담론과 세속적 근대사회 사이의 어정쩡함을 벗어나는 신학 내적 논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복음서는 '현대신학의 꽃'이 되었다. 불편한 것이 아니라, 가장 익숙하고 가장 빛나는, 현대화된 신학적 의미가 넘쳐나는 텍스트가 된 것이다. -28쪽

"로고스가 '살덩이(싸륵스)가 되었다"(14절a), '몸'(소마)이 아니라 살덩이다. 성/승화된 혹은 성/승화 가능성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세속화된 몸이다. 어떤 아름다운 말로 치장해도 결국은 드러나고 마는 적나라함 그 자체다. 반면 '소마'는 미화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육체/존재를 가리킨다. 예컨대 영웅의 몸, 예언자의 몸 등과 같은 것이다, 허나 어떤 영웅인들, 어떤 위대한 예언자인들 그 속이 곪아터지지 않은 육체를 갖고 있으랴. 다만 그 시대의 언어가 그렇지 않은 듯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31쪽

그런 점에서 '살덩이'는 '현실'에 대한 냉혹한 평가를 전제한 존재의 실체적 모습일 수 있다. 그래서 이상화된 궁극인 '로고스'와 결코 이상화될 수 없는 현실의 존재인 '살덩이(싸륵스)' 사이에는 공유점이 전혀 없다. 그런데 '그 로고스가 싸륵스가 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제 로고스는 싸륵스를 통하지 않으면 실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로고스의 육화('소마'화)를 자부했다. 또 장로와 예언자와 감독과 교사 등, 지도자들은 '승화된 육체'였다. 그렇게 믿었다. 궁극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에서 파생된 무엇이라는 일종의 '잠재적/예(31)비적 궁극'이었다. 그렇기에 분쟁이 있을 때 교회는 분쟁의 조정자가 될 수 있었고, 지도자들은 갈등의 해결사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재판관이었다. 옳고 그름을 판별한 예비적인 거룩한 몸이었다. 신이 덧입혀짐으로써 그 육체가 '예비적인 거룩의 몸'이 된 것이다. -31,32쪽

한데 실재 그런가. 도대체 누구의 몸이,감독인들 장로인들 예언자인들 교사인들, 타인과는 조금이라도 거룩한 무엇이 있으랴? 실재를 들여다보면 한시라도 추잡한 욕구를 떨칠 수 없는 약한 육체가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 아닌가? 어떤 육체가 싸륵스이면, 다른 누구의 육체도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다른 육체, 승화된 소마를 주장하는 이(들)가 있다. "로고스가 싸륵스가 되었다." 이 말은 그런 주장을 부끄럽게 한다. 그런 주장의 효력을 절멸시킨다. 기존의 철학적 사유를 빌려서 상투적인 신조적 나열을 하는 것으로만 보였던 서언은 바로 이 대목에서 통념을 전복시킨다. -32쪽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그 내용이 무엇이냐를 지시해주는 게 아니라, 그것을 주장하는 자신들이 정통성을 갖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 초점이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요한복음'은 이런 대비법에서 한 편의 메시아주의가 가짜 메시아주의임을 강변하고 있을 뿐, 자신의 메시아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44쪽

주류 사도계 그리스도교에 대한 동기의식에도 불구하고, 요한계 공동체는 유대교를 모방하여 독자적 발전을 기획하는 주류 교회들의 예전화, 제도화 추세를 경계하고 있다. 요컨대 당시 주류 그리스도교 운동은 로마제국적 영웅주의나 유대 메시아주의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혈통적,육정적,남성주의적 메시아주의에 몰두해 있을 때, 대중적 구원담론이 패권주의와 겹쳐지고 있을 때, 이 공동체는 거기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그 모두를 비판하는 제3자로서 남아 있으려 했다.그것을 '자발적 소수자'가 되려는 선택이다. 그것은 권력 게임의 정당한 비판자로 남아 있기 위함이다.또한 자신들도 좀처럼 자유로워지지 못한 그 강렬한 욕망, 그 권력 본능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체하려는 것이다.-49쪽

사적 네트워크를 통해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는 전략적 선택의 합리성이 닮음꼴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과 어떻게 연루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아무튼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대단히 획일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질적인 것에 지나치게 배타적인 얼굴을 하게 되었다. 미궁 속에 가두어둔 자신의 괴물적 속성은 이들 이질적인 존재를 희생양 삼아 존재하는 우리 내면의 야수성인 셈이다.이질적인 약자를 잡아먹는 미노타우르스는 우리 문명이 낳은 우리 자신의 괴물적 속성인 것이다.-59쪽

한데 역사적 교회는 영을 억압하였다. '영의 정치'를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배제하였고, 순화된 영만을 주변부로 포용하였다. 오늘날 주변부에서 일어나 새로운 중심을 형성할 기세로 확산되는 이른바 성령파 그리스도교는 영의 제도화이지 제도를 넘어서는 '영의 정치'가 아니다. 아무튼 교회가 영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잃어버렸다는 것은,자기를 근원적으로 성찰할 신앙 내적 잠재력을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그리스도교 신학은 영이 부재한 교회의 변증론에서 출발했으며, 그것을 넘어서고자 할 때조차도 근원적인 자기 성찰을 시도하지 못해왔다.-69쪽

'축도한다'는 표현을 들으면서 예수의 축도 행위가 빵을 불리는 마술적 능력을 낳았다고 연상하였을 것이다. 한데 '요한복음'의 예수는 빵을 받아먹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렇다면 예수가 빵을 늘리는 마술을 행했다기보다는 작은이에게서 나온 음식이 시발점이 되어 제각기 먹을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내놓아 서로가 먹게 되었다는 상상이 가능하다. -95쪽

그 거대한 담론들은 고통 받는 이의 시선에서 이야기하기보다는 고통을 거래함으로써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부류의 체계 혹은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115쪽

확실성에 관한 기억, 그 환희어린 '각'의 체험은, 그 체험으로 말미암은 확고한 신념으로 구성된 정체성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많은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단순 명확하게 그 색깔을 드러내리나는 믿음이 그 환희어린 정체성 속에는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선명함 속에 인류의 만행이, 인간이라는 종의 그 잔혹성이 존재의 속성으로 새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143쪽

안병무 선생이 촉발한 이 복음서의 민중신학적 상상력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신랄하다. 왜 우리 신앙은 자신도 모르게 배타적인 심성을 강하게 담고 있는가, 왜 우리 신앙은 선교 현장마다 증(241)오를 낳고 싸움을 낳고 주검을 낳는가, 왜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을 문제시하는가, 왜 사람들은 속속 교회에서 철수하고 있고, 왜 대안적 신앙에 대한 바람을 그토록 강력하게 타전하고 있는가.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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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돈 셈'에 밝을 나이도 된 듯 하지만, 아직 은행에 가면 울렁증 비슷한 것이 있다. 번호표 뽑을 때, 괜히 손에 땀이 나고, 은행직원이 상냥하게 내 번호를 부를 땐 더 그렇다. 은행 직원이 알아서 친절하게 다 해주겠다는 데 왜 이리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대하냐고 핀잔을 주는 것 같은 느낌. 이게 비단 나만의 경험이 아니란 것을 알게된 건 내 또래 친구들 혹은 평소 친분을 쌓고 지내는 평론가 몇몇 분들과의 만남에서 나온 소소한 대화 때문이었다. 

정겨운 자리가 점점 끝나가고, 돈을 내겠다고 주섬주섬 바지를 매만지는 나의 지인들은 대부분 차분하게 지갑 안에서 빳빳한 지폐를 꺼내기보단, 여기저기 쑤셔넣은 흔적이 강한 꼬깃꼬깃한 지폐를 이리저리 꺼내본다. 내가 미처 돈이 없을 땐, 그런 동작이 "어랏, 이 사람 한턱 쏘겠다더니, 허풍이었어?"로 오인하게 만들기도 한다.(순간 흐르는 땀. 혹은 이런 상황을 세심하게 즐기는 친구도 몇 명 있더랬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곳에서 돈이 나올 땐 웃음이 나온다. 구겨진 만원짜리 지폐들, 가방 저 깊숙한 곳에도 나오지 않아, 결국 가방을 털털 털어보니 쏟아지는 동전과 지폐들. 한 평론가는, 이게 다 책만 파는 놈들의 습성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넘긴다.  

무슨 예금이니, 무슨 적금이니 이런 것도 이제는 준비해야 할 나이, 아니 벌써 준비해야 할 나이라고 스스로 꾸짖을 때는 종종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올 때다. 소위 '걸려든 것'이다. 왠일로 전화를 받았냐는 심정으로, 준비된 멘트를 길게 소화하는 한 남자의 은행 상품 소개를  차분하게 들어준 적이 있다. 회의를 가야한다고 거짓말도 해봤지만, 남자는 나의 귀를 놓아주지 않았다.  "죄송합니다.."하고 확 끊을까 하다가, 정성이 갸륵해 결국 거의 다 들어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문득 집 깊숙한 곳에 쳐박아 둔 통장을 꺼내본다. 컴퓨터 옆에 조용히 놓여진 지갑을 다시 꺼내본다. 제대로 쓰지 않는 몇 장의 체크카드 뒤로 그나마 잘 쓰는 반찬가게 적립카드가 소심하게 삐져나와 있다.  주민등록증에 있는 얼굴을 매일 보지만, 오늘은 새롭다.  

갑자기 몇 년 전,  주식을 독학하겠다며, 휴가 귀대일에 몇 권의 주식 관련 서적을 사서 갖고 온 후임 녀석의 귀여운 말이 생각난다. 

"병장님 이제 곧 제대도 얼마 안 남았는데, 저랑 같이 이런 거 공부 한 번 하시죠. 세상 사람들 제 또래 애들 요즘 장난 아니에요." 

고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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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1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찬가게도 적립카드가 있군요...
그런데 어째 이 대목에서 울컥하네요.
적립카드를 만들었을 정도면 반찬을 늘 사드신단 얘긴데
음,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네요...

얼그레이효과 2010-06-16 01:45   좋아요 0 | URL
혼자 산 지. 13년째에요.ㅋ(군대 포함)

이잘코군 2010-06-15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금이니 펀드니 뭐니 하면서 가입하라고 전화가 자주 와요. 그때마다 저는 "저 그런 거 할 돈이 없어요. 정말 돈이 없어요." 그럽니다. -_- 그럼 아 네, 하고 끊어요. ^^

얼그레이효과 2010-06-16 01:45   좋아요 0 | URL
오 다음에 써먹어야겠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