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돈 셈'에 밝을 나이도 된 듯 하지만, 아직 은행에 가면 울렁증 비슷한 것이 있다. 번호표 뽑을 때, 괜히 손에 땀이 나고, 은행직원이 상냥하게 내 번호를 부를 땐 더 그렇다. 은행 직원이 알아서 친절하게 다 해주겠다는 데 왜 이리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대하냐고 핀잔을 주는 것 같은 느낌. 이게 비단 나만의 경험이 아니란 것을 알게된 건 내 또래 친구들 혹은 평소 친분을 쌓고 지내는 평론가 몇몇 분들과의 만남에서 나온 소소한 대화 때문이었다.
정겨운 자리가 점점 끝나가고, 돈을 내겠다고 주섬주섬 바지를 매만지는 나의 지인들은 대부분 차분하게 지갑 안에서 빳빳한 지폐를 꺼내기보단, 여기저기 쑤셔넣은 흔적이 강한 꼬깃꼬깃한 지폐를 이리저리 꺼내본다. 내가 미처 돈이 없을 땐, 그런 동작이 "어랏, 이 사람 한턱 쏘겠다더니, 허풍이었어?"로 오인하게 만들기도 한다.(순간 흐르는 땀. 혹은 이런 상황을 세심하게 즐기는 친구도 몇 명 있더랬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곳에서 돈이 나올 땐 웃음이 나온다. 구겨진 만원짜리 지폐들, 가방 저 깊숙한 곳에도 나오지 않아, 결국 가방을 털털 털어보니 쏟아지는 동전과 지폐들. 한 평론가는, 이게 다 책만 파는 놈들의 습성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넘긴다.
무슨 예금이니, 무슨 적금이니 이런 것도 이제는 준비해야 할 나이, 아니 벌써 준비해야 할 나이라고 스스로 꾸짖을 때는 종종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올 때다. 소위 '걸려든 것'이다. 왠일로 전화를 받았냐는 심정으로, 준비된 멘트를 길게 소화하는 한 남자의 은행 상품 소개를 차분하게 들어준 적이 있다. 회의를 가야한다고 거짓말도 해봤지만, 남자는 나의 귀를 놓아주지 않았다. "죄송합니다.."하고 확 끊을까 하다가, 정성이 갸륵해 결국 거의 다 들어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문득 집 깊숙한 곳에 쳐박아 둔 통장을 꺼내본다. 컴퓨터 옆에 조용히 놓여진 지갑을 다시 꺼내본다. 제대로 쓰지 않는 몇 장의 체크카드 뒤로 그나마 잘 쓰는 반찬가게 적립카드가 소심하게 삐져나와 있다. 주민등록증에 있는 얼굴을 매일 보지만, 오늘은 새롭다.
갑자기 몇 년 전, 주식을 독학하겠다며, 휴가 귀대일에 몇 권의 주식 관련 서적을 사서 갖고 온 후임 녀석의 귀여운 말이 생각난다.
"병장님 이제 곧 제대도 얼마 안 남았는데, 저랑 같이 이런 거 공부 한 번 하시죠. 세상 사람들 제 또래 애들 요즘 장난 아니에요."
고놈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