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현대신학은 <요한복음>의 종말론적 입지를 '실현된 종말론' 혹은 '실현되어가는 종말론'으로 이해함으로써, 종말론적 신앙담론과 세속적 근대사회 사이의 어정쩡함을 벗어나는 신학 내적 논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복음서는 '현대신학의 꽃'이 되었다. 불편한 것이 아니라, 가장 익숙하고 가장 빛나는, 현대화된 신학적 의미가 넘쳐나는 텍스트가 된 것이다. -28쪽
"로고스가 '살덩이(싸륵스)가 되었다"(14절a), '몸'(소마)이 아니라 살덩이다. 성/승화된 혹은 성/승화 가능성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세속화된 몸이다. 어떤 아름다운 말로 치장해도 결국은 드러나고 마는 적나라함 그 자체다. 반면 '소마'는 미화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육체/존재를 가리킨다. 예컨대 영웅의 몸, 예언자의 몸 등과 같은 것이다, 허나 어떤 영웅인들, 어떤 위대한 예언자인들 그 속이 곪아터지지 않은 육체를 갖고 있으랴. 다만 그 시대의 언어가 그렇지 않은 듯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31쪽
그런 점에서 '살덩이'는 '현실'에 대한 냉혹한 평가를 전제한 존재의 실체적 모습일 수 있다. 그래서 이상화된 궁극인 '로고스'와 결코 이상화될 수 없는 현실의 존재인 '살덩이(싸륵스)' 사이에는 공유점이 전혀 없다. 그런데 '그 로고스가 싸륵스가 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제 로고스는 싸륵스를 통하지 않으면 실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로고스의 육화('소마'화)를 자부했다. 또 장로와 예언자와 감독과 교사 등, 지도자들은 '승화된 육체'였다. 그렇게 믿었다. 궁극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에서 파생된 무엇이라는 일종의 '잠재적/예(31)비적 궁극'이었다. 그렇기에 분쟁이 있을 때 교회는 분쟁의 조정자가 될 수 있었고, 지도자들은 갈등의 해결사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재판관이었다. 옳고 그름을 판별한 예비적인 거룩한 몸이었다. 신이 덧입혀짐으로써 그 육체가 '예비적인 거룩의 몸'이 된 것이다. -31,32쪽
한데 실재 그런가. 도대체 누구의 몸이,감독인들 장로인들 예언자인들 교사인들, 타인과는 조금이라도 거룩한 무엇이 있으랴? 실재를 들여다보면 한시라도 추잡한 욕구를 떨칠 수 없는 약한 육체가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 아닌가? 어떤 육체가 싸륵스이면, 다른 누구의 육체도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다른 육체, 승화된 소마를 주장하는 이(들)가 있다. "로고스가 싸륵스가 되었다." 이 말은 그런 주장을 부끄럽게 한다. 그런 주장의 효력을 절멸시킨다. 기존의 철학적 사유를 빌려서 상투적인 신조적 나열을 하는 것으로만 보였던 서언은 바로 이 대목에서 통념을 전복시킨다. -32쪽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그 내용이 무엇이냐를 지시해주는 게 아니라, 그것을 주장하는 자신들이 정통성을 갖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 초점이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요한복음'은 이런 대비법에서 한 편의 메시아주의가 가짜 메시아주의임을 강변하고 있을 뿐, 자신의 메시아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44쪽
주류 사도계 그리스도교에 대한 동기의식에도 불구하고, 요한계 공동체는 유대교를 모방하여 독자적 발전을 기획하는 주류 교회들의 예전화, 제도화 추세를 경계하고 있다. 요컨대 당시 주류 그리스도교 운동은 로마제국적 영웅주의나 유대 메시아주의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혈통적,육정적,남성주의적 메시아주의에 몰두해 있을 때, 대중적 구원담론이 패권주의와 겹쳐지고 있을 때, 이 공동체는 거기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그 모두를 비판하는 제3자로서 남아 있으려 했다.그것을 '자발적 소수자'가 되려는 선택이다. 그것은 권력 게임의 정당한 비판자로 남아 있기 위함이다.또한 자신들도 좀처럼 자유로워지지 못한 그 강렬한 욕망, 그 권력 본능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체하려는 것이다.-49쪽
사적 네트워크를 통해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는 전략적 선택의 합리성이 닮음꼴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과 어떻게 연루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아무튼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대단히 획일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질적인 것에 지나치게 배타적인 얼굴을 하게 되었다. 미궁 속에 가두어둔 자신의 괴물적 속성은 이들 이질적인 존재를 희생양 삼아 존재하는 우리 내면의 야수성인 셈이다.이질적인 약자를 잡아먹는 미노타우르스는 우리 문명이 낳은 우리 자신의 괴물적 속성인 것이다.-59쪽
한데 역사적 교회는 영을 억압하였다. '영의 정치'를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배제하였고, 순화된 영만을 주변부로 포용하였다. 오늘날 주변부에서 일어나 새로운 중심을 형성할 기세로 확산되는 이른바 성령파 그리스도교는 영의 제도화이지 제도를 넘어서는 '영의 정치'가 아니다. 아무튼 교회가 영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잃어버렸다는 것은,자기를 근원적으로 성찰할 신앙 내적 잠재력을 상실한 것을 의미한다.그리스도교 신학은 영이 부재한 교회의 변증론에서 출발했으며, 그것을 넘어서고자 할 때조차도 근원적인 자기 성찰을 시도하지 못해왔다.-69쪽
'축도한다'는 표현을 들으면서 예수의 축도 행위가 빵을 불리는 마술적 능력을 낳았다고 연상하였을 것이다. 한데 '요한복음'의 예수는 빵을 받아먹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렇다면 예수가 빵을 늘리는 마술을 행했다기보다는 작은이에게서 나온 음식이 시발점이 되어 제각기 먹을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내놓아 서로가 먹게 되었다는 상상이 가능하다. -95쪽
그 거대한 담론들은 고통 받는 이의 시선에서 이야기하기보다는 고통을 거래함으로써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부류의 체계 혹은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115쪽
확실성에 관한 기억, 그 환희어린 '각'의 체험은, 그 체험으로 말미암은 확고한 신념으로 구성된 정체성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많은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단순 명확하게 그 색깔을 드러내리나는 믿음이 그 환희어린 정체성 속에는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선명함 속에 인류의 만행이, 인간이라는 종의 그 잔혹성이 존재의 속성으로 새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143쪽
안병무 선생이 촉발한 이 복음서의 민중신학적 상상력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신랄하다. 왜 우리 신앙은 자신도 모르게 배타적인 심성을 강하게 담고 있는가, 왜 우리 신앙은 선교 현장마다 증(241)오를 낳고 싸움을 낳고 주검을 낳는가, 왜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을 문제시하는가, 왜 사람들은 속속 교회에서 철수하고 있고, 왜 대안적 신앙에 대한 바람을 그토록 강력하게 타전하고 있는가.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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