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 - 한국 사회문화사 01
이효인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6월
절판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집을 나온 여자> 같은 영화가 다시 등장하게 된다. 전두환 정권이 국민의 우중화 정책으로 채택한 스포츠 산업 우대와 섹스 산업의 연성화 정책은 곧바로 한국 영화 스크린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관계 설정과 묘사에서도 연성화 정책으로 외면화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얼마 전만 하더라도 번성했던 에로 비디오, 즉 극장에서 먼저 상영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비디오로만 출시되는 영화들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영화들이 1980년대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 바로 <산딸기>, <애마부인>등이다. 1981년부터 이런 영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50쪽

1980년대 중반까지 이런 영화가 성행하게 된 일차적인 이유는 상품으로서의 가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치 환경을 그리거나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는 제재를 받던 시기였던지라 상품으로 가장 적합한 것은 '웃음'보다는 '밀실의 원초적 욕망'을 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산업과 예술 모두에서 후퇴를 거듭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 소재나 이야기 구조에 빠져 있던 한국 영화계가 어느날 갑자기 어느 정도 수준을 지닌 대중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전두환 정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성애의 묘사나 파격적인 설정조차 용납되지 않(253)던 사회적 분위기가,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정권으로부터 그것이 허용되는 분위기로 바뀐 '사회 조건'도 이런 영화의 성행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253~254쪽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분위기를 비판하면서 조금이나마 고치려는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그 작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경제 호황기였던 1980년대에 경제적 성장에 의한 개개인의 풍요는 남성들의 매매춘 행위를 보다 손쉽게 가능하게 했을 것이고, 정권은 그 편의를 위해 각종 윤락 관련 산업을 양성화시켰다. 또 그러한 경제적 잉여는 남성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편리한 생활은 여성들에게도 '잉여 시간과 금전'을 제공했다. 뜻있는 자 누구에게나 매매춘이 가능하도록 조성된 '마초 파라다이스'는 여성들에게도 정반대의 반발심리나 성 욕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심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1970년대나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영화들과는 달리 1980년대의 '부인들' 영화는 이런 여러 가지로 복합된 조건들 속에서 태동할 수있었던 것이다. 또 이 영화들은 80년대의 '또 하나의 장르 영화'로서 미미하나마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었고, 1990년대의 에로 비디오 열풍의 토대가 되었다. -254쪽

에로 영화라는 1980년대의 장르형 영화들은, '여 주인공들의 욕정이 발휘될 수 있는 조건 형성과 진행 과정 그리고 결말'이라는 공식의 차원에서 그 근간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철저할 정도로 (주로 남성)관객들의 관음적 시선을 염두에 두고 노출/표현/변주되었다. <애마부인>시리즈나 <산딸기>시리즈는 처음에는 일반 극장에서 상영되었지만 후속편이 나올수록 점차 변두리 극장이나 비디오 상영 극장에서 상영되었고, 이후에는 아예 비디오로만 출시되어 자신들만의 고정 관객들을 확보해 나가기 시작했다.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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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 - 모던 뽀이에서 N세대까지
마정미 지음 / 개마고원 / 2004년 11월
절판


원칙적으로 공익광고는 국가의 이념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외국의 공익 광고는 대부분 각종 재단과 민간단체 등에서 진행한다. 국가의 이익을 공익광고로 실현하려는 욕구는 정부의 독선과 편견을 조장할 따름이다. 거기에는 정부의 이익과 개인의 욕구 사이의 조절기능이 상실되고 모든 개인의 욕구를 정부의 이익 안에 포함시키려는 관료의 지배욕이 드러날 뿐이다. 1980년대 군사정권 아래 공익광고의 주제로 가장 많이 다뤄진 것이 '질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86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은 1980년대 내내 대중의 일상과 의식을 옭아맨 대규모 의식조작의 수단으로 기능했다. 집권세력은 "올림픽 개최는 곧 선진국"이라는 기묘한 공식을 내세우며 대회 유치를 자신들의 치적으로 내세웠고, '질서'와 '화합'이라는 명목 아래 강력한 통합과 억제의 수단으로 이를 이용했다. 올림픽 유치와 함께 보신탕집이 불법화되고 영어 조기교육 붐이 불어닥친 것도 기억해둘 만하지만, 1980년대 내내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불시에 튀어나와 우리의 말과 행동을 거침없이 옥죄곤 하던 '질서'의 구호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궁극적으로 어떤 의도의 산물이었는지를 잘 보여-202쪽

준다. '질서'의 구호는 교통질서 차원에서 머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행동을 하나의 방향으로 몰아간 일종의 억압적 콤플렉스 기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202쪽

1988년 즈음부터 우리의 소비문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여기엔 1987년 민주화운동을 통해 미온적이기는 하지만 개헌, 대통령 직선제 등의 민주적 절차를 지나오면 언론기본법 폐지 등의 정치적 사회적으로 변화된 상황이 작용했다. 물론 가장 큰 요인은 88올림픽이다. 이제 소비재가 넘쳐나고, 그동안 퇴폐문화라고 거부했던 소비문화를 대학생들이 거리낌 없이 향유하기 시작하면서 바야흐로 혁명의 시대는 욕망의 시대로 접어 들어가게 된다. -217쪽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소비재 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수출역군이던 가전 3사들은 내수시장에 전력을 다했고 광고는 전자제품의 경합장이었다. 특히 백색 가전이라 불리는 세탁기, 냉장고, 전자렌지 등과 흑색 가전이라 불리는 텔레비전, 비디오 등의 생활용품들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컬러텔레비전의 보급과 함께 그 뒤를 이어 VTR이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문화전달매체로 자리잡아갔다. 1987년까지 전체가구의 약 14.6% 수준이던 한국의 VTR 보급률은 올림픽(217) 특수 덕에 1988년 보유대수 260만 대를 넘어서 평균 5가구에 1대꼴로 보급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90년대에는 350만 대로 늘었으며 92년 1월의 갤럽조사에 따르면 그 보급률이 54.2%로 나타났다. -217~218쪽

금성, 삼성, 대우 등 가전 3사는 당시 올림픽을 겨냥하여 간단히 예약녹화를 할 수 있는 대신 다른 기능들을 간소화한 '올림픽형 VTR'을 일제히 출시하고 대대적인 판매경쟁을 벌였다. 직장업무나 학업 때문에 올림픽 경기를 제시간에 감상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올림픽의 감격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지 않으냐고 유혹했다. -218쪽

그 이전까지 VTR과 비디오테이프에 대한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비디오 하면 떠오르는 것이 음란물이었기 때문이다. 꽤 오랫동안 각종 비디오테이프에 의무조항으로 삽입되던 문구가 있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법비디오들을 시청함에 따라 비(218)행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우수한 영상매체인 비디오를 바르게 선택 활용하여 맑고 바른 심성을 가꾸도록 우리 모두가 바른 길잡이가 됩시다. 한 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놓을 수도 있습니다."-218~219쪽

비디오 마니아들에게는 <대한뉴스>처럼 떠오르는 추억의 문구이다. 호환, 마마라니 이미 그 당시에도 시대착오적인 비유였지만 오늘날 되돌아보면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문구이다. 여하튼 VTR의 보급으로 인해 시청각문화활동은 수동적 성격에서 개인의 개성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능동적 성격의 것으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VTR의 발달과 폭넓은 보급은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이라는 새로운 업종을 탄생시켰으며, 주말이나 공휴일의 비디오 감상은 도시민의 자유로운 여가활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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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시간 - 1959-2009 대한민국 전자산업 50년사
전자산업 50년사 편찬위원회 엮음 / 전자신문사 / 2009년 10월
품절


최근 기업사에 관심이 생겨 본 책의 내용 일부를 옮겨 본다(상식 챙기기 목적도 포함)/ 우리 전자산업을 결산하는 최대 수확은 역시 1969년 1월 시행된 전자공업진흥법의 제정이라 할 수 있다. 이 법의 취지는 전자산업을 국가중추산업으로 진흥함으로써 산업설비 및 기술의 근대화,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케 한다는 것이었다. 1959년 금성사의 진공관 라디오 개발이 있은지 꼭 10년만의 일이었다. 이 법이 제정됨에 따라 정부는 비로소 본격적인 전자산업진흥시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그 가운데서도 상공부는 중점 육성대상 품목을 지정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확보함으로써 전자산업 육성 주무부처로서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됐다. 당시 상공부 장관에게는 중점 육성이 필요한 전자기기 품목을 지정할 수 있는 권한과 이 권한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전자공업진흥기본계획 수립 임무가 주어졌다. 이때 장관이 지정할 수 있는 중점 육성대상 품목은 관련기술 국산화, 사업계 전문화와 양산화, 성능과 품질 개선 등이 요구되던 것들인데 이는 결과적으로 민간업계에 상공부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수 있었던 근거들이기도 했다. -91쪽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업계는 성장 유망 품목이라는 화두를 던지기 시작했다. 1975년 전자산업의 주요 품목을 보면 반도체 조립 생산이 26%,흑백TV가 21%, 녹음기가 3%를 차지하고 있었다. 업계는 앞으로 이들 품목이 계속 성장을 주도할 것인지를 진단해 보고자 했다.(134) 1976년 한국무역협회는 세계적 시장조사기관인 ADL에 '한국의 전자산업 장기 전망'이라는 용역조사를 의뢰했다.장기적인 성장을 위한 유망 품목을 찾기 위해서였다. 조사 결과 가전제품으로는 컬러TV, VCR등이 유망 품목으로 꼽혔고 산업용 기기로는 전자식 교환기, 컴퓨터 및 주변기기 등 모두 24개 품목이 선정됐다.(중략)개발 환경을 조성하려는 지원사업도 활발하게 펼쳐졌다. 한국정밀기기센터(FIC)는 1971년 개최된 제2회 한국전자전람회에서 '신모델 경진대회'를 개최해 업계의 새로운 품목 개발을 유도했다. FIC는 1979년부터 이 대회를 '신개발 및 신모델 경진대회'로 확대하고 최우수업체에 수여하는 상공부장관상을 대통령상으로 격상시켜 전자업체가 자연스레 기술 개발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134,135쪽

198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는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정책에서(145)벗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1986년 7월 공포된 '공업발전법'은 산업정책 기조를 간접 지원에 두고 민간 기업의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유도한 정책이다. -145,146쪽

1980년대의 국내외 경기가 제2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침체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정부는 세 차례에 걸쳐 이를 타계할 정책을 펼쳐보였으나 업계의 불황은 지속되었다.같은 해 11월 8일 네 번째 정책이 발표되었다. 그 주요내용은 우선, 저축성 예금 증대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기업의 원가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예금금리를 2.5%, 대출 금리를 2.0%로 각각 인하하는 것이었다. 둘째 컬러TV,냉장고 등에 대한 특별소비세에 탄력세율을 적용해 기본세율의 30%를 인하함으로써 컬러 TV와 냉장고의 특소세 실행세율을 40%에서 28%로 낮추었다. 셋째로는 세타기, 냉장고, 컬러 TV등 내구성 소비재에 대한 은행이 수요지에게 수입가격의 80%까지 융자해주고 수요자는 2년 동안에 그것을 균등분할 상환하는 이른바 수요자 금융 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 대손귀책 등의 문제가 있었으나 당시의 전자산업의 발전과 수요창출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 정책들은 1984년 경기과열 우려에 따라 폐지된다. -176쪽

1969년부터 추진된 전자공업육성 8개년 계획에 따르면 계획이 마무리되는 1976년의 수출 목표액은 4억 달러에 불과했지만 실제 달성액은 250%나 초과된 10억 달러였다.내수와 수출 비중은 평균 4대 6 정도로 수출이 높았다. 이 역시 수출 기반의 경제성장 정책을 편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었다. 주요 분야의 국내 생산 계획은 어디까지나 수출을 전제로 세워지고 추진됐다. -229쪽

1970년대 중반 이후 자국 시장에 개도국들의 물품 수입이 급등하자 선진국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한국과 대만을 비롯해 일본의 수출이 급신장세를 보이자 선진국들이 자국의 산업 보호를 내세워 제동을 걸고 나섰다. 1976년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보호무역주의는 1978년에 들어 정점을 이뤘다. -230쪽

컬러tv는 국내에는 아직 컬러tv 방송이 방영되지 않는 상황에서(230)수출 주력푸목으로 부상한 특이한 경우였다. 당시 금성사와 삼성전자, 대한전선 등 가전3사가 조만간 컬러tv 방송의 방영이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서둘러 양산 체제를 갖춘 것이 1977년. 하지만 과소비와 국민위화감 조성이 우려된다는 시기 상조론에 밀려 방영시기가 계속 늦춰지자 3사는 그 대안으로 미국시장을 뚫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중략)바로 이때 미국 정부가 자국 내 tv업체 보호를 명목으로 한국정부에 자율수출 규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미국 정부는 또 한국에서 소비되지 못하는 상품을 왜 자국으로 밀어내느냐는 항의메시지도 함께 전달해왔다. 정부와 업계가 난관에 봉착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대목이었다. -230,231쪽

전자산업의 장기 발전계획은 1981년 1월 전자공업진흥법 제4조에 '전자공업진흥을 위한 기본계획(이하 '전자공업진흥 기본계획')'으로 공고됐다. 계획 시행 기간은 1981년 공고시부터 1985년까지다. 계획의 기본적인 발전방향은 가정용 기기는 수출 주도적으로 세계시장을 넓혀 나가고 산업용 기기는 내수 위주로 우선 국산화를 촉진한 후 정밀부품과 소재를 개발해 나가는 것으로 명시됐다. -249쪽

컬러TV방송은 마이너스 성장의 충격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특히 전자산업 활성화에 기여한 바가 컸다. 1981년 7월까지 국내에 보급된 컬러TV만 해도 100만대가 넘었다. (중략)당시 컬러TV시장을 주도하던 금성사와 삼성전자는 국민적 관심을 끌고 있는 컬러TV수상기 신 모델 개발과 출시에 온 힘을 쏟았다. 우리나라 전자산업 역사에서 소비자 선호도와 취향에 따라 가전제품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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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졸업 논문 준비로, 한 학기 동안 도외시해왔던 -제 '주무'라고 할 수 있는- '미디어/ 문화연구' 서적들을 다시 챙겨보는 중입니다. 그 가운데 좀 예기치 않은 '수작'을 발견했는데 김선아 선생의 『한국 영화라는 낯선 경계』라는 책입니다. 부제가 이 책의 내용을 다 말해주고 있는데요. 길지만 인용해보면 "코리안 뉴웨이브와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대의 국가, 섹슈얼리티, 번역, 영화"입니다. 한국 영화의 사회문화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연구 영역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영상 분야에 관심 많은 문화연구자들이 사회학적 사고를 통해, 영화 외부의 담론들을 연구하는 논문을 자주 발표하고 있고, (정통)영화학과에서 이론을 공부하는 이들도 영화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상호관련성을 조망하면서, 한국영화의 한 '꼴'을 보려는 작업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평론가 매혈기』의 저자인 영화평론가 김영진이나, 다들 좋아할 정성일의 시각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번에 김선아 선생의 책을 보면서 '흡족한' 구절들이 많아 도그지어 자국이 꽤 됩니다.  

이 책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이 자주 인용되고 있는데요. 전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화라는 대표적인 영상 매체가 갖는 힘. 그리고 그 힘과 관계 맺고 있는 자본의 스며든 형태에 대하여, 서구/비서구의 구도에서 과연 서구 중심의 '시각 경제'와 그 경제의 특성과 효과에 영향을 받는 비서구 국가들의 '지역성'은 어떻게 '통'하고 있는가에 대해 이 책은 자주 화두를 던집니다. 제가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소위 한국에서 작가주의 영화라고 하는 홍상수/김기덕/임권택/박찬욱 감독 등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텍스트'의 특성을 분석하고, 그 분석된 안이 어떻게 영화 외부적 시각과 관계맺을 수 있는가라는 저자의 시선 짚기입니다. 일례로 저자는 임권택이 꾸준히 고수하고 있는 민족적 특성으로 간주되는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뱉어내는 형식성이 전지구화적 시각경제에서 하나의 특이성이라는 주목 영역에 진입하지만, 그러한 주목 영역의 진입은 동시에 서구 자유주의자들의 오리엔탈리즘과 동맹을 맺을 위험이 있다 지적합니다.(사실 이 지적은 좀 새롭진 않아보입니다.서편제와 전지구화적 시각 경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찍이 탁석산 선생이 『한국의 정체성』에서 들었던 사례와 비교해서 읽게 되더군요) 

좀 재미있는 것은 제가 요즘 천착하고 있는 역사 과잉으로 촉발되는 '몰역사성'의 우려입니다. 책에서는 제 고민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주지는 않습니다만, 영화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통한 비서구 사회의 '기술적 근대화'가 이른바 '역사- 향수 영화'를 많이 생산하는 것에 대한 욕망을 저자는 밝혀보려 하는데요. 저자는 트랜스 내셔널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 있는 이 시대에, 비서구사회가 과거 억눌려왔던 혹은 인정받지 못했던 그 어떤 민족의 우울과 퇴행성들을 극복하려는 몸짓으로 서구가 일찍이 포기해왔던 부분들을 복귀시키거나, 또 서구에 결핍된 현존하는 가치의 형태들을 복원하려는 몸짓으로 봅니다. 이 몸짓은 즉 '인정의 몸짓'인거죠. 무엇보다 이런 인정의 몸짓은 '기술적 근대화'를 가친 비서구 국가들의 발전과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역사/ 향수 영화를 통해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이른바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갖고 있는 어떤 기계성의 특징. 그 기계성이 촉발하는 스펙터클로 인하여. 틈입된 이미지의 힘이 과연 역사와 개인의 진정한 만남. 심층적 만남을 고려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여기서 프레드릭 제임슨의 견해가 자주 인용 되더군요). 역사의 상품화. 스토리텔링의 욕망에 대해서는 김기봉 선생의 『역사들이 속삭인다』를 보면 이것이 우리 시대의 화두임을 느낍니다. 김기봉 선생의 시각보다 이 책에서 더 주목하고자 하는 건 바로 '매체'라는 기계성의 존재가 갖는 힘이겠지요. 이 기계성이 단지 우리에게 영화를 '보여준다'라는 동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을 '지배한다'라고 본다면, 이 매체가 갖는 인간과 역사의 관계는 매우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라는 문화 테크놀로지가 주는 재현의 힘. 그리고 그 힘에 영향을 받고 사는 우리 '영상적 인간'들의 수용 형태들. 『선덕여왕』,『아이리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는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로 구분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집 안에서 영화관을 꾸밀 수 있는 시대에, 이런 구분은 별 소용이 없다. 오히려 이런 구태의연한 구분보다 더 중요하게 짚어야 할 점은, 이러한 스펙터클이 아무렇지 않게 우리의 가정 속으로 들어와 편안하게 이 스펙터클을 즐기고 있는 어떤 시점. 어떤 시/공간의 경험 상태다. 전지구화적 시각 경제에서 집 안에서 나를 계속 움찔거리게 만드는 '뵨사마'와 '고미실'의 시각언어는 과연 나의 어떤 욕망선을 건드리고 있는 것일까. 그 욕망선의 주도권을 이미 이 이미지들에게 내준 것 같은 상황에서, 역으로 이 주도권이라는 권력의 한 형태를 영상 세계, 시각 경제라는 곳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분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시각'은 그 생물학적 존재에서 '시각성'이라는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시각성의 이데올로기가 나의 감각을 지배하는 단계에서, 그 이데올로기가 정작 소유하려 하는 것은 감각 뒤에 숨은 우리의 지성일 겁니다. 그 지성이 자극 받는 순간. 해석의 언어들이 이미지와 악전고투를 벌이겠지요. 저도 이 싸움을 벌이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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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30살이 되는 것보다, 27일만 있으면 다가오는 '29'살이 더 두렵다. 단순히 아홉수는 아닌 것 같고. 뭐랄까. 내 주위의 문제들에 대해 참 열심히 부딪혀 왔다가도, 별 성과가 없는 것 같다는 일종의 무기력증과 자책감 같은 것. 그래서 타인에 대한 질투심도 나고, 그 질투심이 나를 더 여유롭게 만들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도 얼마 전에 만난 한 후배의 꿈처럼 귀농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귀농을 해서, 그냥 열심히, 열심히 살았을 때의 그 순수한 느낌을 가져보고 싶기도 하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가 떠 "누구야?"하고 신경질 비슷한 것을 부릴 때, 그런데 그 짜증의 대상이 하필 나를 좋아해주는 지인들이었을 때의 당혹감이란. 내가 대학원에 와서 어떤 나눔을 하고 살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하고 싶은 건 없는데, 읽고 싶은 것은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듣고 싶은 것도 많다. 이 '부지런함주의'가 뭔가 타인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데. 이러한 희망은 늘 타인의 아픔을 목도하고나서야 다가온다. 그래서 늘 이 씁쓸함을 제거하려고 몸부리치는 플러스 한 살을 일찍 꿈꿔본다. 

갈수록 짠 맛을 좋아하시는 부모님 걱정도 되고. 은행에 가면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내 습성을 멀리하고 통장을 어느 정도는 가까이 해야 하는 나이같다는 생각도 든다. 조금만 놓아두면 금방금방 자라는 수염 녀석은 쉬지도 않는다.  

논문은 가장 먼저 준비해놓았다가. 가장 늦게 만들 것 같다. 시기는 문제가 아니라고. 과정에서 뭔가 묵직한 한 방을 때릴 걸 만들면 된다고 위안 삼지만. "너 이번 학기 논문 써?"라는 진부한 '대학원생들의 인사'는 곤욕이자 한 편의 숨겨놓은 공포다. 이런 곳에서 마음이 피폐해질 친구들을 보노라면, 도시락 싸서 말리고 싶은 데, 그래도 전화가 오면, 웃으면서 이 곳을 오라고 손짓한다. 쉬어가자. 친구들아. 쉬어가자 마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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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2-04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보면 저도 29살때 더 우울했던거 같아요.

얼그레이효과 2009-12-04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휘모리님 오랜만입니다. '29살의 우울'같은 노래 누가 만들어줬으면 좋겠네요.(인생 선배님들에게는 죄송) '서른즈음에'가서 콜콜한 맥주 한 잔 하고 싶은 날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12-04 12:43   좋아요 0 | URL
어 저도 학교다닐댄 거기 자주 다녔는데.
레드생 맛나죠 으흐흐흐

2009-12-04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4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롱롱 2009-12-09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 그러고보니, 저도 '서른 즈음에'를 한 번 가본 기억이 있어요. 김광석 노래를 줄창 신청했던 기억이..^^;;

얼그레이효과 2009-12-09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