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졸업 논문 준비로, 한 학기 동안 도외시해왔던 -제 '주무'라고 할 수 있는- '미디어/ 문화연구' 서적들을 다시 챙겨보는 중입니다. 그 가운데 좀 예기치 않은 '수작'을 발견했는데 김선아 선생의 『한국 영화라는 낯선 경계』라는 책입니다. 부제가 이 책의 내용을 다 말해주고 있는데요. 길지만 인용해보면 "코리안 뉴웨이브와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대의 국가, 섹슈얼리티, 번역, 영화"입니다. 한국 영화의 사회문화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연구 영역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영상 분야에 관심 많은 문화연구자들이 사회학적 사고를 통해, 영화 외부의 담론들을 연구하는 논문을 자주 발표하고 있고, (정통)영화학과에서 이론을 공부하는 이들도 영화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상호관련성을 조망하면서, 한국영화의 한 '꼴'을 보려는 작업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평론가 매혈기』의 저자인 영화평론가 김영진이나, 다들 좋아할 정성일의 시각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번에 김선아 선생의 책을 보면서 '흡족한' 구절들이 많아 도그지어 자국이 꽤 됩니다.  

이 책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이 자주 인용되고 있는데요. 전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화라는 대표적인 영상 매체가 갖는 힘. 그리고 그 힘과 관계 맺고 있는 자본의 스며든 형태에 대하여, 서구/비서구의 구도에서 과연 서구 중심의 '시각 경제'와 그 경제의 특성과 효과에 영향을 받는 비서구 국가들의 '지역성'은 어떻게 '통'하고 있는가에 대해 이 책은 자주 화두를 던집니다. 제가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소위 한국에서 작가주의 영화라고 하는 홍상수/김기덕/임권택/박찬욱 감독 등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텍스트'의 특성을 분석하고, 그 분석된 안이 어떻게 영화 외부적 시각과 관계맺을 수 있는가라는 저자의 시선 짚기입니다. 일례로 저자는 임권택이 꾸준히 고수하고 있는 민족적 특성으로 간주되는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뱉어내는 형식성이 전지구화적 시각경제에서 하나의 특이성이라는 주목 영역에 진입하지만, 그러한 주목 영역의 진입은 동시에 서구 자유주의자들의 오리엔탈리즘과 동맹을 맺을 위험이 있다 지적합니다.(사실 이 지적은 좀 새롭진 않아보입니다.서편제와 전지구화적 시각 경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찍이 탁석산 선생이 『한국의 정체성』에서 들었던 사례와 비교해서 읽게 되더군요) 

좀 재미있는 것은 제가 요즘 천착하고 있는 역사 과잉으로 촉발되는 '몰역사성'의 우려입니다. 책에서는 제 고민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주지는 않습니다만, 영화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통한 비서구 사회의 '기술적 근대화'가 이른바 '역사- 향수 영화'를 많이 생산하는 것에 대한 욕망을 저자는 밝혀보려 하는데요. 저자는 트랜스 내셔널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 있는 이 시대에, 비서구사회가 과거 억눌려왔던 혹은 인정받지 못했던 그 어떤 민족의 우울과 퇴행성들을 극복하려는 몸짓으로 서구가 일찍이 포기해왔던 부분들을 복귀시키거나, 또 서구에 결핍된 현존하는 가치의 형태들을 복원하려는 몸짓으로 봅니다. 이 몸짓은 즉 '인정의 몸짓'인거죠. 무엇보다 이런 인정의 몸짓은 '기술적 근대화'를 가친 비서구 국가들의 발전과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역사/ 향수 영화를 통해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이른바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갖고 있는 어떤 기계성의 특징. 그 기계성이 촉발하는 스펙터클로 인하여. 틈입된 이미지의 힘이 과연 역사와 개인의 진정한 만남. 심층적 만남을 고려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여기서 프레드릭 제임슨의 견해가 자주 인용 되더군요). 역사의 상품화. 스토리텔링의 욕망에 대해서는 김기봉 선생의 『역사들이 속삭인다』를 보면 이것이 우리 시대의 화두임을 느낍니다. 김기봉 선생의 시각보다 이 책에서 더 주목하고자 하는 건 바로 '매체'라는 기계성의 존재가 갖는 힘이겠지요. 이 기계성이 단지 우리에게 영화를 '보여준다'라는 동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을 '지배한다'라고 본다면, 이 매체가 갖는 인간과 역사의 관계는 매우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라는 문화 테크놀로지가 주는 재현의 힘. 그리고 그 힘에 영향을 받고 사는 우리 '영상적 인간'들의 수용 형태들. 『선덕여왕』,『아이리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는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로 구분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집 안에서 영화관을 꾸밀 수 있는 시대에, 이런 구분은 별 소용이 없다. 오히려 이런 구태의연한 구분보다 더 중요하게 짚어야 할 점은, 이러한 스펙터클이 아무렇지 않게 우리의 가정 속으로 들어와 편안하게 이 스펙터클을 즐기고 있는 어떤 시점. 어떤 시/공간의 경험 상태다. 전지구화적 시각 경제에서 집 안에서 나를 계속 움찔거리게 만드는 '뵨사마'와 '고미실'의 시각언어는 과연 나의 어떤 욕망선을 건드리고 있는 것일까. 그 욕망선의 주도권을 이미 이 이미지들에게 내준 것 같은 상황에서, 역으로 이 주도권이라는 권력의 한 형태를 영상 세계, 시각 경제라는 곳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분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시각'은 그 생물학적 존재에서 '시각성'이라는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시각성의 이데올로기가 나의 감각을 지배하는 단계에서, 그 이데올로기가 정작 소유하려 하는 것은 감각 뒤에 숨은 우리의 지성일 겁니다. 그 지성이 자극 받는 순간. 해석의 언어들이 이미지와 악전고투를 벌이겠지요. 저도 이 싸움을 벌이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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