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이건희가 참 재미있는(?) 발언을 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추모하며, 국민들에게 제시했던 미래의 상은 '정직'이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모든 국민이 정직해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이죠. 인터넷 거주자들은 일제히 "너나 잘하세요"라며, 이 '어른의 발언'에 야유를 보냈지만, 야유와 함께 저는 이 발언을 좀 더 깊이 고민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좀 코믹하게 해석해서, 이 어르신이 자신이 이빨빠진 호랑이 취급 받는 걸 상당히 두려워하는구나 느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국민에게 정직을 바라는 이 양반의 내면의 깊숙한 곳에는, "야, 이 녀석들아. 지금 너희들 호강하고 말이지. 해외 나가서 한국이란 나라에 그나마 자긍심 느끼는 건, 그래도 외국 사람들이 삼성 휴대폰 쓰고 그럴 때잖아. 삼성 간판 보일 때 외국에서 한국인이라는 반가움, 뿌듯함 느끼잖아. 그러니까 너희들 나 욕하지마. 삼성이 만들어 온 길을 보라고. 자신에게 정직해져보라고." 

이렇게 해석하고 나니, 저는 이건희의 그 발언이 의례적인 행사용 멘트가 아니라, 삼성 없으면 너희도 없었다라는 강한 호통으로 들리더군요.  

강준만이 예전에 쓴 <이건희 시대>란 책을 즐겨읽은 적이 있습니다. 강준만은 이건희를 '코쿤 정치'의 전형적 인물이라고 평가합니다. 코쿤 정치는 '폐쇄적 정치를 지향합니다. 고로 자기 세계가 강해집니다. 자신과의 갈등을 통해서, 자신과의 단련을 통해서 자신을 구축해 갑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주장도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고, 거기서 얻은 자신감으로 '경영 철학'이라는 것도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코쿤 정치가 가진 폐쇄성은 되려 자기 스스로의 훈련을 통해 관성적인 반성의 자세도 자리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업의 실패 사례를 경험할 때, 그 스스로의 반성을 통해 기업의 느슨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신속성을 추구합니다. 변화에 늘 기민하게 대응하라고 촉구합니다. 물론 이런 자세가 좋은 점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제 그 발언을 들으면서, 저는 한국의 비극을 통감했습니다.  

이 비극은 무엇인가. 자본가는 노동자를 고용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차원을 넘는다는 것. 그리고 이 차원은 자본가가 노동자와 함께 구성하는 사회적 가치들을 제 스스로 사버린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자본가가 올바른 사회적 가치들을 경제적 권력에 의해 사버렸을 때, 우리가 올바르다고 여겼던 사회를 둘러싼 중요한 가치와 상징은 자본가들의 그것으로 한정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가 오늘날 "모든 국민이 정직해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사회적 삶의 실패자로 낙인찍히는 계기가 됩니다. 코쿤 정치를 통해 이건희는 자기와의 대화 속에서, 자기와의 대면 가운데, '정직'이란 단어를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 안에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권력자로 누려왔던 자리에서 한정적으로 사용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이건희가 말하는 정직은 약자와의 관계에서 비대칭적입니다. 약자의 정직을 향한 갈망과 강자의 정직을 향한 그것이 비대칭적일 때, 이건희 스스로가 생각하는 정직이란 가치는, 그가 고용하고 있는 수많은 삼성 사원들, 그리고 잠정적으로 삼성 가족이 되길 꿈꾸는 이들이 지녀야할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고로  이건희에게 '모든 국민'은 '삼성의 국민'을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모든'은 '삼성'이 되는 것이죠. 흔히 '다이너스티'라고 표현되는 기업의 구조 속에서, 이건희는 왕의 자리에 앉아 기업이라는 왕국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신민은 왕이 누가 될까, 궁금해할 수 있지만, 왕의 선정 과정에 참여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왕위에 오른 왕은 갑자기 모든 사람을 백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을 향해 한 마디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뭐라 하든, 그건 왕의 권리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이건희의 발언을 통해 삼성이란 기업이 가장 긴밀한 근대적 발전성과 가장 퇴행적인 전근대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삼성을 비롯한 다른 기업도 마찬가지겠지만요. 이건희의 발언은, 자신의 기업이 판매하는 상품을 산 소비자들에게 일종의 덕목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영화를 그렇게 좋아한다던 이건희는 제임스 카메론 흉내를 낸 것이지요. I'm King of the world! 

왜냐면 그에게 삼성은 국가일테니까요. 정경유착이라는 말에서, 예전의 역사가 정치가 경제를 포섭하여, 경제를  종속시켰다는 말을 증명했다면, 오늘날 정경유착은 경제가 정치를 복속시킵니다. 고로 정치인이 말하는 '폐쇄된'정직과 경제인이 말하는 '폐쇄된'정직 속에서, 우리 같은 서민들은 '제왕적 대통령', '제왕적 기업인'의 훈시를 들어야하는 구슬픈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다시 돌아오는 푸념들. "정직하면 뭐해.."라고 시작되는 냉소의 향연이죠.  자본 앞에서 서민이 상상하고 추구하는 정치는, 기업가의 폐쇄적 윤리 앞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습니다.  코쿤의 윤리 앞에 말이죠. 기업을 국가라고 생각하는 코드. 시민을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코드, 그것이 우리를 늘 동물적 존재로 유인하는 자본의 코드이자, 이건희의 코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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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중 선생의 <마음의 사회학>이 주위에서 화제라고 하고, 알라딘에서는 나름 선호를 받는 책 같은데, 생각보다 '난분분한'의견의 공간이 없어서 아쉽다. 개인적으로 어제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김홍중 선생의 논문 주제들과 글쓰기 스타일에 나름 호감을 갖고 있던 편이라서,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예견되는 대목들이 있었다. 다만 책을 다 읽지 않은 상황에서 조심스러운 부분이긴 하지만, 김홍중이 책에서 보여주는 시선에 대해 불편한 부분도 있어, 이 부분이 정확히 나의 '마음'에서 어느정도 자리잡고 있고, 또 어떻게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글을 쓴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이 한 시대를 사유하기 위해 노력한, 정확히 말해 한국이란 나라에 흐르고 있는 마음의 흐름들을 밝히고자 한 저자의 농도 짙은 고민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저자를 향한 무작정한 '안티-'는 아님을 밝히며, 오히려 내가 갖고 있는 의견과 견주어 봄으로써, 사유의 확장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중론을 밝힌다.  

- 우석훈이 언급했던 '진정성' 

내 기억으로 '진정성'에 대하여 나름 흥미로운 언급을 했던 지식인을 꼽으라면 우석훈인 것 같다. 그의 칼럼집<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에, '노무현의 진정성과 전두환의 진정성 사이에서'라는 글이 있는데, 김홍중 선생이 <마음의 사회학>에서 주장/강조하는 진정성이란 개념을 생각하기 이전에, 나는 그 책에 기술된 우석훈의 주장이 떠올랐다. 우석훈이 책에서 한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즘 사람들 참 진정성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애. 근데 이 말 너무 흔하게 쓰이는 것 아냐?" "이 말의 기원이 뭐야?" "이 말 너무 악용되고 있어" .예로 들어 우석훈은 '진정성'이란 용어가 자신들이 불가피하게 악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항변할 때 쓰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 항변의 '진실'을 대중들이 용서의 차원에서 받아주기를 바라는 정치인 특유의 전략으로 전락한 '진정성'이라는 용어는 좀 숙고해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우석훈은 김홍중 만큼의 정성으로, '진정성'이라는 개념의 기원을 찾아본 것은 아니다.  - 그렇다고 그의 불성실함은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석훈은 칼럼에서 진정성이 truthfulness이냐? authenticity이냐?고 물으면서, 그는 이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갖는 오묘한 심리학적 시선, 혹은 문학적이면서 미학적인 시선이 사회에 속한 개인에게 전유되었을 때, 자칫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고 예견하는 듯하다. 암튼, 뭐 여기까진 상식적인 멘트다. 좀 더 해부를 하자면, 우석훈은 진정성이라는 꽤 문학적이며, 미학적인 이 용어가 우리의 삶에 들어왔을 때, 인간의 '오용'이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간주하는 수준에 다다르면서, 진정성은 인상적으로 좋은 '미학적' 면모를 띄는 듯 하지만, 사회에 내재된 권력 관계의 비대칭에 의해, 전혀 다른 메시지로 표출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미학적 가치를 판단하는 용어인 진정성은 스스로 추함의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석훈은 현실 정치계의 '언변 전술'을 비판하면서, 당시 그 정권이 끌어가려는 정치적 의사소통 과정에서, 줄곧 내세운 '불가피론'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여러분, 이 정부가/ 이 여당이 / 이 야당이 추구하려는 가치와 그 기조는 많은 고민 끝에 나온 것입니다. 다들 불만이 많은 줄로 압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르자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도 많이 고심하고, 스스로 죄책감도 갖고 있습니다만..." 우석훈은 진정성이 이런 논지를 옹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라면, 거부하고 싶다고 말하는 듯하다. 즉, 그는 '개나 소나' 진정성을 부르는 시대에,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추해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즉, 그는 진정성이라는 이 용어가 인간 그 스스로의 오류를 진실이라는 가치로 뒤덮는 데 사용되는 것을 중단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고와 촉구는 무엇보다 '진정성'이란 개념은 실체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과 결부된다.

그러나 김홍중은 <마음의 사회학>에서  "어떻게 이 모호한 단어인 진정성에 사람들이 그토록 분명한 실체적 무엇을 요구하는가?"란 우석훈의 질문에 나름의 농도짙은 사회학적 기술을 시도하려 한다.

- 김홍중이 주장/강조하는 진정성 

김홍중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명확하다. 쉽게 말해서 이 '마음'이란 모호한 것은 물질적 형태로 규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추상적일 것 같은 그림이, 추상 그 자체로 남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개개인의 생활 방식 속에서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홍중은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을 설정하면서, 이 '마음의 레짐'에 따라 시대의 흐름을 읽어보자고 권유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진정성이라는 것 자체도 굳이 불명확한 개념은 아니다. 진정성은 '증명될 수 있는 존재론적 사고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이 자리잡음 속에서 진정성은 그것과 관계 맺고 있는 인간이라는 실체를 보여주는 계기이자 매개인 것이다. 우석훈이 '진정성'이 사회적으로 사용/전유되는 과정에 집중하여, 진정성을 오용하는 권력자들의 오만함을 일갈한다면, 김홍중은 진정성을 시대의 차원에서 사고하고자 한다. 그래서 진정성을 대하는 스케일은 김홍중이 더 크고, 더 집요하다.  

김홍중은 한국이란 나라에서 진정성이란 소위 '87년 체제'로 지칭되는 80년대의 마음 구조를 읽을 수 있는 핵심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진정성은 과연 무엇인가. 그는 트릴링에서부터 찰스 테일러 등 진정성을 언급했던 학자들의 설명을 재구성한다. 그 과정 끝에 진정성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쉽게 요약하자면, 

 '나'는 세상을 살아간다. '나'는 세상이 부과하는 도덕 혹은 규범에 마냥 순응할 수 있다. 혹은 거부할 수 있다. 진정성을 갖는 자, 진정성에 충실한 자는 그런 순응과 거부의 태도를 둘 다 인식하면서, '나' 스스로가 올바를 수 있는 태도를 지니려고 노력한다. 이런 정신적인 노력 그리고 육체적인 실천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진정성은 '앙가주망'이라는 형태 속에서 내가 속한 사적 세계와 또 내가 접촉할 수밖에 없는 공적세계 간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렇다면, 이 긴장감으로 구성된 진정성이 어떻게 한국의 87년 체제와 이어질까. 저자는 87년 체제에 속해 있던 개인들에게는 '진정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대목을 좀 꼼꼼하게 봐야 하는데, 이유인즉슨 김홍중은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 마음의 레짐이 87년체제, 97년 체제 등으로 딱딱 10년 단위로 맞아떨어지는 단절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시대적 상황을 '지배하는 담론'으로서, 그 시대를 아우르는 지배적인 인식의 형태로서, 진정성은 이론화시킬 수 있는 납득할만한 위상을 가졌다고 본다. (고로 여기서부터 문제는 발생한다) 

내가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  

김홍중이 내어놓은 해석과 그 근거에 대해 그가 비록 87년 체제를 완전히 '장악'했던 정서로서의 진정성은 아니라고 부연 설명을 하지만, 조금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대목은 이것이다. 한 시대에 진정성인 것, 진정성이 아닌 것이 공존한다고 하는 어느 정도의 설명에 대해 논리적으로 양보한다치더라도, 김홍중은 자신이 설정한 나름대로의 해석과학적 역사관 속에서, 그 '해석'과 이에 부합하는 목적성에 치중한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80년대를 수놓았던 정치적 민주화라는 테마로 수렴되고야마는 역사적 시선, 80년대의 신화에 대해 '진정성'이라는 개념을 갖고 '겸양된  반성적 자세'로 논리적 기술을 시도하지만, 되려 여기에서 '80년대의 신화'에 향수를 느끼는 '신앙'의 체취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비록, 내가 앞에서 '겸양된 자세'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김홍중 스스로 이를 의식한 듯, 진정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소불위의 그 무엇이 아니라, 그 시대를 제약했던 억압적 실체였다는 '반성적 지점'을 만들어놓았지만, 그가 강조하는 진정성 , 속물, 포스트 진정성 체제의 역사적 기술 속에서, 그 정서적 참조점의 기준으로 서 있는 시기는 80년대이며, 그 시기의 구성원들이 내뿜어준, 더 나아가자면 당시 '지식인'으로 대변되는 대학생들의 고뇌와 갈등의 농축이 진정성이라는 개념에 쉽게 포섭되고 있다. 그리고 80년대를 넘어,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으로서 그가 갖는 그 성찰의 전지전능함이 주는 시대를 향한 반성마저도 어쩌면 '성찰성'이라는 개념 안에서 휘둘러지는 나름의 폭력이 아닌가 생각해본다.(그가 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예로 들었을까.  겸손과 반성의 자세에서 그리고 냉소와 허무 속에서도 결국 이 시대를 굳건히 했던 건, 80년대적 주체, 진정성을 가지고 있던 주체들의 힘이었다는 것인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는 그 시대의 사유와 고뇌를 잃었다는 것인가. 더 나아가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가 )  

 

그렇다면 그는 지금 시대의 마음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마음을 단지 (테두리에서만) '기념'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래서 97년 체제가 한국인을 생존의 동물로, 점점 속물성을 강화시킨 시기였음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그가 진정성, 속물, 포스트 진정성 체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그가 애초에 열망하고자 했던 '사회학적 해부'가 아니라, '역사적 신화에 기인한 '기념'적 묘사가 아닌가라고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이 질문 앞에서 결국 97년 체제가 그의 글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마냥 '악의 시간'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담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87년 체제든, 97년 체제든 10년 단위로 끊어지는 구분선의 인식적 한계를 유념하면서도, 그 유념 속에서 안이한 사고를 지향하고 있다. (즉,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찾는 행위) 그는 '성찰'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리고 태도를 통해, 현상을 반성하지만, 이 반성이 '역사적 신화'의 해체의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나는 87년 체제에서도 충분한 속물을 보며, 97년 체제에서도 87년 체제보다 더 진득한 진정성이 발견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너무 도덕적 강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마음'이란 이 모호한 것을 물질성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이 증명의 욕망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헤겔과 코제브를 경유하며 누적된 역사적 시각의 외피로 그 시대에 이미 주어졌던 가치에 기념비 하나를 얹고 바로 산을 내려오고 있지 않았는가. 오히려 그는 진정성과 속물이란 개념을 통해 이미 세워졌던 역사적 기념비를 부수는 작업을 해야하지 않았을까. (오늘은 여기까지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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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0-02-06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공부하고, 생각하고, 글 쓰는 얼그레이효과 님을 보면서 괜시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네요... 님은 훌륭한 사람이 되실거예요. (응?) '훌륭한'이라는 표현은 애매하지만, 아무튼 훌륭한? 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2-06 0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팝트래쉬님 (닉네임에서 어떤 후덜덜한 기운이;). 별말씀을요. 기본적으로 함량 미달이라 늘 생각하며 살기에 몸부림만 치다 끝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바라 2010-02-06 0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며칠 전부터 이 책 드문드문 읽어보고 있었는데.. 저도 80년대 또는 진정성의 체제가 부지불식간 어떤 중요한 참조점으로 미리 전제되어있는 것 같다는 비슷한 혐의를 느꼈었네요. 마저 더 읽어보고 판단해봐야겠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2-06 14:45   좋아요 1 | URL
바라님 안녕하세요. 저도 더 침착하게 읽어보면서 가지런하게 정리해봐야겠네요. 그래도 김홍중 선생이 지향하는 스타일은, 사회학 내에서 참 독특하고 신선해서,저자의 센스를 본받게 됩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2010-02-07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2-08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윤리와 도덕 등. 우리가 엄연히 잘 알고 있다고 판단하는 개념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좋은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최근 윤리학이 이른바 학문적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시대가 사유해야 할 윤리가 무엇인지를 경험적으로 서둘러 접근하기에 앞서, 윤리라는 것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문학결정론'에 대한 부분은 저자가 문학사회학자인 위치에서 문학에 대한 중요성을 위치짓는 것은 학자로서 비단 필요한 사고이겠으나, 이른바 '당대의' 문학과 접붙이는 과정을 면밀하게 보여주기보다는, 이른바 진공상태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진품의 가치로서 문학에 대한 우월성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았나하는 생각에 문제제기를 해봤습니다.
 

내가 있는 신촌의 모 대학이 결국 등록금을 인상하기로 했다. 기사가 뜨고 나서 이제 분노의 화살이 학교측보다, 학교측의 협의대상으로 알려진 총학생회로 쏠리는 듯하다. 아무리 '총학'에 학생들이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미안한 마음에 현수막이라도 한 번 쳐다보는 학생들은, 등록금 문제 만큼은 '뒷담화' 주제로 올려놓을 것이다. 나는 2008년 봄부터 약 6개월 간 대학 총학생회 관련 연구를 하면서, 대학생 시절 가볍게 느꼈던 문제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총학생회를 둘러싼 지저분한 음모도 몸소 듣게 되었고, 그 음모의 희생자들이 총학생회에 참여하면서,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경우를 여러 번 인터뷰했다.  (그리고 부족한 논문을 채워준 그들의 소리 덕분에 우연히 상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감사의 표시를 하려고 할 때, 그들중 일부는 내가 앞으로 설명할 '유지의 정치'로 인한 비리의 당사자가 되어, 학교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 논문의 결론을 넘어서, 더 차분하게 고민해 본 나의 견해는, 총학생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억지로 살아남기'가 아니라, '차라리 아예 망하기'라는 전술이 아닌가하고 생각해본다. 물론 한국의 모든 대학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대학교 총학생회는 조직의 공백 상태를 가까스로 넘기게 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야, 이번에 선거 아무도 안나간대."라고 시작되는 걱정의 기운은 결국 레임덕 시기에 있는 총학생회장이 자신이 눈여겨 본 후보군들을 설득하는 계기로 이어지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문제의 둑은 터진다.   

전 학생회와 선거에 당선된 학생회 간에 인수 문제도 제대로 안 되긴 마찬가지다. 전, 현직 학생회가 갖고 있는 문제는 "야, 그래도 학교에 총학생회가 없으면 어떡해"가 큰 자리를 차지한다. 정작 총학생회에 진정 필요한 정치 방식이 무엇인지는 뒷전이 다. 정책설명회에서 제대로 지키질 못한 공약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며, 선거 과정 가운데, 전 학생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요, 학교 전체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엄밀히 말하면 인상 비평에 가까운 것이 다수다.  

결국 총학생회는 그 오랜 역사 속에서 폐쇄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구조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으며, 참여의 문제니, 동원의 문제니라고 하는 앓는 소리는 "요즘 대학생들이 워낙 바쁘잖아요"라고 하는 변명과 함께, "야, 우리 총학생회 그냥 일 년 버텨보자"의 수준으로 가는 것이다.  (여기서 참여를 위조하는 비리 -대표적인 사례로 투표 조작 같은- 가 자연스레 나타난다)

나는 차라리 대학 내 학생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총학생회라는 조직의 제도 틀 자체가 아예 한 번 폭삭 망해서, 이 공백 상태가 주는 혼란을 대학생들 스스로 뼈저리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결국 그동안 거의 대부분의 총학생회가, "에이, 그래도 어떻게 총학생회가 학교에 없을 수가 있냐"라는 그 존재의 안전 유무에 기민하게 반응한 채 '유지'의 수준으로 나아왔기 때문에, 그 '유지의 정치'가 주는 효과값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이 효과값이 거의 0인 상황에서, 이제 남은 건 총학생회라는 집단의 공백 상태를 만들어 버리고, 이 공백 상태의 위기가 주는 새로운 정치적 요구를 모아보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본다.  

나는 유지의 정치로선 짱돌을 들 수 있는 조건이 거의 희박하다고 본다. 고작 나오는 정치적 행위란, 학생들이 히죽히죽 거리며,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야, 아침에 너 총장 까는 현수막 봤냐?" 그 정도뿐일 것이다. 총학생회는 이 유지의 정치에 드는 에너지, 그동안 총학생회가 지겹게 설파했던, 그들 말로 '학생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현실 전략, 연성화 전략이라고 하는 것에 목매달지말고 - 거기에 위안 삼지도 말고- 차라리, 아예 저항의 거점을 공백으로 삼아라. 이 공백은 내가 보기에 지금 당장 학생들에게 "그래도 학교는 돌아가겠지"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모르나, 내가 보기에 이 '공백의 정치'가 주는 불안의 기회는 대학 사회의 왕인 교직원들에게 또 다른 불안감을 안겨다줄 수 있는 전술이 될 것이라 본다. 

덧붙임) 글을 쓰면서 뉴스 자막을 보니 서강대와 한국외대도 등록금을 결국 올리기로 했단다.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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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1-29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대학 총학생회 오늘 인터뷰도 하던걸요 --;;

얼그레이효과 2010-01-30 12:43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ㅡ.ㅜ

LAYLA 2010-01-30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록금을 올리묜 학교는 학생들의 신임을 일케 되겠지. 지금까지 구래왔고 아프로도 계쏙
-이거 맞나요. 이거 엄청 웃겨서 진짜 팍 웃었는데.... 이번 총학이 너무 기대치를 높인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1-30 12:43   좋아요 0 | URL
그런 내용으로 인터뷰 했나보죠..에고..

LAYLA 2010-01-30 16:01   좋아요 0 | URL
하하하 인터뷰 아니고 플랑 붙여놨더라구요 중도 근처 나무에요^.^
 


 

우리에게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잘 알려진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향년 9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고 

합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로 그를 추모해야겠습니다.

영화 <제리 맥과이어>의 초반 장면도 떠오르는군요.. 

굿바이 홀든 콜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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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다시 아침 운동을 나갔다. 어제 지도교수님과 함께 밥을 먹다가, '공부하는 사람들'의 비극적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름 건강 문제에 대해 잔잔한 충격을 받았던 연유일까. 눈 아래 애교살은 두터워지고, 어깨는 천근만근 무겁지만, 억지로 줄넘기를 챙기고, '완전군장'형태를 갖췄다. 어제나 오늘이나 새벽 시간이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자유로이 인생을 논하는 할머니들이 새벽기도를 마친 후일담을 논한다.   

예배당에서 처음 만난 이들의 즉석 번개인 듯한 풍경이 주는 노인들의 미덕, 어찌 보면 지하철의 한 귀퉁이에서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는 그 신비한 풍경은, 마냥 '그들만의 뒷담화'로 비난할만한 모습은 아닌 듯하다. 혼자 운동장을 돌며 그 할머니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힐끗 쳐다보는 것으로 이제 한 바퀴 돌았구나라는 것을 센다. 

운동장을 나와 어둑한 하늘을 한 번 쳐다보면, 의외로 아침 잠이 많을 것 같은 젊은이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잠이 덜 깬 소녀들이 중무장을 한 채, 공부의 신이 되기 위해 지하철 역을 향하고, 샴푸 향기를 저 멀리 뿌리고 가는 젊은 여성분의 또각또각 구두 소리는 명랑하다. 정돈되지 않은 거리를 비웃듯 왁스로 머리를 단정하게 만든 한 남자의 진중한 걸음도 새벽 거리를 채운다.  

집에 들어와보니, 창 밖으로 붉으락푸르락, '안마', '모텔'이란 글자가 섹시한 자태를 뽐내는 것이 보인다. 누구는 어젯밤 술김에든, 하고 싶어서든 섹스의 진입로에서 사랑해? 사랑해! 아, 좋아 하는 교성으로 서로를 만끽했을 것이라는 음란한 상상을 해 본다. 그리고 그들은  아침이 오롯이 자신의 옷을 입고 나타날 즈음, 섹스에 취한 자신을 달래기 위해 또 한 번의 모닝 섹스로 해장하겠지. 

몇 년 전, 여관 앞 새벽녘, 어떤 사연 속에 실랑이를 벌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같이 새벽 택시를 타던 연인의 모습이 생각난다. 텔레비전을 틀어 아침 뉴스를 챙길까 하다가, 에이..하는 마음에 장한나의 하이든 협주곡 연주를 듣기로 마음 먹었다. 

세상이 모두 던킨 도너츠의 홍차 라떼 맛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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