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중 선생의 <마음의 사회학>이 주위에서 화제라고 하고, 알라딘에서는 나름 선호를 받는 책 같은데, 생각보다 '난분분한'의견의 공간이 없어서 아쉽다. 개인적으로 어제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김홍중 선생의 논문 주제들과 글쓰기 스타일에 나름 호감을 갖고 있던 편이라서,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예견되는 대목들이 있었다. 다만 책을 다 읽지 않은 상황에서 조심스러운 부분이긴 하지만, 김홍중이 책에서 보여주는 시선에 대해 불편한 부분도 있어, 이 부분이 정확히 나의 '마음'에서 어느정도 자리잡고 있고, 또 어떻게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글을 쓴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이 한 시대를 사유하기 위해 노력한, 정확히 말해 한국이란 나라에 흐르고 있는 마음의 흐름들을 밝히고자 한 저자의 농도 짙은 고민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저자를 향한 무작정한 '안티-'는 아님을 밝히며, 오히려 내가 갖고 있는 의견과 견주어 봄으로써, 사유의 확장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중론을 밝힌다.
- 우석훈이 언급했던 '진정성'
내 기억으로 '진정성'에 대하여 나름 흥미로운 언급을 했던 지식인을 꼽으라면 우석훈인 것 같다. 그의 칼럼집<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에, '노무현의 진정성과 전두환의 진정성 사이에서'라는 글이 있는데, 김홍중 선생이 <마음의 사회학>에서 주장/강조하는 진정성이란 개념을 생각하기 이전에, 나는 그 책에 기술된 우석훈의 주장이 떠올랐다. 우석훈이 책에서 한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즘 사람들 참 진정성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애. 근데 이 말 너무 흔하게 쓰이는 것 아냐?" "이 말의 기원이 뭐야?" "이 말 너무 악용되고 있어" .예로 들어 우석훈은 '진정성'이란 용어가 자신들이 불가피하게 악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항변할 때 쓰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 항변의 '진실'을 대중들이 용서의 차원에서 받아주기를 바라는 정치인 특유의 전략으로 전락한 '진정성'이라는 용어는 좀 숙고해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우석훈은 김홍중 만큼의 정성으로, '진정성'이라는 개념의 기원을 찾아본 것은 아니다. - 그렇다고 그의 불성실함은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석훈은 칼럼에서 진정성이 truthfulness이냐? authenticity이냐?고 물으면서, 그는 이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갖는 오묘한 심리학적 시선, 혹은 문학적이면서 미학적인 시선이 사회에 속한 개인에게 전유되었을 때, 자칫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고 예견하는 듯하다. 암튼, 뭐 여기까진 상식적인 멘트다. 좀 더 해부를 하자면, 우석훈은 진정성이라는 꽤 문학적이며, 미학적인 이 용어가 우리의 삶에 들어왔을 때, 인간의 '오용'이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간주하는 수준에 다다르면서, 진정성은 인상적으로 좋은 '미학적' 면모를 띄는 듯 하지만, 사회에 내재된 권력 관계의 비대칭에 의해, 전혀 다른 메시지로 표출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미학적 가치를 판단하는 용어인 진정성은 스스로 추함의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석훈은 현실 정치계의 '언변 전술'을 비판하면서, 당시 그 정권이 끌어가려는 정치적 의사소통 과정에서, 줄곧 내세운 '불가피론'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여러분, 이 정부가/ 이 여당이 / 이 야당이 추구하려는 가치와 그 기조는 많은 고민 끝에 나온 것입니다. 다들 불만이 많은 줄로 압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르자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도 많이 고심하고, 스스로 죄책감도 갖고 있습니다만..." 우석훈은 진정성이 이런 논지를 옹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라면, 거부하고 싶다고 말하는 듯하다. 즉, 그는 '개나 소나' 진정성을 부르는 시대에,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추해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즉, 그는 진정성이라는 이 용어가 인간 그 스스로의 오류를 진실이라는 가치로 뒤덮는 데 사용되는 것을 중단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고와 촉구는 무엇보다 '진정성'이란 개념은 실체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과 결부된다.
그러나 김홍중은 <마음의 사회학>에서 "어떻게 이 모호한 단어인 진정성에 사람들이 그토록 분명한 실체적 무엇을 요구하는가?"란 우석훈의 질문에 나름의 농도짙은 사회학적 기술을 시도하려 한다.
- 김홍중이 주장/강조하는 진정성
김홍중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명확하다. 쉽게 말해서 이 '마음'이란 모호한 것은 물질적 형태로 규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추상적일 것 같은 그림이, 추상 그 자체로 남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개개인의 생활 방식 속에서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홍중은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을 설정하면서, 이 '마음의 레짐'에 따라 시대의 흐름을 읽어보자고 권유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진정성이라는 것 자체도 굳이 불명확한 개념은 아니다. 진정성은 '증명될 수 있는 존재론적 사고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이 자리잡음 속에서 진정성은 그것과 관계 맺고 있는 인간이라는 실체를 보여주는 계기이자 매개인 것이다. 우석훈이 '진정성'이 사회적으로 사용/전유되는 과정에 집중하여, 진정성을 오용하는 권력자들의 오만함을 일갈한다면, 김홍중은 진정성을 시대의 차원에서 사고하고자 한다. 그래서 진정성을 대하는 스케일은 김홍중이 더 크고, 더 집요하다.
김홍중은 한국이란 나라에서 진정성이란 소위 '87년 체제'로 지칭되는 80년대의 마음 구조를 읽을 수 있는 핵심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진정성은 과연 무엇인가. 그는 트릴링에서부터 찰스 테일러 등 진정성을 언급했던 학자들의 설명을 재구성한다. 그 과정 끝에 진정성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쉽게 요약하자면,
'나'는 세상을 살아간다. '나'는 세상이 부과하는 도덕 혹은 규범에 마냥 순응할 수 있다. 혹은 거부할 수 있다. 진정성을 갖는 자, 진정성에 충실한 자는 그런 순응과 거부의 태도를 둘 다 인식하면서, '나' 스스로가 올바를 수 있는 태도를 지니려고 노력한다. 이런 정신적인 노력 그리고 육체적인 실천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진정성은 '앙가주망'이라는 형태 속에서 내가 속한 사적 세계와 또 내가 접촉할 수밖에 없는 공적세계 간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렇다면, 이 긴장감으로 구성된 진정성이 어떻게 한국의 87년 체제와 이어질까. 저자는 87년 체제에 속해 있던 개인들에게는 '진정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대목을 좀 꼼꼼하게 봐야 하는데, 이유인즉슨 김홍중은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 마음의 레짐이 87년체제, 97년 체제 등으로 딱딱 10년 단위로 맞아떨어지는 단절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시대적 상황을 '지배하는 담론'으로서, 그 시대를 아우르는 지배적인 인식의 형태로서, 진정성은 이론화시킬 수 있는 납득할만한 위상을 가졌다고 본다. (고로 여기서부터 문제는 발생한다)
내가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
김홍중이 내어놓은 해석과 그 근거에 대해 그가 비록 87년 체제를 완전히 '장악'했던 정서로서의 진정성은 아니라고 부연 설명을 하지만, 조금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대목은 이것이다. 한 시대에 진정성인 것, 진정성이 아닌 것이 공존한다고 하는 어느 정도의 설명에 대해 논리적으로 양보한다치더라도, 김홍중은 자신이 설정한 나름대로의 해석과학적 역사관 속에서, 그 '해석'과 이에 부합하는 목적성에 치중한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80년대를 수놓았던 정치적 민주화라는 테마로 수렴되고야마는 역사적 시선, 80년대의 신화에 대해 '진정성'이라는 개념을 갖고 '겸양된 반성적 자세'로 논리적 기술을 시도하지만, 되려 여기에서 '80년대의 신화'에 향수를 느끼는 '신앙'의 체취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비록, 내가 앞에서 '겸양된 자세'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김홍중 스스로 이를 의식한 듯, 진정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소불위의 그 무엇이 아니라, 그 시대를 제약했던 억압적 실체였다는 '반성적 지점'을 만들어놓았지만, 그가 강조하는 진정성 , 속물, 포스트 진정성 체제의 역사적 기술 속에서, 그 정서적 참조점의 기준으로 서 있는 시기는 80년대이며, 그 시기의 구성원들이 내뿜어준, 더 나아가자면 당시 '지식인'으로 대변되는 대학생들의 고뇌와 갈등의 농축이 진정성이라는 개념에 쉽게 포섭되고 있다. 그리고 80년대를 넘어,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으로서 그가 갖는 그 성찰의 전지전능함이 주는 시대를 향한 반성마저도 어쩌면 '성찰성'이라는 개념 안에서 휘둘러지는 나름의 폭력이 아닌가 생각해본다.(그가 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예로 들었을까. 겸손과 반성의 자세에서 그리고 냉소와 허무 속에서도 결국 이 시대를 굳건히 했던 건, 80년대적 주체, 진정성을 가지고 있던 주체들의 힘이었다는 것인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는 그 시대의 사유와 고뇌를 잃었다는 것인가. 더 나아가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가 )
그렇다면 그는 지금 시대의 마음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마음을 단지 (테두리에서만) '기념'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래서 97년 체제가 한국인을 생존의 동물로, 점점 속물성을 강화시킨 시기였음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그가 진정성, 속물, 포스트 진정성 체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그가 애초에 열망하고자 했던 '사회학적 해부'가 아니라, '역사적 신화에 기인한 '기념'적 묘사가 아닌가라고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이 질문 앞에서 결국 97년 체제가 그의 글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마냥 '악의 시간'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담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87년 체제든, 97년 체제든 10년 단위로 끊어지는 구분선의 인식적 한계를 유념하면서도, 그 유념 속에서 안이한 사고를 지향하고 있다. (즉,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찾는 행위) 그는 '성찰'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리고 태도를 통해, 현상을 반성하지만, 이 반성이 '역사적 신화'의 해체의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나는 87년 체제에서도 충분한 속물을 보며, 97년 체제에서도 87년 체제보다 더 진득한 진정성이 발견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너무 도덕적 강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마음'이란 이 모호한 것을 물질성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이 증명의 욕망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헤겔과 코제브를 경유하며 누적된 역사적 시각의 외피로 그 시대에 이미 주어졌던 가치에 기념비 하나를 얹고 바로 산을 내려오고 있지 않았는가. 오히려 그는 진정성과 속물이란 개념을 통해 이미 세워졌던 역사적 기념비를 부수는 작업을 해야하지 않았을까. (오늘은 여기까지 고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