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수능시험이 되면 저는 솔직히 지각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수험생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두 손 모은 부모들, 선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새벽부터 나온 후배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느새 '무관심'이 되어버린 것 같은 '수능거부 시위'를 하러 온 학생들은 여전히 제 관심 안에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수능이 될 때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공감합니다'가 아닌, '또 저런 짓이야?' 가 이제는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렇게 피켓 들고 서 있을 시간에, 너희 친구들처럼 글 한자라도 더 보렴"이라는 반응은 올해 수능거부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에게 돌아오는 '당연한 반응'이 된 듯합니다. 

긴 설명 필요없이 학벌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선, 비판자의 학벌이 좋은 측면은 사실 그것을 바라보는 요즘 대중들에겐 한 편의 '성공학'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입니다. 어렸을땐, 이런 상황을 통해 대중들이 "칫, 지는 서울대, 연고대 나와 놓고..남한테는.."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보는데,,요즘은 "그래 학벌 비판도..좀 유식한 놈, 머리 좋은 놈이 해야지..뽀대 나지 않아?"라는 생각이 더 팽배해진 듯 합니다. 이러한 의식의 확산이 결국 '수능거부시위'에서 '그래서 당장 뭐 바뀐 게 있냐'는 실리주의적 시선이 큰 호응을 얻지요. 그 실리주의는 '생활보수주의'로 바뀝니다. 그냥 입 닫고 공부 열심히해서 부모님 속 썩이지 말라고, 네가 사회 생활 해보면, 네가 지금 그러는 행동 피눈물 날거라고.   그들은 수능을 거부했지만, 세상은 그들의 의사를 거부하려고 하는 비극. 이 비극은 결국 그들의 행동을 매년 다가오는 수능처럼, 그들의 의지를 치부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언론도 아예 그들에게 매년 '올해도..'라는 표현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들'의 자리는 매년 바뀌지만, 바뀜의 효과는 더 차디찬 냉소라는 반응과의 접촉입니다.

차가운 반응 가운데, 제게 가장 무서운 냉소는 사실 "그 시간에 차라리 책이나 보라"는 반응이 아닙니다. "이러지 말고 차라리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서, 그 대학에서 네가 펼치고 싶은 꿈을 펼치라고. 네가 하고싶은 시위의 정당성도..영향력도 그때 커질거야"라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서 수능거부 시위를 하는 친구들에게 수능이란 현실을 택해서, 그 수능이란 과정의 최정점의 결과를 통해 그 영향력을 행사해보라라는 게 오늘날 그들의 의지보다, 그들의 프로필에 기입된 '최종학력'을 소비하고픈 대중의 욕망에 더 가까운 게 아닌지 고민해 봅니다..  결국 대중들이 바라는 욕망은, 세상의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는 한 개인의 의지와 그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 보인 과정들의 발견이 아니라, "정말 공감합니다..글 잘 쓰시네요..역시..개념이시네요.."와 같은 딱 자신의 삶에서 적절한 개입선의 측정일 겁니다. 그러면서 그 공감의 반응들이 만드는 건, 학벌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이 체득한 학벌 자체를 선망함으로써, 끝나버리는.  

이제는 '대안학교'도 교육의 대안이 아닌,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대안으로서 낙인이 찍힌 느낌이 든 지 오래입니다. 이 현실이 스며든 '기업화된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수능 추위'를 극복하고, 한국 사회의 모순도 극복해보려는 수능거부 시위자들의 움직임에 대해 우리 사회가 냉소로 화답하는 것이 관례가 되고 있는 요즘이 안타깝고, 또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학력 차별을 점점 바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야 이 '수능거부 시위자'들에게라도 실컷 냉소를 퍼부을 수 있는 자기위안의 안전망에 자신을 집어넣고, '대학'에 들어간 나는 "그래도 너보다 나은 것 같다'는 자족감 하나로 이 세상을 살아갈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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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그 수많은 책 가운데, 그가 늘 강조하는 '한국인 코드'를 꼽으라면, "한국인은 지나치게 주의를 의식한다"일 것입니다. '눈치중심주의 사회'라는 말이 좀 과장될지 모르지만, 최소한의 거부할 수 없는 찝찝함은 안겨다주는 게 사실입니다. '말 한 마디'도 조심조심해야 합니다. '옷 한 벌'도 신중하게 골라야 합니다. (문화연구가 그토록 환호했던 '차이'의 정치학이라는 구호는 요즘의 '시대정신'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는 것은 '뒷담화의 카니발'입니다. 지금 당장 네이버에 '뒷담화'라는 말을 쳐보시죠. 특히 카테고리 중에서 '지식in'을 살펴보면, '뒷담화'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부터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원래 그렇게 '뒷담화'가 심한가요까지, '뒷담화'에 대한 외상이 생각보다 심한 걸 알 수 있습니다. '뒷담화'라는 것이 일상에서 으레 우리가 즐기는 가벼운 오락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지만, 주변 지인들 가운데 이 '뒷담화'로 인해 사람들 앞에 잘 나서려고 하지 않는 이가 적지 않다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지나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외상'라고도 저는 봅니다. 

학교나 회사나 커피숍에서 하던 '뒷담화'가 아는 사람들끼리 행해지는 것이라면,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벌어지는 '뒷담화'의 스펙터클은 '상상 이상'입니다. 누가 하나 '뒷담화'라는 차의 시동을 걸어주면, 여기저기서 '무임승차'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 인터넷 커뮤니티입니다. 흔히 우리가 '이슈'라고 말하는, '껀수'하나가 터지면, 이 무임승차의 규모는 엄청나지요. 무임승차라는 비유에서 우리는 내 감정의 투여 속에 '적정선'이라는 건 그냥 묻어놓은 채, 일단 '타고 보자'라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덧글 보험'에 든 사람들은 가입비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 보험은 특이해서, 그냥 인터넷 가입비만 내면, 너무나 편하게 이 보험의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 꼬박꼬박 보험료 내라고 재촉하지도 않습니다. 이 보험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요소는 '혐오'입니다. 긴 설명 필요 없이 혐오는 경계를 만듭니다. 너와 나. 그리고 ~와를 통해 자연스럽게 구분/구성되는 '차이'. 이 '차이'는 '혐오'를 통해 덧글 보험의 효과를 누려야 하는 이들에게 당장 뿅망치로 때려 구멍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 두더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혐오'는 '같음'을 추구합니다. 혐오로 뭉친 자들은, 내가 그 '혐오'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으로 '안도의 한 숨'을 쉽니다. 그리고 '덧글 보험'을 통해 형성된 '혐오'라는 사적 보험은 난 혐오 받는 너와 달라, 하지만 혐오하는 나와 함께 하는 사람과 같아라는 명제의 동굴에서 나올 줄 모릅니다. 왜냐면 그 동굴 속 어둠이 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를 미워하는 이유]의 저자 다카하리 모토아키의 주장처럼, 오늘날 우리를 뒤덮고 있는 것은 '불안형 내셔널리즘'입니다. (저는 이 개념에 상당히 공감합니다.) '사이비 적'을 만들어 놓고, 그 '적'에 자신의 불안한 내면을 '적대'라는 이름으로 표출하는 것. 이 불안형 내셔널리즘이 인터넷이란 미디어와 만나, 우리에게 '취미화된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을 안겨다주지요. '적대'라는 것이 충분한 설득력 없이 마냥 '희화화'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를 우리는 사실 많이 알고 있습니다. '취미화된 적대'.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맞닥뜨리는 '사태'입니다.  사회의 유동화 속에서 그 어느 하나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없는 현대인에게, 이 안정에 대한 욕망은 이상한 연대로 나아가는 듯 합니다. 적대와 연대가 묶이고, 그 효과가 '혐오'라는 이름 아래 묶일 때, 개인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이성의 필터'는 불능 상태가 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고 있지요.  

[미녀들의 수다]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는 '루저' 관련 방영분을 보면서 든 생각은 사실 남 대 여의 구도에서 오는 분노와 적대를 넘어선,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관계'이라는 고민의 꼴이었습니다.그래서 저는 어제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를 읽으면서, 그 꼴을 더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모스의 [증여론]에서 강조되는 세 요소 교환, 증여, 순수증여.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인'이라는 관계 안에서 많은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커뮤니케이션이 늘 '화통'되는 것은 아니고, '불통'을 학습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남으로써 초식남, 건어물녀 같은 개념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처 예방'을 위해 우리가 아예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겠지요. 좀 더 현실적인 움직임은 '예방'이 아닌, '예상'의 성격이 강한 움직임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주겠다'라는 '순수증여'라는 포장된 애정의 언어대신, 우리는 (마음 속에 숨겨놓았지만) '교환'이라는 애정의 언어를 늘 의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도경씨의 '루저'발언보다, 최한빛 씨가 언급한 '여성들이 꾸미는 만큼 남자들이 그만큼 데이트 비용을 부담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사실은 제법 진부한 지적이지만, 늘 고민거리로 남는 견해에 대해 더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큰 인상을 받음으로써, 사실 우리는 '루저' 발언에서 이도경씨의 입에 함께 따라 나왔던 '경쟁력'이란 단어도 보다 거시적인 구조 안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이 고민은 사실 제 지인이 고민하고 있는, 또 최근 여성학 진영에서 중심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기업화된 가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기업화된 가정' 속에서 늘 '전쟁'같은 일상을 감수해야 하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저는 이도경씨의 발언에서 나온 어떤 무의식에서 시대와 조응하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홈 스윗 홈'이라는 구도마저 깨어지고 있는 것 같은 요즘, 집마저도 전쟁을 위한 공장처럼 간주되는 오늘날, 그 어느 하나 'vs'의 구도로 맞설 수 밖에 없고, 또 구도에 동참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요구받은 이 사회에서, 저는 이도경씨의 발언이 진심이었든 / 대본에 따른 발언이었든 적어도 지금 이 시대가 공명하고 있는 외상이자,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처받아야 할 사람과 그 상처로 인해 가슴 아파야 할 사람은, '루저'라는 발언으로 발끈하는 이들과 함께 이도경씨 본인도 들어가야겠지요.  (그래요. '투자'라는 단어가 어디 네티즌들이 그토록 덧씌우고 싶어하는 '요즘 여성'들의 가치관이던가요. 그 '투자'라는 단어를 오히려 즐기는 것은 남성들도 마찬가지 아니던가요. 이 시대의 연애는 중세 시대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남자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한 치장, 그 치장으로 남성의 유복함, 귀족됨을 확인받던 그 시절.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한스 페터 뒤르의 책들을 보시면 공감하실 겁니다)

도를 넘어선 마녀사냥이다!와 같은 의견 등 우리가 예전부터 정말 많이 접해오고 있는 담론 양상ㅡ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이 '희생양'의식에서 우리가 좀 두텁게 사유해봐야 할 지점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마녀사냥'이란 단어 자체를 가지고 그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고 쓰라고 하면서, 자신의 '취미화된 적대'를 정당화하려는 태도입니다. '마녀사냥'은 정말 그녀가 '마녀'는 아닌데, 사람들로 인해 '부당하게' 마녀 취급을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런 '부당함'이 없는 사람에게 무슨 '마녀사냥'이란 말로 그녀를 구해주려 하느냐입니다. 근데, '부당함'이 사실 객관적일 순 없겠지요. 그 부당함을 둘러싼 복합적 요인들을 고려해봐야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확신하는 지점은 이 '마녀사냥'의 시선을 거부하면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적대적 행위는 비판받을 수 없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과는 전 분명 싸우고 싶습니다.  (근데 이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마녀사냥'운운한다는 것을 하나의 지적 게으름으로 치부하는 최근 견해들을 보면, 일부 공감가면서도, 그 사태에서 자신이 하는 행위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수단으로도 보여진다는 것 또한 저는 보여지는군요)

둘째, 이 '루저'발언으로 갑자기 '인권'을 운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인권'운운하는 분들은 종종 그 발언을 접한 자기 부모가 울었다느니, 친구가 우울증에 걸렸다느니 같은 상당히 '감동적인'(?)예를 들고, 또 거기에 '장애인'들의 사례까지 끄집어내어, "네가 장애인들의 심정을 아느냐"같은 과장된 동원을 시도하더군요. 저는 이 동원도 자신이 즐기고 있는 이 취미화된 적대의 분위기에 동참한 '불쾌한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 '인권' 운운하여, 소송을 걸고, '정의'라는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여, 그 정의의 댓가로 돈을 받자는 의견도 나오더군요. 그러면서 이건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건 상징이고, 나는 그 상징을 위해 소송을 한 것이다. 글쎄요..여기서 '법'은 과연 우리에게 온전한 해결사가 될 수 있는 걸까요.)

셋째, 이번에도 '된장녀' 사건 때처럼, '이게 다 모두 페미니스트들 때문이다'라는 괴언입니다. 페미니즘 좀 안다고 하는 분들이, (어떤 '사이비 강의'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1세대 꼴페미'가 지금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이 또한 진부한 시각을 들고 오시던데, 페미니즘이 얼마나 한국에서 잘못 이해되고 있는가는 이번 사건에서 또 나타났습니다. (이건 마치 젠더 연구한다고 하면, 여성들이 하는 연구라고 생각하는 것과 뭐가 다른 지적 수준인지..이거 원) 

문제는 앞으로 이 '취미화된 적대'는 계속 될 것 같고, '덧글 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이 온갖 잡다한 사이비 지식으로 편견과 오해의 벽을 견고히 만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혐'이라는 감정으로 언제나 똘똘 뭉쳐, '이'가 아닌 '동'으로 가길 바라는 현대 사회의 심리는, 그냥 오락거리의 하나로 보기엔 분명 위험한 수준입니다. 문제는 이런 '혐'을 통해 그 '혐'의 대상자가 된 사람이 "설마 안 좋은 ...?"그 결과로 가는 것 아니야?라는 그 위험한 상상의 '야릇함'을 무의식적으로 즐길 수도 있다는 것이죠. 제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입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에서 시작된 취미화된 적대 -> 근데 그 적대가 겉잡을 수 없이 커져 안 좋은 결과로 나타남 -> 반성이라는 진부한 굴레에서,우리는 또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암울함. 그 암울함을 소비하는 우리의 잔혹함. 문제는 이 잔혹함이 계속 우리의 양심문을 두드릴수록, 우리는 그 문에 강한 자물쇠를 채우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 자물쇠를 채우는 일이 "이웃도 하니 나도 한다"라고 해서 더 문제이겠죠. 거기서 가장 무서운 결론은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 일이랍니다.."라는 자들과 "이거 하다보니 그냥 웃자고 하는 것 같아요. 놔둬요 이게 대세입니다"라는 자들의 무의식적 연대가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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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09-11-1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편으론..지금 이 반성 드립이 더 무섭습니다...이 반성 드립으로..또 취미화된 적대감은 면죄부를 받고..유예되는 것은 아닐지..
 

11월 2일 [월]에 방영된 유시민의 일요인터뷰를 보면서, 문득 10.28 재보선 결과를 통해 진보진영의 위기를 분석한 레디앙과 프레시안의 기사 내용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 노무현의 죽음 이후 끊임없이 유시민에게 '잠룡'의 위치에서 깨어날 것을 요구하고 기대했던 이들은, 인터뷰에서 유시민이 했던 말 한마디,한마디에 시원함과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이번 재보선에서 가장 큰 위기의식을 느낀 곳은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아닐까 싶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사표론'과 '비지론'의 차원에서 '희생'을 강요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유시민은 인터뷰에서 친노신당의 포지션을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가 아니라, 민주당과 민노당/ 진보신당의 사이에 있는 '중도진보'라고 설명했다. 지금 누구를 찍어야 하나라고 고민하는 많은 누리꾼들에게 '솔깃한' 소식일게다. 다만, 기존 진보진영에서는 좌불안석이 될 수밖에 없을 게다.  다만 민주당의 이번 결과를 볼 때, 민주당도 그리 안심할 수 없는 건 '민주당에게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대안은 아직까지도 '엠비를 아직도 믿으십니까'같은 구호일텐데, '심판론'의 구호는 그렇게 안정적인 전략은 아니지 싶다. 사실 이 '심판론'의 구호 안에 전략적으로 뭉치는 진보진영의 경우, 생각보다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없다는 것은, 심상정이나 노회찬 같은 '인물론'이 아직 대중들에게 낯설다는 것 또한 분명 봐야할게다. 그들은 아직 '좋은' 정치인으로 인식될 뿐이지, '이끌어갈 수 있는' 정치인으로 인식되지 않는 듯하다. 대중들은 '좋은 정치인'이 이 정치판을 좋게 '이끌어갈 수 있다'라고 보진 않을 것이다. 그 '좋은'에는 역설적으로 대중들 사이에 공유되는 '좋지 않지만 인정해야 할 부분을 보여주는 것'로서의 '좋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게다. (이것이 정치인 걸까) 

지난 총선 이후, '홍정욱에게 아쉽게 패한 노회찬'의 이미지가 좋게 각인되는 등의 일정 수확으로 진보신당 등에 새로운 기운들이 유입되곤 했었지만, 그 새로운 기운을 형성하는 층이 진보신당을 고정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에, 진보진영은 심오한 고민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싶다. 그리고 유시민은 인터뷰에서 분명 밝혔듯이,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이 '자기들의 실현을 위한 정당'이라고 말하면서, 선을 어느 정도 그었다. 이 선 긋기는 분명 친노신당의(이 갖고 있을만한) 자신감 확보와 이후 연대 전략이 생길 경우,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영향력있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유시민 스스로가 언급했듯이 친노신당은 분명 '리스크가 있는 정당'이다.  좀 서둘러 가자면, 차후 서울시장 선거는 강금실 대 오세훈보다 더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할 듯하다. 다만,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이나 이번 재보선에서 느낀 것처럼, 한나라당 후보보다 민주당 후보가 누가 나오는 지를 더 걱정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여기 친노신당 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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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논쟁'이란 말을 들으면, 뉴스에서 사람들을 '낚으려고' 너무나 쉽게 쓰는 '파문'이란 말을 대할때의 부정적인 생각을 하곤 했다. "이것들, 사람 또 낚으려고 하는구나"하는 그런 좀 못된 심보말이다. 이건 사실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한겨레나 경향을 보던 지인들이 어떤 논쟁들을 보면, 그 논쟁에 대해 '개입적인' 말을 하기보다는, 언론이 또 '괜히' 의제를 만들어보려고 안달이 났구나라는 반응이 의외로 많았다. 그래서 그 논쟁에 참여한 이는 '흥행 없는 배우'들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또 그렇게 '관중'의 위치에만 머무른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조정환-이택광의 '중간계급- 촛불' 블로그 논쟁이 아니었나 싶다. 최 원의 개입을 통해 달궈질 가능성이 농후했던 논쟁이었고, 흥미로운, 나름 유의미한 논쟁이었다고 보는데, 주변 반응은 그냥 두 지식인의 '팬덤' 대결이 아니었냐는 의견이었던 것 같다.  

예상보다 꽤 오랫동안 지속되는 논쟁이 있으니, 그것은 요즘 <레디앙>에서 벌어지는 '체제 논쟁'이다. 나는 아직 20대고, 그렇기때문에 과거 '사회구성체논쟁', '한국 자본주의 성격 논쟁', '시민사회 논쟁' 등등 뜨거웠던 논쟁사를 역사서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체험한 세대이다. 하지만 요즘 워낙 이런 '생산적' 논쟁이 희소한지라, 옛날 그 뜨거웠던 논쟁의 나날들이 그리워진다. (사실, '그리워진다'라는 표현은 당시의 경험을 '글'로만 체험한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리라. 하지만 왠지 이 표현을 쓰고 싶어졌다. 일정한 양해를) 

사실 조희연 - 서영표 vs 손호철 구도에 머무른 채, <레디앙>에서 억지로 살려보려고 기를 쓴 느낌도 들지만, 그런 '불투명한' 의심은 하기는 싫고, 중간에 최 원 선생이 '지배어'의 생산이라는 고민의 의제를 잘 던져놓은 덕분에, 논쟁의 불씨는 계속 남은 형국이다. 이 논쟁 덕분에 얼마전 윤건차 선생의 <한국 현대사상의 흐름>을 다시 집어들어 정독했다. '레디앙'에서 본 조희연 선생과 손호철 선생의 사진을 보다가, 윤건차 선생의 문자 속에 새겨진 조희연과 손호철이라는 이름을 보니, (과장됨 없이)뭔가 가슴이 뜨끔하는 느낌이 들었다(미어진 기운보다는 약간 덜한). 그 뜨거운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그렇기때문에 그 뜨거움을 유지하고 싶은 이 지식인들의 열망, 욕망. 이 열망과 욕망이 가로새겨진 이름들을 하나하나 짚을때마다, 그 어떤 사상과 이념의 적대를 떠나, 그 적대를 아우르는 지성에 대한 존경은 감히 숨길 수 없는 그 어떤 보존의 존재로 남는다는 것은 당연하리라. 

하지만, 이런 '추억의 경제'가 지금 이 논쟁을 '효율과 실리'에 머무르게 만든다면, 그것은 '탈정치'보다 더 못난 얼굴을 가진 게 분명하다. 고로 나는 이런 '생산적 논쟁'이 더 뜨거워지길 바란다. 사실  비평과 해석의 의미에 흠뻑 빠진 우리 젊은 세대에게, 진중권이 시사인에서 언급한 '제작학'으로서의 학문적 의식이 참 없다는 게 안타깝다. 늘 다가오는 현상의 해석에 힘을 쏟은 채, 그 현상의 모순을 극복해보려는 대안의 시간은, '당연한 말만이 돌아올 대답'을 해대는 '당연한 질문'의 시간으로 전락한다. (사실 고단수 선생들은 이런 젊은 제자들의 뻔한 질문질이, 제자들 그들의 '인정 투쟁'임을 안다. 그 인정 투쟁에 결국 '나'는 있고, 사람은 간과된다. 오 인간이 죽어있는 학문이여! 대학생들 반성하자!) 

그런 맥락에서 '체제 논쟁'은 현상 분석의 시간을 넘어, 현상 극복의 시간을 창발적으로 이야기해보려는 '장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태의연한'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다만 이승원 선생이 말한 것처럼(좀 더 정확히 말해 해석해보면), 이런 전략들이 지나친 '현실 정치와의 접점 형성'으로 간다면, 이론이 가진 '지속가능함'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리라 본다. 이 맥락에서 나 또한 조희연 선생이 던진 '어떤 민주주의인가' 그리고 최 원 선생이 언급한'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의제임을 고백해본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더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한다'라는 개념에 이어,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개념 속에서, '다이내믹 코리아'는 희망의 지속가능성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부디 '수사'가 되지 않길 바라며) 

조희연, ‘반신자유주의 연합’ 비판…"국민정치적 공간+반신자유주의"(9월 10일, 레디앙)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481

 

[조희연-서영표 비판] "97년체제론에 대한 왜곡에 답한다"(9월 16일, 손호철)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530

 

[논쟁-손호철 선생님께] 추상적 논의-경험주의 편향 넘기 위해(9월 23일, 서영표)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616

 

[서영표 교수에게] ‘공허하고 추상적인’ 체제논쟁의 이유(9월 24일, 손호철)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632

 

[손호철 선생께①] ‘반신자유주의 헤게모니 정치’ 고민하자(9월 28일, 조희연)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662

 

[손호철 선생께②] “08년 체제는 87년 체제에 대한 역전”(9월 28일, 조희연)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670 

 

[투고-체제논쟁] 조희연-서영표와 라클라우-무페…김대중-노무현에 대한 착각(10월 5일, 최원)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733 

 

 [정치사회비평-체제논쟁] 민주후보-독자후보 논쟁 넘어 삶의 변화로(10월 9일, 이승원)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785

 

[체제논쟁] 최원씨에게…헤게모니 전략과 ‘민주주의적 변혁주의’(10월 19일, 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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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이, 그건 다 그 사람 걱정하니까 그런 말 하는 것이에요" 

2. "아니, 그런 말도 못합니까? 자기만 성군인가?" 

1번과 2번으로 채워질 반응을 미리 예상해 본다. 어제 [pd 수첩]을 보고 난 후 나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 표출'의 게임을 즐기는 것 같았다. 말을 좀 붙여 만들자면, '공포-게임'이라고 할까. '공익고발자'('내부고발자'보다는 이 말이 좋은 것 같다)를 자처한 한 영관장교의 용기있는 소신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사람의 용기로 인해 발생할 어떤 긍정성보다는, 그가 처할 부정적 미래에 대한 진단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아, 물론 "대단하다"는 표현 또한 많았다. 그러나, 그 수 만큼이나 사람들은 그 소령을 둘러싼 어두운 미래를 뱉어내기 좋아했다. "어이구, 이 분 끝이네요", "옷 벗으시겠네요" 이건 좀 심정을 밝히는 차원이지만, 난 괜히 이런 사람들이 밉다. '얄밉다'라는 표현이 맞겠지.  

그런 부정적 언어의 표출을 보면서,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계속 말을 하는 것은..결국 자신의 죽음을 부인하고 싶어서다"라는 그 말. 김영수 소령은 '두려움'이란 말을 꺼냈다. 우리는 그 말, 그 말에 담긴 어떤 감정을 통해 '인간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음과 동시에, 그 '두려움'을 맞이함으로써 '나의 안전망'을 무의식적으로 확보하려는 그 어떤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그 두려움을 내 입에서 나오는 '타자가 처할 두려움'을 발설하면서, 구경하는 쾌락의 순환고리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지.  

우리가 '남의 집 불구경하기'라는 표현을 쓸 때 상상하는 것은, 활활 타올라 잿더미로 변한 집들을 보면서, 옆에서 자신과 함께 보는 이들과 '불타오르는 광경'을 공유하는 것이다. 내가 너무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보는지 몰라도. 그 불구경 속에서 인간의 '공공적' /'이타적' 정신을 찾기보다는, "우리 집은 안 탔으니, 되었다"는 이상한 틈들이 더 가까이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그런 '공포'의 기제들이 만연된 일상. 이것은 왠지 이번 정부들어서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특수한'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더한 공포들이 이전에도 작동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공포들은 참 우리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부정적 자극을 그냥 참고 외면해버리게 하는 자기 검열의 형태라 모호한 두려움이 앞선다.  

결국 우리는 그 소령의 용기에서, 용기 자체에 대한 진정한 인정보다는, "또 무슨 (흥미로운) 일, 그 알 수 없는 실체의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지"라는 심정을 은밀하게 표출하는지 모른다. 그 소령의 용기는 그리하여, 또 '소비'되는 것이다. 타자가 느끼는 공포를 타자를 둘러쌀 공포로 반응하면서. "맞아, 당신 느끼는 두려움 그대로 될 거야"라는 이 수준을 "오 후덜덜합니다"라는 (약간 착한 듯한) 감정의 표출로 조심스레 교환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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