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그 수많은 책 가운데, 그가 늘 강조하는 '한국인 코드'를 꼽으라면, "한국인은 지나치게 주의를 의식한다"일 것입니다. '눈치중심주의 사회'라는 말이 좀 과장될지 모르지만, 최소한의 거부할 수 없는 찝찝함은 안겨다주는 게 사실입니다. '말 한 마디'도 조심조심해야 합니다. '옷 한 벌'도 신중하게 골라야 합니다. (문화연구가 그토록 환호했던 '차이'의 정치학이라는 구호는 요즘의 '시대정신'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는 것은 '뒷담화의 카니발'입니다. 지금 당장 네이버에 '뒷담화'라는 말을 쳐보시죠. 특히 카테고리 중에서 '지식in'을 살펴보면, '뒷담화'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부터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원래 그렇게 '뒷담화'가 심한가요까지, '뒷담화'에 대한 외상이 생각보다 심한 걸 알 수 있습니다. '뒷담화'라는 것이 일상에서 으레 우리가 즐기는 가벼운 오락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지만, 주변 지인들 가운데 이 '뒷담화'로 인해 사람들 앞에 잘 나서려고 하지 않는 이가 적지 않다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지나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외상'라고도 저는 봅니다.
학교나 회사나 커피숍에서 하던 '뒷담화'가 아는 사람들끼리 행해지는 것이라면,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벌어지는 '뒷담화'의 스펙터클은 '상상 이상'입니다. 누가 하나 '뒷담화'라는 차의 시동을 걸어주면, 여기저기서 '무임승차'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 인터넷 커뮤니티입니다. 흔히 우리가 '이슈'라고 말하는, '껀수'하나가 터지면, 이 무임승차의 규모는 엄청나지요. 무임승차라는 비유에서 우리는 내 감정의 투여 속에 '적정선'이라는 건 그냥 묻어놓은 채, 일단 '타고 보자'라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덧글 보험'에 든 사람들은 가입비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 보험은 특이해서, 그냥 인터넷 가입비만 내면, 너무나 편하게 이 보험의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 꼬박꼬박 보험료 내라고 재촉하지도 않습니다. 이 보험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요소는 '혐오'입니다. 긴 설명 필요 없이 혐오는 경계를 만듭니다. 너와 나. 그리고 ~와를 통해 자연스럽게 구분/구성되는 '차이'. 이 '차이'는 '혐오'를 통해 덧글 보험의 효과를 누려야 하는 이들에게 당장 뿅망치로 때려 구멍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 두더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혐오'는 '같음'을 추구합니다. 혐오로 뭉친 자들은, 내가 그 '혐오'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으로 '안도의 한 숨'을 쉽니다. 그리고 '덧글 보험'을 통해 형성된 '혐오'라는 사적 보험은 난 혐오 받는 너와 달라, 하지만 혐오하는 나와 함께 하는 사람과 같아라는 명제의 동굴에서 나올 줄 모릅니다. 왜냐면 그 동굴 속 어둠이 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를 미워하는 이유]의 저자 다카하리 모토아키의 주장처럼, 오늘날 우리를 뒤덮고 있는 것은 '불안형 내셔널리즘'입니다. (저는 이 개념에 상당히 공감합니다.) '사이비 적'을 만들어 놓고, 그 '적'에 자신의 불안한 내면을 '적대'라는 이름으로 표출하는 것. 이 불안형 내셔널리즘이 인터넷이란 미디어와 만나, 우리에게 '취미화된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을 안겨다주지요. '적대'라는 것이 충분한 설득력 없이 마냥 '희화화'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를 우리는 사실 많이 알고 있습니다. '취미화된 적대'.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맞닥뜨리는 '사태'입니다. 사회의 유동화 속에서 그 어느 하나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없는 현대인에게, 이 안정에 대한 욕망은 이상한 연대로 나아가는 듯 합니다. 적대와 연대가 묶이고, 그 효과가 '혐오'라는 이름 아래 묶일 때, 개인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이성의 필터'는 불능 상태가 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고 있지요.
[미녀들의 수다]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는 '루저' 관련 방영분을 보면서 든 생각은 사실 남 대 여의 구도에서 오는 분노와 적대를 넘어선,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관계'이라는 고민의 꼴이었습니다.그래서 저는 어제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를 읽으면서, 그 꼴을 더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모스의 [증여론]에서 강조되는 세 요소 교환, 증여, 순수증여.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인'이라는 관계 안에서 많은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커뮤니케이션이 늘 '화통'되는 것은 아니고, '불통'을 학습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남으로써 초식남, 건어물녀 같은 개념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처 예방'을 위해 우리가 아예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겠지요. 좀 더 현실적인 움직임은 '예방'이 아닌, '예상'의 성격이 강한 움직임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주겠다'라는 '순수증여'라는 포장된 애정의 언어대신, 우리는 (마음 속에 숨겨놓았지만) '교환'이라는 애정의 언어를 늘 의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도경씨의 '루저'발언보다, 최한빛 씨가 언급한 '여성들이 꾸미는 만큼 남자들이 그만큼 데이트 비용을 부담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사실은 제법 진부한 지적이지만, 늘 고민거리로 남는 견해에 대해 더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큰 인상을 받음으로써, 사실 우리는 '루저' 발언에서 이도경씨의 입에 함께 따라 나왔던 '경쟁력'이란 단어도 보다 거시적인 구조 안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이 고민은 사실 제 지인이 고민하고 있는, 또 최근 여성학 진영에서 중심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기업화된 가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기업화된 가정' 속에서 늘 '전쟁'같은 일상을 감수해야 하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저는 이도경씨의 발언에서 나온 어떤 무의식에서 시대와 조응하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홈 스윗 홈'이라는 구도마저 깨어지고 있는 것 같은 요즘, 집마저도 전쟁을 위한 공장처럼 간주되는 오늘날, 그 어느 하나 'vs'의 구도로 맞설 수 밖에 없고, 또 구도에 동참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요구받은 이 사회에서, 저는 이도경씨의 발언이 진심이었든 / 대본에 따른 발언이었든 적어도 지금 이 시대가 공명하고 있는 외상이자,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처받아야 할 사람과 그 상처로 인해 가슴 아파야 할 사람은, '루저'라는 발언으로 발끈하는 이들과 함께 이도경씨 본인도 들어가야겠지요. (그래요. '투자'라는 단어가 어디 네티즌들이 그토록 덧씌우고 싶어하는 '요즘 여성'들의 가치관이던가요. 그 '투자'라는 단어를 오히려 즐기는 것은 남성들도 마찬가지 아니던가요. 이 시대의 연애는 중세 시대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남자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한 치장, 그 치장으로 남성의 유복함, 귀족됨을 확인받던 그 시절.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한스 페터 뒤르의 책들을 보시면 공감하실 겁니다)
도를 넘어선 마녀사냥이다!와 같은 의견 등 우리가 예전부터 정말 많이 접해오고 있는 담론 양상ㅡ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이 '희생양'의식에서 우리가 좀 두텁게 사유해봐야 할 지점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마녀사냥'이란 단어 자체를 가지고 그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고 쓰라고 하면서, 자신의 '취미화된 적대'를 정당화하려는 태도입니다. '마녀사냥'은 정말 그녀가 '마녀'는 아닌데, 사람들로 인해 '부당하게' 마녀 취급을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런 '부당함'이 없는 사람에게 무슨 '마녀사냥'이란 말로 그녀를 구해주려 하느냐입니다. 근데, '부당함'이 사실 객관적일 순 없겠지요. 그 부당함을 둘러싼 복합적 요인들을 고려해봐야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확신하는 지점은 이 '마녀사냥'의 시선을 거부하면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적대적 행위는 비판받을 수 없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과는 전 분명 싸우고 싶습니다. (근데 이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마녀사냥'운운한다는 것을 하나의 지적 게으름으로 치부하는 최근 견해들을 보면, 일부 공감가면서도, 그 사태에서 자신이 하는 행위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수단으로도 보여진다는 것 또한 저는 보여지는군요)
둘째, 이 '루저'발언으로 갑자기 '인권'을 운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인권'운운하는 분들은 종종 그 발언을 접한 자기 부모가 울었다느니, 친구가 우울증에 걸렸다느니 같은 상당히 '감동적인'(?)예를 들고, 또 거기에 '장애인'들의 사례까지 끄집어내어, "네가 장애인들의 심정을 아느냐"같은 과장된 동원을 시도하더군요. 저는 이 동원도 자신이 즐기고 있는 이 취미화된 적대의 분위기에 동참한 '불쾌한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 '인권' 운운하여, 소송을 걸고, '정의'라는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여, 그 정의의 댓가로 돈을 받자는 의견도 나오더군요. 그러면서 이건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건 상징이고, 나는 그 상징을 위해 소송을 한 것이다. 글쎄요..여기서 '법'은 과연 우리에게 온전한 해결사가 될 수 있는 걸까요.)
셋째, 이번에도 '된장녀' 사건 때처럼, '이게 다 모두 페미니스트들 때문이다'라는 괴언입니다. 페미니즘 좀 안다고 하는 분들이, (어떤 '사이비 강의'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1세대 꼴페미'가 지금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이 또한 진부한 시각을 들고 오시던데, 페미니즘이 얼마나 한국에서 잘못 이해되고 있는가는 이번 사건에서 또 나타났습니다. (이건 마치 젠더 연구한다고 하면, 여성들이 하는 연구라고 생각하는 것과 뭐가 다른 지적 수준인지..이거 원)
문제는 앞으로 이 '취미화된 적대'는 계속 될 것 같고, '덧글 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이 온갖 잡다한 사이비 지식으로 편견과 오해의 벽을 견고히 만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혐'이라는 감정으로 언제나 똘똘 뭉쳐, '이'가 아닌 '동'으로 가길 바라는 현대 사회의 심리는, 그냥 오락거리의 하나로 보기엔 분명 위험한 수준입니다. 문제는 이런 '혐'을 통해 그 '혐'의 대상자가 된 사람이 "설마 안 좋은 ...?"그 결과로 가는 것 아니야?라는 그 위험한 상상의 '야릇함'을 무의식적으로 즐길 수도 있다는 것이죠. 제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입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에서 시작된 취미화된 적대 -> 근데 그 적대가 겉잡을 수 없이 커져 안 좋은 결과로 나타남 -> 반성이라는 진부한 굴레에서,우리는 또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암울함. 그 암울함을 소비하는 우리의 잔혹함. 문제는 이 잔혹함이 계속 우리의 양심문을 두드릴수록, 우리는 그 문에 강한 자물쇠를 채우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 자물쇠를 채우는 일이 "이웃도 하니 나도 한다"라고 해서 더 문제이겠죠. 거기서 가장 무서운 결론은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 일이랍니다.."라는 자들과 "이거 하다보니 그냥 웃자고 하는 것 같아요. 놔둬요 이게 대세입니다"라는 자들의 무의식적 연대가 아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