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수능시험이 되면 저는 솔직히 지각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수험생들,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두 손 모은 부모들, 선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새벽부터 나온 후배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느새 '무관심'이 되어버린 것 같은 '수능거부 시위'를 하러 온 학생들은 여전히 제 관심 안에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수능이 될 때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공감합니다'가 아닌, '또 저런 짓이야?' 가 이제는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렇게 피켓 들고 서 있을 시간에, 너희 친구들처럼 글 한자라도 더 보렴"이라는 반응은 올해 수능거부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에게 돌아오는 '당연한 반응'이 된 듯합니다. 

긴 설명 필요없이 학벌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선, 비판자의 학벌이 좋은 측면은 사실 그것을 바라보는 요즘 대중들에겐 한 편의 '성공학'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입니다. 어렸을땐, 이런 상황을 통해 대중들이 "칫, 지는 서울대, 연고대 나와 놓고..남한테는.."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보는데,,요즘은 "그래 학벌 비판도..좀 유식한 놈, 머리 좋은 놈이 해야지..뽀대 나지 않아?"라는 생각이 더 팽배해진 듯 합니다. 이러한 의식의 확산이 결국 '수능거부시위'에서 '그래서 당장 뭐 바뀐 게 있냐'는 실리주의적 시선이 큰 호응을 얻지요. 그 실리주의는 '생활보수주의'로 바뀝니다. 그냥 입 닫고 공부 열심히해서 부모님 속 썩이지 말라고, 네가 사회 생활 해보면, 네가 지금 그러는 행동 피눈물 날거라고.   그들은 수능을 거부했지만, 세상은 그들의 의사를 거부하려고 하는 비극. 이 비극은 결국 그들의 행동을 매년 다가오는 수능처럼, 그들의 의지를 치부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언론도 아예 그들에게 매년 '올해도..'라는 표현을 서슴치 않습니다. '그들'의 자리는 매년 바뀌지만, 바뀜의 효과는 더 차디찬 냉소라는 반응과의 접촉입니다.

차가운 반응 가운데, 제게 가장 무서운 냉소는 사실 "그 시간에 차라리 책이나 보라"는 반응이 아닙니다. "이러지 말고 차라리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서, 그 대학에서 네가 펼치고 싶은 꿈을 펼치라고. 네가 하고싶은 시위의 정당성도..영향력도 그때 커질거야"라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서 수능거부 시위를 하는 친구들에게 수능이란 현실을 택해서, 그 수능이란 과정의 최정점의 결과를 통해 그 영향력을 행사해보라라는 게 오늘날 그들의 의지보다, 그들의 프로필에 기입된 '최종학력'을 소비하고픈 대중의 욕망에 더 가까운 게 아닌지 고민해 봅니다..  결국 대중들이 바라는 욕망은, 세상의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는 한 개인의 의지와 그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 보인 과정들의 발견이 아니라, "정말 공감합니다..글 잘 쓰시네요..역시..개념이시네요.."와 같은 딱 자신의 삶에서 적절한 개입선의 측정일 겁니다. 그러면서 그 공감의 반응들이 만드는 건, 학벌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이 체득한 학벌 자체를 선망함으로써, 끝나버리는.  

이제는 '대안학교'도 교육의 대안이 아닌,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대안으로서 낙인이 찍힌 느낌이 든 지 오래입니다. 이 현실이 스며든 '기업화된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수능 추위'를 극복하고, 한국 사회의 모순도 극복해보려는 수능거부 시위자들의 움직임에 대해 우리 사회가 냉소로 화답하는 것이 관례가 되고 있는 요즘이 안타깝고, 또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학력 차별을 점점 바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야 이 '수능거부 시위자'들에게라도 실컷 냉소를 퍼부을 수 있는 자기위안의 안전망에 자신을 집어넣고, '대학'에 들어간 나는 "그래도 너보다 나은 것 같다'는 자족감 하나로 이 세상을 살아갈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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