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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에 이어 다시 고민을 전개해봅니다. 사회학적 설명/해부를 통한 역사적 신화의 해체가 아닌, 단순히 역사적 테두리를 기념하는 데 그친 것 같다는 제 문제 제기는, 김홍중 선생이 심보선 선생과 함께 쓴 <87년 체제 이후 스노비즘의 계보학>에서 그가 정의한 마음의 레짐이 제시한 구도 때문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그는 지금 이 시대를 '포스트-진정성 체제'로 규정하면서, 지난 20여년의 시간을 '진정성 체제' / '문화적 스노비즘의 체제'/ '토탈 키치'가 지배하는 3대 스놉(합리적 스놉,비판적 스놉, 룸펜 스놉)의 시대로 구분합니다. 물론 저자는 '단정 어법'을 취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구분선은 일종의 '경향'이라고 부연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도 결국 저자가 희미하게 붙들어매고 있는 '진정성'이라는 개념, 진정성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태도 속에는, 그 태도가 일종의 지배적인 '경향'이었던-그렇게 저자에 의해 해석되고 있는- 87년 체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자가 지향하는 정서적인 태도와 논리적인 기술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결국 정서가 논리를 압도하는 것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정서가 논리를 압도했을 때, 정서는 논리를 가장하여, 과학적 체계로 자리잡힐 수 있습니다.  

결국 87년 체제라는 정서적 참조점을 부인하든, 긍정하든 그 부인과 긍정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주체만이 가지는 '  순수한 '진정성'이 있다는 의견이 도출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문화적 스노비즘'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여, 386세대의 한계를 반성하지만, 그 반성은 결국 '평등한 위치'에 있는 자로서의 반성이 아니라, 그 시대의 가치를 알 수 있었던 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반성의 위치에서 머뭅니다. 그 반성의 위치에서 도출된/기술된/규정된 진정성 체제 이후의 시대 정의를 보면, 그것은 그 시대의 마음을 심층적으로 해부하여, 그 시대의 마음을 헤아리려하기보다는, 진정성이라는 개념을 최상의 위치에 올려놓고 진정성의 경향이 강했던 시기 이후의 문화적 경향은 그 시대의 마음에서 불순한 존재만을 가려내는/ 부각시키는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지점에서 이 책은 가장 점잖은 문체를 지향하지만, 가장 뜨거운 책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김홍중 선생이 지금 이 시대를 바라보며 문제화하는 지점이 분명 필요하다고 봅니다. 진정성이 부재한 시대에, 이 진정성, 올바른 사유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올바른 긴장감을 형성하는 작업은 중요하겠지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결국 그가 '마음'이라는 이 추상적인, 고로 추상적일 수 있기에 객관적 실체와 연결지어 규명해볼 수 있다는 학자의 욕망이, 마음 자체를 수사적으로, 또 마음 자체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하는 차원에서, 사회학 자체도 '수사'로 동원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 길게 설명하기에는 제 머리가 많이 부족하지만, 결국  마음을 설명하는 '사회학'에서 김홍중 선생은 사회과학적 기술, 객관적 기술의 태도만을 빌려온 것에 그친 것은 아닐까요. 고로 사회학과 객관적인 과학적 태도가 서로 혼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물론 저는 분명한 학문적 구분선을 긋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암튼. 이러한 태도 속에서, 제가 이 책이 역사적 기념비를 깨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기념비를 더 공고하게 세우는 것이라 한 점은, 저자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풍부한 지식으로, 지난 시간에 있어온 특별한 양상들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바라봄 속에서 문화와 관계맺는 주체의 방식에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계몽의 개입을 시도하고 있는 듯 합니다. 김홍중 선생은 아도르노 / 포스트- 아도르노/ 리(re)-아도르노의 사유 속에서, '계몽의 변증법'을 다시 정독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계몽의 변증법'에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해체하려는 그 '신화'로써 오늘의 문화를 둘러싼 신화를 비교할 때, 그 신화의 층위는 선뜻 '경제논리에 포섭된 문화'의 측면으로 단선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제가 말하려는 것은 문화를 수용하는 자들의 모든 점들을 긍정하며 본질적 가치를 부정하는 '문화주의'의 고수는 아니랍니다. ) 

-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이후.. 

본 책의 구성, 정확히 다는 아니지만, 진정성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기술하는 시각에서, 저자가 지향하는 스타일은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과 유사해봅니다. 리스먼은 대중사회론의 대표적 저서인 이 책에서,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사회적 성격'이라는 것을 규명해보기로 합니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전통지향형/내부지향형/타인지향형 인간입니다. 김홍중 선생은 스놉을 설명할 때, 리스먼이 '타인지향형'을 설명할 때 제시한 부정적 인간형태의 측면으로 스놉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냅니다.즉, 스놉에게 중요한 것은 타인과의 인정 투쟁이며, 자신을 과시하는 욕망의 농축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스놉을 속물로 번역한다는 것은, 스놉 자체의 개념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자신이 취하고 있는 문화적 적대의 시각을 살짝 가리는데요. 결국 속물을 스놉으로 번역한다고 해서, 진정성 체제 이후 그가 바라보는 문화적 형상에서 그 부정적 시각으로 점철된 적대감은 중화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70년대는 청년 문화의 시대였다, 90년대는 신세대 문화의 시대였다라는 어떤 해석을 아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소위 이런 공동체의 문제를 문화적으로 해석해왔던 일련의 문화연구자들에게 '문화구성체'라는 개념은, 그 시대의 지배적 감정 구조를 문화적 실천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자들을 설명하는 데 보탬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구성체라는 이름으로 객관화되어 있는 역사적 산물로서, 그 역사 속 주체와 그 주체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재구성과 해체의 작업을 해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지점에서 김홍중 선생이 지난 시간을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을 통해 시대를 살아간 개인과 공동체의 마음을 독해하려는 시도는 이런 시도를 젊은 연구자들이 갈수록 기피한다는 점에서 본받고 싶음을 밝혀둡니다. 다만, 마음이라는 이 주관적이며, 해석의 차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지점에서, 사회학이 개입하는 지성의 실천이 보여준 <마음의 사회학>이라는 산물이 주위의 반응과 달리 그렇게 성공적이라고 저는 보지는 않습니다.  

 

# '문학결정론'의 위험성

결국 문화와 인간, 예술과 인간이라는 관계에서, 김홍중 선생은 우석훈 선생이 진정성에 대해 설명한 것처럼, 하나의 정서적 개념이 인간에게 전유되었을 때, 인간은 그 정서적 개념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더군요. 그러나, 자칫 이런 시각은 마치 기술결정론,사회결정론, 기술의 사회구성론 등등의 논의에서 나오는 충돌점처럼, 하나의 문화적 형식이 지닌 고유의 가치를 진공상태의 무엇으로 올려놓아, 인간이 그 문화적 형식을 통해 보여주는 가능성들을 수동적이며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로 들어 그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비판하면서, 문학은 이미 그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는데, 고진은 문학의 진정성을 너무 안이하게 보고, '과잉진술'을 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주장합니다. 해석과 해석이 맞부딪혀야 하는 시점이 왔네요. 저는 김홍중 선생이 인용하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이론과 언급들을 보면서, '매체'로서의 문학이 갖는 아직 우리가 더 고민해봐야 할 가능성에 대해, 문학이 지탱해야 할 본질적 가치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규정한 지식인들의 의견으로, 문학 스스로의 존재와 소통 범위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국 이 안에서 문학은 신이 되고, 인간은 그 신의 도움으로 진정성이라는 태도를 유념하게 되는 '신앙적 이성'을 선취하게 되는 것으로 우리는 되돌아와야 하는 것일까요.  소위 '문학결정론'이라는 위험성이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요. 

여기서 고진과 김홍중은 만납니다. 문학은 정치적인 것을 담보해왔다, 그러나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문학을 통해 정치를 상상한다는 것은 오늘날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문학을 포기하려 한다. 그것이 고진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김홍중은 문학은 살아있다, 너는 문학을 통해 정치를 사유하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주체들이 죽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냐고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지요. 하지만, 결국 이 안에서 저는 '문학결정론'의 위험성을 봅니다. 묵독이라는 수용의 방식과 이를 통해 만들어진 개인의 진정성이 만들어진 공간, 그 공간을 만들어주는 데 문학은 그 무엇보다 우위에 서 있다라는 견지는 서로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문학결정론이 먹히지 않는 시대에 실망한 고진은 다른 운동을 하러 갔고, 김홍중은 아니야 고진아, 문학결정론은 충분히 살아 있어. 내가 진정성이라는 개념으로 네가 버리려고 한 문학적 주체들을 다시 끌어모아 볼 께 한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마음의 사회학>안에서 문학적/비문학적 구도가 나뉘어지는 것 같고, 이상하게도 정치적/비정치적 구도가 나뉘어지는 것 같습니다.  (가령, 문학적 : 비문학적 = 정치적 : 비정치적 이렇게 말이죠..)

그러나, 저자가 그토록 강조한 '포스트-진정성'체제에, 우리가 진정성을 재정립할 수 있는 방식/형식까지 건드릴 수 없는 게 아닌가, 그 자율권만은 개인에게 맡겨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1장 진정성의 운명과 이와 연관된 87년 체제 이후의 스노비즘의 계보학에서 저는 386적 주체가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계몽의 힘을 보게 됩니다. 386적 주체는 이미 진정성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개인으로서, 진정성이 아닌 것을 경험도 해 본 개인으로서, 문화적 적대로서의 스놉이라는 문화적 주체의 윤리에 진정성이라는 훈계를 내릴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나는(386으로서) 저항한다 , 나는 타락도 해봤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완벽한 주체로)'  

 

 

.....(스놉인 아이들아)따라올테면 따라와 봐.. 

- 끝-    

* 이 논의는 본 책의 1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고로 나머지 장은 또 다른 차원에서 시간이 날 때 고민해보고 싶네요.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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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2-06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습니다. 글 잘 읽었고요. 386이 가진 헤게모니(문화적 우선권의 의미로)를 온당히 해체(?)해야 한다로 읽히네요.(독법이 부족합니다. 제가 글을 왜곡시켰다면 양해를 부탁...^^) 반론이 있는 것은 아닌데요. '포스트 - 진정성' 시대에 '진정성을 재정립할 수 있는 방식/형식'을 개인이 담당하기엔 너무 버겁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이론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일 성 싶기도 하고요. 역으로는 그래서 실천적인 문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글 잘 읽고 가고요. 제가 잘못 읽었다면 지적해주세요. 과감히 삭제(!)하겠습니다. 건필하세요.^^

얼그레이효과 2010-02-0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제가 보기에 글 말미에 갈수록 힘이 딸려, 종지부를 좀 제대로 찍지 못한 것 같네요. 개인에게 주어진 조건과 그 조건에 의해 나타나는 방식들을 조직화하는 건, 우리 사회에 늘 꾸준히 요구되었던 전술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론과 실천의 구분이 아닌, 빵가게님의 말씀처럼 이론과 실천의 역동성 속에서,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2-0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점에서 개인 차원으로 등 떠밀자고 한 것은 아니었구요.^^ 개인의 능동성과 자율성 너머에 함께 할 수 있는 격론과 연대의 시장이 열리길 고대합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2-07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잘못 읽었네요.^^ 신경쓰지 마시고요. 건필하세요.^^(좋은 글도 계속 부탁드리고요.^^)

얼그레이효과 2010-02-08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닙니다. 좋은 지적이셨어요. 고맙습니다.!

라살레 2013-05-06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 아주 좋은데요. 제가 김홍중을 읽은 독법과 같은 해석이시네요. 엘리트주의적인 계몽주의. 결국 진정성이란 일자적 대자를 상정한 이분법 구도에서 나온 하나의 일자일 뿐이지요. 따라서 그의 진정성 개념 자체가 과잉해석되어 왜곡되어있다고 보여집니다. 인정투쟁을 벗어나 있고, 자기반성의 개념이 진정성이란 것에 동의하기 쉽지 않거든요. (이른바 진정성세대인 386세대들이 운동권에게)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인정투쟁의 구도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되니까요.
 

   

  김홍중 선생의 <마음의 사회학>이 주위에서 화제라고 하고, 알라딘에서는 나름 선호를 받는 책 같은데, 생각보다 '난분분한'의견의 공간이 없어서 아쉽다. 개인적으로 어제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김홍중 선생의 논문 주제들과 글쓰기 스타일에 나름 호감을 갖고 있던 편이라서,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예견되는 대목들이 있었다. 다만 책을 다 읽지 않은 상황에서 조심스러운 부분이긴 하지만, 김홍중이 책에서 보여주는 시선에 대해 불편한 부분도 있어, 이 부분이 정확히 나의 '마음'에서 어느정도 자리잡고 있고, 또 어떻게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글을 쓴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이 한 시대를 사유하기 위해 노력한, 정확히 말해 한국이란 나라에 흐르고 있는 마음의 흐름들을 밝히고자 한 저자의 농도 짙은 고민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저자를 향한 무작정한 '안티-'는 아님을 밝히며, 오히려 내가 갖고 있는 의견과 견주어 봄으로써, 사유의 확장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중론을 밝힌다.  

- 우석훈이 언급했던 '진정성' 

내 기억으로 '진정성'에 대하여 나름 흥미로운 언급을 했던 지식인을 꼽으라면 우석훈인 것 같다. 그의 칼럼집<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에, '노무현의 진정성과 전두환의 진정성 사이에서'라는 글이 있는데, 김홍중 선생이 <마음의 사회학>에서 주장/강조하는 진정성이란 개념을 생각하기 이전에, 나는 그 책에 기술된 우석훈의 주장이 떠올랐다. 우석훈이 책에서 한 주장을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즘 사람들 참 진정성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애. 근데 이 말 너무 흔하게 쓰이는 것 아냐?" "이 말의 기원이 뭐야?" "이 말 너무 악용되고 있어" .예로 들어 우석훈은 '진정성'이란 용어가 자신들이 불가피하게 악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항변할 때 쓰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 항변의 '진실'을 대중들이 용서의 차원에서 받아주기를 바라는 정치인 특유의 전략으로 전락한 '진정성'이라는 용어는 좀 숙고해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우석훈은 김홍중 만큼의 정성으로, '진정성'이라는 개념의 기원을 찾아본 것은 아니다.  - 그렇다고 그의 불성실함은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석훈은 칼럼에서 진정성이 truthfulness이냐? authenticity이냐?고 물으면서, 그는 이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갖는 오묘한 심리학적 시선, 혹은 문학적이면서 미학적인 시선이 사회에 속한 개인에게 전유되었을 때, 자칫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고 예견하는 듯하다. 암튼, 뭐 여기까진 상식적인 멘트다. 좀 더 해부를 하자면, 우석훈은 진정성이라는 꽤 문학적이며, 미학적인 이 용어가 우리의 삶에 들어왔을 때, 인간의 '오용'이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간주하는 수준에 다다르면서, 진정성은 인상적으로 좋은 '미학적' 면모를 띄는 듯 하지만, 사회에 내재된 권력 관계의 비대칭에 의해, 전혀 다른 메시지로 표출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미학적 가치를 판단하는 용어인 진정성은 스스로 추함의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석훈은 현실 정치계의 '언변 전술'을 비판하면서, 당시 그 정권이 끌어가려는 정치적 의사소통 과정에서, 줄곧 내세운 '불가피론'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여러분, 이 정부가/ 이 여당이 / 이 야당이 추구하려는 가치와 그 기조는 많은 고민 끝에 나온 것입니다. 다들 불만이 많은 줄로 압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르자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도 많이 고심하고, 스스로 죄책감도 갖고 있습니다만..." 우석훈은 진정성이 이런 논지를 옹호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라면, 거부하고 싶다고 말하는 듯하다. 즉, 그는 '개나 소나' 진정성을 부르는 시대에,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추해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즉, 그는 진정성이라는 이 용어가 인간 그 스스로의 오류를 진실이라는 가치로 뒤덮는 데 사용되는 것을 중단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고와 촉구는 무엇보다 '진정성'이란 개념은 실체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과 결부된다.

그러나 김홍중은 <마음의 사회학>에서  "어떻게 이 모호한 단어인 진정성에 사람들이 그토록 분명한 실체적 무엇을 요구하는가?"란 우석훈의 질문에 나름의 농도짙은 사회학적 기술을 시도하려 한다.

- 김홍중이 주장/강조하는 진정성 

김홍중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명확하다. 쉽게 말해서 이 '마음'이란 모호한 것은 물질적 형태로 규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추상적일 것 같은 그림이, 추상 그 자체로 남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개개인의 생활 방식 속에서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홍중은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을 설정하면서, 이 '마음의 레짐'에 따라 시대의 흐름을 읽어보자고 권유한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진정성이라는 것 자체도 굳이 불명확한 개념은 아니다. 진정성은 '증명될 수 있는 존재론적 사고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이 자리잡음 속에서 진정성은 그것과 관계 맺고 있는 인간이라는 실체를 보여주는 계기이자 매개인 것이다. 우석훈이 '진정성'이 사회적으로 사용/전유되는 과정에 집중하여, 진정성을 오용하는 권력자들의 오만함을 일갈한다면, 김홍중은 진정성을 시대의 차원에서 사고하고자 한다. 그래서 진정성을 대하는 스케일은 김홍중이 더 크고, 더 집요하다.  

김홍중은 한국이란 나라에서 진정성이란 소위 '87년 체제'로 지칭되는 80년대의 마음 구조를 읽을 수 있는 핵심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진정성은 과연 무엇인가. 그는 트릴링에서부터 찰스 테일러 등 진정성을 언급했던 학자들의 설명을 재구성한다. 그 과정 끝에 진정성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쉽게 요약하자면, 

 '나'는 세상을 살아간다. '나'는 세상이 부과하는 도덕 혹은 규범에 마냥 순응할 수 있다. 혹은 거부할 수 있다. 진정성을 갖는 자, 진정성에 충실한 자는 그런 순응과 거부의 태도를 둘 다 인식하면서, '나' 스스로가 올바를 수 있는 태도를 지니려고 노력한다. 이런 정신적인 노력 그리고 육체적인 실천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진정성은 '앙가주망'이라는 형태 속에서 내가 속한 사적 세계와 또 내가 접촉할 수밖에 없는 공적세계 간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렇다면, 이 긴장감으로 구성된 진정성이 어떻게 한국의 87년 체제와 이어질까. 저자는 87년 체제에 속해 있던 개인들에게는 '진정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대목을 좀 꼼꼼하게 봐야 하는데, 이유인즉슨 김홍중은 '마음의 레짐'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 마음의 레짐이 87년체제, 97년 체제 등으로 딱딱 10년 단위로 맞아떨어지는 단절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시대적 상황을 '지배하는 담론'으로서, 그 시대를 아우르는 지배적인 인식의 형태로서, 진정성은 이론화시킬 수 있는 납득할만한 위상을 가졌다고 본다. (고로 여기서부터 문제는 발생한다) 

내가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  

김홍중이 내어놓은 해석과 그 근거에 대해 그가 비록 87년 체제를 완전히 '장악'했던 정서로서의 진정성은 아니라고 부연 설명을 하지만, 조금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대목은 이것이다. 한 시대에 진정성인 것, 진정성이 아닌 것이 공존한다고 하는 어느 정도의 설명에 대해 논리적으로 양보한다치더라도, 김홍중은 자신이 설정한 나름대로의 해석과학적 역사관 속에서, 그 '해석'과 이에 부합하는 목적성에 치중한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80년대를 수놓았던 정치적 민주화라는 테마로 수렴되고야마는 역사적 시선, 80년대의 신화에 대해 '진정성'이라는 개념을 갖고 '겸양된  반성적 자세'로 논리적 기술을 시도하지만, 되려 여기에서 '80년대의 신화'에 향수를 느끼는 '신앙'의 체취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비록, 내가 앞에서 '겸양된 자세'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김홍중 스스로 이를 의식한 듯, 진정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소불위의 그 무엇이 아니라, 그 시대를 제약했던 억압적 실체였다는 '반성적 지점'을 만들어놓았지만, 그가 강조하는 진정성 , 속물, 포스트 진정성 체제의 역사적 기술 속에서, 그 정서적 참조점의 기준으로 서 있는 시기는 80년대이며, 그 시기의 구성원들이 내뿜어준, 더 나아가자면 당시 '지식인'으로 대변되는 대학생들의 고뇌와 갈등의 농축이 진정성이라는 개념에 쉽게 포섭되고 있다. 그리고 80년대를 넘어,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으로서 그가 갖는 그 성찰의 전지전능함이 주는 시대를 향한 반성마저도 어쩌면 '성찰성'이라는 개념 안에서 휘둘러지는 나름의 폭력이 아닌가 생각해본다.(그가 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예로 들었을까.  겸손과 반성의 자세에서 그리고 냉소와 허무 속에서도 결국 이 시대를 굳건히 했던 건, 80년대적 주체, 진정성을 가지고 있던 주체들의 힘이었다는 것인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는 그 시대의 사유와 고뇌를 잃었다는 것인가. 더 나아가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가 )  

 

그렇다면 그는 지금 시대의 마음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마음을 단지 (테두리에서만) '기념'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래서 97년 체제가 한국인을 생존의 동물로, 점점 속물성을 강화시킨 시기였음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그가 진정성, 속물, 포스트 진정성 체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그가 애초에 열망하고자 했던 '사회학적 해부'가 아니라, '역사적 신화에 기인한 '기념'적 묘사가 아닌가라고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이 질문 앞에서 결국 97년 체제가 그의 글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마냥 '악의 시간'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담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87년 체제든, 97년 체제든 10년 단위로 끊어지는 구분선의 인식적 한계를 유념하면서도, 그 유념 속에서 안이한 사고를 지향하고 있다. (즉,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찾는 행위) 그는 '성찰'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리고 태도를 통해, 현상을 반성하지만, 이 반성이 '역사적 신화'의 해체의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나는 87년 체제에서도 충분한 속물을 보며, 97년 체제에서도 87년 체제보다 더 진득한 진정성이 발견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너무 도덕적 강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마음'이란 이 모호한 것을 물질성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이 증명의 욕망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헤겔과 코제브를 경유하며 누적된 역사적 시각의 외피로 그 시대에 이미 주어졌던 가치에 기념비 하나를 얹고 바로 산을 내려오고 있지 않았는가. 오히려 그는 진정성과 속물이란 개념을 통해 이미 세워졌던 역사적 기념비를 부수는 작업을 해야하지 않았을까. (오늘은 여기까지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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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trash 2010-02-06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공부하고, 생각하고, 글 쓰는 얼그레이효과 님을 보면서 괜시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네요... 님은 훌륭한 사람이 되실거예요. (응?) '훌륭한'이라는 표현은 애매하지만, 아무튼 훌륭한? ㅎㅎ;

얼그레이효과 2010-02-06 0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팝트래쉬님 (닉네임에서 어떤 후덜덜한 기운이;). 별말씀을요. 기본적으로 함량 미달이라 늘 생각하며 살기에 몸부림만 치다 끝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바라 2010-02-06 0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며칠 전부터 이 책 드문드문 읽어보고 있었는데.. 저도 80년대 또는 진정성의 체제가 부지불식간 어떤 중요한 참조점으로 미리 전제되어있는 것 같다는 비슷한 혐의를 느꼈었네요. 마저 더 읽어보고 판단해봐야겠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2-06 14:45   좋아요 1 | URL
바라님 안녕하세요. 저도 더 침착하게 읽어보면서 가지런하게 정리해봐야겠네요. 그래도 김홍중 선생이 지향하는 스타일은, 사회학 내에서 참 독특하고 신선해서,저자의 센스를 본받게 됩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2010-02-07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2-08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윤리와 도덕 등. 우리가 엄연히 잘 알고 있다고 판단하는 개념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좋은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최근 윤리학이 이른바 학문적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시대가 사유해야 할 윤리가 무엇인지를 경험적으로 서둘러 접근하기에 앞서, 윤리라는 것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문학결정론'에 대한 부분은 저자가 문학사회학자인 위치에서 문학에 대한 중요성을 위치짓는 것은 학자로서 비단 필요한 사고이겠으나, 이른바 '당대의' 문학과 접붙이는 과정을 면밀하게 보여주기보다는, 이른바 진공상태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진품의 가치로서 문학에 대한 우월성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았나하는 생각에 문제제기를 해봤습니다.
 


눈대중으로 누군가의 기록을 판단하는 것에 앞서


이 글은 내가 쓴 책의 또 다른 서문을 표방한다.

편의상 서문-B라고 하겠다. 서문-B를 나누는 이유


다소 곤란한 감정을 읽고 있거나 읽을 이들이 인식하게 되는 지적 지형도 속 위치의 문제때문이다. ‘이 책은 과연 사회학 도서의 위치에 있는가’ ‘이 책은 산문집인가’.  학술계 내  연구자나 비평가. 전자의 위치를 기대하다 후자의 위치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독자들. 후자의 위치로 파악하면서 전자의 위치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유형화의 시도보다 중요한 것은 본 책이 지향하는 고민거리다. 그 고민거리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 여정을 공개하는 게 이 책에 접근하는 유익한 경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경로엔 위치의 문제라고 밝힌 대목에 관한 나만의 입장도 있다. 아울러 이 글은 본 책의 주요 형식인 단상에 스민 학술적 두께에 대한 소개도 될 것이다. 다만 일반 독자들이 독서를 통해 꾀할 다양한 목적을 고려하는 가운데,  굳이 책에서 설명하지 않아도 될 대목이라고 생각해 책에 싣진 않았음을 밝힌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한 나의 결언부터 말하자면, 내 생각이 이 책을 읽을 사람들이 도모할 제각기 다른 독해의 자유를 제한시킬 이유란 없다. 다만 당신이 본 기록물을 접해가는 가운데 이런 지적인 배경이 있었구나, 떠올려주면 그만이다. 

이런 지점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 분들은 여기까지 읽고 자신의 독서를 계속 진행해도 좋으리라.

 



 




















2 감정사회학 이전에 심리(학)적 사회학에 대해

아무래도 학술계, 학술계와 가까운 출판계에 몸담지 않은 일반 독자가 많을 것이기에, 사회학의 역사를 조금 챙겨보는 일. 필요하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당신이 사회학으로 인식하는 학문. 오랜 시간 분화의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오래전부터 사회학자의 글쓰기인지 심리학자의 글쓰기인지 구분 불가능한 사회학 내 분야, 사회학자의 타입이 있어왔다. 나는 감정사회학 연구를 행하고 이후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감정사회학 입문서에 늘 처음 등장하는 레퍼토리, ‘그동안 사회학사 내에서 감정의 위상은 중요하지 않았다는 식의 설명에 심히 집착하기보단 사회학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연구하기, 기록 쓰기를 행해온 이들에게 끌렸다


대표적으로 게오르그 짐멜이 있으며, 가브리엘 타르드도 해당된다. 나는 특히 게오르그 짐멜이 남긴 기록을 탐독하면서 심리(학)적 사회학이라는 명명 아래 이것이 사회학인지 심리학인지 쉬이 구분되지 않는 학자들의 연구 성과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 열중의 영역엔 조지 허버트 미드, 찰스 호튼 쿨리, 그리고 사회학사 내에서 가장 뛰어난 일상의 조사관 중 한 명인 어빙 고프만, 고프만의 이론을 전유&확장하면서 사회 내 감정, 정서, 심리의 문제를 챙긴 랜들 콜린스가 있다. 이들 모두 사회적 상호작용론이라는 테마 아래 묶을 수 있다.

사회적 상호작용론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 부대끼는 각종 상황에서 나타나는 마음, 정서, 감정, 심리를 설명하려는 이론이다. 특히 사회적 상호작용론자의 대표격인 랜들 콜린스는 인간이 사회인으로 살아가며 맞닥뜨린 상황에 대해 탄탄한 시선과 풍부한 해부를 시도해왔다. 


+참고로 그는 언뜻 보기에 사회학의 연구 분야라 볼 수 없는 생각의 의미에 대해, 내향성의 특성에 대해서도 연구한 바 있다. 

그는 생각의 사회학자이자 내향성의 사회학자였다. 이참에 말하자면 나는 성격심리학이 오랜 시간 유형화해온 성격 유형의 내향성을 넘어서는 지점에 더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다소 곤란한 감정』은 내향적 인간의 유형에 부합하는 이들을 위한 심리학적 처방전의 위치를 경계한다. 


오히려 이 책의 관심사는 사회적 차원의 내향성은 과연 가능한가, 사회적 차원의 내향성이라는 렌즈 아래 점점 '내향화되어가는 사회'란 어떤 상황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다. 나는 책에서 내향화되어가는 사회를 우려하며 '사회적 우울'이란 용어를 제시했다. 고로 나는 부러 책을 통해 성격심리학에서 말해온 내향성의 눈으로 나를 설명하지 않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회에서 통용되어온 내향인의 기준 안에서 나를 판단하고 당신을 판단할 때 놓치고 있던 지점이 뭘까 곱씹게 됐다. 그러므로 '어느 내향적인 사회학도의 섬세한 감정 읽기'라는 부제에서 내향적인-이란 , 나를 내향적 인간으로

두어보는 일종의 실험적 명칭에 더욱 가깝다. 



 
























3  상황의 힘을 주목하며 

사회를 살아가면서 개인도 구조도 아닌 상황의 힘이 중요하다고 설파한 대표적인 학자로 심리학계에선 리처드 니스벳이 있고, 사회학계에선 랜들 콜린스가 있다. 굳이 학술적 해명을 하지 않아도 당신과 내게 상황은 어떻게 인식되는가. 나는 상황에 대해 강의할 때 상황과 더불어 당황이란 단어를 함께 설명하는 편이다. 상황은 아무리 유비무환의 자세로 준비한다 하더라도 그 상황에 연루된 이들을 어떻게든 당혹시킨다. 다시는 그런 상황에 휘말리지 않겠다 마음먹고 준비한 대로 움직인다 하더라도 계획 그대로 실행하진 못하는 게 상황이다. 공고한 사회구조도 상황의 불확실성엔 맥을 못 추곤 한다.


오래전 논의지만 사실 사회학 내에서 상황의 힘을 주목하게 된 것은 개인 대 사회라는 구도 아래 사회를 해부하는 사회학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회의감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 중간항으로 상황이 설정되었다. 내가 다소 곤란한 감정에서 55개의 어휘를 활용한 것은 ‘55개의 상황과 그 속 의미를 어떻게 시각화, 장면화할 것인가에서 비롯됐다. 책을 읽은 이나 책을 읽을 이가 알게 되겠지만 나는 가급적 사회구조개인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으려 했다.


상황엔 개인으로 혹은 사회구조로도 쉬이 얽어낼 수 없는 당혹감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나는 외려 그 당혹감의 자리에 매혹되었고, 상황과 감정이라는 두 키워드 아래 감정사회학을 공부하고 연구해나갔다. 그런 가운데 국내의 감정사회학 연구자들이 이 같은 상황의 힘보단 감정으로 한국 사회의 거시적 형체를 규명하는 데 매몰되어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아마도 사회적 상호작용론은 주목받기엔 너무 오래된 이론이자, 한편으론 자칫 어떤 심리학주의에 경도된 사회학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에(오늘날처럼 유형화가 되어있지 않으면 의심부터 하고 안심하지 못하는 지식의 지형도를 볼 때) 그런 선택이 불가피했다고 이해해보려 한다. 그러나 사회적 상호작용론에서 강조하는 상황과 감정의 경우.  여기서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일상의 차원. 그리고 그 차원에서 사람들이 쓰고 있는 감정의 언어와 그 언어에 대한 해석을 국내 감정사회학 연구자나 비평가들이 도통 챙기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다.






















사회학자 데버라 럽턴은 감정적 자아에서 사람들은 대체 일상에서 감정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심층인터뷰를 수행한 바 있는데, 나는 이 기록을 접하면서 책을 쓴다면 이런 접근성을 참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느 감정사회학자처럼 뒤르켐과 베버라는 두 사회학 거두의 이론에서 차마 발견하지 못했던 감정의 역설부터 설명하려는 대신,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감정의 차원, 그 차원이 스민 장면들을 수집하고 열거하며 유형화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게 감정사회학이 무언지 궁금해할 이들을 위한 입문의 과정이라 생각했다.

 




























아울러 글을 써가는 데 우리나 현대인이라는 사회학 연구  내 익숙한 호명 대신 '당신과 나'라는 호명을 쓴 까닭은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결합태'라는 이론에 기반했다. 그 또한 개인 대 사회, 거시 대 미시라는 구도 아래

사회학이 전개되는 양상을 못마땅해했고, 사회란 어떻게든 나로 출발해 나와 결부될 수밖에 없는 타인이 존재하며

그렇게 나와 타인이 결부되어 만들어가는 사회적 연계, 그 연계의 덩어리들이 얽히고설키는 것이 사회라고 보았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또한 사회에서 당신과 내가 결합된 채 맞닥뜨리는 상황들의 역사에 주목해왔고, 나는 고로

나와 너, 너와 나로 출발하는 사회적 상황의 장면들에서 감정을 읽어나가는 시도부터 이뤄져야 

비로소 감정사회학 '입문'이 가능하지 않을까 곱씹게 됐다. 























다소 곤란한 감정은 감정사회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간편히 에세이화’해버렸다는 유형화의 유혹을 일찍이 경계하려는 책이며, 오히려 소개하고자 한다면 이 책은 단상이란 형식의 감정사회학 입문서다. 물론 모든 공부가 그렇지만 나는 감정사회학을 접해가면서 사회학만으로 역부족임을 깨달았고 다행히도 오랜 기간 각종 인문&사회&예술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지적 조류 및 기록과 친숙해질 기회를 얻었다. 나는 이를 전형적인 학술적 글쓰기로 용해시켜 발표하기보단 단상이란 형식으로 남기려 했다. 이는 가독성/독이성에 대한

인식과 거리가 멀며, 사회학적 글쓰기에 대한 내 나름대의 확장을 염원하는 시도였다. 







보론)

나는 대학원 시절, '사회학 출판의 이해'라는 강좌가 개설되면 어떨까 자주 꿈꿔왔던 사람이었다. 익히 알다시피

학계 내에서 통용되는 사회학적 글쓰기와 단행본 시장에서 통용되는 글쓰기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나는 학술계와 출판계 둘 다에 속하면서 두 위치를 모두 체험했고 두 위치를 오가며 서로의 오해와

곡해를 확인하게 됐다. 다소 곤란한 감정』은 그러한 오해와 곡해에 머무는 대신 사회과학이라는 학술계와 이를 다루는

출판계 사이를 교란하면서도 혼융하는 '사회학적 글쓰기'의 시도이기도 하다. 

이 책을 기존 사회학 도서의 위치에서 보리라고, 혹은 에세이의 위치에서 보리라고 정해야 안심이 되는 누군가가

다소 곤란한 심경을 느꼈다면, 외려 나의 의중은 통했다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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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1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준만의 그 수많은 책 가운데, 그가 늘 강조하는 '한국인 코드'를 꼽으라면, "한국인은 지나치게 주의를 의식한다"일 것입니다. '눈치중심주의 사회'라는 말이 좀 과장될지 모르지만, 최소한의 거부할 수 없는 찝찝함은 안겨다주는 게 사실입니다. '말 한 마디'도 조심조심해야 합니다. '옷 한 벌'도 신중하게 골라야 합니다. (문화연구가 그토록 환호했던 '차이'의 정치학이라는 구호는 요즘의 '시대정신'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는 것은 '뒷담화의 카니발'입니다. 지금 당장 네이버에 '뒷담화'라는 말을 쳐보시죠. 특히 카테고리 중에서 '지식in'을 살펴보면, '뒷담화'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부터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원래 그렇게 '뒷담화'가 심한가요까지, '뒷담화'에 대한 외상이 생각보다 심한 걸 알 수 있습니다. '뒷담화'라는 것이 일상에서 으레 우리가 즐기는 가벼운 오락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지만, 주변 지인들 가운데 이 '뒷담화'로 인해 사람들 앞에 잘 나서려고 하지 않는 이가 적지 않다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지나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외상'라고도 저는 봅니다. 

학교나 회사나 커피숍에서 하던 '뒷담화'가 아는 사람들끼리 행해지는 것이라면,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벌어지는 '뒷담화'의 스펙터클은 '상상 이상'입니다. 누가 하나 '뒷담화'라는 차의 시동을 걸어주면, 여기저기서 '무임승차'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곳이 인터넷 커뮤니티입니다. 흔히 우리가 '이슈'라고 말하는, '껀수'하나가 터지면, 이 무임승차의 규모는 엄청나지요. 무임승차라는 비유에서 우리는 내 감정의 투여 속에 '적정선'이라는 건 그냥 묻어놓은 채, 일단 '타고 보자'라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덧글 보험'에 든 사람들은 가입비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 보험은 특이해서, 그냥 인터넷 가입비만 내면, 너무나 편하게 이 보험의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누가 꼬박꼬박 보험료 내라고 재촉하지도 않습니다. 이 보험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요소는 '혐오'입니다. 긴 설명 필요 없이 혐오는 경계를 만듭니다. 너와 나. 그리고 ~와를 통해 자연스럽게 구분/구성되는 '차이'. 이 '차이'는 '혐오'를 통해 덧글 보험의 효과를 누려야 하는 이들에게 당장 뿅망치로 때려 구멍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 두더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혐오'는 '같음'을 추구합니다. 혐오로 뭉친 자들은, 내가 그 '혐오'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으로 '안도의 한 숨'을 쉽니다. 그리고 '덧글 보험'을 통해 형성된 '혐오'라는 사적 보험은 난 혐오 받는 너와 달라, 하지만 혐오하는 나와 함께 하는 사람과 같아라는 명제의 동굴에서 나올 줄 모릅니다. 왜냐면 그 동굴 속 어둠이 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를 미워하는 이유]의 저자 다카하리 모토아키의 주장처럼, 오늘날 우리를 뒤덮고 있는 것은 '불안형 내셔널리즘'입니다. (저는 이 개념에 상당히 공감합니다.) '사이비 적'을 만들어 놓고, 그 '적'에 자신의 불안한 내면을 '적대'라는 이름으로 표출하는 것. 이 불안형 내셔널리즘이 인터넷이란 미디어와 만나, 우리에게 '취미화된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을 안겨다주지요. '적대'라는 것이 충분한 설득력 없이 마냥 '희화화'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를 우리는 사실 많이 알고 있습니다. '취미화된 적대'.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맞닥뜨리는 '사태'입니다.  사회의 유동화 속에서 그 어느 하나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없는 현대인에게, 이 안정에 대한 욕망은 이상한 연대로 나아가는 듯 합니다. 적대와 연대가 묶이고, 그 효과가 '혐오'라는 이름 아래 묶일 때, 개인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이성의 필터'는 불능 상태가 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고 있지요.  

[미녀들의 수다]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는 '루저' 관련 방영분을 보면서 든 생각은 사실 남 대 여의 구도에서 오는 분노와 적대를 넘어선,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관계'이라는 고민의 꼴이었습니다.그래서 저는 어제 나카자와 신이치의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를 읽으면서, 그 꼴을 더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모스의 [증여론]에서 강조되는 세 요소 교환, 증여, 순수증여.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인'이라는 관계 안에서 많은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커뮤니케이션이 늘 '화통'되는 것은 아니고, '불통'을 학습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남으로써 초식남, 건어물녀 같은 개념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처 예방'을 위해 우리가 아예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겠지요. 좀 더 현실적인 움직임은 '예방'이 아닌, '예상'의 성격이 강한 움직임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주겠다'라는 '순수증여'라는 포장된 애정의 언어대신, 우리는 (마음 속에 숨겨놓았지만) '교환'이라는 애정의 언어를 늘 의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도경씨의 '루저'발언보다, 최한빛 씨가 언급한 '여성들이 꾸미는 만큼 남자들이 그만큼 데이트 비용을 부담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사실은 제법 진부한 지적이지만, 늘 고민거리로 남는 견해에 대해 더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큰 인상을 받음으로써, 사실 우리는 '루저' 발언에서 이도경씨의 입에 함께 따라 나왔던 '경쟁력'이란 단어도 보다 거시적인 구조 안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이 고민은 사실 제 지인이 고민하고 있는, 또 최근 여성학 진영에서 중심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기업화된 가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기업화된 가정' 속에서 늘 '전쟁'같은 일상을 감수해야 하는 오늘날 현대인에게, 저는 이도경씨의 발언에서 나온 어떤 무의식에서 시대와 조응하는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홈 스윗 홈'이라는 구도마저 깨어지고 있는 것 같은 요즘, 집마저도 전쟁을 위한 공장처럼 간주되는 오늘날, 그 어느 하나 'vs'의 구도로 맞설 수 밖에 없고, 또 구도에 동참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요구받은 이 사회에서, 저는 이도경씨의 발언이 진심이었든 / 대본에 따른 발언이었든 적어도 지금 이 시대가 공명하고 있는 외상이자,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처받아야 할 사람과 그 상처로 인해 가슴 아파야 할 사람은, '루저'라는 발언으로 발끈하는 이들과 함께 이도경씨 본인도 들어가야겠지요.  (그래요. '투자'라는 단어가 어디 네티즌들이 그토록 덧씌우고 싶어하는 '요즘 여성'들의 가치관이던가요. 그 '투자'라는 단어를 오히려 즐기는 것은 남성들도 마찬가지 아니던가요. 이 시대의 연애는 중세 시대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남자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한 치장, 그 치장으로 남성의 유복함, 귀족됨을 확인받던 그 시절.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한스 페터 뒤르의 책들을 보시면 공감하실 겁니다)

도를 넘어선 마녀사냥이다!와 같은 의견 등 우리가 예전부터 정말 많이 접해오고 있는 담론 양상ㅡ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이 '희생양'의식에서 우리가 좀 두텁게 사유해봐야 할 지점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마녀사냥'이란 단어 자체를 가지고 그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고 쓰라고 하면서, 자신의 '취미화된 적대'를 정당화하려는 태도입니다. '마녀사냥'은 정말 그녀가 '마녀'는 아닌데, 사람들로 인해 '부당하게' 마녀 취급을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런 '부당함'이 없는 사람에게 무슨 '마녀사냥'이란 말로 그녀를 구해주려 하느냐입니다. 근데, '부당함'이 사실 객관적일 순 없겠지요. 그 부당함을 둘러싼 복합적 요인들을 고려해봐야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확신하는 지점은 이 '마녀사냥'의 시선을 거부하면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적대적 행위는 비판받을 수 없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과는 전 분명 싸우고 싶습니다.  (근데 이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마녀사냥'운운한다는 것을 하나의 지적 게으름으로 치부하는 최근 견해들을 보면, 일부 공감가면서도, 그 사태에서 자신이 하는 행위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수단으로도 보여진다는 것 또한 저는 보여지는군요)

둘째, 이 '루저'발언으로 갑자기 '인권'을 운운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인권'운운하는 분들은 종종 그 발언을 접한 자기 부모가 울었다느니, 친구가 우울증에 걸렸다느니 같은 상당히 '감동적인'(?)예를 들고, 또 거기에 '장애인'들의 사례까지 끄집어내어, "네가 장애인들의 심정을 아느냐"같은 과장된 동원을 시도하더군요. 저는 이 동원도 자신이 즐기고 있는 이 취미화된 적대의 분위기에 동참한 '불쾌한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 '인권' 운운하여, 소송을 걸고, '정의'라는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여, 그 정의의 댓가로 돈을 받자는 의견도 나오더군요. 그러면서 이건 돈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건 상징이고, 나는 그 상징을 위해 소송을 한 것이다. 글쎄요..여기서 '법'은 과연 우리에게 온전한 해결사가 될 수 있는 걸까요.)

셋째, 이번에도 '된장녀' 사건 때처럼, '이게 다 모두 페미니스트들 때문이다'라는 괴언입니다. 페미니즘 좀 안다고 하는 분들이, (어떤 '사이비 강의'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1세대 꼴페미'가 지금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이 또한 진부한 시각을 들고 오시던데, 페미니즘이 얼마나 한국에서 잘못 이해되고 있는가는 이번 사건에서 또 나타났습니다. (이건 마치 젠더 연구한다고 하면, 여성들이 하는 연구라고 생각하는 것과 뭐가 다른 지적 수준인지..이거 원) 

문제는 앞으로 이 '취미화된 적대'는 계속 될 것 같고, '덧글 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이 온갖 잡다한 사이비 지식으로 편견과 오해의 벽을 견고히 만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혐'이라는 감정으로 언제나 똘똘 뭉쳐, '이'가 아닌 '동'으로 가길 바라는 현대 사회의 심리는, 그냥 오락거리의 하나로 보기엔 분명 위험한 수준입니다. 문제는 이런 '혐'을 통해 그 '혐'의 대상자가 된 사람이 "설마 안 좋은 ...?"그 결과로 가는 것 아니야?라는 그 위험한 상상의 '야릇함'을 무의식적으로 즐길 수도 있다는 것이죠. 제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입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에서 시작된 취미화된 적대 -> 근데 그 적대가 겉잡을 수 없이 커져 안 좋은 결과로 나타남 -> 반성이라는 진부한 굴레에서,우리는 또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암울함. 그 암울함을 소비하는 우리의 잔혹함. 문제는 이 잔혹함이 계속 우리의 양심문을 두드릴수록, 우리는 그 문에 강한 자물쇠를 채우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 자물쇠를 채우는 일이 "이웃도 하니 나도 한다"라고 해서 더 문제이겠죠. 거기서 가장 무서운 결론은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 일이랍니다.."라는 자들과 "이거 하다보니 그냥 웃자고 하는 것 같아요. 놔둬요 이게 대세입니다"라는 자들의 무의식적 연대가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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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09-11-1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편으론..지금 이 반성 드립이 더 무섭습니다...이 반성 드립으로..또 취미화된 적대감은 면죄부를 받고..유예되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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