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이 아닌 곳에서 텔레비전, 비디오, 그리고 이제는 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네필'과 '영화광'을 섞어 쓰지만, 사실 영화사적으로, '시네필'은 고유의 의미를 지켜줄 필요가 있는 개념이다. '영화관에 가는 체험'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시네마'라는 개념 안에서, 영화광의 원초가 되는 '시네필'들은 늘 영화관에 '가는' 체험을 강조해왔다. 모두가 잘 아는 프랑소와 트뤼포의 전기를 보면, 그가 극장에 '가는'것으로 느끼는 행복감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담겨 있다.  

온라인 세상에 머무는 시간이 오프라인보다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요즘. 선거를 앞두고 유명 정치인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인증을 하는 것을 보면서, 소멸하는 정치적 열정을 걱정하는 내 마음을 씻어버리는 수많은 이들의 어떤 열광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그래 차라리 온라인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이 기운을 이어나가기 위해 인터넷으로 전자 투표하는 세상을 빨리 만들자구!하는 상상. 그런데, 조금 더 생각을 가다듬어보니, 영화는 영화관에 가서 보는 게 제 맛이요, 투표는 투표장에 가서 하는 게 제 맛인 것 같다. 

'시네필'들은 단순히 영화관 안의 어둠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봤던 연인들의 그 은밀한 동작들부터, 수많은 영화평론가, 그리고 영화감독들이 증언하는 영화관 문화 안의 흔적들. 영화를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기, 티켓을 끊기, 옛날 분들은 오징어를 직접 구워 검은 봉지 안에 땅콩과 함께 넣어 갔을 것이며, 더 옛날엔 좌석에 붙은 껌딱지를 밟아 영화를 놓치고, 화장실 오줌 지린내에 기분을 잡친 채로 영화의 본모습을 잊고 나오는 추억도 있었을 것이다.  

'투표장'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영화관만큼 흥미로운 추억은 없겠지만, 줄을 서고, 약간 후덥지근한 날씨 안에서 선거로 인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사람들의 안내를 받고, 내 신분증을 보여주며, 투표용지 안에서, 누구를 찍을 지 이름을 확인하기. 그리고 몇 번을 접어, 투표함에 손수 넣어보기. 그리고 나오면서 느끼는 얇은 책받침같은 두께의 추억들 혹은 그것보다 더 두터운 스스로의 뿌듯한 보람이 담긴 추억으로서의 한 풍경. 

투표, 그 '시네필'적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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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고인이 된 영화배우이자 감독, 그리고 화가였던 데니스 호퍼를 추모하고자 한다. 데이빗 린치 감독의 <블루 벨벳>에서의 그 인상적인 악마, 프랭크 부쓰나, 장 드봉 감독의 <스피드>에서, 악역경찰 하워드 페인 역할로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었을 데니스 호퍼, 그는 다들 알다시피, 예술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만드는 것', '창조하는 것'을 예전부터 좋아하던 연기자였다. 또 그는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자,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이기도 한 영화 <이지 라이더>의 감독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데니스 호퍼의 진면목, 연기자가 아닌 삶에서 그가 추구했던 예술적 열정을 잘 정리해놓은 자료를 찾다가, 집에서 드디어 한 권 발견했다. 영상이론가 존 a 워커의 <유명짜한 스타와 예술가는 왜 서로를 탐하는가>(2003/2006). 이 책에서 저자는 데니스 호퍼를 '화랑의 부랑자'로 설명하고 있다. 혹시 영화 <블루벨벳>의 DVD를 갖고 있는 분이라면, 서플먼트 중에서 메이킹 다큐멘터리를 꼭 보길 바란다. 여기엔 감독 데이빗 린치의 세계를 조망해주는 참여 연기자들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데니스 호퍼가 데이빗 린치의 세계관을 설명할 때 쓰는 표현에서 그가 얼마나 미술을 좋아하는지를 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아래는 존 a 워커의 책 중, '화랑의 부랑자' 데니스 호퍼의 삶을 정리해놓은 구절을 직접 몇몇 옮겨놓은 것이다.  

모험적이고 반항적인 기질, 마른 체격에 열정적인 데니스 호퍼는 1936년 캔자스의 다지 시티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부유했지만, 중서부의 평평한 농업지대에서 유년시절을 외롭게 보냈고, 영화의 생생한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가 그의 도피처가 되었다. 미술과 시 암송 외의 수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춘기 때 캔자스 시티의 넬슨-앳킨스 미술관에서 미술 강의를 들었는데, 잭슨 폴록을 가르쳤던 그 지역의 화가인 토머스 하트 벤튼(1889~1975)에게 배웠다. 유럽의 마티에르 미술에 영향을 받은 호퍼는 1955년까지는 무거운 질감의 그림을 그렸다. 1961년 화재로 인해 그의 벨 에어 스튜디오에 있던 300여점의 추상화가 불탔을 때 그의 미술가로서의 경력은 타격을 입었다. 어쨌든 1950년대에 호퍼는 연기로 방향을 바꿨고, 샌디에고의 한 극장에서 셰익스피어극을 공연하던 중에 할리우드의 눈에 띄었다. 제임스 딘과 <이유없는 반항>(1955)과 <자이언트>(1956)에 출연했고, 호퍼와 딘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딘 역시 그림을 시작해보기도 하였다. 한 영화감독과의 불화 끝에 호퍼는 뉴욕으로 옮겨와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법을 배우는 한편, 사진을 시작하면서 추상표현주의가 해프닝, 네오-다다,팝아트에 자리를 내줄 무렵에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호퍼는 팝아트를 '현실로의 회귀'로 생각했고, 추상표현주의의 제스처적인 흔적을 좋아하기는(94) 했지만, 그는 팝아트의 발견된 오브제들을 이용하곤 했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호퍼는 '화랑의 부랑자'가 되었는데, 전시된 모든 작품이 눈에 들어올 때까지 현대미술관을 돌아다녔다.  94~95쪽 

  

  데니스 호퍼가 그린 Andy Warhol (with Flower) 

호퍼의 다재다능함은 그가 영화배우이자 감독이며 화가에 조각가, 사진가에 미술품 수집가였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또한 그는 전시회용 카탈로그에 보 바틀렛이나 케니 샤프 같은 예술가에 대한 논평을 쓰기도 했다. 더 나아가 그는 TV 드라마와 광고에 출연했고, 광고와 예술의 상호작용에 관한 tv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1983년에 그는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동안 다이너마이트가 원형으로 쌓인 공간을 웅크린 채로 지나가는 위험한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95쪽 

호퍼는 10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가 감독했고 썼다고도 주장하는 대항문화의 영화 <이지 라이더>(1969)에서 장발의 오토바이 폭주족에 코카인 밀수업자인 빌리 역,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블루 벨벳>(1986)에서 사디스트적인 마약 딜러 프랭크 부스로 잘 알려져 있다. 호퍼는 기대치 않았던 <이지 라이더>의 상업적 성공으로 <최후의 영화>(1971)라는 현실적이고 지적으로 야심 찬 상징적 영화를 감독할 수 있었다. 페루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영화 만들기, 환상과 실제, 외국 문화에 대한 미국의 영향에 관한 영화였다. 호퍼는 영화라는 매체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자신의 영화편집을 현대회화에 비유했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추상표현주의 회화(95)와 같아, 한 남자가 연필 선을 보여주고 캔버스에 여백을 남기고, 붓 자국을 보여주고는 약간의 자국이 흘러내리도록 하면서, '그래, 난 물감과 캔버스와 연필 선으로 작업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는 서부 지역의 미술가 브루스 코너가 자투리 필름으로 만든 실험영화들이 <이지 라이더>와 <최후의 영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96쪽  

  

호퍼의 그림, BIKER COUPLE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호퍼는 윌리스 홉스, 브루스 코너, 앨런 케프로우, 에드워드 키엔홀츠, 리히텐슈타인, 에드 루샤와 워홀 같은 동부와 서부 지역의 미술가들과 월터 홉스, 어빙 블럼 같은 미술중개상들과 어울렸다. 영화배우이자 수집가인 프라이스와의 오랜 교분은 이미 언급했었다. 코너는 호퍼처럼 아상블라주를 만들었고, 1970년대 초에 동판화의 세 시리즈를 만들면서 사람들의 오해를 살 만한 <데니스 호퍼 원맨쇼>라는 제목을 붙였다. 96쪽 

호퍼는 할리우드의 주류에 반대하여 1960년대의 급진적인 정치운동에 공감하고 있었다. 1965년, 그는 앨라배마 주의 셀마에서 있었던 흑인 인권운동 행진에 참가하여 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1967~68년 사이에 베트남에서 전쟁이 확대되고 있을 때, 호퍼는 쓰레기장에서 발견한 제2차 세계대전 때 비행기에서 나온 폭탄 투하장치에 기초한 플렉시글라스, 스테인리스 스틸, 네온으로 만든 <폭탄 투하>(1967~68)란 제목의 냉소적이고 움직이는 대형조각을 만들었다. 유명인들은 자신과 같은 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유명인들과도 쉽게 연결되었다. 그런 까닭에 호퍼의 사진이 갖는 매력의 하나는 말론 브란도, 피터 폰다와 제인 폰다, 제스퍼 존스, 리히텐슈타인, 폴 뉴먼, 워홀 같은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호퍼는 배우이자 감독으로서 '장면 뒤의' 말하자면 영화 세트나 촬영지에서의 스타들을 찍을 수 있었다. 98쪽  

 

호퍼의 사진은 단순한 아마추어 스탭사진이 아니다. 호퍼의 사진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이나 구성 면에서 뛰어나고, 여러 나라에서 전시되고 몇 권의 사진집이 출판되기도 했다.<60년대로부터>는 현재 수집가들의 값비싼 소장품으로 알려져 있다.호퍼의 업적은 1987~88년에 미니애폴리스의 워커 아트 센터를 시작으로 순회 전시된 회고 영화와 전시회 '데니스 호퍼 : 방법에서 광기까지'에서 잘 드러났다. 그의 시각예술에 초점을 맞춘 두 번째의 회고전은 2001년 2월 암스테르담의 권위 있는 현대미술 전시관인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열렸다. (중략) 호퍼는 미국의 주도적인 미술가들과의 친분, 시각예술에 관한 그의 이해 덕택에 통찰력과 과감함을 겸비한 현대미술 수집가가 되었다. 사실 그는 생전에 세 개의 다른 컬렉션을 모았고, 그 중 두개는 이혼문제를 해결하(99)기 위해 처분해야 했다(그는 다섯 번 결혼했었다). 99~100쪽  



                                          호퍼의 사진, Venice (Gagged Man)

호퍼가 1986년 뉴욕에서 첫 사진전을 열었을 때, 그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명성을 얻은 슈나벨을 만났다.(얼그레이효과 주- 우리가 <잠수종과 나비>의 감독으로 잘 알고 있는 그 감독이 줄리앙 슈나벨이다)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고, 호퍼는 슈나벨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 한 토기 부조 그림을 그의 컬렉션에 추가했다.(슈나벨은 후일 깨어진 접시에다 호퍼의 머리와 어깨를 초상화로 그렸다) 100쪽 

시각예술에 대한 관심과 팝적인 감수성 덕택에 호퍼는 도시적인-특히 로스엔젤레스의-풍경들과 간판들에 민감했다. 그는 자전거 타는 사(104) 람들, 자동차 도로, 더러운 담벽, 찢어진 포스터, 빌보드 광고판, 담벼락의 낙서를 사진으로 담았고, 음식점과 주유소를 선전하는, 사람의 모습을 한 높고 조야한 입식 광고물을 찬미했다.그는 부유한 덕택에 전문 상업미술가들을 고용하여 <멕시칸>이나 <라 살사 맨>이나 <모빌 맨>의 복제품을 만들어 그의 빌보드 이미지를 사진과 같은 사실적인 모습으로 그리도록 했다. 104~105쪽  



                                         호퍼의 그림, Morocco (Drip Painting)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호퍼의 자기파괴적인 행동은 극에 달했다. 그가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고 코카인을 복용한 채, 두 명의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 때문에, 할리우드 제작사의 간부들은 여러 해동안 그를 영화에 출연시킬 수 없다고 치부해버렸다. 호퍼는 술과 마약에 탐닉한 것이 창작의 과정에는 - 특히 시작 단계에서- 필연적이었다고 주장한다. 호퍼를 인터뷰한 영국의 저널리스트 린 바버는 천재가 되려는 호퍼의 엄청난 야망에 주목하고 이렇게 평했다. "유감스럽게도 작품보다 천재들의 라이프 스(105)타일을 연구하는 흔한 실수, 즉 소위 내가 귀를 잘라내면 반 고흐처럼 그림을 그릴 것이란 환상-를 저질렀다.호퍼는 바버에게 예술을 하는 그의 목적은 '자신의 시대보다 조금 더 지속하는 뭔가를 남김으로써 죽음을 약간 속여보자는 '희망'이라고 말했다. 105~106족  

 



* 더 많은 호퍼의 작품은 http://www.acegallery.net/artistmenu.php?pageNum_ACE=3&totalRows_ACE=75&Artist=21# 여기서 감상할 수 있다. 

고인의 나이, 74세. 미국 현지 시각으로 5월 29일. 깊은 잠에 들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굿바이, 프랭크 부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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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5-3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데니스 호퍼가...
저 개인적으로는 의미있는 배우에요..이지라이더에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까지...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는 수밖에요..

얼그레이효과 2010-05-31 12:56   좋아요 0 | URL
메피스토펠레스님, 반갑습니다. 같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안타까운 죽음이 자주 일어나, 더 씁쓸하고 그렇네요.
 

어릴 적 부모님들을 볼 때면 가장 신기했던 게, 모두가 '생방송'으로 챙겨봐야한다고 스포츠 경기들에 대체로 무관심했던 태도였다. 그런데, 요즘 내가 그렇다. 월드컵이 되었는데, '드디어' 이번 월드컵부터는 설레이는 마음이 사라졌다.(내가 기억하는 월드컵은 1990년 이태리 월드컵 부터다.) 심지어 요즘엔 그냥 하이라이트로 잠깐 챙겨 보지 뭐,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중학교 1학년 과학 시간에, "선생님 제발 오늘은 수업 10분만 하고 보지요!"라는 친구들의 건의를 큰 소리로 지지했던 나. 결국 FM이셨던 선생님의 수업 강행으로, 친구와 나는 조용히 라디오를 들으며, 홍명보의 추격골, 서정원의 극적인 동점골에 환호를 참아가며 좋아했다.(그땐, 내가 키가 제법 컸다는 것이 그리도 감사할 수가.)  

하지만, 이젠 그런 추억들을 애뜻하게 지금 다시 느끼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지고, 얼마든지 텔레비전을 끈 채,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내가, 가끔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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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31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나이를 알아버렸어!
'이립'밖에 안되셨다니~~^^

얼그레이효과 2010-05-31 12:57   좋아요 0 | URL
^^;;
 

 
출처 : 오마이뉴스
 

심상정 경기도지사 진보신당 후보가 어제 후보 사퇴를 했다. 개인적으로 예상은 했지만, 실제 사퇴의 과정을 밟기 까지, 그 고민과 갈등을 둘러싼 주위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짐작이 간다'는 표현 자체로도 정리할 수 없는, 아니, 그 표현 자체가 무례해보이기까지 한, 며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심상정 씨의 사퇴를 정치사회학적 접근이나, 흔히 정치비평에서 많이 쓰이는 수사인 '정치공학적 측면'으로 분석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그 어떤 인간적인 감정이라고 할까. 정치판이라는 세계에서, 인간으로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갖는 내면의 혼란, 하지만 그 혼란스러움을 가다듬고, 밖에서는 정돈된 기조와 의견을 보여주는 그 사이. 나는 정치인의 생리를 잘 모르지만, 그동안 봐왔고 경험했던 시간 안에서, 역사는 늘 정치인이 되려면 '선인'은 될 수 없다는 안타까운 교훈을 주었던 것 같다. 고로, 이 말을 뒤집어보면, 심상정은 현실 정치 내에서 그 기능과 소임을 다할 수 없음을 사퇴 발표로 보여줌으로써, 그가 사퇴하면서 갖는 인간적 고뇌, 아직 인간으로서 놓치고 싶지 않은 '선함의 의지'들을 보여주었다고 본다.  (냉정하게 말해서, 사람들은 그녀의 사퇴를 통해 그녀를 '선한/좋은 사람'심상정으로 기억할 수 있으나, '능력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심상정은 또 다른 시선으로 평가할 것이다.) 

* 다만 한가지, 사람들은 백분토론에 나와 신랄한 사회 비평을 실천하는 심상정과 노회찬에게 '평론가'로서의 소임을 늘 기대했으면서도, 이 두 정치인이 정작 정치를 하기 위해, 보여주는 정치 언어에는 '이상주의자'란 말, 그리고 '정책의 비현실성'이라는 말로 쉽게 정리를 해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이들의 정치 언어가 현실성이 없는 걸까? 사람들은 평론가 심상정, 평론가 노회찬만을 보고 싶어했던 건 아닐까. 이미 진보=이상주의자라는 프레임 안에서 사고함으로써, 그들을 '유연하지 못하고 철없는 정치인' 으로 낙인찍은 건 아닐까. 고로, 영화는 잘 비평하는데, 정작 영화 자체를 만들어보라고 하면 잘 못 만드는 이로 못박아놓고 있지는 않은 걸까. 그 점은 유감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지나치게 냉소적인 것 아니냐고 평가할 수 있지만, 나는 심상정의 결단에 '반한나라당연대'를 지지하던 이들이 어제 주로 언급했던 "심상정 씨, 대인입니다.", "비례대표는 진보신당을 찍읍시다" "민주당과 국참당은 만약 잘 되면 당연히 심상성과 진보신당을 배려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 그리 '인정'섞인 시선으로 접근하고 싶진 않다. 대중은 얼마든지 변덕스러울 수 있으며, 결정적일 땐 '방관자'가 되거나, 발을 뺀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심상정을 존경한다. 그녀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본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퇴함으로써 생기는 어떤 정치적 이익을 기대했다기보다는, 그녀는 아마도 사퇴 이후 기로에 선 진보신당의 운명, 그리고 이 운명에 대해 (범야권단일화라는 이름으로 뭉친)다른 정당들은 물론이거니와 대중들이 윤리적인 책무를 가지고, '진보신당의 명운'을 함께 고민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스스로 했을거라고 본다.  

너무나 안타까운 수긍이지만, 다들 정치라는 세계를 알지 않는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정치판에 제발 들어가지 말기를"과 같은 말이 인생의 관용구처럼 떠도는 현실. 이 현실의 생리, 그 아픔과 고통을 '진보정당의 열악함'속에서 그 누구보다 잘/ 많이 경험했을 심상정. 그녀에게 이 현실 정치가 보여주는 '순간'의 일희일비. 그 자연스러움에 대한 예상이 오히려 그녀가 고뇌하는 거리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인간 심상정과 정치인 심상정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게, 아니 사고하여야 하는게 안타깝지만, 오히려 그 안타까움을 줄이기 위해 고뇌한 정치인이 있다면, 나는 그 중 심상정을 꼽아야 한다고 본다. 그녀가 정치인을 꿈꾸며 상상하고 그렸을 '인간적인 것'. 그 가치가 무엇인지, 이 씁쓸하고 안타까운 사건은 우리에게 숙제 하나를 던져준 것 같다. 아직 내 나이가 정치란 무엇인가를 정리하기엔 그 연륜이 짧지만, 가장 '인간'이란 단어와 개념이 직,간접적으로 많이 쓰이는 정치. 그러나 정작 정치는 우리가 인간적인 것을 꿈꿀때, 그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게 하는, 계기로 작동하는 사건의 연속이 아닐까라고 중간 정리를 해본다. 인간이 되고자 하는 정치 안에서, 과연 우리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의 미덕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인간이길 포기해야 하는가? 정말 우리는 괴물이 되어서라도 우리가 꿈꾸는 그 무엇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하는 걸까? 다시, 홉스를, 다시 루소를 읽어야 겠다. 아니, 다시 성경을 펴자. 신 만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물론 나는 므두셀라보다 더 많은 나이를 살아도 답을 얻을 수 없을 것 같다) 

어제 공교롭게도 미국 프로야구 경기 중, 클리블랜드 투수 오브리 허프가 양키즈 타자 알렉스 로드리게즈의 타구에 머리를 정면으로 맞는 사고가 있었다. 아마, 어제 허프만큼 머리가 띵하고 아픈 이를 꼽으라면, 심상정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허프는 걱정하는 뉴욕 양키즈의 홈 관중들에게 실려나가는 과정 속에서도 엄지 손가락을 위로 올리며 자신은 괜찮음을 표했다. 재미있게도, 함께 그 장면을 본 내 온라인 지인들은 허프가 올린 엄지손가락을 보고, 터미네이터 2의 명대사를 연발했다.  

"I'll be back."  

지금 그녀에게 이런 말로 응원과 존경을 표한다는 것 자체가 미안하다. 

현실적으로 그녀 앞에 쌓인 예상 밖 난관들이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돌아온다면, 나는 펜을 들고 싶다. 




"응원합니다. 심상정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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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31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응원합니다. 심상정 님"

얼그레이효과 2010-05-31 12:36   좋아요 0 | URL
화이팅!

머큐리 2010-05-31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얼마나 고뇌했을지...

얼그레이효과 2010-05-31 12:3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머큐리님..그러게요..어제부터 돌아가는 진보신당 게시판만 계속 봤는데,,글로만 봤던 상황이지만...안타까운 그림들이 상상이 가서..에효..

무해한모리군 2010-05-31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정치인인데.. 마음은 아픕니다만,
울지말고 기자회견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향후 진보정당의 전진을 위해 그랬다는 심상정 후보의 말에 진정이 묻어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끔 단식을 하는 것보다 긴 단식을 성과없이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용기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다른 얘기지만 그냥 생각이 났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31 12:38   좋아요 0 | URL
가끔 단식을 하는 것보다 긴 단식을 성과없이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용기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휘모리님의 좋은 표현 잘 공유하고 새겨야 할 것 같네요.

글샘 2010-05-31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나은 게 있다면... 승리를 위해서는 접을 줄도 안다는 거죠.
김대중, 김영삼 단일화 못한 것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병신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1인... ㅠㅜ

얼그레이효과 2010-05-31 12:39   좋아요 0 | URL
글샘님 반습니다. 승리와 접음...살면서,,이 '결단'이라는 거 우리도 물론 다 하고 사는 것이지만,,정치인에게 결단이란 무엇일까..또 한 번 그 고민을 공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해할 수 없겠지요..)
이 '접음'이 다시 한 번 그녀의 비상으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비로그인 2010-05-31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그 소식을 접하고 내내 착잡하더군요. 하지만 한 가지 확인한 것도 있습니다. 진보세력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를 상대로 진보의 가치를 설명하고 비전을 제시할 만한 큰 정치인으로 심상정을 꼽았었는데,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더군요. 그는 큰 사람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31 12:40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인정하고, 존중하는 그녀의 행보가 부디 이번 일로 꺾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좋아하는 대학 동창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원래 늠름하고 믿음직한 친구였지만, 결혼 예복을 입었을 때 보이는 그 인상은 신부에게 충분한 믿음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친구와 분위기가 닮은 신부, 주례를 맡은 목사님의 썰렁한 농담과 그 농담에 웃어주는 하객들, 봉투에 얼마를 넣어야 하나, 같이 온 친구들끼리 고민했던 모습, 이젠 경사와 조사를 기다려야 볼 수 있는 친구들의 모습과 살이 붙거나 혹은 살이 빠진 친구들의 모습, 한 놈은 여자친구의 손을 꼭 붙잡고, 한 놈은 대학교 1학년 때의 여드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한 놈은 여전히 자신만의 익살을 선보이고, 한 놈은 여전히 그런 친구들의 모습을 마음 속으로 메모하기에 바쁘다. 

어김 없이 찾아오는, 부재한 친구들 그리워하기, "뭐 하고 사나?"에서부터, 다시 1학년 때로 돌아가 나누었던 추억들을 곱씹어보기. 지난 번에 배아프도록 웃었던 추억담을 다시 틀어도 친구들은 그게 좋다고 또 웃는다.  그리고 어색한 이별, 우리 한 번 뭉치자라는 선의의 빈 말만 주고 받은 채, 어색한 침묵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지하철에서 조근조근 나누다보니, 어느새 "또 누가 결혼할까?'라는 예상 놀이를 마지막으로, 헤어짐. 

어쩌면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이 추억들을 자양분으로 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추억들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요즘 들어 해본다. 삶에 대한 편안한 감정, 행복 자체를 마음 놓고 부려볼 수 있는 시간과 장소. 그러다가도 다시 '마음매무새'를 만지다보면, 또 나는 삶을 왜 그렇게 어렵게 살려고 마음 먹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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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30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아름다운 추억만들기가 우리 삶의 그림인지도 모르겠어요^^

얼그레이효과 2010-05-31 01:06   좋아요 0 | URL
네 그 그림을 편안하게 그릴 수 있는 시간, 공간들이 더 많아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