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지만, 고인이 된 영화배우이자 감독, 그리고 화가였던 데니스 호퍼를 추모하고자 한다. 데이빗 린치 감독의 <블루 벨벳>에서의 그 인상적인 악마, 프랭크 부쓰나, 장 드봉 감독의 <스피드>에서, 악역경찰 하워드 페인 역할로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었을 데니스 호퍼, 그는 다들 알다시피, 예술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만드는 것', '창조하는 것'을 예전부터 좋아하던 연기자였다. 또 그는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자,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이기도 한 영화 <이지 라이더>의 감독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데니스 호퍼의 진면목, 연기자가 아닌 삶에서 그가 추구했던 예술적 열정을 잘 정리해놓은 자료를 찾다가, 집에서 드디어 한 권 발견했다. 영상이론가 존 a 워커의 <유명짜한 스타와 예술가는 왜 서로를 탐하는가>(2003/2006). 이 책에서 저자는 데니스 호퍼를 '화랑의 부랑자'로 설명하고 있다. 혹시 영화 <블루벨벳>의 DVD를 갖고 있는 분이라면, 서플먼트 중에서 메이킹 다큐멘터리를 꼭 보길 바란다. 여기엔 감독 데이빗 린치의 세계를 조망해주는 참여 연기자들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데니스 호퍼가 데이빗 린치의 세계관을 설명할 때 쓰는 표현에서 그가 얼마나 미술을 좋아하는지를 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아래는 존 a 워커의 책 중, '화랑의 부랑자' 데니스 호퍼의 삶을 정리해놓은 구절을 직접 몇몇 옮겨놓은 것이다.  

모험적이고 반항적인 기질, 마른 체격에 열정적인 데니스 호퍼는 1936년 캔자스의 다지 시티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부유했지만, 중서부의 평평한 농업지대에서 유년시절을 외롭게 보냈고, 영화의 생생한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가 그의 도피처가 되었다. 미술과 시 암송 외의 수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춘기 때 캔자스 시티의 넬슨-앳킨스 미술관에서 미술 강의를 들었는데, 잭슨 폴록을 가르쳤던 그 지역의 화가인 토머스 하트 벤튼(1889~1975)에게 배웠다. 유럽의 마티에르 미술에 영향을 받은 호퍼는 1955년까지는 무거운 질감의 그림을 그렸다. 1961년 화재로 인해 그의 벨 에어 스튜디오에 있던 300여점의 추상화가 불탔을 때 그의 미술가로서의 경력은 타격을 입었다. 어쨌든 1950년대에 호퍼는 연기로 방향을 바꿨고, 샌디에고의 한 극장에서 셰익스피어극을 공연하던 중에 할리우드의 눈에 띄었다. 제임스 딘과 <이유없는 반항>(1955)과 <자이언트>(1956)에 출연했고, 호퍼와 딘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딘 역시 그림을 시작해보기도 하였다. 한 영화감독과의 불화 끝에 호퍼는 뉴욕으로 옮겨와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법을 배우는 한편, 사진을 시작하면서 추상표현주의가 해프닝, 네오-다다,팝아트에 자리를 내줄 무렵에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호퍼는 팝아트를 '현실로의 회귀'로 생각했고, 추상표현주의의 제스처적인 흔적을 좋아하기는(94) 했지만, 그는 팝아트의 발견된 오브제들을 이용하곤 했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호퍼는 '화랑의 부랑자'가 되었는데, 전시된 모든 작품이 눈에 들어올 때까지 현대미술관을 돌아다녔다.  94~95쪽 

  

  데니스 호퍼가 그린 Andy Warhol (with Flower) 

호퍼의 다재다능함은 그가 영화배우이자 감독이며 화가에 조각가, 사진가에 미술품 수집가였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또한 그는 전시회용 카탈로그에 보 바틀렛이나 케니 샤프 같은 예술가에 대한 논평을 쓰기도 했다. 더 나아가 그는 TV 드라마와 광고에 출연했고, 광고와 예술의 상호작용에 관한 tv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1983년에 그는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동안 다이너마이트가 원형으로 쌓인 공간을 웅크린 채로 지나가는 위험한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95쪽 

호퍼는 10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가 감독했고 썼다고도 주장하는 대항문화의 영화 <이지 라이더>(1969)에서 장발의 오토바이 폭주족에 코카인 밀수업자인 빌리 역,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블루 벨벳>(1986)에서 사디스트적인 마약 딜러 프랭크 부스로 잘 알려져 있다. 호퍼는 기대치 않았던 <이지 라이더>의 상업적 성공으로 <최후의 영화>(1971)라는 현실적이고 지적으로 야심 찬 상징적 영화를 감독할 수 있었다. 페루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영화 만들기, 환상과 실제, 외국 문화에 대한 미국의 영향에 관한 영화였다. 호퍼는 영화라는 매체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자신의 영화편집을 현대회화에 비유했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추상표현주의 회화(95)와 같아, 한 남자가 연필 선을 보여주고 캔버스에 여백을 남기고, 붓 자국을 보여주고는 약간의 자국이 흘러내리도록 하면서, '그래, 난 물감과 캔버스와 연필 선으로 작업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는 서부 지역의 미술가 브루스 코너가 자투리 필름으로 만든 실험영화들이 <이지 라이더>와 <최후의 영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96쪽  

  

호퍼의 그림, BIKER COUPLE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호퍼는 윌리스 홉스, 브루스 코너, 앨런 케프로우, 에드워드 키엔홀츠, 리히텐슈타인, 에드 루샤와 워홀 같은 동부와 서부 지역의 미술가들과 월터 홉스, 어빙 블럼 같은 미술중개상들과 어울렸다. 영화배우이자 수집가인 프라이스와의 오랜 교분은 이미 언급했었다. 코너는 호퍼처럼 아상블라주를 만들었고, 1970년대 초에 동판화의 세 시리즈를 만들면서 사람들의 오해를 살 만한 <데니스 호퍼 원맨쇼>라는 제목을 붙였다. 96쪽 

호퍼는 할리우드의 주류에 반대하여 1960년대의 급진적인 정치운동에 공감하고 있었다. 1965년, 그는 앨라배마 주의 셀마에서 있었던 흑인 인권운동 행진에 참가하여 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1967~68년 사이에 베트남에서 전쟁이 확대되고 있을 때, 호퍼는 쓰레기장에서 발견한 제2차 세계대전 때 비행기에서 나온 폭탄 투하장치에 기초한 플렉시글라스, 스테인리스 스틸, 네온으로 만든 <폭탄 투하>(1967~68)란 제목의 냉소적이고 움직이는 대형조각을 만들었다. 유명인들은 자신과 같은 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유명인들과도 쉽게 연결되었다. 그런 까닭에 호퍼의 사진이 갖는 매력의 하나는 말론 브란도, 피터 폰다와 제인 폰다, 제스퍼 존스, 리히텐슈타인, 폴 뉴먼, 워홀 같은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호퍼는 배우이자 감독으로서 '장면 뒤의' 말하자면 영화 세트나 촬영지에서의 스타들을 찍을 수 있었다. 98쪽  

 

호퍼의 사진은 단순한 아마추어 스탭사진이 아니다. 호퍼의 사진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이나 구성 면에서 뛰어나고, 여러 나라에서 전시되고 몇 권의 사진집이 출판되기도 했다.<60년대로부터>는 현재 수집가들의 값비싼 소장품으로 알려져 있다.호퍼의 업적은 1987~88년에 미니애폴리스의 워커 아트 센터를 시작으로 순회 전시된 회고 영화와 전시회 '데니스 호퍼 : 방법에서 광기까지'에서 잘 드러났다. 그의 시각예술에 초점을 맞춘 두 번째의 회고전은 2001년 2월 암스테르담의 권위 있는 현대미술 전시관인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서 열렸다. (중략) 호퍼는 미국의 주도적인 미술가들과의 친분, 시각예술에 관한 그의 이해 덕택에 통찰력과 과감함을 겸비한 현대미술 수집가가 되었다. 사실 그는 생전에 세 개의 다른 컬렉션을 모았고, 그 중 두개는 이혼문제를 해결하(99)기 위해 처분해야 했다(그는 다섯 번 결혼했었다). 99~100쪽  



                                          호퍼의 사진, Venice (Gagged Man)

호퍼가 1986년 뉴욕에서 첫 사진전을 열었을 때, 그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명성을 얻은 슈나벨을 만났다.(얼그레이효과 주- 우리가 <잠수종과 나비>의 감독으로 잘 알고 있는 그 감독이 줄리앙 슈나벨이다)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고, 호퍼는 슈나벨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 한 토기 부조 그림을 그의 컬렉션에 추가했다.(슈나벨은 후일 깨어진 접시에다 호퍼의 머리와 어깨를 초상화로 그렸다) 100쪽 

시각예술에 대한 관심과 팝적인 감수성 덕택에 호퍼는 도시적인-특히 로스엔젤레스의-풍경들과 간판들에 민감했다. 그는 자전거 타는 사(104) 람들, 자동차 도로, 더러운 담벽, 찢어진 포스터, 빌보드 광고판, 담벼락의 낙서를 사진으로 담았고, 음식점과 주유소를 선전하는, 사람의 모습을 한 높고 조야한 입식 광고물을 찬미했다.그는 부유한 덕택에 전문 상업미술가들을 고용하여 <멕시칸>이나 <라 살사 맨>이나 <모빌 맨>의 복제품을 만들어 그의 빌보드 이미지를 사진과 같은 사실적인 모습으로 그리도록 했다. 104~105쪽  



                                         호퍼의 그림, Morocco (Drip Painting)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 호퍼의 자기파괴적인 행동은 극에 달했다. 그가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고 코카인을 복용한 채, 두 명의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 때문에, 할리우드 제작사의 간부들은 여러 해동안 그를 영화에 출연시킬 수 없다고 치부해버렸다. 호퍼는 술과 마약에 탐닉한 것이 창작의 과정에는 - 특히 시작 단계에서- 필연적이었다고 주장한다. 호퍼를 인터뷰한 영국의 저널리스트 린 바버는 천재가 되려는 호퍼의 엄청난 야망에 주목하고 이렇게 평했다. "유감스럽게도 작품보다 천재들의 라이프 스(105)타일을 연구하는 흔한 실수, 즉 소위 내가 귀를 잘라내면 반 고흐처럼 그림을 그릴 것이란 환상-를 저질렀다.호퍼는 바버에게 예술을 하는 그의 목적은 '자신의 시대보다 조금 더 지속하는 뭔가를 남김으로써 죽음을 약간 속여보자는 '희망'이라고 말했다. 105~106족  

 



* 더 많은 호퍼의 작품은 http://www.acegallery.net/artistmenu.php?pageNum_ACE=3&totalRows_ACE=75&Artist=21# 여기서 감상할 수 있다. 

고인의 나이, 74세. 미국 현지 시각으로 5월 29일. 깊은 잠에 들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굿바이, 프랭크 부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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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5-3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데니스 호퍼가...
저 개인적으로는 의미있는 배우에요..이지라이더에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까지...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는 수밖에요..

얼그레이효과 2010-05-31 12:56   좋아요 0 | URL
메피스토펠레스님, 반갑습니다. 같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안타까운 죽음이 자주 일어나, 더 씁쓸하고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