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로메르의 희극과 격언 시리즈 네번째 작품인 <만월의 밤>(1984)은 '영역과 성격'에 관한 이야기다. 


A 실제로 영화의 실내디자인을 책임지기도 한 주연배우 파스칼 오지에는 루이즈란 디자이너로 나온다. 현실 속 오지에의 미적 취향은 주인공 루이즈의 취향이다. 


B 삶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얼마만큼 확보할 수 있는지 신경쓰는 루이즈. 그러나 루이즈를 독점하려는 남자들인 도시건축가 레미, 작가 옥타브는 그런 루이즈를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관계맺음을 자기 영역 안에서만 잘 발휘하려 한 채, 타인의 영역에 발들여놓는 걸 어색해하는 모습들을 그려낸다 


C 특히 레미와 옥타브는 자신의 실내 공간에선 기가 살지만 바깥에 나가면 사람들을 힘겨워한다. 루이즈는 그들을 간파하고 변화를 줄 것을 제안하지만 레미는 거부를, 옥타브는 외려 자신이 실은 사교적인 사람임을 강변한다 


D 영역을 확보한다는 건 일과 여가 사이의 균형, 삶의 패턴과 그 배치이기도 한데 본작에서 이를 인상적으로 연출한 장면은 '좀 앉아서 이야기해도 될까'라고 묻는 대화씬이다. 영화에선 누군가의 집으로 초대받고 그 누군가의 취향을 구경한 뒤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간다. 이때 자신이 늘 해온 삶의 패턴이 있는 주인공들은 상대가 좀 앉아서 이야기해도 되겠냐고 말할 때까지 눈치채지 못한다(영화에선 앉아서 이야기해도 되겠냐는 질문이 세 씬에서 꼭 한 번씩 등장한다) 


E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과연 서로의 영역을 확보해준다는 건 가능한가란 질문을 시종일관 던진다. 


F 영화엔 시적인 영화가 있고, 소설적인 영화가 있으며, 에세이적인 영화가 있는 것 같다. 로메르의 영화는 아마 에세이적인 영화에 해당하지 않을까. 그의 영화엔 아주 세심하고도 인상적인 말들은 없지만, 우리가 늘 쓰는 말들의 산문적 배치 속에서 곱씹게 만드는, 묘한 울림이 있다. 


G <만월의 밤>하면 영화가 시작할 때 나오는 "두 여성을 가진 자는 영혼을 잃고, 두 집을 가진 자는 이성을 잃는다"는 로메르 본인이 지은 격언이 유명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삶과 영역을 늘 고민하는 여성 루이즈가 카페에서 처음 만난 이에게 듣는 어떤 한마디를 더 좋아한다. "동전을 던져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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