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비디오를 보는 남자' http://blog.aladin.co.kr/717962125/3798296란 포스트를 통해, 곧 나올 내 졸업논문 주제를 밝힌 적이 있다. <VCR 시대의 영화 소비 경험에 대한 연구 :1979~1999)>. 한국의 1980년대,90년대 영화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매체였던 비디오에 관한 사회문화사라고 할 수 있다. 지난 포스트가 '비디오대여점'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오늘은 비디오를 볼 수 있던,1980년대의 대표적 공간인 만화방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사실 이 시절을 정확히 기억하는 시기에 태어나진 않았기 때문에, 사료로서만 그 시대의 느낌을 '호기심'으로 접촉할 수밖에 없는 게 아쉽다)
이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장소가 된 만화방. 그래도 종로 어디어디에는 문득 보이던데. 지금은 만화책도 하드커버가 나오는 시대이지만, 그 시대의 어른들은, 아이들은, 또 어렴풋이 바라보는 나 같은 사람에게 조금 허락된 문화의 기억은, 누렇게 변질된 만화책,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손이 끈적하도록 침을 뱉고서, "얘야, 니 그 만화책 보고 꼭 손 씻어야 된데이..."라는 어머니의 걱정. 하지만, '엄지 만화방'에 찾아오는 손님들의 목적이 꼭 만화책을 읽기 위해서만은 아닌 듯하다.
엄지만화방에 설치된 딱 한 대의 작은 텔레비전을 통해, 사람들은 나라를 살폈고, 세계를 걱정했다.
만화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딴 짓'을 하러 온 연인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자. 이제 심야요금 걷겠습니다"
우리는 심야요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욕정의 시간'으로 빠져 들었다. 지금에 와선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지만, 불법비디오를 대여해주거나, 상영해주는 사람은 사회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비디오가 등장하자, 호기와 불황을 동시에 맞은 대표적인 장소가 만화방이었다. 여관은 물론이거니와, 분식집에서도 비디오 기기를 설치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데, 만화방이라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고 연이어 나오는 문화를 향해 가하는 지식인들의 도덕적 질타. 사람들은 '화이트 비디오'와 '블랙 비디오'라는 명칭으로, 자신이 보는 것은 정품, 밀실에서 즐겨야 할 것은 '삐짜'라는 구분을 지었다. 하지만, 시나리오 작가 심산 선생의 고백처럼, 낮에는 데모라는 열정의 시간으로, 밤에는 애마부인을 보기 위한 욕정의 시간으로라는 건 비난만 할 수 없는 그 시대의 문화였다. 밤의 열기 속으로.
"야, 어린 짜식이 까져가지고는... 못 참겠냐? 화장실을 가던가 새끼야. 휴지줄까?"라는 대사를 던지는 명계남 아저씨의
모습이 귀엽다
엄지방의 총무는, 오늘의 상영회를 갖기 앞서, 사람들에게 볼 작품을 소개한다.
"여러분 오늘 볼 작품은요. 먼저, 성룡의 사형도수입니다. 성룡의 코믹연기와 취권계열의 액션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보시면 흡족할 작품이구요. 두번째 작품은 척 노리스가 나오는 델타포스입니다. 척 노리스에 대한 이야기 BLAH..BLAH. 주변 사람들이 총무의 소개를 지겨워한다. "아. 거 빨리 영화 봅시다" 총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간다. 세번째 작품이 여러분들이 기다리시는....욕망의.... 갑자기 어느 남자가 "그거 좋지"라는 말을 던진다.
꺼진 텔레비전, 시대에 지친, 사랑에 지친, 일에 지친, 무언가에 지친 사람들. 분노할 힘도, 좋아할 힘도 사라졌을 때, 누군가의 보살핌, 그리고 내가 정작 갖고 싶어하던 행복은 무엇이었나를 다시 돌아보고 싶을 때, 엄지만화방에 모인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소파에 누워 잠시 눈을 감는 것으로, 고뇌를 대신한다.
일터에 나가기 위해 새벽짐을 싸는 사람들. 그리고 어디선가 내일을 또 열고 있을 사람들
가리봉의 하루는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장미빛 인생>. 이 영화를 만든 김홍준 감독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시대의 시네필이었으며, 우리에겐 필명 구회영으로 더 친숙한 사람이다. 나도 영화를 볼 줄 안다오,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시절의 필독서였던, <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두 세가지 것들>이란 책을 본다면, 그 시대에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이었나, 그 시대의 영화광은 무엇이었나를 돌아보는 데 소중한 시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장미빛 인생>은 시대의 기억이기도 했지만, 누군가 마음 속에 소장하고 있을 나라는 영화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