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전화음은 내부전화냐 외부전화냐에 따라 벨소리의 길이가 다르다.
외부전화의 신호음은 길게 울리는데, 긴 신호음이 울리면 어쩔수 없이 조금 긴장하게 된다.
사적인 전화는 대부분 휴대폰으로 주고 받으니 사무실로 오는 외부전화는 업무와 연관있는 담당 공무원의 협조요청이거나 사고처리요청이다.
협조야 내쪽에서 처리해주면 그만이나 사고는 우리쪽의 실수를 처리해야 하는 일이니 기술적인 저자세가 요구된다.
비굴하지 않게 사무적으로, 신속한 사과와 정확한 업무처리로 이어져야 일의 확대를 막을수 있다.
엊그제는 아침부터 긴 신호음이 울렸다.
<여보세요...>하는 소리를 들으니 공무원의 목소리는 아니다. 말소리에 기름기도 좀 끼여있고 늘여서 하시는 톤이 전형적인 사모님이다.
대뜸 본인이 관공서에 신청한 일이 언제 처리되는지를 물었다.
나: 그 부분은 선생님께서 해당 관청에서 설명들으셔야 하는 내용인데요.
사모님: 내가 궁금해서 그러잖아... 요즘 공무원들을 어떻게 믿을수도 없고.
나: 몇일날 신청하셨나요? 신청한 날짜별로는 말씀 드릴수 있습니다.
사모님: 그럼 내게 지금 어디쯤 있나 확인해주지.
나: 선생님 개인의 주민번호를 확인해서 개인개인에게 임의로 확인해 드릴수는 없습니다. 주민번호를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당사자인지 제가 확인해볼 방법이 없을뿐 아니라 개인신상에 관한 부분을 담당공무원의 승인없이 발설하는 것은 규정에 위배됩니다. 다만 선생님이 아까 말씀하신 날짜에 신청하셨다면 그날 신청하신 분은 오늘 아침 모두 완료되어 발송했으므로 담당공무원에게 알아보시면 즉시 확인이 가능할 것입니다.
사모님: 내가 공무원을 못 믿는대잖아. 내주민번호하고 주소넣어 확인해줘.
이쪽의 답변을 무시해가며 사모님이 대는 주소는 이른바 대표적인 버블세븐 지역이었다.
나: 선생님, 공무원에 대한 불신부분은 해당 기관의 감사실이나 민원실에 말씀하실 내용이구요. 지금 확인을 요청하신 부분은 저희에게 열람권이 없으므로 곤란합니다. 번거로우시더라도 해당 읍면동으로 전화해주시면 곧바로 확인이 가능할 것입니다. 개인신상에 관한 부분은 번거로우시더라도 규정을 준수해야 사고를 막을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개인신상에 관한 부분은 사소한 내용이라도 임의로 발설할수 없습니다.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분기가 남아있는 사모님 목소리가 좀더 이어질듯하더니 뚝 끊겨버렸다.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보니 세상에 예외없는 법칙이란게 없다는 것쯤은 알게 되었다.
살다보면 누구나 고의가 아닌 실수도 하고 사는 것이고 그럴때마다 원칙을 들이대며 아니오라는 답변을 듣는다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고단할 것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는 원칙에 맞추어 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부득이 예외를 요구할때도 그에 합당한 절차와 수준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며칠전 피디수첩의 말미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법앞에 평등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것 아니냐는 태도로 말하던 고액 수임료의 변호사의 말이 나는 아직 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현실이 그렇다 할지라도 가진게 적어 지킬것조차 적지는 않으니, 당당하다 못해 오만한 그들이 무섭기는 하지만 아직은 당신과 나의 귀천이 다르지 않음을 작은 목소리로라도 말해줘야 하리라.
아침부터 전화한 사모님이야 한번더 전화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싫었을뿐이라고 애써 믿으며, 나는 아직 이 사회가 그렇게 막무가내는 아니리라고 우긴다.
아들과 함께 이땅을 떠나는 벗과 차를 마신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