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를 달래며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로드무비님의 페퍼를 읽다가 문득, 건우와 연우가 떼를 쓰면 뭐라 달래야 하나 싶었다.
어린시절 대책없이 조숙한 딸부자집 셋째였던 나는 시세말과는 다르게 남동생 못본죄로 두고두고 구박덩어리였다.
큰딸은 살림밑천이라고, 손아래 여동생은 남동생본 딸이라고, 손위언니는 눈치빠르게 둘째딸로서의 처신을 요령있게 잘해 피해가는 구박을 오기와 고집으로 똘똘 뭉친 나는 늘 정면대응으로 받곤 했다.
그럴때마다 엄마는 말문이 막혀하시며 등짝을 쥐어박곤 하셨다.
지금이야 이유도 기억안나는 일로 엄마에게 한치의 물러섬없이 따박따박 따지고 들던 어린딸이 얼마나 기가 막혔으랴.
그러나 엄마만큼은 아니었어도 변변히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으며 양보만을 강요당했던 나도 기막히게 서운했었다.
어느날인가 무참히 서운한 마음으로 엄마의 차별을 따지고 드는 내게 엄마는 <열손가락 깨물어봐라 안아픈손가락 하나라도 있나> 하며 혀를 차셨다.
그말에 대뜸 < 손가락도 손가락 나름이고, 엄마가 어느 이빨로 얼만큼 세게 물었나에 따라 아픈 정도가 다 틀리겠지...>하며 그동안 쌓인 서운한 마음을 모아 가출보따리를 쌌었다.
자식이 이리 줄줄인데 설마 피한방을 안섞였다면 엄마가 나를 키울리 없을 것이고, 친자식이라면 저리 차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분명 나는 아버지가 바람피워 낳아온 딸이 분명하다고 소설을 써가며 아줌마 안녕히 계시라고 줄줄이 인사를 적은 편지를 남기고 집을 나왔다.
그렇게 나선 대문밖 세상은 발을 내딛자마자마자 황당하게도 넓고 낯설었다.
금방이라도 찾을수 있을것 같던 상상속의 친엄마는 단서도 없고 어둑어둑해지는 골목을 돌아 동네에서 제법 떨어진 강둑에 앉아 있으려니, 비겁하게도 아버지가 돌아와 엄마를 나무라며 나를 찾아주는 것이 가장 큰 희망으로 변해 있었다.
주변이 깜깜해져 주위가 분간이 어려워졌을 무렵 동네어귀로 돌아오니 내이름을 부르며 애가탄 식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몰래 열린문을 살그머니 밀고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깜박 잠이 들었는데 한참이 지나 식구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어린마음에 절대 눈을 뜨면 안돼라고 속으로 다짐을 하며, 목이 멘 엄마가 등짝을 쥐어박아도 눈을 질끈 감고 있었던 것이 나의 가장 선명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초등학교나 갓 들어갔던 때의 기억이니,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파란만장한 나의 어린시절의 기억을 하나씩 들려주면 우리 아이들은 뭐라고 할까.
혹, 엄마의 무모함과 과격함에 경악이나 하지는 않을지 피식거리며 잠든 아이들을 보니,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못한다고 그새 아이들의 말대답이라도 들을라치면 울컥하는 내가 얼마나 가소로운지...
나의 과거사가 생각할수록 가소롭기만 하니 두고두고 아이들에게는 말하지 못하고 덮어두어야겠다.
혹, 아이들이 너무 소심하여 무모함이라도 일깨워야 할 일이 있다면 그때는 조금 부끄러워도 얘기해줄일이 있으려는지...
조금더 기억을 더듬어보면 머리맡에 앉아 자분자분 이야기해줄 추억이 혹 생각 날까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