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래도 괜찮아 ㅣ 푸른도서관 40
안오일 지음 / 푸른책들 / 2010년 11월
평점 :
MBC드라마 '마이 프린세스'에서 김태희가 고기를 먹으며 "고기는 항상 옳아요, 구원받는 느낌이랄까!" 라는 대사에서 리뷰 제목을 뽑았다. 이 시집을 세 번 읽었는데, 한 편 한 편 곱씹으면 구원받는 느낌이랄까.^^
작년 12월 아들 고등학교 기말시험에 학부모 감독하면서 읽은 시집이다. 시험 시작 10분만에 대부분 끝내고 엎드려 자는 아이들을 보니,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시크릿 가든 김주원의 대사를 날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시집을 봤다. 학교측에서 학생들이 답안 작성을 끝내면, 감독하기 지루하니까 책을 봐도 괜찮다고 해서... 시집에 그려진 청소년들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딩들이 교실에 갇혀 사는 현실이 겹쳐져 마음이 짠하게 울리는 시읽기였다.
'안오일'이란 시인의 이름을 보고 '남자분이 참 섬세하게도 썼구나' 생각했는데, 두번째 읽으면서 시인이 여자라는 걸 알았다. 에이, 참 아둔하고 센스없는 나를 어쩌란 말이냐.^^ 남자라고 생각하고 시를 읽을 때와 여자로 알고 시를 읽으니까 느낌에도 차이가 있었다. 여자라서 더 섬세하고 엄마 마인드로 아이들의 삶과 내면을 들여다 보았구나, 이해되는 시들이 눈에 들어왔다.
4부로 나뉜 제목만 봐도 청소년들의 마음을 잘 표현한 것 같다. 1부 한 대 치고 싶다, 2부 그럴 때도 있지, 3부 이 정도는 웃어 주세요, 4부 지금 우리는. 시인은 청소년들이 시를 어렵고 자기들 생활과는 뚝 떨어진 먼 이야기라는 생각을 없애주고 싶어 시를 썼다고 한다. 청소년 시에서는 비유도 그들의 생각과 삶의 이야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주고 싶었단다. 시인이 만났던 학생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생각이나 말과 행동 하나하나 진실을 표현해 공감대를 느끼고 싶었다니까, 이 시집을 읽는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로 공감하고, 나처럼 구원받는 느낌을 받으면 좋겠다.^^
천 냥 하우스
모양이 달라도
쓰임새가 달라도
모두 다 천 원이란다.
일괄 처리된
이쑤시개, 면봉, 칫솔, 컵, 바구니......
바둑부 동완이
운동부 훈이
음악부 화주
그리고 문예부 나
모두 수학 심화반에 넣어졌다.
한 대 치고 싶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자기표현 못 하는
재영이
자기 잘못 아니라고
사실은 이게 아니라고
분명하게 따지지도 못하는
기정이
볼펜, 지우개, 샤프심, 형광펜
다 빌려 주고 제대로 못 받는
심지어 교통카드 빌려 주고
자기는 걸어가는
동진이
돈 잘 쓰며
거들먹거리는 진우 앞에서
살살 기는
세준이의
등짝을 한 대 쳐 주고 싶다.
정말, 이런 짓거리를 하는 사람은 애고 어른이고 등짝을 한 대 쳐주고 싶다.
아픈 엄마 대신 국을 끓이려고 멸치로 육수를 만드는데, 건더기를 한꺼번에 건져 내려는 맘만 앞서 아무 생각없이 냄비를 들고 체어 부어 버린 난감한 상황을 묘사하고, 나를 만들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은 다 흘러가 버리고, 다 같이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는다고 문제아 취급하는 거 그게 문제 아니냐?는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허망하게 흘러가 버린 육수가 나도 모르게 빠져 나가고 있는 '나'인 것만 같다는 <멸치와 육수>는 청소년들의 현주소, 그네들의 울부짖음처럼 감지된다. 꽉 닫힌 뚜껑을 여는데는 힘보다는 뚜껑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려서 연 엄마처럼, 엇나가는 아이에게 부드럽게 톡톡톡톡 마음을 두드려 달라고 선생님께 당부하는 <꽉 닫힌 뚜껑을 열며>등, 수록된 시편들이 비유와 진술이 잘 어우러져 감동을 준다.
다 너 잘되라고
엄마는 만날
공부해라, 공부해라
나는 만날
내가 알아서 할게요
해서 나 주니?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내가 잘되는 게 뭔지
진지하게 생각 좀 해 주세요.
지금은 '공부해서 남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잘나고 똑똑해서 높은 자리 차지한 인간들이 저밖에 모르는 건, 부모들이 '다 너 잘되라고' 가르쳐서 그렇게 된 건 아닐까? 너 잘돼서 부모도 좋고 사회도 좋고 국가도 좋게 봉사하는 사람, 잘돼서 남주는 인간이 되라고 가르쳤다면 제 주머니 불리기 위해 온갖 짓거리 다하는 이기적인 사회가 되지는 않았을 거다. 정말 내가 잘되는 게 뭔지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청소년에게 줘야 한다. 왜 어른들은 기본이 되는 공식대로 살지 못하는 걸까?ㅜㅜ
하고 싶은 일을 시켜야 한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공부와 인성이 꼭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공식대로만 하면
좀 더 살맛 나는 세상이 될 텐데..... (수학 시간, 부분)
군말
우리들이 무슨 말만 하면
들려오는 소리
쓸데없이 군말 말고!
하지만 그 군말은
우리들의 마음이 구워 낸 말들이란 걸
알아주세요
질문
수학 공식 말고
영어 단어 말고
때론
내가 경함허지 못한 것들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요
인생은 소중한 거니까요.
내가 읽은 청소년 시집은 박성우 시인의 <난 빨강>이 처음이었는데, 남고생들의 내면을 표현한 18금스런 시들은 중학생 딸내미에게 보라고 하기가 민망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에 실린 시들은 여중생이 보아도 민망하지 않고, 자신들이 잘 표현해내지 못한 마음까지도 잡아낸 시인의 눈길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까. 그래서 김태희의 대사처럼 '구원받는 느낌이랄까' 그런 느낌을 받으면 좋겠고, '그래도 괜찮아' 토닥여주는 위로를 받아도 좋으리라.
왈칵 눈물이 났다
내 마음이 초라해질 때면
세상은 늘 이렇게 아름다웠다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내려다보는데
내 신발코가 불안하게 나를 쳐다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주문처럼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내 자신이 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아......
나는 신발코를 어루만져 주었다
나를 만지듯 (그래도 괜찮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