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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말뚝 - 다시 읽는 박완서 ㅣ 다시 읽는 한국문학 21
박완서 지음 / 맑은소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나는 오랫동안 박완서 작가의 팬이었다. 처녀작 <나목>부터 읽기 시작해 신문에 연재됐던 <휘청거리는 오후>나 <도시의 흉년>을 읽었고, 작품이 나올 때마다 사서 읽었다. 누군가에게 책 선물 할 일이 있으면 박완서 작가의 책을 즐겨 선물했다. 나홀로 흠모하던 작가였는데, 2001년 11월 11일 하동군의 평사리문학제에 박경리 선생과 함께 오신 작가를 뵈었다. 거기 오시는 줄 알았으면 책을 갖고 가 사인을 받았을 텐데, 사진만 같이 찍고 사인도 못 받았는데 돌아가셔서 안타까웠다. 그 분을 추모하는 글은 쓰지 않았지만, 그 분의 작품을 다시 읽으며 나혼자 작별의식을 치르는 중이다. 책꽂이 한 자리에 모아둔 그 분의 작품을 어루만지고 들춰보면서...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自閉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주었다.”고 말하는 박완서 작가는, 1970년 여성동아 장편공모에 <나목>이 당선돼 40세의 늦은 등단이었지만, 40년간 빛나는 작품으로 시대를 밝혀준 작가였다. 이 책엔 <엄마의 말뚝>과 단편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가 수록되어 중고생들이 보면 좋다. 중3 막내는 교육청 논술대회 지정도서라 ’엄마의 말뚝’을 읽었는데, 고등학교 문학에서도 만나는 고등학생의 필독도서다.
박완서 문학의 뿌리를 알려면 <엄마의 말뚝>을 봐야 한다. 졸지에 남편을 잃고 박적골을 떠나 대처에 말뚝을 박고 아들 딸을 잘 키워내는 것이 지상 목표였던 어머니는, 작가의 어머니 뿐 아니라 모든 어머니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숟가락 하나도 집안 것은 안 건드리고 오로지 당신의 단 하나의 재간인 바느질 솜씨만 믿고 어린 아들의 손목을 부여잡고 표표히 박적골을 떠났다.(18쪽)"
"핵교를? 기집애를 핵교를?"
"네, 기집애도 가르쳐야겠어요."
"야, 너 대처에 가서 무슨 짓을 했길래....... 큰 돈 모았구나? 아니면 간뎅이가 부었던지,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수로 기집애꺼정 학교에 보내 보내길?"(21쪽)
어머니는 딸을 도회지로 데려가 학교를 보내고, 학교를 나와서 신여성이 되길 원했다. 어머니가 그리는 신여성은 당신이 되고 싶은 모습이었을 것이고, 당찬 어머니 덕분에 우리가 박완서 작가를 만날 수 있었던 건 행운이다.
"신여성이란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 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란다."(37쪽)
어머니는 그렇게 갈망하던 대처로 나왔지만 문안으론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밖인 현저동 상상꼭대기에 말뚝을 박으며, 상처받았을 어머니의 허세와 자존심은 외면하기 힘든 우리 모습이기도 하다. 같이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이웃들을 바닥 상것으로 업신여기며 살던 어머니는, 감옥소 마당에서 노는 딸을 문안 학교로 보내기 위해 친척집으로 주소를 옮겼다. 요즘 말로 하면 위장전입을 한 것인데, 서울에 뿌리박은 손자 손녀를 위해 시골에서 마련해 준 돈으로 괴불마당이 있는 여섯 칸 기와집을 사게 되었다. 어머니는 비록 문밖이지만 기어코 서울에 말뚝을 박았다고 감개무량해 하셨다.
해방이 되고 돈을 번 오빠가 문안에 집을 사서 이사 했지만, 어머니는 괴불마당 집의 말뚝에서 풀려나지 못했다고 회상한다. 박적골을 떠나온지 40년 만에 현저동 옛동네를 지나게 된 나는, 자신도 엄마의 말뚝이 풀어준 새끼줄 길이만큼만 벗어났을 뿐, 의식은 여전히 말뚝을 가지고 있었다는 고백으로 마무리된다.
엄마의 말뚝을 볼 때마다 우리 가족 이야기로 감정이입이 된다. 우린 충청도 시골에 살면서 언니 오빠를 먼저 인천으로 올려보냈고, 형제들이 하나 둘 합류하면서 결국 고향을 떴다. 부모님이 고향을 뜨고도 시골에 남았던 나는, 짧은 기간 할아버지 댁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부평에 말뚝을 박고, 가난한 도시인으로 힘겨운 세월을 견뎠다. 부모님은 5남매를 먹이고 공부시키느라 고생했지만, 도시에 말뚝을 박았으니 학교를 다니게 됐다고 당신들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셨다. 돌아보면 참 눈물겨운 세월이었지만, 그 덕에 요만큼이나 사는구나 싶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은 틀니>는 절름발이 딸(설희)을 둔 이웃집 여편네와 나의 삶에 생기는 여러가지 문제를 얘기한다. 부모, 예술, 이민, 가족 간의 알력, 간첩으로 내려올지 모르는 오빠 때문에 감시를 당하면서 삶이 위축되고 황폐화 되는걸 보여준다. 훌훌 털고 이민을 떠나는 설희 엄마가 부러워서, 서른 여덟에 틀니를 한 나는 그 아픔조차 틀니의 아픔으로 대체하려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엄마의 말뚝>은 1.2.3까지 연작으로 읽어야 할 작품이다. <엄마의 말뚝 1>은 대처에 말뚝을 박은 가족사이고, <엄마의 말뚝 2>는 6.25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황폐한 삶과 아들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엄마의 말뚝 3>은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어머니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어머니의 말뚝인 아들을 잃는 사건은 삼대에 걸쳐 대물림되었다. 박완서 작가의 아버지와 오빠, 아들까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보냈다. 이제 작가님은 박적골의 할머니와 어머니랑 한 자리에서 당신들의 말뚝이었던 아들들과 함께 계실까? 이제는 당신들의 말뚝과 편안히 안식하기를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