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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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가슴. "뻘 속에 갇힌 무디고 둔한 영혼"을 벗어던지고 한없이 자유로운 가슴을 소유했던 조르바. 거침없이 바다로, 바다와 맞닿은 대지에서도 머물지 않았다.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육체 노동으로부터 얻어지는 깊은 쾌감을 누린다. 조르바의 살아 있는 가슴은, 악을 바다에 빼앗기고 순수하고 선하게 단련되어 있다. "과부를 혼자 두는 것"에 대한 죄책감, 사랑을 맘껏 내어주지 못하는 남자들의 파렴치함, 이성과 도덕에 붙들린 정조를 용납하지 못하는 순정파 가슴이다. 그의 이러한 '살아있는 가슴'에서 비롯한 괴변은 잠깐의 삐뚜름한 미소를 짓게 하지만, 인간의 욕망마저도 자유에 헌사하는 기염을 엿볼 수 있다. 조르바의 사랑 방식은 간단하다.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다. 나쁜 남자의 전형이다. 그래서 조르바는 사랑받을, 사랑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닐까. '내'가 이성적 영혼으로 침묵하는 동안, 조르바의 영혼은 뛰고 숨쉬고 있었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중에서도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그의 이력은 깨나 흥미롭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명성을 얻고 몇 해 뒤의 일이다. 이러한 인과관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식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속에서 그의 민중에 대한 철학과 사상과 애정을 충분히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나'의 조국애와 민중의식은 진지하고, '크레타 혁명'을 통해 드러나는 동지들의 숙명적 애환과 결단에 고무적이다. 단면에 불과할지라도, 그렇다. 어쩌면 정치인으로서의 위선과 현실에 타협해 나가야 할 자신이 갖지 못했던 것을 조르바를 통해 충족받고 싶었던 건 아닐까.  

  

"럼주를 입안에서 굴리 듯" 조르바는 거침없는 자유를 입안에서 농락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꿀꺽 삼킨 쓰디 쓴 술을, "푸짐한 언어"들로  토해낸다. 예의 바르고 조신한 말들이 때론 밥맛 없게 들릴 때가 있다. 반면 막 돼먹은 말투가 미혹적이기도 하다. 단순한 언어의 유희에 그치는 조르바가 아니다. 그가 내놓는 언어들은 투박하지만 길들어지지 않는 자유와 모험의 언어들이다. 그가 경험한 이야기들은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철학이고 사상이고, 고뇌다. 혁명을 한답시고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고, 만용했던 애국심의 치부를 통해 젊은 시절, 한 때의 혈기를 참회한다. 조르바는 60대 노인으로 '나'와 만난다. 세상 풍파를 몸으로 겪고 배우고 깨달은 조르바의 연륜과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물을 제대로 보고 생각하려면 나남없이 나이 처먹어 분별이 좀 생기고 이빨도 좀 빠져야" 한다는 조르바의 푸짐한 언어들은 완전한 조언이며, 농익은 애정이다. 조르바는 거침없이 탐욕적이고 주저없이 육적이다. 반면의 '나'에 대한 조르바의 조롱은 언제나 우회적이다.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칠" 육체에 대한 그의 설득은 약에 쓸만한 개똥철학이다. 왜 행동하지 않는지, 머무르려고만 하는지, 고뇌를 달고 사는지에 대해 조르바는 '나'에게 묻고 있다. "노예의 사슬"만 길어지게 할 뿐 아니냐고. 조르바가 야성적이라는 것 쯤 이제 완전히 파악된다. 그것은 성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혼에까지 이른다. 길들어지지 않는 영혼의 소유자다. 땅을 누비며, 바다를 가르며, 몸으로 사는 사람이다.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하는" 뱀과 같은 사람.  

 

거침없고 야성적이고 쾌락적이며 멋대로인 조르바는 의외의 순수성을 보여준다. "결이 고운, 따뜻한 모래 같은" 사람이다. 측은지심을 갖는 것은 거반 도(道)의 경지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 손의 행복은 꽉 진채로, 불행만을 드러내어 자신을 가엾게 여긴다. 그러나 조르바는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라고 고백한다.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조르바는 위대한 스승이다. 이 한줄의 글은 사실 아무런 감정도 실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약간의 근접함은 있을지라도 조르바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맞겠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나도 뭉클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향한 시선이 아니라 나를 향한 조르바의 시선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난 작품에 비교적 이입이 잘 되는 특이 체질이다. 387쪽 쯤에서의 조르바의 고백은 충분히 나를 다독이고 나를 녹이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불쌍해지는 현실감이 불편하긴 했지만, 뭉클한 감정은 앳된 응어리를 쓸어내리게 했다. 아마도 내가 조르바의 순수에 빠져들고 있나보다, 했다. "신성한 경외감"이라고나 할까.  

 

"그렇다. 조르바는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24쪽) 
 

작품속의 '나'는 자유를 채집하는 사람일 뿐이다. 채집된 '자유'를 바라보고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것에 그치는 인물이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도무지 채집당하지 않는 완전한 이성적 자유, 조르바로 인해 더이상의 채집을 멈춘다. 형태를 남기지 않는, 본연의 자유에 속한 조르바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조르바는 '나'에게 선물같은 자유의 징표로 "산투리"를 남긴다. 산투리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다. 영혼에서 부르짖는 자유의 선율이며 삶의 가사를 붙인, 신을 향한 고백이며 참회의 소리다. 창조자를 거스르는 일은, 허락한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오만이며, 방종이다. 조르바가 경험한 숱한 자유의 표현들이, 마지막 겸손한 자유로 '나'에게 건네지는 순간, 나는 완전한 해방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페넬로페가 된 것 같다. 열렬했던 자유, 자유인 조르바, 강렬한 소설 조르바를 만난 반가운 흥미는, 10 여 년이 넘게 떠나 있다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만난 그것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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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0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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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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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들이지만 내겐 처음이다.  1회 수상작들은 당연히 모르고, 이런 상이 있는지조차 생소했다.  젊은작가상이 생겨난 취지를 읽으면서도 간헐적으로 드는 의문, 왜 젊은 작가여야하지?, 였다. 
  


김애란  물속 골리앗 
잊혀진 사람들의 침잠하는, 조용한 아우성이 "살짝 매캐한 눈물" 이 나게 한다. 소년은 "금치산자" 같은 자연에 대고 해명을 요구한다.  골이앗에서 떨어져 죽은 아버지의 퉁퉁 불어난 몸뚱아리와  녹색테이프에 감겨진 주검조차 떠나보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다. 소년은 부모의 죽음을 상실이 아닌 소멸로 읽어나간다. 죽음이 아닌 기억으로부터 잊혀진 ’소멸’ 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게 한다.  계속되는 빗줄기는 세상이 퍼붓는 불쾌한  이기와 맞물려 계속 소용돌이 친다.  김애란 작가는 소년으로 하여금 분명하지 않는, 그래서 불안한  ’희망’ 을 기대하도록 만든다. 기다리게 만든다. 그것은 불어난 물에 떠다니며 굶주림과 외로움의 끝에서 만나는 과자 봉지를 줍는 것만큼 필사적이면서도 가녀린 희망이다.  "누군가 올 거야." , 라는 단 한 줄의 글이 몹시도 휘청거린다. 김애란 작가는 끝내 골리앗크레인에 소년을 버려둔다. 희망은 소년의 것이며, 누군가는 그를 데리러 갈 것이다. 김애란은, 그 희망이 자신이 아니라 필경의 누구라고 침묵으로 답한다. 누구든, 혹은 무엇이든. 오랜 장마처럼 끈덕지게 이어지는 간결하고 선명한 글 줄들이 김애란이란 거대한 물웅덩이에 빠져들게 만든다.      



김유진  여름 
유리병에 담긴 체리주를 보기 위해 코가 눌리도록 얼굴을 바싹 가져다대고 있다. 내가 김유진의 소설을 보는 자세다. 더위의 소상한 기운이 유리병안에서 후끈 옮겨온다. 시선이 감정으로 옮겨간다. "유리의 마찰음과 골목을 가득 메우는 햇볕의 짱짱한 소리" 가 갖는 관계처럼 불안과 안도를 교차시킨다. "바퀴가 시멘트 바닥을 긁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소리" 를 통해 단조로운 일상에서 튕겨져나오려는, 다소 불안정한 긴장을 유도한다. 이렇게 김유진의 <여름>은, 소리없이 불안을 확대시키다가 문득 사그러뜨린다. 체리주가 익어가기 위한, "어린 열매가 여물어" 가기 위한 시간을 요구하 듯, 우리의 필요한 감각을 기다리게 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관계와 상상과 시간을 우리 감각안에 저장하고 있다.  뚜렷한 이미지나 감각없이, 막연한 선명함으로 남는 작품이다.   



이장욱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몽환적이며 작은 공포가, 수도꼭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처럼 샌다. 이 작품안의 작품, ’꿈’ 이라는 공포소설이 기괴함을 한껏 부풀린다.  특별한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만큼, 초보적 공포를 잘 구슬리며 매끄럽고 부담없이 흐르는 플롯과는 달리 안드레이가 던지는 철학적 우문들이 잠깐씩 생각을 멈추게 만든다.  



김사과  움직이면 움질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을 신기하다고 말한다. 색다르고 놀랍다고. 그러나 나는 무섭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려는 1분 전이, 한 시간 전이 무섭다. 결코 이 이상한 일들이 낯설거나 과장되지 않게 느껴진다는 게 가장 무섭다. 김사과는 뜻밖에도 우리안에 응집되어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공포르 괴물로 형상화시킨다. 번식하고 자라는 생각의 불규칙한 변이를 생성한다. ’나’ 의 생각들이 무수하게 짓눌려 있다가 괴물처럼 불거져 나온다. 일상에서 나도 종잡을 수 없는 ’속말’ 들이 속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막연한 불안감을 느낀다. ’착하지 않은 감정’ 을 도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가 있다. 김사과는 이런  자괴감과 분노, 고민의 감정들을  ’신기한 날’ 에 한꺼번에 쏟아낸다. ’나’ 의 분노가 소름끼치도록 실체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럼에도 실제가 아니란 것을 감지한다.  그냥 생각과 상상으로 일관되어지는 의식의 세계다. ’내’ 안의 분노를 ’나’ 에게서 꺼내 달라고, 보둠어주기를 기다리는 여린 짐승이 그냥 울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그 울음이 날카롭지만 애처롭다.  



김성중  허공의 아이들
혼란스런 슬픔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허공’ 으로 사라지는 기억과 느낌이 색다른 상상력으로 그려지는데 경험하지 못했으면서도 분명하게 기억나는, 소멸의 슬픔이다. 한편으로는 "뼈가 자라는" 것, 분명하게 이어지는 생명의 지속적 요구를 ’생성’ 의 슬픔으로 담고있다.  생성과 소멸이 공존하는 혼란이다. 땅이 꺼지고 사람들과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중에도 소녀와 소년, 둘이 만들어가는 기억과 사실들만 선명하게 크로즈업되고 있다. 세상의 끝에서가 아니라 어느 무인도에서 일어나는 듯한 그들만의 순수한 슬픔이 느껴진다. 황순원의 <소나기> 가 자꾸 떠오르는 게...이게 웬말인지.       
         


김이환  너의 변신
변화가 아닌, 변신을 꿈꾸고 실천하는 자들에게 강한 질타의 메세지를 보내면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성형중독, 외모지상주의, 쾌락탐닉들에 대한 무분별한 사고에 대한 경종이다. 말도 안되는 듯한 소리 같지만 곧 들이닥칠 것 같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티브이 프로그램이나 현실의 인물들을 삽입함으로써, 비현실적 사실을 마치 현실처럼 느끼게 한다. 사회 고발적이면서도, 보기 드물게 희극과 비극을 교묘하게 넘나든다. 

 

정용준  떠떠떠, 떠
표면화된 결핍에 대한, 수줍은 위로와 이해가 뒤엉켜 있다. 그녀와 ’나’의 감각은 수평적이다.   혀, 침이 고인다. 표현을 시작하기 전에, 맛을 탐닉하던 기관이어서일까. 발음하지 않으려는, 하지 못하는 결핍이 허기로 이어지는 느낌이다.  판다의 발작은 잠이지만,  ’꿈’ 의 부재다. 사자와 판다 사이를 오가는 결핍의 공기는 ’혀’ 를 통해 이루어진다.  사자와 판다의 땀내나는 의식(意識)이 서로를 핥고 있다. 할퀴고 찌르는 ’시선’ 과  위로와 이해의  ’혀’ 가 기우뚱하게 엇갈리며 수평을 저울질 하고 있다. 장애에 대한 침묵적 학대를 거부하고 저항하며 동물적 감각을 동원해, 아이러니하게도 이성적이며 원론적인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읽는 체감이 고루하지 않다. ’젊음’은 오래된 것의 반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임을 실감하게 하는 단편집이다. 갓 잡아올린 물고기가 사방으로 물방울을 튀며 파닥거리는 것처럼, 생생한 감각을 뿌린다.  단일하지 않은 상상력과 답습적이지 않은 문장들이 소상한 긴장을 유발하고, 적잖은 질문들은  결코 외람되지 않다. 감정의 빈축을 사지도 않는다.   갑자기 수혈 받은 젊은 피 때문에 어지럽고 손끝이 찌르르 저려온다. 위에서 아래로 마지 못해 흐르던 피가 갑자기 분주해진다. 발끝에서 역류한 그것이 가슴을 관통한다. 왜 젊은 작가여야 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각각의 글과 문장에는 그들만의 낙인이 찍혀있다. 분명한 각인이다. 단편으로 이처럼 밀착적일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혹자는 이런 경우를 보고, 우리 문학의 미래가 밝다, 라고 한다. 그 정도가 아니다.  우리 문학의 미래, 밝은 정도가 아니라 눈이 부실 정도라고.  기대를 쫓는 것에는, 작가의 일차적인 몫에 이어 독자의 이차적이고 적극적인 관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경험하고, 그것이  피드백으로 이어진다면 이상적 독자와 작가의 관계는 물론, 눈 부신 우리 문학의 지평을 앞당기지 않을까. 덧붙여, 다른 노력도 결실의 거름이 되리란 걸 확인했다. 책을 구매하는 데 책값이 말도 안되게 특별했다. 특별보급가 5,500원이다. 책을 받고보니 가격 밑에 조그만 글씨로 쓰여있다.  ’ 이 책의 적정가는 11,000원입니다. 젊은 작가들을 널리 알리자는 상의 취지에 따라 출간 후 1년 동안은 보급가로 판매합니다.’ 라고,  건강하고 바른 움직임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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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도
윤영수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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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야쓰, 빤쓰 바람으로 돌아다녀도 기껏해야 잔소리를 맞을 뿐, 칼침은 안 맞는다. 불가침 불문률에 힘입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부부싸움은 종종 새벽녁까지 건재하다. 시험점수에 상응하는 톡톡한 댓가들이 치러지는 현장은 복도 창문을 통해 실시간으로 생중계된다. ’집’ 이다. 즐거운 곳에서 아무리 오라고 꼬드겨도 내 쉴 곳은, 곧 죽어도 내 집뿐이란다. 집으로 가야한다. 우리는 왜 집으로 가야만 하는걸까. 가족 때문일 것이다. 집은 그저 형상일뿐, 가족이 본질일테니까 말이다.   
 
형상이었던 과거의 집을 기억하게하는 <귀가도 - 철학잉어> 에서,  잉어는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 외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집’ 이기도하며, 귀가의 유일한 이유, 그리고 석형 자신의 지독한 외로움이기도 하다. 죽을 자유를 위해 물밖으로 연신 뛰어오르는 잉어를, "못 된" 잉어를 쉽사리 놓아주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돌아갈 집의 이유를 잃어버릴까봐서였을까. 그것만은 아니다. 잉어가  "물속에서 진한 눈물" 을 흘리는 것에서 간절한 이유가 묻어난다. 도망치고 싶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 라는 간절함을 보게된다. 습관적으로든 어떻든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그다지 상심스럽지 않다. 그런데 유감은 다른 방향으로 틀어진다. 도망치고 싶다는,  바람직의 여부를 따질 수 없는 강력한 충동이 정작 ’삶’ 과 이어지고 있을 때다.  집 나가야 숨통이 트일것 같다, 라고 말하게 될 때다. 

<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 에서의 혜순쯤 되고보면, 집이어서 죽을 것만 같다. "며느리를 쟁기 멘 소로 아는 시어머니" 와 그녀의 아들, 즉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징그러운 삶" 의 연속이다. 며느리로, 아이들의 엄마로 살았지만 정작 혜순은 아내로 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의 길고도 징그러운 삶의 끝에는 도망이 기다리고 있다. 도망치고 싶다. 단지 살기위해서. "뜨뜻하게 물이 도는 눈"으로 편지를 쓰고 있는 남편의 짓거리에 한순간 속을 뻔했다. 이 "수모"를 감당해야 하는 이유로 어머니- 치매에 걸려 8년째 자리를 보전하고 있으며 친자식임에도 5년만에야 방 문을 열어본, 바로 그 어머니- 를 들먹이고 있다니. 수모는 다 뭐고, 불효는 또 뭔지. 하지만 이런 신파적인 김명구때문에 <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 는 분명한 배반적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순진한 믿음에 또 한번 다가서게 만든다. 칼로 수 도없이 물을 베고 사는 부부들이 다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처럼.  

정작 떠나지 말아요, 라고 말해야 할 사람은 순봉이다.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의 유순봉, 미림엄마와 그녀의 두 자녀야말로 고집스럽고 미련하게 고마움의 이유를 달고 사는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른다.그의 삶에서 현실은 구부정하고 엉거주춤하지만 "고맙습니다"만은 똑바르고 일관되게 이어진다.  이 책을 읽다가 한 순간 확 집어던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때가 바로 이 양반을 만나서이다. 속이 틀리고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 편으로, 나의 익숙한 단면이 스멀거리며 파고들기에 들었던 책을, 유순봉을 내려놓는다.  삶을 위한 궁여지책으로의 ’거짓 고마움’들이 떠오른다.  영악스러워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나의 고마움은 구부정하고 유들유들하다. 고마움에 담긴 어쩔 수 없는 삶의 슬픈 변명을,  콱 쥐어박고 싶다.      

"비겁한 남편"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면서도 끝내 남편을, 자신처럼 가엾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깊은 슬픔이 움츠려있다. "모든 죽은 영혼들이 그리워하는 삶의 독한 괴로움, 칼끝 같은 아픔을 나는 아직 맛볼 수 있는 것이었다." (116쪽) 빨간 원피스에 시장 바구니를 든 여느 아줌마들에게서 느껴지는 고단한 귀가가 <귀가도 - 아직은 밤> 에 유착되어 있다. "속으로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 겉으로는 여전한 미련과 이유를  기대하는 무거운 귀가에 비해 <귀가도2 -도시철도 999> 는 만화의 한 컷, 한 컷처럼 정밀하고 익살맞은, 그러나 차마 웃을 수만은 없는 씁쓸한 에피소드다. 세상과 사람, 사람과 이야기, 이야기와 질문이 탑승한 공간에서 비롯되는 숱한 군상들의 해묵은 귀가가 순환되고 있다. 답답한 웃음이라도 흘릴 수 있는 건, 나의 여느 귀가와 다르지 않은 공감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삼가,  교훈이라면 노약자석이 비록 텅텅 비어있어도 절대 앉아서는 안 된다는 것. 전철 손잡이에 매달린 피곤이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지분거리는 하늘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 몹시 필요한 것 말이다. 길을 걷고 있을 때 아는 체하며 뒷통수를 세게, 그냥 세게가 아니라 눈알이 툭 튀어 나오도록 거침없이 세게 치는 사람, 돌아보니 결코 아는 사람이 아니다. ’ 아쿠,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인줄 알고...’. 멋쩍게, 그러나 기민하고 성급하게, 횡하니 사라진다. 겨우 튀어나오기만 하고, 미처 빠지지 않은 눈알을 팔뚝으로 문대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그 핑계로 펑펑 울어 퍼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운대로 망치라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못질을 핑계로 손가락을 사정없이 벽에 박고는, 째려보고 흘겨보고 노려보는,  내 뿜을 수 있는 모든 독기를 담아 시선을 한 몸에 주리라. 망치 너에게. 핑계있는 울음, 핑계있는 원망을 퍼붓고 싶었다. 속이 시원해지고 싶었다. 윤영수의 소설을 읽는 내내. 그만큼 내게 바짝 들러붙는 이야기들이, ’살이’ 와도 닿아있기 때문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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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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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을 수 없는 요의. 영화 <인셉션>에서 그들은 각각의 토템을 지니고 있다. 꿈속인지 현실인지를 분간하는 자신만의 인식. K에게는 그 토템이 '참을 수 없는 요의'다. 배설의 욕구만큼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는 본질이 또 있을까. 어릴 적에는 요에 지도를 그리기도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부터는 '요의'의 자각을 꿈속에서도 명확히 구분한다. 꿈속을 벗어나 있는 '나'를 증명하는 체감이다. 그래서 혼란이 시작되거나 혼란중에 있는 K는 '요의'로써 현실로 돌아오게된다. 그렇다면 그가 느끼는 이상한 기류들은 모두, 영화 <인셉션>의 그것들처럼 꿈인걸까. K의 혼란은 그저 '이상한 느낌'들로 시작한다. 가끔은 누구에게라도 찾아드는 낯설고 불편한 느낌들이다.  

길에서 우연히 스친 사람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느껴지거나, 반대로 주위의 익숙한 냄새들이 변질되어 느껴지는 것들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는 건 잦아진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것들은 잠깐의 현상으로 지나고 언제나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제 자리에 잘 정돈된 '나'와 '나의 냄새'들이 돌아온다. 강박에 지친 한 인간의 머릿속으로 두통같은 현상들이 지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반복됨에 따라 불안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확실한 두려움같은 게 불거진다.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도시가 통째로 뒤바뀌는 건지, 타인들이 역할을 바꾸는지와 같은 3차원적 두려움이 아니다. 거울속의 너는 누군인가. '나'가 아니라면 단지 낯익은 타인이란 말인가. 나는 진짜 나일까, 라는 질문에 휩싸이게 하는 4차원적, 혹은 그보다 깊은 두려움이다. 그것은 확실히 주위로 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나'란 현상에 집중된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러나 K의 두려움과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한낱에 불과한 헤프닝이라 하기에  딱 좋은 주제이고, 전개다. 이것이 전말(顚末)이라면 말이다.  

 

그런데 '나'에 대한 현상적 질문들이 어느 순간 존재적 이유에 대한 물음으로 뒤바뀐다. '나는 누구인가'  

변신하는 자들의 도시, 변장이나 변복이 아닌 "본태가 바뀌는 탈바꿈"을 하는 사람들. 자신의 변신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행사하고 변신한 자신을 본질적인 '자신'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도시에서 K는 '낯선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러기에 K는 이 도시에서,  존재의 이유가 필요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 오랜동안 철학적으로 누적되어온 것에 비한다면, '변신'을 동기로 품은 이 질문은 좀더 본질적인 것이 된다. 변신을 통해서도 변하지 않는 원론적 본질이다. 나는 인간이다, 라는 형용할 수 없지만 명료한 진실로 이끈다. 인간이기에 뼈저리게 알고싶은 존재적 이유에 대한 욕구. 그러나 쪼개고 나누지 않고는 알 수 없었다. 마치 나무가 잎을 떨구고 벌거숭이인채 자신을 들여다봐도 '현상'은 도통 변하지 않고 본질은 더더욱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쪼개고 나누어 나무속으로 이어진 관다발을 찾아내고 또 다시 그것을 가르는 것처럼, K는 자신의 본질을 파낸다. 거기 있었다. K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나'의 모든 것이. 그것은 선과 악의 관을 타고 말초신경까지 가로질렀던 삶의 내막이었다.   

"선악과였어."

"그래, 만약에 그 나무 열매를 따 먹지 않았더라면 자네와 나는 선도 악도 몰랐을 거야. 원래 이 세상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었을테니까. 그랬으면 자네와 난 분리되지 않고 합체가 된 온전한 하나의 '나'가 되었을 거야. 그 하나의 '나'는 하느님이 창조했던 원래의 인간이 아닐까. 온전한 '나'가 되면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고,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할 테니까." (336쪽) 

"K는 죄를 짓지 않은 무죄한 사람이었다...중략..K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거짓말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선'으로 규정짓고 있다. 동시에 K2가 자신이듯, 그는 '악'이기도 하다.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라는 것 자체가 거짓이야' 라는 논리에 가당찮다는 이견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 설령 반박하고 싶어하는 '거짓말 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기억 못하는 거짓말이 있을거란 의심을 하지 않는 건 아닐거다. 그것은 우리 몸속에 수 천년, 수 만년 전부터 흘러든 원죄에 대한 기억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와 또다른 '나'는 무엇인가. 현상일까. 존재일까. 원죄로부터 분리된 선과 악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는 '회귀'에 도달한다.  신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임을 깨닫고 본래의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은 죽음이면서 생명의 잉태며. 도달이고, 시작이다. 그래서 최인호 작가는 K를 본래의 그의 땅으로 돌려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온전한 '내'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돌아가는 곳. K는 죽음을 그렇게 해석하기로 한다.  태초로 돌아가는 것. "온전한 K는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의 알파, K를 낳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들이 태어나기 전의 태초", 바로 그곳으로.

 

....환자가 아닌 작가로 죽겠다



 

 

 

 

 

 

  

 "정말 쓰고 싶은 글을 한 편이라도 쓰고 죽는 작가는 거의 없다. 그런데 백척간두의 고통 속에서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작품을 쓸 수 있었고...병에 걸린 뒤 암이 내게는 봄볕이라는 것을 알았다.... 암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하다가 어영부영하다가 들쑥날쑥하다가 허겁지겁 죽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암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동아일보 2011년 7월 14일자 인터뷰 기사중에서)   

 

그의 삶은 문학으로 연명되어온 것이며, 그가 곧 문학이다. 

정말 쓰고 싶었던 작품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신을 향한 은유의 고백...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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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박범신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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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는 쇠담금질을 시작하기전에 마음을 정(淨)하게 한다고 한다. 특히나 무사의 칼을 만들 때는 더욱 마음을 정(靜)하게 하였다고 들었다. 비록 살의(殺意)의 도구로 사용됨이 확실할지라도, 그것으로부터 넘어 오고 넘어 가는 '마음'을 차단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을 만들 때도 이와 같다. 음식을 만드는 이가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요리하는가, 슬프고 화난 마음으로 요리하는가에 따라 그 맛이 달콤하거나 쓰거나 하단다. 뿐만아니라 슬프고 화난 상태로 만들어진 요리는 독이 된다고 한다. 미물은 그렇다치더라도 사물이 사람과 통한다는 게 정말일까, 싶으면서도 이런저런 얘기들이 있고보면 허투루 지날 일은 아니다. 사물이 사람의 마음을 읽던, 사람이 사물에 마음을 심던 간에 그것이 사실이거나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약간 오싹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말굽이 살의(殺意)를 발현(發現)한다. 말의 발바닥에 죽은 듯이 -아니 실제로 죽은 게 맞다 - 붙어 있어야 할 물건이 사람의 손에 있다면 일단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먼저 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말굽이 손에 의해 부려지거나 기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생하려 들고 손을 부리려 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그런 황당함은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에서, 서서히 불성실하나마 연민으로 변해간다. 연민이라기보다는 연대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살인에 대한 해석의 각각이 변명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위성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살인에는 분노와 절망, 혹은 가눌수 없는 절박함 같은 게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변명도, 당위성도 주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말굽에 의한 살인에서, '나'는 '바람맞힌 미란이년' 때문에 발길질하는 남자에 대해 부당하다거나 화가나 있지도 않았다. 아예 "때리고 싶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생각"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손바닥이 "발작하듯" 내리박힌다. 그 남자의 뒤통수에. '나'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순간적이었다는 게 '발작'이란 단어를 통해 드러난다. 자신의 의지와 별개였음을 언뜻 시사하는 이 부분에서 나는 말굽의 우회적 살인을, 殺意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첫번 째 살인은, 말굽의 의지였다고 본다. 그렇기에 당연히 말굽의 기억속에 차 있던 殺意의 발현이라고 보는 게 맞다. 결국 '미란이년' 운운하던 남자는 "죽여도 좋은 쓰레기들"중에 하나라고 여기던 전 주인의 의지와 기억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패밀리'중 두 명을 죽인 두 번째 살인은, 그야말로 살인의 해석이 필요없는 우발적인 사고다. '개백정의 아들'도 모자라 기폭제 역할을 충실히 하는,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가지고 살았던 시간들에 대한 막연한 저항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그의 첫 저항의 의지는 강력했고 확실했다. 두 번째 살인이야말로 진짜 살인의 이유다.  

 

"슬픔이란, 어떤 슬픔이 없었다.
 내겐 탄생 이전부터 전해져온 슬픔 뿐이었다.
 슬픔은 언제나 그냥 하나의 슬픔 뿐이며, 분파되지 않았다.
 어쩌면, 연민의 공포라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341쪽)
 

'나'는 '슬픔의 집'이다. ''탄생 이전의 슬픔'을 간직하고 슬픔말고는 아무런 감정의 찌꺼기도 없는 '순수한 슬픔'이다. 그래서 "연민의 공포"라는 말로 대신되는 슬픔을 끝내기 위해 세 번째 살인을 한다. 피켓든 남자, 치매걸린 노파, 제천댁의 죽음에 관여한 건 분명 그 이유다. 그들을 살리는 길은 죽음을 선사하는 것으로 대신된다. 세 번째 살인을 통해서 앞에서 언급한 '불성실한 연민'이 느껴진다. 이로써 '나'의 마지막은 분명해진다. 말굽으로부터 분리되고 자신을 살리기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것은 죽음을 완성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방정맞게도 스릴을 만끽해가는 나는 "도덕상의 악과 선"을 외면할 뿐아니라, 그 경계를 잊어가고 있다. 어쩌면 "살인이야말로 언제나 최고의 윤리성을 갖고 있다"는 '나'의 말에 연대감을 가지는 건 아닌지. 죽을 힘을 다해 살라는 말이 있다. 차마 죽지 못한다, 라는 말도 들었다. 죽음이 아무리 가까이서 치근덕 거려도 결코 삶을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변명이다. 그렇다면 왜 살아야하는가. 왜 죽지도 못하고 살아야만 하는가. 여기서 '나'는 그 답을 얼버무리지만 '말굽'만은 정확히 알고 있다. 최소한 '말굽' 자신이 살아야하는, 그것도 불멸이어야하는 이유 말이다. 완전한 결합, 의식과 사랑과 행위가 결합된 삶을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세 번째 살인에서 중요한 또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손'이었다. 제천댁의 마지막 손은 "그녀를 강력히 붙잡고 있었고, 그것은 그러므로 비열하고 비천"하다는 것이다. '나'의 손을 들여다 본 것이다. 자신을 강력히 붙잡고 있는 말굽의 집착이 비열하고 비천해 보였을 것이다. 이로써 말굽과의 결별은 확연한 약속이 된다. 
 


마지막 살인은 '나'를 떠나있던 기억이 완성되는 순간에 이뤄진다. "영원히 훼손될 염려가 없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살인을 통해 자신과 완전히 결합시킴으로써 그 자신도 불멸하게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는 듯하다. '내'가 '샹그리라'로 되돌아온 이유이기도하다. 상그리라. 지상에 존재하는, 평화롭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지막 땅이 아니던가. 여진을 통해, 여진의 죽음을 통해 '나'는 영원한 행복을 박제(剝製)하기에 이른다. 또한 두 영원한 것에 대한 선택이기도 하다. "손바닥에 쇠말굽을 숨겨 지니고 영원히 사는 것은, 아무래도 슬픈 느낌"이었기에, 더이상의 영원한 슬픔을 '나'는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속 이사장의 은둔처, 상그리라엔 "부부가 사는 집이 없다". 그것은 완전한 결합, 완전한 사랑, 완전한 불멸이 없다는 뜻이기도하다. 부부가 하나 된다는 것은 단순히 살을 맞대고 사는 이상의 의미가 있다. 결합자체가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을 못보는 여진, 성불구의 이사장, 쓰레기같은 세상을 용납하지 못하는 '패밀리', 욕정에 사로잡힌 슈퍼마켓 남자와 노랑머리 여자, 이들은 결국 상그리라에서 추방되어질, 아니 애초부터 상그리라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상그리라에서 여진을 죽임으로써, 그녀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완전한 결합을 꿈꾸고 영원한 행복을 이루고 상그리라를 완성한다.  그리고 비로소 "본성을" 찾는다.                  

 

말굽은 단순히 살인의 도구가 아니다. "내가 오히려 나의 주인을 도구로 삼았다"는 그의(?) 주장은  상당히 일목요연하다. 말굽은 '나'를 성장시키고 단련시켰다. 말굽은 '유기적 살의'다. 살의가 살아있다는 건 아무래도 불편하고 힘든 상상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가 가졌던 슬픔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말굽에게서. '나'의 마지막 뼈에 달라붙어 있으면서 불멸의 또 다른 주인을 기다리는 말굽에게서 슬픔의 순환이 보간직하고 있는 건 기억이다. 기억이 슬픔이다. '화형'으로도 멸하지 않는 자신의 몸뚱아리를 원망하며, 또 다시 버림받지 않기위해 불멸의 누군가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간절함은 애뜻한 사랑으로 이어져 말굽을 무기물로 바꿔놓는다. 말굽은, '나'의 여진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강력한 사랑을 '나'에게서 원했던 듯하다. 뜻밖이다. 살인의 도구와 탄생 이전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의 사랑이라니. 마땅히 자신도 인정한 싸이코패스, 말굽에 대해 오싹한 경멸이 느껴져야함에도 그의 불멸이 어쩐지 안됐지, 싶다. 이사장의 얼굴과 몸뚱아리가 따로 노는 것에서 느껴지던 안쓰러움과 같은 것이다. 혼란이 느껴진다. 한 마디로, 기묘하고 무섭고도 슬픈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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