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은 압축된 언어로 표현된 예술이다. 독자는 시를 읽고 그림을 보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것이 나타내는 상징과 은유를 해석해야만 한다. 당연히 온전한 나만의 해석으로 읽어내면 좋겠지만 그것도 쉽지 않아 다른 사람이 해석해 놓은 것을 참조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떠 먹여 주는 것도 편하지는 않다. 건조하고 어렵게 서술된 글이 재미없고, 시나 그림을 칼로 분해 하는듯한 감상이 싫다. 그럼에도 잘 모르니까, 또는 나의 해석이 완전히 틀릴 수도 있으니 평전이나 해설서를 펼쳐보게 된다.
내가 화가 ‘에드워드 호퍼’를 알게 된 건 최근이다. 그의 그림이 현대적이고 독창적이라 관심 가지게 되었는데, 마침 호퍼 전시회가 한국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림을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전에 대충이라도 호퍼에 대해 알고 싶었다.
『빈방의 빛』(원제는 HOPPER)은 시인이 쓴 호퍼의 그림에 대한 글이다. 저자인 ’마크 스트랜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가하고 받아들이는 호퍼 그림에 대한 느낌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마크 스트랜드가 시인이지만 미술을 공부했고, 말년에는 미술가로 활동했기 때문인지, 그의 글은 시적(詩的)이기보다 상당히 세밀한 호퍼 그림에 대한 분석에 가깝다. 시인의 독자적인 감상이 대다수 공감되었지만, 어떤 경우엔 납득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마크 스트랜드는 ‘왜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호퍼의 그림 앞에서는 비슷한 종류의 감동(p.13)’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나는 호퍼의 그림에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인간의 소외와 고독을 가장 많이 보았다. 특히 옷을 잘 차려입은 여자들이 더 고독해 보였다. 그들에게 집이나 침대, 여행 중의 기차 안, 호텔은 편하게 쉬는 곳이기 보다 더 소외되고 외로움을 주는 장소처럼 보인다. 마크 스트랜드는 호퍼의 그림에서 나타난 등변사다리꼴 구조를 강조했지만, 나에겐 긴 수평과 강렬한 수직이 교차되는 직사각형의 구조가 더 눈에 들어왔다.
에드워드 호퍼에게도 인상주의화가처럼 ‘빛‘이 중요한데, 화가 모네가 빛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호퍼의 빛은 계산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그림이 상당히 구조적이고 기하학적이라 더 그런 생각이 든다.
[호퍼의 그림은 즉흥적이라기보다는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계획된 것이고, 그의 빛은 축하의 빛이라기보다는 기념의 빛이다. 그의 빛이 기하학적인 견고성을 갖추게 된 것은 빛이 흩어지지 않도록 빛에 어떤 생명을 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빛은 오히려 빛이 저항하고 있는 대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게 빛은 결국 어둠이라는 더욱 강한 세력의 휴지(休止)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p.59]
롤프 귄터 레너의 『에드워드 호퍼』는 여러 참고문헌을 인용해 호퍼의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이 책은 보통의 독자가 읽기에는 조금 어렵다. 미술 사조나 용어의 뜻을 계속 검색해가며 읽었다. 미술 전공자에게 더 좋은 책인 것 같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나타난 자연은 바로 우리 옆에 있다. 그러나 오히려 동떨어진 느낌이 들며 음산하고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한 발만 내디디면 내가 그곳에 빨려 들어가 사라질 것 같다. 금방이라도 무시무시한 존재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인간의 마음에서 오는 불안과 초조, 갈등 등 심리적 모습들을 자연으로 표현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호퍼의 그림 중 책과 신문을 읽는 사람들!
그들은 집중하고 있지만, 왠지 고독하게 보인다.
나만의 느낌일까?
호퍼의 그림을 보다보니 산책길에서 만난 구립 어린이집에서 그의 그림이 연상되었다.
‘햇빛이 비치는 이층집’과 비슷하다.
코로나 시국의 영향으로 미술 전시를 관람하려면 날짜와 시간까지도 정해 예약해야한다. 유명 뮤지컬이나 콘서트처럼 예약하기도 힘들다. 시간이 날 때 ‘미술관에 가서 그림이나 볼까!’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갔다가는 많이 기다리거나 못 들어갈 수도 있다. ‘에드워드 호퍼전’은 워낙 인기가 많아 친구 비아가 겨우 예약에 성공해 가게 되었다.
호퍼의 그림은 시대별로 다양하게 전시되었고, 그의 습작품이나 데생도 많았지만, 우리가 더 좋아하는 호퍼식 특징의 그림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 아쉬웠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당연 ‘에드워드 호퍼’이지만 난 호퍼의 부인인 ‘조세핀 호퍼’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에드워드와 미술대학에서 만난 조세핀은 화가이기도 하면서, 호퍼의 뮤즈이자 모델이었고 조력자였다. 화가로서, 예술가의 아내로 산 여자의 삶이 궁금했다.
호퍼의 그림에는 당연히 조세핀이 모델이 된 그림이 많다. 전시관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햇볕 속의 여자’는 찍을 수 있었다. 이 그림에서 나체로 서 있는 여자역시 조세핀이다. 당시 조세핀은 78세였다고 한다. 78세에 저런 포즈로 남편이자 화가의 모델이 되어준다는 게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늙어 죽을 때까지 예술가의 뮤즈역할을 자청한 건지, 아님 호퍼의 요구를 받아들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크 스트랜드는 ‘빈방의 빛’에서 이 그림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여자의 몸은 매끄럽지도, 완곡한 곡선을 이루고 있지도 않다. 그보다는 빛이 만드는 곱지 않은 경계선이 다소 남성적인 그녀의 근육질 몸 위에 머무른다......「햇볕 속의 여자」에서 묘사된 여자는 그 누구의 미적 관념에도 맞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녀는 엄청난 존재감으로, 방 안을 다소 울적하고 사색적인 에로스로 가득 채운다.
-p.65]
78살이나 먹은 여인은 당당한 모습으로 담배를 들고 서 있다. 나이에 비해 몸매가 탄탄하지만 전혀 에로스적이지는 않다. 정면으로 빛을 한 몸에 받고 서 있는 여성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고 있는 듯하다. ‘그 누구의 미적 관념에도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 온 세월을 육체 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이 여자는 무척 아름답고도 숭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된 ‘에드워드 호퍼전’은 관람 동선이 별로 좋지 않았다. 특히 전시실에 의자가 하나도 없어 쉴 공간이나 오랫동안 그림을 감상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관람객이 그저 그림을 빨리 보며 지나가기를 바란 것 같다.
전반적으로 서울 시립미술관 전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오래 전 딸아이와 함께 읽었던 앤서니 브라운의 『행복한 미술관』이 생각났다.
엄마, 아빠와 두 아들은 엄마의 생일을 맞아 런던에 있는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으로 그림을 보러 간다. 세 남자는 스포츠 경기를 보고 싶어 미술관에 가기 싫었지만, 엄마의 생일이라 할 수 없이 따라 나섰다. 처음엔 시큰둥하고 재미없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을 보며 서로 장난도 치고, 아빠와 닮은 그림도 찾아낸다. 그들은 점점 기분이 좋아졌고 나중에는 모두 다 즐겁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앤서니 브라운은 미술관에 갔던 날에 엄마와 그림놀이를 했으며 그때 자신이 커서 무엇을 하며 살지 결정했다고 한다.
앤서니 브라운의 ‘행복한 미술관’처럼 미술관의 역할은 그런 것이 아닐까! 유명한 그림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닌, 그곳에서 추억을 쌓게 하고 그림에 감동할 시간을 충분히 주며, 나중에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계기를 주는 곳......
그런 미술관에 가고 싶다.
*사진속의 그림은 '빈방의 빛', 에드워드 호퍼', '행복한 미술관'에서 발췌했고, 페이지는 생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