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벙어리 같은 웅얼거림과 눈먼 대화 속에, 공포와 희망과 고통으로 묶인 이들의 빽빽한 뒤섞임 속에, 같은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사이의 몰이해와 증오 속에, 20세기의 재앙들 중 하나가 비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 P37

밤이 지나갔다. 불타버린 잡초 위에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강물이 음울하게 숨 쉬며 제방에 부딪쳐왔다. 파헤쳐진 대지, 다 타버리고 남은 빈 건물 속 잔해를 보는 심장마다 온통 슬픔이 밀어닥쳤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지금, 전쟁은 이 하루를 검은 연기와 쇄석과 쇳조각으로, 피로 물든 붕대로 가득 채우고자 아낌없이 준비하고 있었다. 지나온 날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쇠붙이로 파헤쳐진 땅과 불로 가득 찬 하늘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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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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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욕망하는, 졸렬하고 이기적인 것들을 이루게 해줄 부적은, 그것이 손에 잡히는 순간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인간극‘의 창시자인 발자크는 이 단순한 사실을 장황하고도 서늘하게 직조해낸다. 철학이 뭐 별건가? 웃기면서도 난폭한, 환상적이면서도 비굴한 인간의 삶이 그냥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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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7-18 21: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을 때마다 발자크는 천재같아요~

페넬로페 2024-07-19 00:23   좋아요 1 | URL
읽다보니 점점 더 발자크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얄라알라 2024-07-20 2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페넬로페님의 100자평으로 알게 되는 2가지.

˝오노레˝란 이름.

참 맛을 모르고 어렸을 때 읽었나보다, 이렇게 극찬하시니 다시 봐야할 소설가 목록에~~

페넬로페 2024-07-21 05:19   좋아요 0 | URL
ㅎㅎ
‘오노레‘란 이름~~

2월부터 한 달에 한 권씩 발자크 소설 읽고 있는데
그 중에서는 <나귀 가죽>이 제일 좋았어요^^
 













사람마다 각자의 취향이 있다

예전에는 누군가가 나에게 음악과 미술, 산과 바다 중 어느 것을 더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다와 음악을 좋아한다고 바로 대답했다. 그런데 지금은 선뜻 대답하기가 힘들다. 기회 있을 때마다 미술관에 자주 가서 그림을 보다보니 그림이 좋아졌다. 요즘은 푸른 나무가 무성한 숲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미술관에 가서 그림과 마주하면 주위의 모든 것들이 소거되어 버린다. 그림이 주는 느낌과 압도적 아우라에 생각이 멈춰지고 오직 그림만을 보게 된다. 그러다 그림과 현재 나의 상황이 연결된다. 결국 나는 내가 개입된 해석을 하고 만다.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이 다양하고 그것에 정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이 그림을 잘 보고 있는지에 대해 항상 믿음이 가지 않는다.


-p.69, 폴 세잔, <생트빅투아르 산>, 필라델피아 미술관


[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은 때때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그림 중 하나로 기술된다. 캔버스의 평면을 급진적으로 강조한 최초의 작품 중 하나에 속하기 때문이다. 엑상프로방스 지역, 그의 화실이 있던 레 로브 언덕에서 보고 그린 산 이미지에서, 세잔은 관목들을 환기시키기 위해 구획을 나눠 색칠하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그것들은 다른 무엇보다 하나의 추상적 패턴을 형성하는 최초의 그리고 중요한 색채의 흔적들이었다.

-p.68]

 

알랭 드 보통의 세잔의 그림에 대한 기술적 해석이다. 세잔의 그림에 대한 이런 해석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저 생트빅투아르산의 모습만을 생각하며 감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해석을 무조건 좋아하고 받아들이는 편은 아니다. 그림마다 작가의 의도나 작품이 주는 영향 등 수없이 많은 해석과 에피소드, 중요성이 있지만, 내가 그것을 다 알고 그림을 보지는 않는다. 작품에 대한 해석이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 해석으로 그림은 틀에 갇혀 버린다. 미술관에 가서 도슨트의 설명이나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면 분명 도움은 되지만 그때부터 내 시각은 설명되어진 문장으로만 그림을 보게 된다.

 

난도질하듯 시를 분석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림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떤 그림이 역삼각형 구조이고, 어느 사조에 속하며 이러저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해지는 것이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그림에 대한 감상이 힘들고 나의 독자적 해석 역시 위험하기 때문에(물론 많이 알지 못하기도 하다.) 미술에 관한 책을 들여다봐야만 한다.


-p.73, 크리스 오필리, <성모마리아>, 신구 미술 박물관(개인소장)

 

[크리스 오필리는 무엇이 예술을 예술답게 하는가에 대한 인습적 생각에 반대해왔다.오필리는 성모마리아의 가슴을 전통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말린 코끼리 똥에 니스를 칠해 표현하는 방법으로, 배설물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모든 것이 무가치하다는 우리의 선입견에 도전장을 내민다.

-p.70]

 

크리스 오필리의 그림 <성모마리아>1997년 런던에서 첫선을 보이고, 뉴욕의 브룩클린 박물관에 전시되자 관람객은 분노했고 세계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이 그림에 충격을 받았다면 문제는 오필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품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완고함에 있다고(p.70)’ 말한다. 그림은 우리에게 이런 충격을 줌으로써 어떤 가치를 지닌다. 이런 그림은 작가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서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다. 그림에 대한 해석은 필요악일 수밖에 없다.

 

영혼의 미술관은 지적인 작가, 알랭 드 보통이 그림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서술한 책이다. 예술에 대한 일곱 가지 기능-보통은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에서도 이런 분석을 한다. 이 작가의 특징인 것 같다. 그만큼 아는 것이 많다고 할 수 있지만, 약간의 허세와 잘난 척도 있다.-과 예술의 핵심, 여러 가지 예술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예술에 대한 실질적 이용방법도 있어 유익하다. 그림에 대한 책인데도 글이 상당히 많다. 글 하나하나에 깊이가 있어 알랭 드 보통 작가에 대한 경외감이 든다. 특히 예술에 대한 일곱 가지 기능을 읽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치유되는 느낌도 든다. 이 책은 예술을 통한 자기계발서다. 멋지고 풍부한.

 

이 책은 한 번에 읽고 말 책이 아니다. 생각날 때마다 꺼내 그림도 보고 보통의 글도 읽으며 생각에 잠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물론영혼의 미술관엔 작가 개인의 의견이나 느낌이 들어 있기에 모두 다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나와 그의 의견이 다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예술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울하거나 힘들 때, 나에게 힘이 되어 줄 책인 것 같다. 내가 몰랐던 그림도 많고 그 그림들에서 받는 기운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작가들(보통과 화가)은 그냥 천재들이다. 다른 말이 필요 없다.

 

보통은 예술의 일곱 가지 기능을 기억, 희망, 슬픔, 균형 회복, 자기이해, 성장, 감상으로 분류했다. 나는 이것들 중 자기이해부분이 좋았다. 그림을 통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P.46, 사이 툼블리, <파노라마>,

 

수없이 많은 스크래치가 있는 내 마음 같다.


-P.14, 클로드 모네, <수련 연못>, 내셔널갤러리

 

어떤 그림은 예쁘고 아름답기만 하다. 그 속에 가난과 불평등, 고통이 들어 있지 않은 것도 많다. 그렇지만 예술에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가 너무 쉽게 즐거워하고 유쾌해진다는 점, 인생과 세계를 지나치게 낙천적인 눈으로 본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터무니없이 희망적이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대부분 기우에 불과하다. 우리는 거의 항상 장밋빛의 감상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기는커녕 과도한 우울로 고생한다. 우리는 세계의 문제와 부당함을 아주 잘 알고 있지만, 단지 그 앞에서 작아지고 약해지고, 초라해질 뿐이다.

-p.13]



 

 

 

 

 

 

 







보급판으로 출간된 이 책은 양장본보다 가볍고 휴대하기 좋지만, 그림과 많은 내용의 글을 이 작은 책에 그냥 쑤셔 박은 것 같다. 나처럼 노안이 심한 사람 입장에서는 짜증도 난다. 집에서 영화를 보면 영화관의 큰 스크린에서 보는 감동이 그대로 느껴지지 않듯, 이 책에 수록된 그림도 너무 작아 그림이 평범해 보인다. 미술 도록은 비싸더라도 양장본이 훨씬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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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7-11 19: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힘이 되어줄 책이라고 하시니 급 관심이 가네요.. 보통 잘난척에는 공감을.. ㅋㅋㅋㅋ 저는 소설들이랑 불안 정도 읽었지만요.
그림은 그저 내 마음에 좋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싶은데 또 설명 듣고 보면 안 보이던 게 보이니 신기하고 재밌기도 하더군요^^

페넬로페 2024-07-11 22:18   좋아요 2 | URL
생각보다 이 책에 글이 많은데 예술과 연관된 작가의 통찰이 좋았어요.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이 많은데 모르는 미술 작품도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청아 2024-07-19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찬가지로 소설을 읽지 않아야 독자적인 소설을 쓸 수 있다고 했던 피에르 바야르의 말이 떠오릅니다. 어떤 틀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저는 참 오래걸렸어요.
아직도 멀었지만요. [영혼의 미술관]저도 읽고 싶던 책이에요^^

페넬로페 2024-07-19 15:50   좋아요 1 | URL
이 부분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틀에 갖히기는 싫은데
그러다보면 제가 오역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더라고요. ㅋ
이 책 천천히 음미하고 읽으면 되게 좋아요.
물론 제 감상이지만 청아님은 좋아하실 것 같아요^^
 
기차와 생맥주 - 최민석의 여행지 창간호
최민석 지음 / 북스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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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와 생맥주처럼 다양하고 톡 쏘는 시원함으로 읽을 때 즐거웠다. ˝일상의 쉼표˝가 되어 주었지만, 기차와 생맥주처럼 순식간에 기억에서 증발되어 버리는 아쉬움도 있었다. 많은 것에 공감되고,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좋았다. 나와 우리의 기차와 생맥주가 신나게 계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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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7-18 2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케이크와 맥주,의 오마쥬인가요? ㅎㅎ

페넬로페 2024-07-19 00:22   좋아요 1 | URL
내용은 전혀 달라요.
주로 전업 작가로서의 고충과 여행에 대한 에세이예요^^
 














열린책들출판사에서 출간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첫 장에 있는 작가 소개는 개인적 체험에서 가장 위대한 허구를 만들어 낸 작가라는 말로 시작된다. ’개인적 체험에서 시작해 그것을 소설로 만들어 낸 작가가 헤밍웨이만은 아닐 것이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 역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 많다.

 

헤밍웨이는 작가는 직접 겪은 일을 써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글을 썼지만 박완서 작가에게는 철학이라는 말보다는 그냥 그 많은 경험을 토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필요와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타고난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져 글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 같다. 그래서 헤밍웨이가 그 다음 작품에 대한 부담(다른 이유도 많겠지만)’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박완서 작가는 오랫동안 꿋꿋이 건재해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 동화 등 많은 작품을 이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tvN 드라마 졸업에서 대치동 일타 국어 강사인 서혜진(정려원)은 박완서 작가에 대해 강의할 때 ’1931-2011‘이란 숫자에 답이 있다고 한다. ’작가가 살면서 경험한 전쟁, 분단, 산업화를 거치며 진행된 사회적인 변화와 인간 사회의 병폐와 부조리가 선생의 글감이다. 여기에 유년 시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선생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선생이 세 살 때 아버지가 맹장염에 걸렸지만 병원에 가서 수술하지 않고 민간요법으로 병을 치료하다 아버지가 죽었다. 그 사실에 두고두고 한이 맺힌 박완서의 어머니는 아들과 선생을 서울로 데려가 신식교육을 시켜야한다는 생각을 한다. 선생의 생일을 깊이 있게 이해했다면 선생의 어떤 작품이 덤벼도 무섭지가 않다고 정려원은 말한다. 선생은 자신의 작품이 교과서나 문제지에 실리기를 별로 원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겪지 않았던 시대를 완벽하게 소설에 묘사해 놓았기에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을 수가 없다.

 

박완서의 말1990년대에 있었던 박완서에 대한 인터뷰 기록들을 그녀의 장녀인 호원숙 작가가 엮은 책이다. 이 책에서 선생은 워낙 격변하는 여러 시대를 거쳐 산 덕분에 자신이 500년 정도 산 느낌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다. 게다가 1988년 남편과 아들을 한꺼번에 저세상으로 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여태껏 선생이 당한 그 어떤 굵직한 사건보다 더 큰 충격이고 힘듦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생의 말에 고통이나 아픔은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음에 다 넣어 삭힌 듯하다.

 

선생의 말은 담백하고도 뼈가 있었다. 말이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아 좋았다. 오히려 인터뷰어들의 말이 더 장황할 정도였다. 고정희 시인의 편안한가 하면 날카롭고 까다로운가 하면 따뜻하며 평범한가 하면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작가가 박완서다.”라는 말처럼 선생은 담담함 속에서도 아닌건 아니라고, 자신의 생각을 뚜렷하게 밝힌다. ‘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끊임없는 독서, 체험이 선생 글의 밑받침이 된다고 했다. 박완서 작가에 대한 이력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이 마흔의 나이에 등단했다는 사실 아닐까? 아이 다섯을 키워낸 주부가 어떤 습작기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 그때부터 무수히 많은 글을 써내는 것 자체가 경이로울 정도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구상한 후에 글은 금방 쓴다고 했다. 그만큼 쓸 수 있는 소재를 많이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박완서의 소설에 작가의 경험만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작품 중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산업화 이후 대한민국 중산층과 여성의 삶을 다룬 내용이 들어있는 것도 많다. 특히 여성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날카롭다. 진보적 여성관을 가지고 있으며 중산층 여성의 이기심에 대한 비판도 많이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박완서 작가는 제 1세대 페미니스트가 확실하다. 작가 자신이 전업주부로 별 어렵지 않게 중산층의 삶을 살았다고 폄하될지는 모르지만 페미니스트가 뭐 별건가? 꼭 장외로 나가 서로의 관계를 부정하며 상대를 비판하고 구호를 외치는 극단적 투쟁만 하는 것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선생의 소설 속 여자들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 시대 여자들이 앞으로 갈 방향을 잘 제시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페미니스트가 될 자격은 충분하다.

 

혹시 선생이 페미니스트란 말을 싫어하실라나? 그렇지만 나는 나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사람 사는 것에 뭔가 확실한 경계는 없다. 나란 사람에게 가부장적인 것과 보수적인 면도 분명히 들어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극복하고 더 진전하겠다는 각성과 그에 따른 실천을 한다면 그것이 페미니스트이고 진보주의자인 것이다. 다음 주에 시아버지 제사가 있다. 이 더운 여름에 불 옆에서 전을 부치기 싫어 아프다는 핑계로 가지 말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그저께 형님께서 가져다주신 깍두기와 열무김치를 먹으면서 가서 보은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은 여자들만이 제사를 준비하는 가부장적 제도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의 행동도 필요하지만 받은 것을 돌려주는 인간적인 삶도 절대적이다. 사는 것이 이래서 정말 힘들다.

 

이 책을 읽으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즐거웠던 것은 박완서, 피천득 선생과 나의 종교관에서였다. 우리 모두 가톨릭이란 종교가 아름답고 성스러워 영세를 받고 성당에 나가지만 고해성사와 같은 종교가 주는 의식을 싫어한다는 점이 닮아 있었다. 피천득 선생은 고해를 보지 않고도 성사표를 고해를 보고 난 후에 넣는 바구니에 넣었다고 했다. 그 부분에서 나는 그만 큰 소리로 웃었다. 나도 똑같이 그렇게 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았고 그것이 오히려 더 순수한 것 같아 정화되는 느낌도 들었다. 박완서 선생이 목마르다고 맥주를 한 잔 하자고 하면서 당신이 맥주를 잘 마신다고 한 말도 좋았다. 사람인데도 사람한테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할 때가 나는 가장 행복하다.

 

이 책 끝부분에 선생 작품의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2011년 기준으로 장편소설과 소설집 35, 산문집 17, 동화집 11.단지 쓴다고 해서 이렇게 많은 책을 출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읽어 주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책의 숫자에 숙연해진다.

 

[내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으면 소설을 결코 쓰지 않겠죠.

 

소설이란 여러 사람하고 같이 공감하면서 쉽게 마음에 와 닿도록, 삶의 모습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거예요.

 

내가 안 겪어봤으니까 더더욱 다른 이들의 아픔이 생생하게, ‘날 것으로 다가왔다고 말이다. 문학을 하는 능력이 별스러운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처지를 내 것처럼 이해하고 상상하는 능력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대목이다.]


-'박완서의 말' 중에서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중에서]

 

일사후퇴 후 거의 모든 사람이 남쪽으로 피난을 갔지만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 피난을 가지 못한 20살의 박완서는 텅 빈 서울에, 마치 자신만 남은 것 같은 공허에, 앞으로 이러한 사실을 증명할 글을 쓸 거라는 예감을 한다. 그녀는 40세에 처음 세상에 글을 내 놓았다. 박완서의 예감은 적중되었다.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작가가 자신의 예감을 실현시키려는 의지보다 글을 쓸 수밖에 없는 당위성의 이유를 확인시켜 주는 책이다. 그만큼 한 인간이 저렇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용이 풍부하며 파란만장하다. 큰 역사적 흐름 속에서,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인간들의 변화와 적응력, 순간적인 운명 등 지금 세대들은 감당하지도 못할 이야기가 가득하다. 특히 작가의 오빠의 운명은 더 기구해 마음이 아프다.

 

이 두 권의 소설은 저절로 술술 읽힐 정도로 내용도 절절하고 작가의 문장이나 표현도 너무 좋다. 그렇지만 작가는 이 글을 쓰면서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오열한 순간도 많았을 것이다. 한 인간의 삶이, 역시나 그 시대에 살았던 내 엄마와 돌아가신 아버지도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들에게도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인생이 있었다. 


[우리 집에 모여 앉은 많지 않은 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그림자이기를 거부한 이는 역설적이게도 사자였다. 엄마가 먼저 맡은 부란(腐爛)의 냄새는 역질처럼 무섭게 우리한테 번졌다.

 

쉬어서 버리면 안 되지.”

엄마가 헛소리처럼 말하면서 팥죽을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둘러앉아, 사랑하는 가족이 숨 끊어진 지 하루도 되기 전에 단지 썩을 것을 염려하여 내가 버린 인간들답게, 팥죽을 단지 쉴까 봐 아귀아귀 먹기 시작했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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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7-04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드라마 ‘졸업‘ 때매 잊고 있던 박완서 단편전집 생각나서 다시 펼쳤다는 거 아닙니까 ㅎㅎ

페넬로페 2024-07-04 17:41   좋아요 1 | URL
아, 그래서 서곡님께서 요즘 박완서 작가의 작품 읽으시는군요.
졸업은 저 장면을 끝으로 더 보지는 못했는데 드라마가 끝났더라고요^^

stella.K 2024-07-04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페님, 저도요! 사실 제가 신앙은 카톨릭에서부터 시작을 했죠.
그 성스런 분위기가 좋아서. 근데 막상 영세를 받고보니 고해성사가 영 익숙치가 않아서
결국 멀어졌죠. 영성체에 하고 싶어고 고해성사를 안 받았는데 어떻게 할 수가있겠어요? ㅠ
그러다 이내 멀어졌고 저희 집이 기독교를 받아드리는 바람에 결국 저도 그쪽으로 가게됐죠.
저만 고역이 아니었다는 걸 까달았더라면...ㅎ
박완서 작가의 책은 전 너무 젊을 때 읽었단 생각을 해요. 나이들면서 읽으면
공감할 게 많을 것 같은데 아직도 못 읽고 있네요.ㅠ

페넬로페 2024-07-04 20:12   좋아요 1 | URL
오, 그러셨군요.
저는 스텔라님께서 모태신앙인 줄 알았어요.
누구나 다 고해성사가 힘들다고 느낄거예요. 저는 전에 고해성사 받다가 길게 한다고 신부님께 혼난 적도 있어요. 그때는 정말 열 받더라고요. 어떤 신부님은 잘 들어주어 고해성사하면서 힐링받은 적도 있지만도 아무튼 너무 힘들어 요즘은 그냥 생략하고 있어요.

저도 작가의 책을 젊었을 때 읽고 그동안 멈췄는데 다시 읽으니 좋으네요.
작가가 노년에 대해 쓴 책도 좋았어요. 그것도 재독하고 싶어요^^

마힐 2024-07-05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태껏 한번도 박완서님 글을 읽어 본 적이 없었네요.. 이번에 페넬로페님의 글을 보고 언젠가는 꼭 읽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평생을 다해도 읽지 못 할 책이 너무 많을 것 같네요...

페넬로페 2024-07-05 15:11   좋아요 1 | URL
저는 예전에 박완서 작가의 작품 많이 읽어서 다시 안 읽을 줄 알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다시 읽으니 좋네요.
마힐님
정말요,
세상에 읽을 책이 너무 많아요
더 열심히 읽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