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선생의 책을 처음으로 완독했다. 그동안 저자의 다른 책을 여러 번 읽으려고 시도했었지만 끝까지 읽어내지는 못했다. 저자가 쓴 글은 천천히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것 같았는데, 빠른 호흡으로 너무 급하게 다가오는 느낌에 내 속도를 맞추기 힘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책의 내용과는 무관했다. 저자가 강조하는 말인 ‘맥락’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나와 정희진의 맥박수가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바탕이 되는 책이라 반가웠다. 영화를 좋아하고 오랫동안 봐 온 사람이라면 이 책의 제목인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를 그냥 그 자체로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정말 내 몸을 지나간다. 두어 시간 남짓의 압축된 것에서 뿜어 나오는 모든 것들을 몸으로 먼저 느끼고 그 다음에 머리로 정리해야 한다.
이 책의 내용은 영화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영화를 보지 않고 읽어도 괜찮다. 영화의 부분만으로 저자는 하고 싶은 말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영화에서 받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인식하고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책을 읽어 가며 내 생각이 복잡해지고, 깐깐해졌다. 내가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도 있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이를 언급할 땐 내 성격도 비슷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환경을 부러워할 때 나도 똑같이 부러워했다.
정희진이 영화를 해석하는 방식은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에서 시작한다. 각자 다른 부분적 시각에서 영화의 독후감은 출발한다. ‘부분’이란 단어가 처음에는 생소하게 들렸지만 내가 보는 영화의 방식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영화든 책이든 결국 나는 부분으로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책 덕분에 영화를 많이 봤다. 새로 본 영화도 있고 다시 본 영화도 있다. 더 읽어야 할 책, 봐야 할 영화도 많아졌다.
[이 책의 요지는 한 장면으로 ‘전체’를 해석하고 ‘확장’하고 다양한 버전으로 보는 방식을 공부하는 데 있다. -p.26
부분적이지만 각자 독창적이며 그래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온전히 하나(holism)인 대화의 공동체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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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중력의 영향을 받지만, 느끼는 강도는 똑같지 않다. 우울증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중력의 힘이 너무 세 땅 속으로 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래비티’에서 딸을 잃은 라이언 스톤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우주에서 직면한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편하게 다시 땅을 밟을 수 있게 된다. 고통으로 인한 힘듦은 땅 위에서 해결하기 어렵다. 사람들도 잘 도와주지 않는다. 현실에서, 중력을 벗어난 우주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본다.
‘나라야마 부시코’는 날씨가 약간 추운 날에 남편과 같이 본 영화이다. 영화의 분위기와 소재가 특이해 지금까지도 기억에 많이 남아 있다. ‘비밀은 없다’, ‘암수살인’, ‘리플리’, ‘아무도 모른다’는 이번에 처음으로 본 영화이다. 이 영화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신선했고, 공감했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영화 ‘기생충’에 대한 평론가 이동진의 한줄평이다. 이동진은 이 글이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비난을 많이 받았다. 그는 최근에 방영된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나름 해명을 했다. 한줄평같은 짧은 글은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뜻을 잘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희진도 한자어를 많이 사용한다. 자신의 뜻을 잘 전달하기 위해 고심해 단어를 선택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20대가 많이 보기를 바란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한줄평이 아닌 장문의 글을 쓸 수 있는 책에는 한자어보다 더 쉬운 단어를 선택해 글을 쓸 수 있다. 그녀의 책을 20대가 많이 읽기 바라는 독자로서, 정희진이 선택하는 단어가 변화되기를 기대한다.
JTBC에서 방영된 ‘방구석 1열’을 매회 시청했다. 그 프로에서 영화전문기자였던 주성철 평론가를 알게 되었다. 영화에 대한 풍부한 해설을 해주어 좋았다. 『그 영화의 뒷모습이 좋다』는 주성철의 첫 번째 영화평론집이다. 오랫동안 영화와 함께 했기에 이 책에는 작가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들이 담겨있다. 영화에 대한 많은 정보, 뒷이야기들이 있고, 배경설명과 해석도 맛있게 잘 버무려 자신만의 감칠맛을 낸다. 감독관, 배우관, 장르관, 단편관의 섹션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정희진의 책과 달리 영화를 보고 읽으면 더 좋다. 한국 영화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려면 박찬욱, 봉준호 감독부터 언급되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웬만큼 영화를 본 사람에게는 조금 식상하고, 뒤로 갈수록 글이 힘을 잃는 것이 아쉽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서사의 정서와 감동의 완성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여성 캐릭터를 내세워 봉합의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게다가 〈올드보이〉에서 미도의 양손을 묶고 배에 전화 내용을 메모하는 장면도 굉장히 불편했다. 실제로 박찬욱 감독도 한 인터뷰에서 〈친절한 금자씨〉이후 할리우드에서 만든 〈스토커〉,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아가씨〉, 그리고 플로렌스 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TV 시리즈 〈리틀 드리머 걸〉에 이르기까지 여성 주인공들이 중심인 영화를 만들어온 최근의 작업에 대해 “올드보이에서 미도 캐릭터를 유일하게 끝내 진실에서 소외된 채로 퇴장하는 인물로 그렸던 게 마음에 걸려 〈친절한 금자씨〉를 기획하게 되었고, 이후 여성 캐릭터에 관심이 많아졌다....
박찬욱은 〈올드보이〉를 만든 후 고백했던 그 ‘꺼림칙한 마음’에 대한 참회의 답변을 〈헤어질 결심〉으로 내놓았다.
-박찬욱, p.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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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는 영화가 있어.
엄마는 애들 버리고 가서 애들만 사는 영화인대 5분 보다가 꺼 버렸어. 열두 살 먹은 큰놈이 웃으면서 어른들한테 돈 꾸러 다니는 거 보자마자 꺼 버렸어. 나 이 영화 마음 아파서 못 본다. 나 티브이 부시고 들어가서 걔들 빼내 와서 내가 키운다. 근데 영화 한다는 놈이 이런 것도 못 보고 어떻게 무슨 영화를 한다고. 다음 날 봤어. 보길 잘했다 싶더라. 애들 나름 자기 힘이 있더라. 인간 다 자가 치유 능력 있어“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기훈이가 형인 동훈에게 하는 대사이다. ‘나의 아저씨’는 초반에 보기가 무척 힘든 드라마였다. 그 보기 힘든 드라마에서 힘들다는 영화가 언급되어 그때에는 보기가 무서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는 정희진과 주성철의 책에 동시에 등장한다. 정희진은 이 영화에서 사회 구조나 부모를 빼고 아이들의 삶과 생존방식에만 주목한다. ‘나의 아저씨’의 기훈과 비슷한 생각을 한다. 이번에 처음 본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은 복잡했다. 엄마를 빼고 아이들만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레에다 감독의 ‘가족이 된다’라는 관점은 굉장히 좋게 생각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들여다보기가 힘들었다.
〈아무도 모른다〉는 각기 다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네 명의 아이들이 엄마가 행복을 찾아 떠난 후, 6개월 동안 아무도 모르게 그들만의 삶을 사는 내용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막내 여동생이 죽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성철의 ‘그 영화의 뒷모습이 좋다’에 이 영화의 실제 내용이 언급된다. 영화의 내용과는 다르게 실제 2살이던 막내 여동생은 사고가 아닌 장남의 친구들에게 폭행을 당해 죽는다고 설명되어 있다. 2살짜리 아이가 누군가에게 맞아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고레에다 감독은 사람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경계해 이 영화에서 엄마를 배제하고 ‘남매들 사이의 감정 공유나 기쁨과 슬픔,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의 성장과 희망이 있었을 것(p.110)’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라는 매체는 시간관계상 ’생략‘의 필요성이 큰 예술이다. 압축의 미학으로 아름답고도 숱한 얘기들을 쏟아내지만, 그런 이유로 영화가 위험할 수도 있다. 정희진이 말한 ’부분‘이 독창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객관성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브로커〉가 실패한 이유를 이 맥락에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외로움에서 시작한다. 뱃속에서부터 아이와 교감은 하지만 소통은 할 수 없다. 아이의 반응이 계속 증가하고 완전해질 때까지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막막하고도 아득한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의 엄마는 큰아들에게 “난 행복해지면 안 돼?‘라고 말하며 그에게 나머지 아이들을 맡겨놓고 떠난다. 그 엄마도 아이를 키우는 일이 막막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난 엄마의 외로움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 엄마를 증오하기도 한다.
엄마에게 행복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