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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 게르망트 쪽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평점 :
어렵게, 어렵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계속 읽고 있다. 시작했으니 끝내자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책을 잡고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난관에 부딪히고 넘어진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고, 읽기에 지겨운 부분도 많다. 책을 벗어난 생각이 안드로메다까지 가 있어 먼 길을 다시 돌아와 읽기를 반복한다. 화자의 몽상은 왜 그리 많은지 몽상 속으로 같이 들어가기가 무서울 지경이다. 화자의 몽상에 나의 몽상이 더해져 어느새 길을 잃는다. 집중이 되지 않아 같은 구절을 여러 번 곱씹어 읽고, 장소를 변경해가며 읽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이 책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어렵지만 프루스트의 문장은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바르트(Roland Barthes)는 프루스트를 모더니즘 작가가 아닌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다루는 19세기의 위대한 작가로서 발자크나 바그너, 디킨스, 졸라와 같은 우주생성론자의 반열에 합류한다(p491)”고 했다. 롤랑 바르트의 말대로 이 책에는 벨 에포크 시대의 거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백과사전적 작가의 깊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얕음을 인정하고, 그저 폼이 나는 프루스트의 책을 들고 이리저리 떠도는 노마드가 되기로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모든 곳에는 시간이 존재한다. 화자는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지나간 시간의 흐름을 좇아간다. 그 속에서 사실과 몽상을 교차시키며 관계와 이름을 다시 규정한다, 과거를 소환하기에 화자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재규정하고자 하는 모든 것은 감각적일 수밖에 없고, 실제와 관념의 경계도 모호하다. 가장 화려하고, 행복했던 것조차 기쁨보다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빠져나가는 것들을 붙잡지만 공백이 더 많다. 그럼에도 화자의 시간은 살아있다. 믿을 수 없는 감각으로 찾아간 과거에 우리가 느끼는 보편적 정서가 가득하다.
마르셀은 게르망트 공작부인에게 반해, 그녀의 살롱에 입성하기를 원한다.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그에게 폐쇄적인 귀족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게르망트가에 속해 있는 친구, 생루에게 부탁하기 위해 그가 있는 동시에르로 간다. 그곳에서 우정을 나누고 활기찬 군인의 삶을 엿보지만, 파리에 있는 할머니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온다. ‘게르망트 쪽 2’의 앞부분은 요독증을 앓고 있는 할머니의 투병과 죽음에 관한 내용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권은 처음부터 60페이지까지, 담담하고도 아름답게 그려진 프루스트의 문장만으로도 빛을 발한다.
[우리는 흔히 죽음의 시간이 불확실하다고 말하지만, 이런 말을 할 때면 그 시간이 뭔가 막연하고도 먼 공간에 위치한 것처럼 상상하는 탓에, 그 시간이 이미 시작된 날과 관계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 죽음이-혹은 우릴 먼저 부분적으로 차지하고 나서 그 후엔 결코 손에서 놓아주지 않는-이렇게 확실한 오후, 모든 시간표가 미리 정해진 오후에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그리하여 다른 쪽에서 당신을 향해 걸어오던 죽음이, 무대에 등장하기 위해 바로 그날 몇 분 후 마차가 거의 샹젤리제에 도착할 바로 그 순간을 선택하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한다.
-p11~12]
생각보다 쉽게 게르망트가의 살롱에 초대받은 화자는 빌파리지 후작 부인, 게르망트 공작 부인, 샤를뤼스 남작의 집을 차례로 방문하게 된다. '귀족의 살롱'이라는 장소를 빌려 프루스트는 그 시대의 단면을 묘사한다. 그것은 인간관계, 사상, 예술과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드레퓌스 사건까지 다양하다. 자신이 속한 세계와는 다른 것을 욕망하고 상상하며, 기대하지만 화자가 직접 본 귀족의 세계는 결국 환멸로 다가온다. 닫히고 일그러진 그들만의 세계는 가식과 허위만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타인을 위함이나 공동의 선을 기대한다는 건, 그 세계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한다.
게르망트 공작은 무도회에 참석하는 자신을 위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친척의 죽음이 미뤄질거라 확신한다. 빨간 드레스에 검정 구두를 신고 나온 게르망트 공작부인에게 다시 빨간 구두로 바꿔 신고 오라고도 한다. 그들에게 검정으로 인식되는 애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을 앞둔 오랜 친구, 스완에게 조차 조금의 연민도 없다. 스완과의 대화로 힘을 뺏긴 아내가 파티에 가서 피곤해 할 것에 대한 걱정만 한다.
[공작은 죽어 가는 사람에게 아내와 자기 몸의 불편함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것만이 그의 관심을 끌었고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를(계속 화자가 옆에 있다) 집 밖으로 친절하게 내쫓고 나서야 공작은 그가 받은 예의 바른 교육과 즐거운 기분 덕분에, 이미 안마당에 나가 있는 스완을 향해 낭송하듯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의사들의 그 저주받을 바보 같은 소리에 기죽지 마시오. 멍청한 자식들이오. 당신은 퐁뇌프 다리만큼 오래 버틸 거요. 당신이 우리 모두를 묻어 줄 거요!”
-P486~487]
그럼에도 화자는 그토록 짧았던 많은 ‘음악적 순간(P400)’들과 권태나 서글픔으로 느껴지는, 외부로부터 오는 인위적인 도취감(P403)을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 안에 넣는다. 우리가 과거로 들어가 만나는 순간들의 느낌은 다 다르다. 화자에게 홍차에 적신 마들렌과 콩브레의 마르탱빌 종탑이 석양빛에 그려지는 모습, 발베크의 오솔길은 아름다웠지만 게르망트가 사람들의 만남은 허무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화자의 과거를 구성하고, 훗날 소중한 진실의 한 부분을 담고 있다. 허무한 관계조차 과거의 일부이고, 그것은 우리를 성장시킨다. 먼 훗날 우리는 ‘메마른 우리 삶의 경박함을 망각하며(P406)'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지금 11권까지 출간되어 있다. 김희영 선생의 번역은 훌륭하고, 소제목마다 붙인 번역자의 해설 역시 한편의 텍스트로써 손색이 없다. 개개의 문장에 달린 각주도 친절해 내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는다. 빨리 완간이 되기를 바란다. 이제 난 이 책의 반 정도를 읽었다. 프루스트와 함께 하는 앞으로의 여정도 힘들 거라 예상하지만 힘을 내서 달려보자.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머리칼에만 유일하게 늙음의 관이 씌워졌을 뿐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의 고통으로 새겨진 주름살이나, 오그라들고 부풀어 오른 살, 팽팽하거나 늘어진 살로부터 해방된 얼굴은 이제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주 오래 전 할머니의 부모님이 남편을 골라 주던 날처럼 할머니의 이목구비는 순수함과 순종으로 섬세하게 새겨져, 뺨에는 세월이 점차 파괴해 버린 순결한 희망과 행복에의 꿈, 결백한 즐거움마저 빛나고 있었다. 할머니로부터 조금씩 물러가던 삶은, 삶에 대한 환멸마저 앗아 가 버렸다. 할머니 입술에 미소가 떠오르는 듯 했다. 장례 침상에서 죽음은 중세의 조각가처럼 할머니를 한 소녀의 모습으로 눕히고 있었다.
-p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