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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시아의 여정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우리가 길을 떠나는 이유와 방법들은 아주 많다. 변변한 가방 하나 없이 비닐 쇼핑백 두 개를 들고 집을 나서는 펠리시아에게도 여정(旅程)의 목적은 있다. 축복받기는커녕 적어도 허가된 것도 아닌 그녀의 떠남은, 낯선 곳에 도착하고도 또다시 800m, 40Km, 두 시간 거리의 도시들을 헤매는 것으로 결과가 예상된다.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 <펠리시아의 여정>은 처음에 펠리시아의 시각을 통해 세밀하고 주도면밀하게 배경이 묘사된다. 나열된 배경은, 이미지로 변해 머릿속에서 계속 영상으로 재생되는 것 같다. 그것은 어떤 자세한 설명보다 시대적 상황이나 펠리시아에게 놓인 현실을 더 잘 이해시켜준다. 그리고 소설의 중간부분부터 작가의 문장과 내용에 점점 빠져 소설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가족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칠푼이’, ‘나사 빠진 인간’으로 불리어지며 집안일을 도맡아하고, 백 살이 다 된 증조할머니까지 돌보는 펠리시아는 순수한 소녀이다. 외모에 자신이 없고, 첫사랑인 남자에게 고백도 하지 못한다. 그런 그녀에게 접근한 조니 라이서트를 사랑하게 되고 임신까지 하게 된다. 외롭고 힘들었던 그녀에게 누가 봐도 새파란 건달이며 교활한 그가 한 행동을 펠리시아는 사랑이라 여긴다. 그 어이없는 사랑과 믿음은 그가 있는 영국의 ‘버밍엄 북부‘를 향해 그녀를 아일랜드의 집에서 떠나게 만든다. 펠리시아가 아는 건, 조니가 영국의 버밍엄 북부에 있는 한 도시에서, 잔디깎이를 만드는 공장의 부품창고에서 관리인으로 일한다는 그것 하나뿐이다. 무모했지만, 아무도 모르게 펠리시아는 출발한다.
‘힘듦’은 지금 사는 곳에서 사람을 살게 하지 못하고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펠리시아뿐만 아니라 재키, 베스, 엘시 커빙턴, 샤론, 게이, 보비역시 그 힘듦으로부터 탈출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예상하고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더 끔찍한 건 ‘듀크 오브 웰링턴 로드 3번지’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조용하고도 집요하게 달려드는 선량함과 도움으로 가장한 진짜 악의 모습들이다. 그것은 진실인 듯 보여도 거짓말투성이고, ‘힘듦’에서 떠난 사람들이 덥석 잡을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먹이를 가지고 있다.
한 번씩 소설에 나오는 인물을 이해하기 힘든 때가 있다. 소설가 ‘켄 리우’는 ‘종이 동물원’ 서문에서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올리는 생각이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 떠올렸던 생각과 똑같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당신과 나, 우리는 서로 다르고, 우리가 지닌 의식의 특질도 우주 양 끝의 두 별만큼이나 서로 다르다”고 했다.(‘종이 동물원’, 켄 리우, 장성주 옮김, 황금가지-서문에서 인용) 우리는 생각과, 살아온 만큼의 배경지식이 다 다르므로 어떤 사람을 제대로 판단하기가 어렵다. 작가가 서술한 힐디치는 누구인지, 작가의 의도대로 내가 그를 이해했는지 궁금했다. 그가 나쁜 사람인지, 아니면 충분히 그에게도 어떤 정상 참작의 이유가 있는지 이 ‘힐디치’라는 인물에서 계속 멈추어 있어야 했다.
‘힐디치’에 대해 어떤 평가와 단정을 내리려 할 때마다 ‘윌리엄 트레버‘작가는 그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하나씩 던져주며 우리들의 판단을 유보시킨다. 작가는 ’힐디치‘로 대변되는 ’악‘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악‘은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키워진 것일 수도 있다. 힐디치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그의 엄마는 아무 남자에게나 추파를 던지며, 그들을 집에 끌어들이는 여자이다. 자신이 꿈꾸던 군인의 모습도 신체적인 결함으로 이루지 못한다. 어쩌면 ’듀크 오브 웰링턴 로드 3번지‘는 그에게 외로움과 지켜지지 않는 약속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키워지고 점점 부풀려지는 내면의 불만들은 왜곡되고 뒤틀린 모습으로 외부로 향해간다. 힐디치가 ‘우정’이라 규정하며 행하는 것들은 철저하게 계획적이고 집요하다. 갈 곳 없는 어린 소녀들의 약점을 이용해, 멀리서부터 촘촘히 거미줄을 쳐오며, 마지막엔 그들이 꼼짝할 수 없게 만든다.
힐디치는 펠리시아의 돈을 훔치며,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락시키고 되돌릴 수 없게 만든다. 영국에 대해 뼛속깊이 적대적인 감정만을 가지고 있는 펠리시아의 아버지는, 조니를 거부한다. ‘모임의 집‘ 광신도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따르며 같이 행동할 사람들만 받아들인다. 그녀가 사랑했던 그 건달은 끝내 그녀에게 주소를 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조니 라이서트는 펠리시아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유가 있고, 그들 역시 힘들었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나쁜 사람은 나쁘다. 그들이 아이들을 떠나게 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만든다.
[그녀는 이제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안다. 가을날 결혼식 신부 들러리도 아니고 자동차 뒷자석에서 담요를 뒤집어썼던 아이도 아니다. 한때 그녀의 것이던 순수함은 시간이 흐르며 이제 어리석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고, 상실을 경험한 예전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으로 이끈 사람이기에 소중하다. 또다른 아침, 눅눅한 밤을 보내고 맞는 화창한 아침에 길을 걸으며, 그녀는 자신을 감싸는 평온함을 당황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새로이 깃든 그 평온함을 기뻐한다. -p312]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펠리시아의 순수함은 결국 힐디치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노숙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펠리시아를 살리는 것인 동시에 죽이는 것이다.
‘캘리거리’같은 광신도가 외치는 기도는 공허하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지상 낙원은 죽고 난 뒤에 갈 수 있는 곳이고, 현실에서는 사슴과 사자가 같이 뛰어놀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뭔가가 아주 조금만 있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도 있는 이들에겐 먼 훗날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죽음으로, 노숙자의 삶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처음 읽은 ‘윌리엄 트레버’의 글에서 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힐디치는 흐릿하다. 그의 글을 계속 읽어나가며, 조금은 뚜렷한 힐디치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