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은 도덕과 분리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오늘날 주류 경제학 교과서는 경제학이 이른바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데만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옳다거나 그르다는 식의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작가 정희진(1967~ )은 가치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훨씬 강력한 가치판단을 전제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가치중립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균형은 없다. 역사의 시작과 함께 저울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이 가장 무서운 서명인 것처럼,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
















누군가가 자신 말이 ‘사실’이며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면, 자신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때 쓰는 상투적인 언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주장하는 배후에는, 우리가 모두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현실은 우리 현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사실은 우리의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팩트풀니스(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태도와 관점)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현실 세계는 무한히 복잡합니다. 현실을 묘사하기 위한 어떤 설명도 부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가치관은 사회적인 쟁점이 무엇인지 결정할 때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사회문제에 어떤 해결책을 쓸지 선택하는 데도 영향을 미칩니다. 종종 그러한 선택 뒤에는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 유리한 이해관계가 숨어 있습니다. 



중립을 지키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미 부와 권력이 특정한 방식으로 분배되고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시도는 현 상태를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자는 뜻입니다. 여러 이해관계가 끊임없이 충돌하는 세상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순수한 사실’이라든가 ‘중립적인 서술’은 모두 은폐된 해석이며, 여러 가능한 관점 중 그냥 하나일 따름입니다.

















과학기술사회학자인 데이비드 블루어(1942~ )는 ‘사실’ 그 자체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사실’(fact)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만든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파케레’(facere)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습니다.



‘사실’이라는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생겼습니다. 유럽에서 이 개념은 불과 5백 년 전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16세기까지 확증된 사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로 인해 곤란에 처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이나 진리는 오직 신의 마음속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종이 가격이 싸지고, 안경이 개발되면서 많은 사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경 덕분에 사람들은 책을 읽는 시간이 늘어나고, 이에 따라 책 수요가 늘어났습니다. 그러자 인쇄된 것은 모두 ‘사실’일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고, 이에 따라 여론이라는 게 처음 형성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에서 나온 말보다 종이에 쓰인 글을 더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신문이나 교과서, 법전처럼 인쇄된 것은 ‘사실’일 것이라는 믿음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사실은 만들어집니다. 사회학자들의 표현대로 사실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확실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는 주장이 따라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과학자들은 여러 전문가 집단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특별히 큰 힘을 가진 이익 집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면, 사회과학이 행사하는 과도한 영향력에서 우리는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사회학자 미셸 칼롱(1945~ )의 주장처럼, 우리가 믿는 경제학 자체가 우리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우리 경제체제는 경제학이 만들어 낸 ‘사실’, 곧 우리가 믿는 경제학에 따라 생성된 결과물입니다. 세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우리가 만들어 냈기에 질서가 있는 듯 보이는 세상과 우리가 알 수 없는 ‘실제’ 세상(철학자 칸트의 말을 인용하면 물자체*)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세상의 규칙은 인간이 만든 결과물이므로 어느 정도 질서가 있지만, ‘실제’ 세상의 질서(그런 게 정말로 있다면)를 지배하는 법칙은 우리 이해 능력을 넘어섭니다. 경제학이 그나마 가끔 세상을 설명하는 이유도 경제라는 세계의 조직과 구조, 통치 자체가 바로 우리가 고안해 낸 경제학 규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경제학이 바로 우리 세상을 규정합니다. 우리가 믿는 경제학이 달라지면 우리 세상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경제학은 가난한 자를 해방시킬 수 있지만, 또한 어떤 경제학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경제학 이론이 현재 상황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현재 사회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역할에만 치중하게 됩니다. 

















* 물자체: 칸트는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현상’이라고 부르고, 현상 너머의 실제 세계를 '물자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현상’뿐이며, ‘물자체’ 즉, 사물의 실제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를 볼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에서 해석된 현상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라디오 2024-11-05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침 요즘 경제 관련 책 보고 있는데ㅎ

흥미로운 주제네요. 경제학이 도덕과 분리될 수 있는지.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