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는 허위다.

숨길 것을 숨기고 난 후의

묵계에 불과하다.

- 이수영





현대 사회는 개인이 문화에 구애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행동하길 요구합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개인이 자신 생각을 바꾸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지기에,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은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지만,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으로부터 비롯된 문제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개인이 노력해서 구조적인 문제를 극복하라고 요구하는 일은 사회 문제를 개인 문제로 은근히 떠넘기는 일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수사적인 무기로 사용하지 말아야 할 말은 인본주의(휴머니즘) 뿐만이 아닙니다. 관용(똘레랑스) 또한 그렇습니다. 



관용의 모순


사회는 개인에게 ‘관용’이라는 미덕을 요구합니다. 흔히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다양성과 차이를 이해하고, 편견 없이 존중하라고 말합니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관용하고, 기독교인은 무슬림을 관용하고, 지배적인 다수 인종은 소수 인종을 관용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똘레랑스[관용]의 전도사로 알려진 사회운동가 홍세화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프랑스 사회의 유연성을 높게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똘레랑스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외면하며, 비타협보다 양보를, 처벌이나 축출보다 설득과 포용을, 홀로서기보다 연대를 지지하며, 힘의 투쟁보다 대화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권력의 강제에서 개인 자유와 권리를 보호합니다." 

 















홍세화는 사회 문제를 똘레랑스라는 문화로 해결하자고 주장합니다. 인종이나 종교, 정치체제가 서로 다른 사람을 관용하는 정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 사람들은 서로를 자극하거나 증오하는 일을 그만두게 될까요? 홍세화가 수십 년 전 방문했던 프랑스와는 달리, 오늘날 프랑스 국민 39퍼센트만이 관용이 중요한 미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관용이 증오와 경멸에 영구적인 치료제가 된 적은 없었습니다. 관용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치료하지 않습니다. 단지 단기적인 효과만 가져옵니다. 그래서 이제 관용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무시하지 말고 올바르게 평가해달라고 점점 더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관용하는 사람의 겸손한 태도 뒤에 숨겨져 있는 경멸에 민감해졌습니다. ‘다수에게는 방해를 주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로 생각해도 좋다’는 식의 관용을 그들은 더 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관용과 같은 문화적인 접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회 문제에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맥락을 무시한 채 우리 생활 방식과 생각만 바꾸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서로 등을 토닥여주는 관용 프레임은 자본주의 모순과 폐해, 대의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취약성 같은 갈등의 근본 문제들을 가리면서 이를 정념으로 가득 찬 관용의 문제로 치환합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틈이 급격히 커지고 있는데도 관용 주장은 이런 진짜 모순을 덮으면서 사회 문제를 개인 문제로 돌려버립니다. 겉으로 진보적이고 의식 있게 보이는 관용 담론이야말로 오히려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합니다. 사회문제는 개인이 단순히 자신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관용을 숭상하면 갈등은 무조건 위험하고 나쁜 일로 여겨집니다. 관용은 갈등 상황에 항상 천편일률적으로 역지사지하면서 서로 양보하라고 요구합니다. 관용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무조건 나쁜 것으로 매도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보다 만사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서로 양보하면서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저 관용이 아니라 따져보고 저항해야 합니다. 



물론 갈등이 생겼을 때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화해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시비비를 끝까지 따져봐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관용 사상이 만연하면, 사람들은 갈등을 병리적인 상황으로만 간주하며 모든 갈등을 그저 역지사지와 자기 양보를 통해 봉합하려 합니다. 한마디로 기계적인 관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입장이 충돌할 때, 획일적으로 중간에서 타협하는 게 관용이 가르치는 갈등 해소의 준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회를 진정으로 건강한 사회로 만들기 원한다면 타인에 대한 관용을 가르치는 것만큼 타인이나 국가가 자기에게 가하는 불의에 용기 있게 저항하는 것을 인간의 마땅한 의무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차이가 중요하니 인정하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 차이를 쉽게 좁힐 수 없기에 관용이 요구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관용이라는 느끼는 방식만 바꾸면 차이를 종식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관용 담론은 그 차이를 더욱 공고히 만듭니다. 가령 미국 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그렇습니다. 흑인은 사회에서 값싼 노동력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백인이나 자본주의 기업은 흑인과의 실질적인 평등을 환영할리 없습니다. 따라서 흑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라는 문화적인 관용 운동에만 쉽게 집중하게 됩니다. 실질적으로 흑인 권리를 높이는 일에는 눈을 감습니다. 단지 그 차이만 관용하라고 백인을 설득합니다. 















백인에게 흑인을 관용하라고 설득하는 일은 인종주의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의도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관용 설파는 자본주의가 가난한 백인 역시 착취할 수 있게 만듭니다. 백인들이 자본주의 때문에 겪는 여러 문제의 원인을 오히려 흑인 탓으로 돌려 흑인 노동자와 백인 노동자를 서로 분열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고용주와 교섭하는 노동자 집단 전체 힘이 약화됩니다. 결국 자본가 계급의 소득은 증가하지만, 가난한 흑인 뿐 아니라 가난한 백인 노동자의 소득도 줄어들게 됩니다. 관용은 인종주의를 강화하며,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적인 안정을 뒷받침합니다.















라이프니츠는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의 관용에는 자본주의 동기가 뚜렷이 작용하고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다른 도시와 달리, 유대인들을 게토(Ghetto, 전근대 법으로 유대인이 모여 살도록 강제한 서유럽 도시의 거리나 구역)로 몰아넣지 않았습니다. 스페인계 유대인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할 때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와 남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있는 광범위한 무역 거래망도 함께 가지고 왔습니다. 17세기 중반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의 해외 무역에서 15퍼센트나 되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관용에 속지 말라는 취지로 관용에 감추어진 의미를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착취당하는 사람이 관용으로 만족감을 얻는다는 것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미천한 뱃사람도 싸구려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실 때는 마치 자기가 왕이나 된 마냥 망상에 빠지는 것과 같다. 생계비를 벌려면 아직도 세상에 나가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유발 하라리는 ‘인종주의’와 ‘문화주의’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관용의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그는 관용이라는 가치가 문화적인 갈등을 해결하는 데에는 부족하다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인종주의 전쟁터가 ‘문화주의’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 결과 전통적인 인종주의자는 줄어든 반면, 오늘날 세계는 ‘문화주의자’로 가득하다. 
우선 문화는 생물학보다 유연하다. 이 말은 오늘날 문화주의자가 전통적인 인종주의자보다는 ‘관용’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채택하는 한에서 그들을 우리와 동등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동화에 실패하면 훨씬 가혹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는 그렇게 하려고 해도 거의 할 수 없다. 결국에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만 듣게 되고 잘못은 자신이 뒤집어쓰고 만다. 관용이라는 가치는 세계의 문화적 갈등을 해결하고 인류를 결집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우리는 서로 간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경우와 인정할 수 없는 경우를 헛갈릴 때가 많습니다. 개인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면, 차이가 분명히 있는데 상대방을 무조건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관용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각자 차이를 존중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기존 견해, 곧 현재의 지배적인 의견을 상대방에게 따르라고 강요하는 셈입니다. 입증의 책임(burden of proof)이 없는 사람에게만 유리한 게임입니다. 















이처럼 관용의 비대칭성은 대체로 간과됩니다. 관용 담론의  이분법 구조는, 지배와 종속의 문제까지 정당화 합니다. 관용은 관용 대상이 되는 자가 관용을 베푸는 자에 비해 열등하고 주변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표지(mark)하는 일인 동시에, 상대가 관용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될 경우 폭력 행사까지 미리 정당화합니다. 


관용은 그 자체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른 문화를 관용하는 일은 단지 모든 문화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관용은 ‘차이’보다 ‘우위’를 전제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자존감’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좋게 생각하기에 자신이 속한 그룹을 좋게 여기고, 경계를 넘어선 그룹을 낮게 평가합니다. 가령 한 사람이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이슬람교나 유대교 모두를 진지하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정말로 이슬람교가 기독교만큼 가치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기독교인이 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용의 딜레마입니다. 당신이 자신 문화에 우위를 둔 채 ‘다양성 자체에 가치’를 고려한다면, 다른 문화에 사는 사람은 열등한 삶의 방식을 지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이 아니라면 다른 문화를 동등하게 여기도록 상이한 문화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당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의 다양성 가치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차이를 관용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환원할 게 아니라, 차이를 바탕으로 보편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합니다. 관용을 강조하면 차이나 우위만 부각되며, 경계의 이동이나 권력 차이, 이해 갈등이 무시됩니다.


단지 의견이 다를 뿐이야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세 가지 이상(理想)을 내세웠습니다. 프랑스가 의도했던 박애는 관용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그 후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치가 서로 모순된다는 점입니다. 자유가 너무 지나치면 평등을 침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못지않게 다른 문제는 박애가 평등과 이율배반적인 관계라는 점입니다. 지나친 관용은 평등에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 미국인들은 50년대 심지어 80년대에 비해 훨씬 더 관용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인들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불평등해졌습니다. 관용이 고무되면 평등 가치는 더욱 쇠퇴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관용은 개인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용을 옹호하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놀랍도록 독립적이며 개인이 스스로 내린 결정을 존중합니다. 자신이 싫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 적어도 겉으로는 – 관용을 보이며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람마다 서로 가치관이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될 도덕적인 담론이나 논쟁에는 거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으며, 성급하게 토론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자신 견해를 말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을 뿐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노력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괜찮아, 우리는 단지 서로 의견이 다를 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굳이 의견이 같을 필요가 없어’라고 말합니다. 논쟁에서 이기거나 상대방이 틀렸다고 스스로 깨닫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모든 걸 그냥 내버려둡니다. 
이러한 상대주의가 무관심주의로 발전합니다.















관용을 옹호하는 개인주의의 핵심은 ‘사회에서 좋은 삶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누구나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좋은 삶은 개개인이 각자 알아서 나름대로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개인주의에 따라 공동체 유대는 상실되고, 도덕적인 지평들은 실종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느끼는 ‘불안감’이나 ‘헛헛함’은 결국 공동체 유대가 상실되면서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플라톤이 “민주정체에서 지나친 자유는 지나친 예속[전제주의] 이외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뀌지 않는다”라고 지적한 것처럼, 
공동체 유대가 상실된 군중에게는 고독감이 커지며 파시즘이 싹틀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된다고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규정했습니다. 공동체 가치의 깊은 유대가 다른 식으로라도 충족되지 못하면, 국민들은 삶의 의미에 굶주리게 되어 지도자의 사탕발림에 더 잘 넘어갈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 사회는 고립과 고독으로 이어지며, 그런 조건에서는 정상적인 삶은 퇴화되고, 파시즘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불안한 사람들은 온갖 부류의 독재자들에게 자신 자유를 넘겨주거나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삶이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당연히 ‘친숙한 것들’, 즉 자신 나라나 민족 때때로 자신 인종 속으로 퇴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동체 유대가 붕괴되어 삶이 불안해지면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심지어 파시즘까지도 삶의 버팀목이자 감정적인 도피처로 보일 수 있습니다. 
















관용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의 정치 철학입니다. 이 철학은 각 시민이 지지하는 도덕적인 관점이나 종교적인 관점에 정부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발상입니다. 사람들이 ‘좋은 삶’에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동의하지 않기에, 정부는 ‘좋은 삶’이 무엇인지 법률로 단정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정부는 각 개인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 존중하며, 각자 가치관과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관용을 강조하고 개인 권리를 존중하는 사상 전통, 즉 존 로크와 임마뉴엘 칸트로부터 시작해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롤스에 이르는 사상 전통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하는 토론이나 논쟁 대부분은 이 범위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각 개인은 사회의 문화와 밀접하게 얽혀 있기에, 우리 각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 자신만의 가치관과 목적을 가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칸트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타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고 배려하는 자유로운 양심에서 그 해답을 찾았습니다. 칸트의 선한 양심은 ‘자유로운 자아’를 전제로 합니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는 자유를 양심의 원천으로 보는 칸트 견해에 반대했습니다. 칸트가 언급한 온전한 자유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항상 나의 자유를 확대하거나 제한합니다. 


레비나스가 양심은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 주장은 옳습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 유대의 원천이 타인 상황에 대한 공감과 배려라고 주장했습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들 짐을 함께 나누어 짊어지는 일이 공동체 유대의 출발점이라고 보았습니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1929~ )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회 구성원이 노력을 기울이면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이기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 이익을 함께 추구하면, 사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합의를 통해 서로의 행동을 조정하면서, 상황에 관한 공통 이해에 이르는 것이 최우선 목표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사람이 자기중심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게 전체의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이 빈부 격차나 대립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상호간의 동정심(sympathy)에서 그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유주의 경제를 추구하는 미국에서는 동정심이 가득한 자원봉사자가 많지만, 불평등은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인 결함은 이러한 ‘도덕 감정’으로 해소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레비나스나 하버마스, 스미스가 언급한 공감과 배려, 이해, 동정 등은 사회와 문화에 지배당하는 개인감정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관용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반면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1892~1971)는 그의 저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932)에서 개인 도덕성이 집단에는 투영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집단에 만연한 ‘이기성’을 지목했습니다. 여기서 ‘집단’은 사회나 국가, 민족, 계층 등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니버는 개인들의 도덕성으로 부도덕한 집단이 개선될 것을 기대하는 일은 순진한 생각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따라서 톨스토이 류(類)의 개인 도덕성 함양으로 사회가 개혁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개인 도덕성과 사회 도덕성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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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은 개인이 혼자 있을 때와는 다르게 느끼고 행동합니다. 개인의 정신 상태는 군중의 정신 상태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 역(逆)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개인 의식과 개성은 사라지고, 대신 군중과 동일한 감정과 생각만 공유됩니다. 그렇기에 군중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지적 능력이나 전문성, 경험 등의 총합이나 평균은 군중에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군중 속에 남는 건 개인들의 무의식뿐입니다. 이처럼 군중이 무의식만을 공유한다는 사실 때문에 군중은 높은 지능을 필요로 하는 이성적인 행위를 하지 못합니다. 군중 속에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모든 사람의 평범한 자질만이 공유됩니다. 군중의 이런 평범함 때문에 군중은 무슨 일이든 미리 계획할 줄 모릅니다. 항상 그 순간의 자극에만 반응합니다. 
















달라이 라마

그렇다면 우리는 혹시 불교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불교에서 자비*라는 개념은 관용이나 연민, 동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관용이나 연민, 동정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비대칭성, 즉 제거할 수 없는 지위 차이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진정한 관용이나 연민, 동정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환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갈 곳 없는 이주자, 쫒기는 이방인에게 내미는 환대의 손길은 그를 손님으로 맞아주는 주인 행세입니다. 가령 부자가 자신을 동정하는 가난한 자의 뜻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부자가 화를 안 내면 다행입니다. 따라서 동정이나 환대는 자비와 거리가 멉니다.


달라이 라마는 “모든 중생이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얻고자 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함을 인식하는 것”에서 평등한 자비심이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평등한 자비심은 ‘의도적인’ 연민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 능력이 있다는 ‘무의식적인 평등 인식’에서 나옵니다. 모든 중생은 ‘부처’라는 관점에서 평등합니다. 부처에게 높고 낮음과 멀고 가까움이 없습니다. 자비란 모든 중생에 대해 부처로서 평등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친하든 낯설든, 멀든 가깝든, 심지어 친구든 적이든 모두가 부처라면, 모두를 부처로서 평등하게 존중하고 도와주는 일이 바로 잠재적으로 부처인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가능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무의식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자비란 스스로를 부처로 인식하고, 자신과 만나는 모든 사람이 잠재적인 부처라는 인식을 가지며 그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일은 나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회가 바뀌는 일이 아닐뿐더러, 지위 차이가 없는 ‘평등 인식’은 개인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사회 자체가 변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평등 인식은 집단의 무의식, 즉 사회 전체의 인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사회 전체 무의식이 바꾸기 전에 그저 개인에게 관용으로 차이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으며, 참된 평등에서 점차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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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에서 자비(compassion)는 공감(empathy) 및 동정(sympathy)과 함께 논의되곤 합니다. 공감은 ‘다른 사람 감정에 이입하는 것’을, 동정은 다른 사람과 ‘함께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가지 모두 타인의 표층의식에 접근합니다. 반면 자비는 이와는 다르게 개인의 표층의식보다 더 심층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마음에 접근합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마음이 있지만 그 깊은 곳에는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의 마음, 즉 하나로 공명하는 마음이 있다고 봅니다. 불교는 이 심층 마음을 불성(佛性)이나, 진여(眞如,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라고 했습니다. 융 심리학은 심층의 보편적인 마음을 집단 무의식으로 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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