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일 뿐 아니라, 물질적 부(富)를 추구하는 행복은 절대적 빈곤보다 더 민감한 상대적 빈곤 문제를 일으킵니다. ‘오늘날 가장 궁핍하게 사는 사람조차 수백 년 전 왕보다 더 잘 사는 데 몇몇 사람이 엄청 잘 사는 게 뭐가 그리 대수로운가?’라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큰 빈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 듀런트(1885~1981)는 “가난은 부(富)에 의해 만들어지며, 부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 우리는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평범한 사람은 부자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누구든 백만장자가 어떻게 삶을 사는지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부자들의 호화로운 삶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크게 보도합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이 부자들의 집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자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이라는 증상이 생겼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평생 절대 소유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괴로울 정도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든 다른 형태의 대중적 노출이든,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은 보통 사람이 소유한 것을 하찮게 보이도록 합니다. 비록 그 사람이 객관적인 기준에서 삶을 넉넉하게 누리고 있고, 인류 역사 전체 기준에서 극히 잘 사는 사람일지라고 그렇습니다. 

 















사회운동가 홍세화(1947~ )는 “성공한 자의 거머쥔 부를 동경하는 것은 ‘90퍼센트 사람들’이 덥석 문 당근이다. 그 가능성은 로또복권 당첨 확률에 불과하지만, 모두 성공 예감으로 뜀박질하도록 내몰아 기대하는 미래상으로만 자신을 일치시키고 오늘의 자신을 배반하도록 한다”라고 말하며, 그 이면을 깨달아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내 생각은 내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나에게 갖도록 요구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해야 한다.” 
















그렇다면 상대적 빈곤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모든 사람을 가장 가난한 사람만큼 가난하게 만들어 간단히 평등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명백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원래대로 가난하지만, 나머지 모든 사람은 해를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평등을 추구하는 일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한다고 해서, 불평등을 그냥 받아들여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불평등이 용인될 수 있는 경우가 언제인가 하는 점입니다. 불평등은 결과적으로 아무도 더 나빠지지 않고, 더 나아지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만 허용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치철학자 존 롤스(1921~2002)가 ‘차등 원칙’(difference principle)이라고 부른 것과 유사합니다. 불평등은 가장 못사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다는 원칙입니다. 하지만 이 원칙이 이상적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사회에서 불평등이 더욱 민감하게 감지되고,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웃이 더욱 부유해지면, 자신이 더 못살게 되는 것이 아님에도 부의 차이를 점점 더 의식하게 되고 불만족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등과 불평등을 오로지 물질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끔찍한 실패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상대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 행복을 판단할 때, 자신 실제 상황을 과거 혹은 현재의 사회적 경험에 비추어 비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복이 상대적이라면 국가가 객관적으로 경제를 개선하고 부양한다고 해서 반드시 국민이 행복해진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하며, 행복은 객관적으로 충족되지 않기에 국가의 경제 정책이 국민 행복 증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여건이 극도로 좋아진 후에도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자신 운명에 주관적으로 만족하도록 하고 사회 불만을 막고자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기본적 필요’가 무엇이든지간에, 일단 한 번 누구에게나 그것을 무료로 제공하면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빈곤층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 지구에 불평등이 만연한 것에 극도로 분노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소득은 다른 의미 있는 일과 더불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일 이후(이외)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일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한다. 보편 기본소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가 언급한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인 사회가 요즘 일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일본 젊은 층 대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취직률은 저조하고, 저임금에 시달리고, 워킹푸어로 일하고, 현대판 홈리스라고 볼 수 있는 피시방에서 난민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이들은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일본 20대 젊은 층이 느끼는 생활 만족도와 행복 지수는 78.3퍼센트까지 상승했습니다. 일본 중학생과 고등학생 95퍼센트가 자신은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꽤 높은 만족도입니다. 1980년 절정기를 맞았던 일본의 ‘입시 전쟁’이 상징하듯 ‘좋은 학교, 좋은 회사, 좋은 인생’이라는 중산층 꿈으로 일본 전체가 압도되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1990년대 이후 중산층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기업의 정식 구성원이 되지 못한 젊은이가 증가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 층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요즘 일본 젊은이는 예전만큼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습니다. 술도 많이 마시지 않습니다. 해외여행도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유학생 수도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선거 때 투표하러 가는 젊은이 수도 현저하게 줄고 있습니다.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태어난 지역에 애착을 느끼는 젊은이가 증가하고 있고, 대도시권으로 이동하는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2011)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1985~ )는 그 원인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고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고 느낀다.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될 때, 지금 행복하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세속적 물질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 그 자체가 오히려 불행의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해마다 소비자 구매 심리를 자극하는 더욱 매혹적인 상품이 나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물건을 소유하는 기쁨보다 물건을 갖지 못하는 비참함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754년에 이미 루소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세상 물질을 갖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물질을 소유한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면의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해서 오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무언가 주어지는 행복은 지속시간이 짧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원했던 승용차를 사더라도 만족감이 반년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은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합니다. 인간의 행복에는 설정점(set point)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행복감은 기저수준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을 계속 누릴 수는 없습니다. 마치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처럼 아주 잠깐만 바닥을 벗어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흔히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 곧 적응하리라는 사실을 매번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노인들은 대게 건강 문제로 고통을 많이 겪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인이 젊은이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을 들으면 매우 놀랍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만성 질병에 잘 적응하는 편입니다. 인간은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느낄지 예측하는 데 매우 서툽니다. 우리는 자신 감정의 반응 강도와 지속시간 모두를 크게 과대평가합니다. 
















흔히 쾌락주의자로 잘못 알려진 철학자 에피쿠로스(BC 341~270)는 행복을 대부분 사람과는 다르게 규정했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정서 차원에서 행복을 떠올립니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 측면에서 행복을 규정했습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습니다. ‘문제(~taraxia)가 없다(a~)’는 뜻입니다. 우리가 만족을 느낄 때는 어떤 것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바로 불안이 없을 때입니다. 행복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합니다. ‘다행’(多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 쾌락은 인생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쾌락 뒤에는 필연적으로 불쾌감이 뒤따르며, 인간의 참된 목표인 고통의 부재로부터 멀어진다는 점이 그의 요지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습니다. 불필요한 욕망을 필요한 욕망으로 착각하면 고통이 생깁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갈망에 비해 그 성취감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쾌락으로 시작된 것이 고통으로 끝납니다. 에피쿠로스는 유일한 해결책이 욕망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제안합니다. 

















부처(BC 560?~480?)는 우리 행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이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한 사람의 번영은 보통 다른 사람의 궁핍이나 배제에 의존합니다. 나라가 부유해지면 항상 불평등이 불행을 초래하기 마련입니다. 작가 버나드 맨더빌(1670~1733)이 말한 것처럼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다수 사람이 가난하고 불행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상주의’라고 부르는 이러한 논리는, 한 사람의 손실이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된다는 뜻입니다. 중상주의자가 해줄 수 있는 최고 조언은, 예컨대 임금은 낮출수록 좋다는 점입니다. 값싼 노동력은 경쟁 우위를 창출해 수출을 증진시키기 때문입니다. 맨더빌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노예가 허용되지 않는 자유 국가에서 가장 확실하게 부를 창출하는 것은 부지런히 일하는 빈곤층 다수”입니다. 

 















멘더빌이 이렇게 거리낌 없이 주장했던 이유는 빈곤층이 형편없는 사람들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입니다. “동료 노동자와의 경쟁에서 패한 노동자는 나태와 우둔이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빈곤이라는 형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영국 전 총리 마거릿 대처(1925~2013) 역시 빈곤을 ‘인격의 결함’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빈곤을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은 그럴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현대사회에는 ‘긍정적으로 사고하라!’는 신앙이 있습니다. 이 같은 낙관주의에 사로잡힐 경우 우리 모두에게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됩니다. 나아가 내 자신 감정을 다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냉담하게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처는 “괴로움의 현실이 우리 삶 전체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교는 삶의 목표로써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삶의 현실인 변화의 고통[生老病死]을 깨닫고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가져오는 뭔가를 얻자마자 곧 그것을 잃을까봐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늘 욕망의 대상을 쫓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결국 그것 때문에 불행해질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부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도 실제로는 순간순간 변화한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실체에 대한 믿음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욕망을 낳고 또 그 욕망은 고통을 가져온다. 만족스러운 순간은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좌절하는 것이다.” 
















철학자 스베냐 플라스푈러(1975~ )는 인간이 고통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성장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실패를 겪은 사람은 그것이 왜 실패했는지 생각하고,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지 고민하여, 다시 일을 시작할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장애나 시스템 오류라고 생각해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려고만 한다면, 인간은 자기 실존과의 중요한 연결 지점을 잃고 말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을 한계가 있는 존재로 인정할 때 자아를 갖게 된다. 인간이 그 한계와 고통을 경험하고 자신 인생과 사회가 대체 왜 이러한지 근거를 캐물어야 한다. 고통은 생각을 낳는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그 고통을 억지로 참는 사람은 성과(成果)의 강요에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2014)와 『호모 데우스』(2016)에서 행복은 달성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다스려야 할 마음 상태라고 말합니다. 행복을 갈망하지 않으면 현재 순간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고, 스트레스와 불만을 피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행복이 주관적 느낌이라고 믿기 쉽고, 자신이 행복한지 비참한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행복을 갈구하면 쉬지 않고 그런 감각을 쫓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마침내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고 해도 그 감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과거의 행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행복을 갈구할수록 점점 더 스트레스와 불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BC 460?~380?)는 행복은 재산이나 물질적 재화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의 쾌락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짧고, 고통을 산출하고, 반복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적 행복은 쾌락의 절제와 삶의 균형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덜 욕구할수록 덜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행복 역시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만족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의 성숙된 삶 전체의 문제였습니다. 성숙된 삶은 교육을 받고 습관화를 통해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즉 덕이 있는 행위를 하도록 훈련받고 또 이를 꾸준히 실천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를 반복하여 우리 본성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위를 하여 정의로워지고, 절제 있는 행위를 하여 절제 있게 되고, 용감한 행위를 하여 용감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같은 행위와 덕을 행복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다음에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건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인간 본성은 존재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가 사회에서 만들어가는 산물입니다. 인간 본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구성되는 과정에 있으며, 생성하는 존재로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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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 어떠한 원대한 시대사상이 없더라고 ‘그냥’ 살수도 있습니다. 그냥 산다는 것이 잘못된 일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어떠한 사상이 뿌리째 뽑아버릴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안에 깊숙이 심어져 있기에 그냥 산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국가가 전부라고 생각하여 국가를 위해 자신 인생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시민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경험했던 전쟁터는 다음처럼 몹시 참혹했습니다. 



"어느 날 백병전이 시작됐어...... 뭐가 기억나느냐고? '오도독오도독' 소리. 그 소리가 기억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사방에서 오도독오도독하는데, 사람들 연골이 으스러지고 뼈마디가 뚝뚝 부러져나가는 소리였지. 그리고 짐승의 울음 같은 처절한 비명들...... 서로를 찔러 죽이고, 숨통을 끊어놓고, 뼈를 부러뜨렸어. 총검으로 입이고 눈이고 닥치는 대로 찔렀지...... 심장을 찌르고 배를 찌르고...... 독일군에게 잡혀간 우리 여성 간호병을 찾아냈지. 세상에, 눈알이 도려내지고 가슴이 잘려나가서는...... 놈들이 말뚝에 박아놓았더라고. 몸에 살을 에는 추위에 꽁꽁 얼어 새하얗고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어 있었어. 그 아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러시아 시민들이 경험한 전쟁터는 이토록 참혹한데 그들은 기꺼이 스스로 지원에서 전장으로 갔습니다. 



“그저 전선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 그게 다였어. 어떻게 히틀러가 모스크바를 차지하도록 보고만 있겠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내 또래 소녀들은 너나없이 모두 전선으로 가겠다고 나섰지. 우리는 우리만 애국심에 불타는 줄 알았어...... 우리만 특별한 경우라고...... 하지만 웬걸, 모병사무소에 갔더니 글쎄 우리 같은 여자애들이 한가득인 거야. 세상에, 얼마나 놀랐던지! 심장이 뛰고 피가 끓어오르더라고. 나는 선발이 안 될까봐 가슴을 졸였어." 



딸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더라도 어머니는 반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한테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었는데도 어머니는 딸을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딸이 전선에서 돌아온 일을 모욕으로 생각하셨지. 적과 싸우지 않는 것을.” 



전쟁은 이토록 끔찍한데 그들은 왜 기꺼이 그 지옥으로 갔을까요? 



"우린 어렸을 때부터 '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어.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선으로 가기로 결정한 거야. 내가 안 가면 대체 누가 가겠어? 나는 반드시 가야 했지..... 나는 '전선으로 갈 거예요, 전선으로 보내줘요! 전선으로!'라고 날마다 '전선, 전선' 노래를 부르며 고집을 꺾지 않았어. 실은, 포스터 글귀들의 영향이 컸어. '모국이 그대들을 부른다!', '전선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눈만 뜨면 사방에 보이는 게 그 글귀들이었으니까. 노래는 또 어떤 줄 알아? '일어나라, 위대한 나라여...... 일어나서 죽기까지 싸우라......“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은 죽는 것이었어요! 자신을 희생하는 것, 전부를 내주는 것이요! 콤소몰(소련의 공산주의 청년 정치조직) 선언에도 있어요. ‘나는 내 민족이 내 목숨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말로만 하는 맹세가 아니었어요.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교육을 받으며 자랐어요. 군대가 행군하는 걸 보면 모두들 제자리에 멈춰 서서 경의를 표했죠. 승전 이후 군인들은 더 이상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거든요.“ 
















상호주관인 시대사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형성될 수 있지만, 특정 권력의 선전과 선동으로 아주 단기간 내에 '세뇌'될 수 있습니다.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1885~1971)는 선전과 선동이 인간을 '도취'시켜 비인간화하기에 이는 비윤리적이라고 말합니다. "도취는 하나의 기만이며 사기다. 감정이입을 핵심으로 삼는 일은 일상적인 삶을 격하시킨다. 니체의 '디오니스적 도취'는 감정이입 반응의 극단적 형태이며, 개인 인격을 균열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는 세계와 인간관계를 공허하게 만든다. 선전과 선동은 인간을 기만하는 위장된 오만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흔히 ‘반복 편견’(repetition bias)이라 부르는 이상한 오류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자주 들으면 들을수록 그 이야기가 참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는 현상입니다. 반복은 마치 서서히 젖어들어 온 몸을 젖게 만드는 가랑비와 같습니다. 기업은 광고를 반복하고 정부 역시 홍보와 선전을 반복합니다. 그들은 같은 이야기를 자주 반복하면 이성을 압도할 수 있으며, 심지어 거짓말도 반복하면 점점 더 진실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뭔가를 자주 듣거나 보게 될수록 우리 뇌는 더 빨리 적응하여 그것을 진실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018년 예일대학교 연구진은 사람들이 정보의 신뢰도와는 무관하게 같은 정보에 반복되어 노출되자 그 정보를 사실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였습니다. 아주 약간만 그럴듯해도 반복되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걸 믿었습니다. 가령 이러한 제목이 붙은 기사를 살펴보죠. ‘트럼프의 군사 개혁안: 미국은 징병제로 돌아갈 것이다.’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분명 사실이 아닌 이런 기사 제목조차도, 같은 내용을 두 번 본 사람은 한번 본 사람에 비해 두 배나 많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구진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가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반복 편견에 빠뜨리는 위험한 무기와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확인을 통해 확인되었을 때조차, 심지어는 본인의 정치 성향과 상반되는 의견일 때조차도, 자주 노출된 가짜 정보를 사실이라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정보가 되풀이된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복은 우리가 무언가를 진실이라 믿게 만드는 미끼 노릇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정부나 기업, 지도자들은 모두 오래도록 이 미끼를 잘 활용해왔습니다. 가령 히틀러(1889~1945)의 『나의 투쟁』(1927)을 읽어보죠. 히틀러는 성공적인 프로파간다를 위한 몇 개의 핵심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문장은 그 하나입니다. “몇 개의 간단한 생각을 지속적으로 반복할 것. 틀에 박힌 문구를 사용하고 객관성을 피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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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를 만드는 데 아담이 갈비뼈 하나를 내주었기에 여자는 남자보다 갈비뼈가 하나 더 많다는 기독교 전통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1543년 해부학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1514~1564)가 사람 갈비뼈 수를 직접 세어 그 믿음이 틀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까지 이어졌습니다. 



로마의 과학자이자 저술가였던 플리니우스(24?~79)는 세계 최초 백과사전인 『박물지』(77?)에서 여성 월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월경하는 여자에게 우유를 가까이 두면 상하게 된다. 그 여자가 만진 씨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접붙인 나무는 시들고, 정원의 식물은 바짝 말라버리며, 그녀가 앉았던 자리의 나무는 열매가 다 떨어져 버린다. 그녀 얼굴은 거울의 반짝임을 없애고, 철의 끝을 뭉툭하게 하고, 상아의 매끈한 표면도 거칠게 한다. 벌떼도 그녀가 바라보기만 해도 곧바로 죽어 버린다. 그녀의 배설물을 먹은 개는 미쳐서 발작을 일으키며, 그런 개에게 물리면 독성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하다.”



분명 정말로 그러한지 간단하게 실험해 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과학혁명이 있기 전까지 아무도 1,500년 동안 지배해 온 이 믿음을 반박할 증거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스위스는 오래되고 안정된 민주국가지만 스위스 여성은 1971년까지 투표권이 없었습니다. 뉴질랜드는 1893년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고, 핀란드는 1929년에 인정되었습니다. 조금 늦게 프랑스와 이탈리아조차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여성에게 참정권을 확대한 바 있습니다. 그 후 몇 년 이내에 아르헨티나와 일본, 멕시코, 파키스탄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1971년까지 스위스는 방글라데시와 바레인, 요르단, 쿠웨이트, 사모아, 이라크와 함께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은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은 투표권을 얻는 데 자국 남성보다 평균 47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1291년 남성 시민이 투표를 했던 스위스에서는, 여성을 포함한 보통투표가 이루어지기까지 700년이나 걸렸습니다. 



스위스 남성들은 왜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전 세계 남성들이 했던 똑같은 주장, 즉 여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면 여성답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스위스의 어느 여성 참정권 반대론자는 ‘너무 똑똑한 여자처럼 불쾌한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대부분 스위스 여성이 남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고 그런 상태에 만족하기에 어차피 실제로 투표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이유도 많았습니다. 여성을 억지로 공적 영역으로 끌어내면 가정이 무너질 것이라든지, 스위스는 여성 참정권 없이도 100년 넘게 평화롭게 지내 왔고, 두 번의 세계대전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며, 엄청난 번영을 일구었으므로 망가지지 않은 것은 고치지 않는 것이 최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정치는 남자의 일이며, 국사를 여자에게 맡길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부유하고 교육열도 높고 민주적인 스위스가 오랫동안 여성 참정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믿음조차 시대나 사회마다 크게 다를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 대부분은 실제로 과거 어느 때 이식된 믿음입니다. 자신이 옳다는 신념은 곧 다른 누군가가 옳다는 신념과 같습니다. 철학자 몽테뉴(1533~1592)는 “사람들의 신념은 자국의 관습이나 부모의 양육 방식, 혹은 우연한 믿음 속으로 휩쓸려 형성된다”고 말하며, “태풍에 휩쓸리듯 판단이나 선택의 여지없이,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사고력이 형성되기 전인 어린 나이에 이미 그렇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우리에게 현재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보이지만, 언젠가 모든 사람이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할 일은 없을까요?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믿음 중 일부는 미래에 옳지 못한 믿음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현재의 믿음 중 무엇이 언젠가 옹호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회가 공유하는 생각은 너무나 강력하고, 좁기에 누가 세상을 분명하게 보고 행동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불변하는 객관적인 진리는 없습니다. 상호주관(inter-subjective)만이 존재합니다. 상호주관이란 진리이거나[眞] 옳다거나[善] 아름답다고[美] ‘당시 대다수 사람이 믿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철학자 플라톤(BC 428?~327?)은 『국가』(BC360?)에서 예술 규칙에 따라 만들어진 항아리를 아름답다고 규정했습니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역시 미(美)란 적당한 비례와 밝기, 명료성은 물론 완전무결함의 결과라고 설명하며 플라톤의 관념을 확장했습니다. 따라서 미에 반대되는 추(醜)는 비례에 맞지 않는 것, 곧 아퀴나스가 ‘축소되어 욕되다’라고 규정한 거대한 머리와 아주 짧은 다리를 가진 사람 뿐 아니라, 다리가 하나 없거나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을 묘사할 때도 쓰이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비례와 조화를 이루는 미란 무엇일까요? 미의 의미는 역사에서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한 세기 동안 비례가 맞다고 여겨지던 것이 다른 세기에 들어서 더 이상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때는 다른 사람과 상호 작용하면서 서로 공유한 경험이 바탕이 됩니다. 사회나 특정 집단 내 의미나 규범, 가치는 이러한 공유된 이해를 통해 형성됩니다. 우리는 다수 의견에 쉽게 순응하는 경향이 있기에 공유된 경험이나 환상에 손쉬운 먹잇감이 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회에 큰 영향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도 ‘상호주관’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선 18세기에 이르자 오직 남성 간에만 한정되던 두 영혼의 결합이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도 가능하다고 처음 주장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사랑에 빠진 남성이 여성을 부양할 만큼 부유하다는 사실만 진지하게 증명하면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사랑이란 단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사랑받는 상대가 이상화되고, 누구하고든 사랑에 빠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또한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부추겨져 사랑에 대한 모든 전제 조건이 철폐되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가장 놀라운 발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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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의 인문학 - 실수투성이 인간에 대한 유쾌한 고찰
캐서린 슐츠 지음, 안은주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자신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정보에는 덜 노출된다. 우리는 이미 자신이 가진 견해를 고수하는 데 완전히 만족한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믿음에 대해 공부해 볼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전혀 다른 믿음 체계를 가진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별로 없다. 게다가 그런 사람과 시간을 보내더라도 서로 다른 견해에 대해 토론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날씨에 대해서는 얘기를 나누지만 기후 변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최근의 여행은 얘기하지만 사회의 낙태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행동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다. 그런 행동이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선호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예절 바른 행동으로 보기 때문이다. 에티켓 전문가는 ‘타인이 기분 좋아할 만한 일과 말만 하려고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pp. 182-183. - P182

1990년 아프가니스탄인 압둘 라만은 기독교로 개종했다. 국민 99퍼센트가 이슬람교도인 아프가니스탄에서 개종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하만은 아프간 난민들에게 의료용품을 원조하는 가톨릭 자선단체에서 일하다가 동료들의 종교를 믿게 된 것이다. 라만이 개종하면서 그의 삶은 모두 달라졌다. 그는 배신자라는 이유로 독실한 이슬람신자인 부인에게 이혼당했다. 두 딸에 대한 양육권 소송에서도 같은 이유로 패했다. 라만의 부모는 ‘우리 집안에서는 이슬람에서 다른 종료로 개종한 자식은 필요 없다’면서 그와 연을 끊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가혹한 형벌이지만, 2006년 라만은 배교 혐의로 아프간 경찰에 체포당해 투옥되었다. 교리에 따라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다. 검사는 ‘무슬림 사회에서 차단되어 사라져야 하며, 죽음을 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프간 변호사협회 역시 그 견해를 지지하면서 그의 교수형을 촉구했다. 국제 사회가 강력하게 압력을 행사한 후에야 비로소 라만은 석방되었다. 법정 사형은 면했으나 법정 밖에서의 신변 위협으로 그는 이탈리아로 도망치듯 망명했다. 기독교로 개종해 가족에게서 쫓겨나고 사랑하는 이들과 격리된 채 이국에서 떠도는 운명에 처하게 된 이슬람 압둘 라만은 본질적으로 방랑 유대인이 된 셈이다.
이 사례는 한 사람의 불순분자가 공동체 전체의 일관성을 파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의심과 반대는 확산되어 공동체를 파괴할 수도 있는 전염병과도 같다. 따라서 많은 공동체가 반대론자를 치료하거나 격리하거나 추방하려는(극단적인 경우에는 제거하려는) 조치를 재빨리 취한다. 어떤 하나의 믿음에 대해 서열을 깨는 한 사람이 전체 공동체의 일관성을 위협한다고 본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더욱 심하게, 믿는 행위의 본질에 위협이 될 수 있다. 국경을 넘을 때(또는 가톨릭 신자인 국제 원조 요원을 만날 때) 믿음이 변할 수 있다면 진리란 단지 지역 관점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진리라는 개념의 요점은 보편성에 있으므로 믿음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곤란하다. 라만의 사형 언도를 지지했던 한 이슬람 언론가는 그 문제를 간단히 설명했다. ‘누군가가 한 순간에는 진리를 긍정하다가 그 다음 순간에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부정한다면 진리의 전체 패러다임이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p. 188-189. - P188

미국 의학협회에 따르면, 미국에서 매년 환자 69만 명이 의료 과실로 희생되며, 그들 중 4만 4천 명이 사망한다. 의료 과실은 미국에서 여덟 번째 사망 원인으로 유방암이나 에이즈, 오토바이 사고보다 그 순위가 높다. 미국 항공업계가 의료 과실과 동일한 사망자 수를 내려면 항공권이 매진된 747기가 사흘에 한 번 꼴로 추락해서 탑승객 전원이 사망해야 한다. p. 368. - P368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소유했다는 생각은 굉장히 중요한 심리적 목적에 기여한다. 우리에게 본질적이고 불변하는 정체성이 있다면 우리가 가진 믿음, 우리가 하는 선택, 우리가 될 사람 중 어느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 삶의 모든 궤적은 필연적인 것이 되고,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결국은 드러날 것이라는 확신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이 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오류를 범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우리의 거짓 자아는 미리 운명지어져 있으며, 겉으로 보기에 오류처럼 보이는 것도 엄격히 말하면 더 큰 진리에 복무하기 위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신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종교적 주장, 즉 삶의 시행착오나 오점으로 보이는 것조차도 신의 더 큰 계획의 일부라는 주장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렇듯 진정한 자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이야기들은 목적론이다. 우리는 결국 운명이 미리 정해 놓은 바로 그 자리에 도착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 본질론적 자아론의 매력인 동시에 약점이 있다. 우리의 인생은 결정론적이며 그 자체의 지적, 감정적, 영혼적 강점 때문에 선택했다고 생각했던 어제의 신념은 단지 미리 결정된 미래의 자아를 위해 우리를 유인한 함정에 불과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때 과거가 그 자체로 가지고 있었을 의미와 가치는 손쉽게 지워져 버린다.
더 큰 문제는, 진정한 자아라는 개념이 우리가 절대로 어떤 중요한 대변동도 경험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큰 변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진정한 자신, 늘 그러했던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한 후에는, 우리에게 더 이상의 변신은 불가능하다. 자아가 계속 변한다면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고, 계속 새로운 누군가가 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각자에게 고정된 본질이 있다면 우리는 그 본질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과거에 그 본질적 자아로부터 벗어났던 것은 단지 설명할 수 없는 한 번의 의도일 뿐이며 배신이나 죄로 규정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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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상 체계는 다소간 그것이 발생한 문명과 그 창시자의 인격, 이전 사상 체계에 의존하면서, 당대와 그 이후 시대의 이념과 제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하나의 철학이 그 창시자의 인격과 기질을 반영하고 그것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지극히 극단적인 주지주의자들 말고는 다들 인정하는 바이다. "기질은 모든 철학 활동에서 작용하는 하나의 요소다"라는 기질주의적 입론은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 첫 강연에서 설득력 있게 옹호된다.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철학사는 상당히 인간적 기질들이 충돌한 역사다." 제임스 견해에 따라 철학적 기질의 구체적인 차이는, 합리론자 곧, ‘마음 약한 사람들’과 경험론자 곧, ‘의지 강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대립이다.
‘마음 약한 사람들’은 대체로 합리론적, 주지주의적, 관념론적, 낙관론적, 종교적, 자유의지 옹호적, 일원론적, 독단론적이다. ‘의지 강한 사람들’은 경험론적, 감각론적, 유물론적, 비관론적, 비종교적, 다원론적, 회의론적이다.
마음 약한 합리론자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헤겔이 있다. 의지 강한 사람들은 데모크리토스, 홉스, 베이컨, 흄 등이 있다. 하지만 철학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 가운데 스피노자와 로크, 버클리 같은 사람들은 마음 약한 사람들과 의지 강한 사람들의 자질을 동시에 갖고 있음으로 이 구분의 양편에 다리를 걸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주의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점에서는 마음 약한 사람으로서, 유물론적이고 운명론적인 점에서는 의지 강한 사람으로 특징을 갖는다. 버클리는 관념론적이고 종교적이고 자유의지 신봉적인 점에서 마음 약한 사람의 도식을 따르지만, 경험론자라는 점에서는 의지 강한 사람의 특징을 갖는다. 두 기질 유형의 대립은 시대마다 당대의 철학적 분위기를 형성해 왔다. p. 25.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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