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은 불완전성의 원리를 발표했다. '적어도 하나의 자연수 이론이 포함된 형식적 체계의 무모순성은 해당 체계 안에서는 증명될 수 없다'를 증명했다. 이 말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증명되어도, 우주 자체가 증명되는지는 알 수 없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안에서는 결코 증명될 수 없고, 벗어난 다음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너머 편>

















‘이 명제는 증명될 수 없다’는 문장은 불확실한 진술이다. 괴델 말처럼 이 문장은 증명될 수 없다. 그 문장이 참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논리 도구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 문장이 거짓말쟁이 패러독스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 관한 진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자기 연관성(self-refrence)이 개입된 문장이다. 자기와 관련된 것은 종종 풀 수 없는 모순을 낳는다.



자기 연관성이 초래하는 많은 결과 중 가장 놀라운 점은 우리가 자신을 꿰뚫어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스스로의 행동을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스로 행동을 예언하려면 스스로 생각을 추월해야 하기 때문이다.<우연의 법칙>


















업력(業力)을 간직한 무의식적 심층 마음이 곧 근본식인 아뢰야식이다. 그런데 아뢰야식은 개인  자신이 행한 과거의 업(業)에 의해서일 뿐만 아니라 다른 개인들과 더불어 함께 살게 되는 공통적 환경세계의 모습을 형성하는 식이기도 하다. 이처럼 공적 세간을 개인의 업의 결과로 간주한다는 것은 곧 불교가 독립적 객관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계가 우리 자신과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심층에서 우리 자신과 본질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물질세계는 그렇게 인식하는 개인의 식에 대해 그 식의 경계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그 식을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인식한 대로의 이 세계는 그렇게 인식하는 인간에 대해서만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 아닌 다른 존재, 예를 들어 개나 곤충, 천사에게도 바로 우리에게와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동일한 사물도 그것을 인식하는 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인식하는 자의 인식을 떠나 객관적 세계 자체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흔히 ‘일수사상(一水四相)’의 비유를 제시한다. 말하자면 같은 물이라 해도 아귀에게는 그것이 피고름으로, 물고기에는 삶의 터전이나 길로, 천인에게는 보석의 땅으로, 인간에게는 마시는 물이나 바다 등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대상의 상대성에 대한 자각을 유식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의 깨달음으로 간주한다. pp. 82-83.



인간 의식은 동물적 본능 또는 사회 경제적 권력에 의해 지배받고 규정되는 수동적 산물이다. 개인적 욕망과 그 욕망이 지향하는 사회적 권력이 서로 얽힌 관계에서 인간의 무의식적 본질을 규정하고, 인간의 일상적인 표면적 의식이란 단지 그 무의식이 최종적으로 표면화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이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자가 그 대답을 자기 자신 안에서, 즉 자신 의식 안에서 찾아내려고 하면, 그것은 이미 빗나간 길을 가는 것이 된다. 내가 나 자신을 어떤 존재로 자각하고 인식하는가, 내가 나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의 삶이 되도록 결단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의식적 생각이든 어떤 의지적 결단이든 그 안에 작동하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이 들어 있으며, 바로 그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밝혀냄으로써만, 그 생각과 결단의 본질, 한마디로 인간 본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된다. pp. 110-111. 



대상 세계와 접하여 생겨나는 상(像)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생겨나는 느낌이 바로 수(受)다. 그 다음 그러한 상을 능동적으로 마음에 취하는 것이 바로 상(想), 즉 생각이다. 경계의 상을 취하는 과정에서 각종 명언(名言), 즉 언어를 시설하게 된다. 그 다음 행(行)이란 마음의 조작을 뜻한다. 마음이나 말이나 몸으로 짓게 되는 각종 업(業)이 바로 이 마음의 조작인 행에서 비롯된다. 마지막으로 식(識)이란 세계를 이러저러하게 분별하여 인식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며 아끼고 집착하는 것, 자기 자신을 그 안에서 발견하며 자신과 동일시하는 그런 것들이 바로 이러한 몸이나 느낌, 생각, 의지, 인식들에 다름 아니다. pp. 141-142.



불교에 따르면 우리 자아에 대한 집착은 곧 상일주재(常一主宰)적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다시 말해 변하지 않고 항상되며 단일한 상일(常一)의 자아,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이기에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주재(主宰)적 자아가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신체나 느낌, 생각이나 의지, 인식 등 그 모든 것은 처음부터 나의 본질로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나의 유전적 조건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사회 문화적 쪼는 자연적 환경에 의해 그렇게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환경 변화에 따라 항상 바뀌어갈 수 있는 그런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나 쪼는 나의 것이라고 집착할 이유가 없다. 이와 같이 집착할 만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깨달음이 바로 해탈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된다. 아집을 극복케 할 무아의 깨달음이 어느 정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는 다음 비유가 잘 말해 주고 있다. p. 145.



어떤 사람이 남의 심부름으로 멀리 가서 빈방에 혼자 있는데, 밤 중에 귀신이 송장 하나를 메고 와서 그의 앞에 던진다. 이내 뒤를 이어 다른 귀신 하나가 따라와서 앞의 귀신을 꾸짖되 "이 시체는 나의 것인데 어째서 네가 메고 왔느냐?" 하니, 앞의 귀신이 답하기를 이 것은 나의 것이므로 내가 메고 왔다" 하였다. 그러나 나중의 귀신이 말하기를 "이 시체는 실로 내가 메고 왔다"고 하여 마침내 두 귀신이 서로 시체의 팔을 하나씩 잡고 다투다가 먼저 귀신이 이렇게 제의를 했다.

"여기 인간이 하나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자"

이 말에 따라 나중의 귀신이 물었다.

"이 시체는 누가 메고 왔는가?

그 사람이 생각하기를 "이 두 귀신은 힘이 센데, 사실대로 말해도 내가 죽음을 당할 것이요. 거짓을 말해도 죽음을 당할 것이다. 어차피 죽음을 당할 것이라면 거짓말을 해서 무엇하랴" 하여 사실대로 "그 시체는 앞의 귀신이 메고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나중의 귀신이 화를 내어 그 사람의 팔을 뽑아 땅에 던져 버리니, 먼저 귀신이 시체의 팔 하나를 뽑아다가 그에게 붙여주어 멀쩡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두 팔, 두 다리, 머리, 허리 등 온몸을 모두 시체의 것과 바꿔놓은 뒤에 두 귀신은 뽑아 버린 사람의 몸을 다 먹고 입을 닦으면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

이 때 그 사람이 생각하였다. "나는 지금 어머니가 낳아 주신 몸을 몽땅 두 귀신에게 먹히고, 나의 이 몸은 몽땅 저 시체의 것이니, 나는 지금 몸이 있는 것인가, 몸이 없는 것인가? 몸이 있다고 하자니 모두 귀신에게 먹히었고, 몸이 없다고 하자니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걱정하기를 마치 미친 사람 같더니, 이튿날 아침에 길을 떠나 가다가 목적한 국토에 이르렀는데 불탑과 스님들이 있었다. 그는 찾아가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몸이 있는가, 없는가?"만을 물었다. 비구들이 도리어 묻기를 그대는 누구인가?" 하니, 그는 "나도 사람인지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소"라고 하면서 지난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비구들은 그 사람이 무아의 도리를 잘 알아서 제도하기 쉬울 것을 알고 그에게 말했다. 그대의 몸은 본래부터 항상 나가 없었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다만 사대가 화합하기 때문에 내 몸이라는 생각을 내었을 뿐이니, 그대 본래의 몸이 지금의 것과 다름이 없다." 비구들이 제도해 주니, 도를 닦아 번뇌를 끊고 곧 아라한을 이루었다. 이것이 때로는 남의 몸에 대하여 나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너와 나를 구분하여 나가 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도리이다. pp. 146-147.



이러한 자아관은 어찌 보면 상일주재적 자아개념을 더 이상 간직하고 있지 않은 현대적 인간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공연히 “주체는 죽었다’를 선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에 따르면 항상된 자기 동일적 자아정체성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는 생물학적 요인들 및 사회 문화적 관계 안에서 형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자아 또는 인간이란 것 자체가 자연적으로 사회적으로 진화되고 발전되어 온 것이며, 따라서 자아란 그러한 자연적, 사회적 법칙과 관계들을 통해 규정되고 형성된 것이다. pp. 148-149.

<동서양의 인간 이해>






기독교는 신 자신과 그 신에 의해 창조된 일체의 피조물들과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신으로부터의 창조가 아닌 무로부터의 창조’를 역설한다. 일체의 피조물은 무로부터의 존재이며, 자체 안에 신과 자신을 구분짓게 하는 무성을 지닌 것이다. 피조물의 하나에 불과한 인간 역시 신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무로부터 창조되었기에 존재와 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결국 기독교적 우주 창조론에 있어 우주 창조를 설명하는 기본 축은 신과 무라는 양 원리다. 이 이원성 안에서 우리는 다시금 희랍적 형상과 질료, 정신과 물질의 이원적 사고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창조에 전제된 무가 정말 순수 무라면, 무로부터의 창조와 신으로부터의 창조가 과연 구분될 수 있겠는가? 우주와 신, 피조물과 창조자, 인간과 신 가의 절대적 구분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pp. 102-103 - P1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소성은 인간 욕망이 무한하고 달성하고픈 목적은 끝이 없는데 수단이 부족할 때를 말한다. 하지만 적게 일하고 적게 먹고 많이 노는 사회”에서도 희소성 원리가 적용될까? 하고픈 일도 없고 되고픈 것도 없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도 희소성 공리는 보편적으로 적용될까?” 우리는 “인간 운명이 희소성과의 투쟁이라고 선언한 뒤 불철주야 경제 행위에 매진하다 일 중독증이나 과로사에 봉착하고 마는 근대형 인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어떤 목적이 욕구의 무한함을 불러일으킬 만큼 추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수단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에 따라 항상 부족을 일으키진 않는다. 고대 아테네 폴리스처럼 ‘잘 사는 생활’이란 인생 목표가 ‘폴리스에 헌신하는 것’ 혹은 ‘폴리스에 헌신을 위한 여가’와 같은 것이라면, 이 무한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온종일 극장에서 소일하는 것’ ‘배심원이 되는 것’ ‘선거운동을 하여 공직을 맡는 것’ ‘성대한 제사에 감동을 하여 고상한 기분이 드는 것’과 같이 사용해도 부족해지지 않는 수단들이 필요할 뿐이다.” 따라서 “주어진 상황에서 ‘희소’라는 말이 수단에 알맞은 말인가 아닌가는 사실의 문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진부한 ‘희소성’ 격언을 여러 현상 이면에 작동하는 경제 법칙인 양 취급함으로써 경제에서 ‘실제적인 것’의 의미는 무시되고 결국 잊혀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논리가 사실을 훈육한다.”<칼 폴라니, 反경제의 경제학>

















신체적 쾌락을 좇는 욕망은 왜 저급하고, 정신적 만족을 좇는 욕망은 왜 고급한가? 신체적 욕망과 정신적 욕망 차이는 무엇인가? 신체적 쾌락을 좇는 욕망이 저급한 욕망으로 해석되는 까닭은 그 욕망이 개체적 욕망이고 인간 상호간에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식욕을 채워줄 수 있는 음식물은 내가 먹거나 네가 먹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므로 그러한 욕망에 무제한적으로 충실하다 보면, 인간 상호간의 배려인 도덕성 여지가 들어설 수 없게 된다.



이에 반해 이성적 만족을 좇는 욕망이 고급한 욕망이 되는 것은 그것이 보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나의 지식욕을 충족시키는 것은 그대로 너의 지식욕도 채워준다. 그것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며, 개체성을 떠난 것이다. 즉 사적이지 않고 보편적, 공적인 것이기에 보다 높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원리에 더 높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그것만이 만인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이성적 사회를 건립할 수 있는 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개체 아닌 보편, 사 아닌 공을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인간만이 이성적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물도 숫놈 아닌 암놈이 새끼를 돌보니 자식을 돌보는 것은 당연히 에미 몫이다.’라든가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적 방식의 삶이 가장 바람직하다’라든가 또는 ‘자연에서도 강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으니 강자의 생존전략을 좇을 수밖에 없다’라는 식으로 인간 사회 질서의 원형을 동물사회에서 구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 차이를 간과한 동물적 주장일 뿐이다. pp. 126-127



플라톤은 인간을 신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으로 이해한다. 인간이 이 생애에 있어 부자유한 것은 신체를 가졌기 때문이다. 신체를 먹여야 하고 입혀야 하기에, 신체의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살 수 있기에, 인간은 부자유하며 무수한 비도덕적인 것들도 행하게 된다. 인간 자유는 신체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뜻한다.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는 것 등의 신체적 욕망에서 야기되는 자연필연성의 강제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움이 곧 인간 영혼의 자유다. 이는 곧 신체적 욕망을 벗어나 이성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됨을 뜻한다. 하지만 영혼이 신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신체를 벗어남으로써만 가능하다. 영혼이 육체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 그것은 곧 죽음이다. 철학이란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죽어서나 가능한 자유를 최대한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즉 이성적, 보편적으로 사유하며 이성적 원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다. 인간의 개체적 욕망을 넘어서며 욕망의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한마디로 죽음의 연습이 된다. pp. 128-129. <동서양의 인간 이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와 같이 개인은 시대사상인 문화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개인이 문화를 넘어서 자율적으로 행동하길 요구한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개인은 자신 생각을 바꾸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지기에,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은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문화는 집단이나 사회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개인 노력만으로는 문화를 완전히 극복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사회는 개인에게 ‘관용’이라는 미덕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다양성과 차이를 이해하며, 이에 대해 편견 없이 존중하라고 흔히 말한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관용하고, 기독교인은 무슬림을 관용하고, 지배 인종은 소수 인종을 관용하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관용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돌려버리는 일이다. 관용 담론은 불평등이나 사회적 억압과 같은 문제를 개인이나 집단 편견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 똘레랑스[관용] 전도사로 알려진 사회운동가 홍세화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프랑스 사회의 유연성을 높게 평가하며, 이렇게 말한다. “똘레랑스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외면하며, 비타협보다 양보를, 처벌이나 축출보다 설득과 포용을, 홀로서기보다 연대를 지지하며, 힘의 투쟁보다 대화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권력의 강제에서 개인 자유와 권리를 보호합니다." 홍세화는 사회 문제를 똘레랑스라는 당시 새로운 문화로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문화적인 접근은 한계가 있다. ‘모든 사회 문제에 정치·경제적 맥락을 도외시하고 우리 생활 방식과 생각을 바꾸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틈이 급격히 커지고 있는데도 관용 주장은 이런 진짜 모순을 덮으면서 시스템 문제를 개인 문제로 돌려버린다. 겉으로 진보적이고 의식 있게 보이는 관용 담론이야말로 오히려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게다가 문화는 개인이  자신 의지력으로 혹은 교육과 교화로 간단하게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유발 하라리도 관용의 한계를 제시하기 위해 ‘인종주의’와 ‘문화주의’를 서로 대비하여 설명한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영웅적인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사이 전쟁터가 ‘문화주의’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 결과 전통적인 인종주의는 줄어들고 있는 반면, 오늘날 세계는 ‘문화주의자’로 가득하다. 현재 흑인이 열등한 유전자를 가졌기에 범죄율이 높다는 주장은 사회에서 퇴출된 반면, 흑인이 문제가 있는 하위문화에 속해있기에 범죄율이 높다는 말은 흔하게 오간다. 우리는 생물학적 모욕에는 민감하지만 사회학적 모욕에는 둔감하다.



생물학에서 문화로 전선이 이동한 것은 단순히 의미 없는 용어 변경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실로 심오한 이동이며, 현실적인 여파는 아주 넓다. 우선 문화는 생물학보다 유연하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오늘날 문화주의자가 전통적인 인종주의자보다는 ‘관용’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채택하는 한에서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동등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그 결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훨씬 큰 동화 압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 동화에 실패하면 훨씬 가혹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피부색이 짙은 사람에게 피부를 희게 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근거는 거의 없지만, 사람들은 아프리카계나 무슬림이 서구 문화의 규범과 가치를 택하지 않는 것은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는 그렇게 하려고 해도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에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만 듣게 되고 잘못은 자신이 뒤집어쓰고 만다. 관용이라는 자유주의적 가치는 세계의 문화적 갈등을 해결하고 인류를 결집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사회 문제를 개인들에게 일임하여 문화 문제로 해결하려고 했던 유명 인사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인도 ‘성자’ 간디다. 간디는 ‘자기통제와 자기 정화, 고통 등 수년간 금욕을 실천하여 비폭력 저항에 필요한 용기가 다져진다고 믿었다. 간디 추종자들은 모두 공식적으로 순결과 가난, 봉사의 서약을 했으며, 단식과 운동, 노동과 기도를 수행해야 했다. 자기완성의 실천은 그 자체로 목적인 동시에 사회정의를 수호하는 용감한 전사를 양육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개인적 자기완성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는데 꼭 필요한 기반이 형성된다. 이와 관련하여 간디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나부터 바꾸기 시작해야 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간디는 자신의 비폭력 저항 신념이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하며 도덕적으로 무결하다고 주장했다. 비폭력 저항은 박해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상대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한다는 논리를 따른다. 그런데 만약 박해자가 양심이 없다면 양심을 향한 비폭력적 호소는 실패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국가는 양심이 없다. 이렇게 인간적 양심에 호소가 불가능한 곳에서 비폭력 저항은 악을 상대로 힘을 쓸 수가 없다. 간디 사상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나치 정권의 하인리히 같은 사람에게는 소용없다는 의미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에게 간디의 비폭력 저항은 집단 자살을 권유하는 것과 다름없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 신념이 보편적이지 않다면, 도덕적으로는 무결할까? 안타깝게도 간디가 자신을 벌하며 단행한 채식주의 식사 때문에 그 자신과 아내, 자녀들은 아사할 뻔했고, 그 밖에 여러 가지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가족들과 불화를 일으켰다. 간디 가족 중 그 누구도 간디주의를 온전히 실천할 수 없었다. 추종자들 또한 많은 이가 간디를 따라 운동을 진행하다 이를 거부하거나 지키지 못한 자들에게 충격적인 폭력을 행사하곤 했다. 간디는 통일된 인도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친선을 위해 생의 마지막 30년을 바쳤는데, 그 끝은 결국 공동체 간 잔인한 폭력과, 인도와 파키스탄 간 전쟁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간디는 말년의 충격적 결말로 인해 자신의 필생 사업이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고 여겼다.‘ 
















간디는 인간이 모두 똑같고, 각 개인 영혼은 우주적인 영혼의 일부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에 대한 관용이 당연했다. 하지만, 간디 삶에서 우리는 관용의 한계를 볼 수 있다. ‘간디는 진정으로 이 세계를 변화시켜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상주의자였다는 점이 간디의 궁극적인 약점이었다. 가난을 영적인 정화라고 찬양하고 도시를 비도덕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굶주리고 직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없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영웅주의를 요구했다. 다른 사람 생각도 똑같으리라고 가정한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성인은 어떤 영감의 대상이 될 수는 있겠지만 본받을 모델이 될 수는 없다. 사람들에게 장기간에 걸쳐 관용을 보이라고 가르치고 설득하고 강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도 독립 후 그는 자신 성취를 가장 큰 실패로 보았다. 독립 후 인도가 너그러움으로 순화되고 영적인 자기 발전에 매진하고 폭력을 거부하는, 그가 꿈꾸었던 그런 나라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슬람교도가 갈라져 나와 파키스탄이라는 별도 나라를 세운 것을 그는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명백하게 양립할 수 없는 것을 끌어안는 인도의 다원적인 재능과 상치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간디는 자신 적인 이슬람교도 지나를 힌두교 인도의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제안했다. 하지만 오직 간디만이 이런 교묘한 해결책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는 대단한 반감이 생겨났다. 이슬람교에게 너무 관대한 것처럼 보였기에 간디는 힌두교 광신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힌두교조차 이런 옹졸함을 잉태할 수 있다. 간디 삶을 보면 전통적으로 관용을 옹호하는 나라에서 지극히 뛰어난 인물에 의해 관용이 실천될 때도, 결국 불충분한 처방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세 가지 가치를 중심으로 한다. 프랑스가 의도했던 박애는 관용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 후 이 이상(理想)에 대해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이 가치 세 개가 서로 모순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즉 지나친 자유 혹은 특정 형태의 자유가 너무 지나치면 평등을 침해할 수 있다. 혹은 지나친 평등 혹은 특정 형태의 평등이 너무 지나치면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문제였다. 이에 못지않게 대단히 중대한 문제는 세 번째 가치에 해당하는 박애와 자유, 평등의 이율배반적 관계다. 즉 지나친 관용은 자유와 평등에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1990년대의 미국은 50년대 심지어는 70년대의 미국에 비해 훨씬 더 관용적이었다. 그런데 미국인은 해가 갈수록 더 관용적이 되었지만 동시에 더욱 불평등해졌다. 관용과 평등 사이에는 일종의 철칙이 있어서, 관용적 개인주의 성장에 따른 평등 가치 쇠퇴는 필연적 현상으로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곳에서 ‘차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차이는 적어도 쉽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차이가 교정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관용이 요구되는 것이다. 쉽게 변하거나 혹은 교정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차이는 관용의 대상이 아니다. 관용 담론은 차이의 문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는커녕, 차이의 문제에 영원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기에 관용은 실질적인 평등과 자유의 추구를 노골적으로 방해한다. 관용은 연대나 공동체가치 문제마저도 포기하게 만든다. 대신에 관용은 우리를 분리시키고 갈라놓으려 하며, 이러한 사회적 고립을 차이로 인한 필연적인 것으로 둔갑시키고 그 차이를 관용하라고 우리를 설득한다. 게다가 관용의 비대칭성은 대체로 간과된다. 관용받는 이들은 종종 관용의 능력을 결여한 이들로 간주된다. 관용 담론의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는, 지배와 종속의 문제까지 정당화 한다. 관용은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관용을 베푸는 이들에 비해 열등하고 주변적이며 비정상적인 이들로 표지(mark)하는 일인 동시에, 상대가 관용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될 경우 부과할 수 있는 폭력 행위를 사전에 정당화한다.‘ 
















‘불교에서 자비는 관용이나 연민, 동정과는 거리가 멀다. 관용이나 동정 연민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비대칭성이, 제거할 수 없는 지위 차이가 전제되어 있다. 이방인에 대한 환대 또한 그렇다. 갈 곳 없는 이주자, 쫒기는 이방인에게 내미는 환대 손길은 그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주인 행세다. 부자들이 자신에 대한 빈민의 동정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화를 내지 않으면 다행이다. 따라서 동정이나 환대는 평등성과는 거리가 멀다.



달라이 라마는 인간 아닌 것을 포함하여 ‘모든 중생이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얻고자 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함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평등한 자비심이 나온다고 말한다.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중생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강조되어 있다. 평등한 자비심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평등 인식에서 나온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중생은 ‘부처’라는 점에서 평등하다. 부처에 높고 낮음과 멀고 가까움이 어디 있으랴! 자비 평등심은 부처 간의 평등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비란 모든 중생에 대해서 부처로서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친하든 낯설든, 멀든 가깝든, 심지어 친구든 적이든 모두가 부처라면, 모두를 부처로서 평등하게 존중하고 도와주는 것이 바로 잠재적으로 부처인 내가 마땅히 행할 바이다. 자비란 스스로가 부처로서, 자신과 만나는 모든 잠재적 부처들에 대해 갖는 마음이고, 그들에 대해 행하는 바다.‘ 
















세상의 거의 모든 철학과 종교가 사랑과 관용이라는 비이기성을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구원되어야 할 영원한 자아(혹은 영혼)를 갖고 있다고 가르친다. 자아를 갖는 한 이기성은 필연적이기에 관용이라는 비이기성을 우리가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4세기 불교학자 세친에 따르면, 어떠한 유형의 유아론(有我論)을 믿던지, 즉 무아(無我)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결코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했다. 무아(無我)인 개인은 문화를 토대로 자신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문화적인 정체성은 개인의 심리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개인에게 그저 관용으로 문화를 극복하라는 요구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으며, 진짜 평등에서 멀어지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59년 강연 ‘플랑크의 양자론과 그리고 원자물리학의 철학적 문제점들’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양자물리학의 가장 심오한 의미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과학이 자연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설명하고 이해하는 자연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관성의 한 요소가 자연과학에 도입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 세계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현상이 우리 관찰에 따라 달라진다고는 누구도 주장하지 못합니다 – 자연과학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 서 있으며 아울러 우리가 인간 본성에 내재된 인식 개념 또는 기타 다른 개념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암시했듯이 이 점은 단지 양자론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지난 역사에서 명백히 드러났듯이 자연철학 또는 자연과학은 언제나 인간과 자연 사이에 서 있었다. 어떤 시대의 과학사상이든 그 시대 사람들에게 물리적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역사상 그 시기에 세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하였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세계 그 차제에 관한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고 곧잘 여긴다. 하지만 수학적 예측치가 관찰된 실험 결과와 아무리 가깝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연 자체의 실재보다는 자연에 대한 해석에 의존한다.”<서양과학사상사>
















“일반적으로 대상이 존재하고 주체가 그것을 인식한다고 본다. 하지만 유심론인 유식학파는 식(識)이 있기에 경(境,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이 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경을 객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꿈을 실재로 착각하는 것과도 같다. 경은 허망한 성격, 즉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주관의 눈으로 대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항상 잘못 분별하는 것)’을 띠는 것이다. 이 허망함을 깨달아야만 ‘객관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될 수 있다..“<세계 철학사 2>
















“하이데거에게 현존재는 삶의 지향성인 존재를 망각한다. 그야말로 객관적인 대상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현존재는 자기가 만든 산물을 산물인지 모르고 자연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 현존재에서 객관적인 대상 세계가 사라지는 어떤 체험이 발생한다. 바로 불안 체험이다. 불안은 어떤 것의 부정이 아니라 전반적인 무(無)에서 나온다. 하이데거는 불안 경험에서 우리가 자연 과학의 객관적인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계기를 본다. 객관적인 세계가 무너지면 이 세계가 지향적인 삶의 세계임이 드러나면서 도구의 세계가 드러난다.”<현대 철학 아는 척하기>

















“자연에 보편법칙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와 같이 왜 그런 법칙이 존재하는지, 혹은 누가 그런 법칙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 다른 문제도 생긴다.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어떻게 우주에 존재하는 보편적 법칙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감각과 이성 모두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대체 어떻게,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고 발견할 수 있을까?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는 인간’이라는 관념은 우연히 진화한 인간 존재에게 너무 많은 능력을 부여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반론에 다른 논박도 있다. 자연의 법칙을 믿는 과학자들은 자연에 수학적 형태의 법칙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케플러의 제1 법칙도 행성 궤도가 타원에 가까울 뿐이다. 실제 자연을 아주 비슷하게 기술한 자연에 대한 근사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실제 복잡한 자연 세계의 여러 조건 중 특정한 조건에만 초점을 맞춘 뒤 과학법칙을 얻어낸다. 그래서 많은 과학법칙이 수학적 형태를 띠고 이다. 자연이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에서 수학적 관계를 만족하는 특정한 변수들에게만 초점을 맞춰서 변수 사이에 연관 관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예술과 같이 창조적 활동이다.”<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매 시기마다 문화가 같지 않았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개인 관심사와 행동을 서로 다르게 구성했다. 만약 특정 시기, 특정 문화가 개인감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를 풍부하게 제공하면, 사람들은 자신 감정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며, 더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자신 감정을 표현했다. 이처럼 시대마다 문화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현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경험과 감정 역시 역사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경험해 보지 않았거나 당해보지 않았다면, 말조차 꺼내지 마세요!"라는 우리 표현은 어느 시대에서나 항상 옳았던 말이 아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현대인의 전형적인 특징이 '개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습성'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경험해 보려고 새로운 땅과 풍경, 음식을 찾아 나서며, 집에서 억지로 지켜야 할 금기에서 벗어나고자 휴양지로 떠난다. 배낭 여행자는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풍경뿐 아니라 낯선 곳에서의 위험과 어려움, 불편함을 즐기고자 지구 반 바퀴나 돌아 여행하고, 그 고난을 소중히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 성향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분명 이러한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다채로운 삶을 체험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몹시 노력했다. 이들이 보기에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나 좋아할만한 이러한 욕구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미지를 탐구하려는 '호기심'은 사악한 유혹으로 여겨졌기에 두려워하고 삼가 할 일로 간주되었다. 마술에 홀린 사람이나 이러한 악덕에 빠지며, 결국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어떠한 고대인도, 심지어 어떠한 고대 시인도 자신 느낌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리스-로마의 시(詩)에는 ‘나’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고대 시인은 ‘나의’ 사랑이나 슬픔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투나 사랑 그 자체를 노래했다. 시인은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적용되는 감정을 말한 것이지, 독자가 자신 개인감정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한 일이 아니었다. 고대인들은 개인 자신 감정을 표현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고대 로마 시대 사람들만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18세기 후반 낭만주의 ‘혁명’ 이전까지는 대부분 사람이 개인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근대 일본도 수많은 서양 책을 가져다가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장 옮기기 힘든 단어 중 하나가 ‘individual’이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전쟁을 벌였는데, 인간 경험의 정점인 개인 참전(參戰)도 나의 ‘진짜’ 감정이 아닌 단지 다수가 옳다고 믿는 상호 주관일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치열한 전투에 참전한 미군 병사 중 약 50퍼센트는 바지에 오줌을 쌌으며, 약 25퍼센트는 똥을 쌌다고 인정했다. 제1,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 같은 대규모 전투에서는 싸움 중 사망한 병사보다 정신 이상으로 후송된 병사가 더 많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이러한 현상을 ‘잃어버린 사단’이라고 부른 한 연구에서는 미군의 정신적 붕괴로 병력 50만 4천 명을 잃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 인원이면 50개 사단을 편성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는 달리 현실은 전투에 온전히 교전하는 군인이 소수에 불과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 소총병 85퍼센트가 너무 두려운 나머지 총을 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구들의 한계는 데이터가 주로 현대 전쟁 사례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전투에서 살인 시 정신적인 충격이나 감정적 손상을 입는 일은 대개 현재 우리 시대에 나타난 과장된 태도이며, 자신 스스로 초래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대 문화에 영향받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일 뿐이다. 18세기 이전에는 전쟁에 참전하여 살인을 하거나 심한 부상을 당해도 심리적 충격을 거의 받지 않았다.‘ 낭만주의 혁명 이전 병사들은 자신이 참여한 전투 경험에서 특별한 감정이나 교훈을 얻지 못했다. ‘병사들은 전투 경험을 아주 하찮은 일로 여겼으며, 고통의 시련을 감정적이거나 감각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또한, 고통에서 무언가를 배웠다는 기록이나 고통으로 인해 무언가 변했다는 말도 없다. 대신 “우리는 동지와 친구들 시신이 땅바닥에 똥처럼 널려 있는 것을 보아도 아무런 감흥이나 감화를 받지 못한다”와 같은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당시 회고록을 남긴 사람들은 전투에서 얻은 경험을 개인적으로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첫 출정이나 적과의 첫 대치, 첫 대규모 전투, 처음으로 들은 포성, 처음으로 죽인 적군, 처음 목격한 전우 죽음, 첫 부상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병사들은 적을 죽이는 것, 특히 최초 살인조차 아주 무심하게 다뤘으며, 때로는 농담처럼 회고하기도 했다. 부상으로 얻은 장애도 삶의 전환점이나 자아 발견의 관문으로 보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그저 또 한 차례 겪은 사고에 지나지 않았다. 포로 생활에서 겪은 고통이나 전우애 역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더욱이 전쟁에 대한 환멸도 표현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당시 병사들은 전쟁 경험에서 그 어떠한 깨달음이나 지식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몇 년 동안 직접 겪은 일보다는 전쟁에 대해 독서하고 담론을 나누는 일로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거기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와 같은 상투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묘사한 사건을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정반대의 상투어를 종종 사용했다. 예를 들어 포탄에 팔이 잘렸을 때 자신이 겪은 고통은 누구나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낭만주의의 ‘개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습성’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휩쓸며 대중화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감수성을 형성하고 있다.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낭만주의를 서구 세계의 가치관과 역사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꾼 “가장 강력한 표현이자 증상”으로 평가했다. “낭만주의 중요성은 서구 세계에서 삶과 사유를 변모시킨 가장 거대한 최근 운동으로, 서구에서 가장 큰 의식 전환의 단일 사례이다. 이에 비해 19세기와 20세기 발생한 다른 모든 전환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며, 그래 봤자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낭만주의는 모든 생각과 지식이 육체의 감각 산물이라고 보는 철학적 입장이다. 이에 따라 인간 정신과 영혼은 육체에 종속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한 것은 단지 외부 대상이 감각에 비추어진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개인 각자가 경험을 내세워 기득권에 도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육체적 감수성을 소유하고 있기에 경험만으로도 동등한 자질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박사가 책으로만 읽는 내용을 문맹인 군인은 직접 경험하면 훌륭한 권위자가 될 수 있었다.‘
















인간은 낭만주의 철학과 같은 그 어떤 원대한 시대사상이 없더라고 ‘그냥’ 살수도 있다. 그냥 산다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냥 살아본 적이 없다. 어떠한 사상이 뿌리채 뽑아버릴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안에 깊숙이 심어져 있기에 그냥 산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가가 전부라고 생각하여 국가를 위해 자신 인생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일반 시민들이 그랬다. 그들이 경험했던 전쟁터는 몹시 참혹했다. "어느 날 백병전이 시작됐어...... 뭐가 기억나느냐고? '오도독오도독' 소리. 그 소리가 기억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사방에서 오도독오도독하는데, 사람들 연골이 으슬어지고 뼈마디가 뚝뚝 부러져나가는 소리였지. 그리고 짐승의 울음 같은 처절한 비명들...... 서로를 찔러 죽이고, 숨통을 끊어놓고, 뼈를 부러뜨렸어. 총검으로 입이고 눈이고 닥치는 대로 찔렀지...... 심장을 찌르고 배를 찌르고......" "독일군에게 잡혀간 우리 여성 간호병을 찾아냈지. 세상에, 눈알이 도려내지고 가슴이 잘려나가서는...... 놈들이 말뚝에 박아놓았더라고. 몸에 살을 에는 추위에 꽁꽁 얼어 새하얗고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어 있었어. 그 아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그들이 경험한 전쟁터는 이토록 참혹한데 그들은 기꺼이 스스로 지원에서 전장으로 갔다. “그저 전선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 그게 다였어. 어떻게 히틀러가 모스크바를 차지하도록 보고만 있겠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내 또래 소녀들은 너나없이 모두 전선으로 가겠다고 나섰지. 우리는 우리만 애국심에 불타는 줄 알았어...... 우리만 특별한 경우라고...... 하지만 웬걸, 모병 사무소에 갔더니 글쎄 우리 같은 여자애들이 한가득인 거야. 세상에, 얼마나 놀랐던지! 심장이 뛰고 피가 끓어오르더라고. 나는 선발이 안 될까봐 가슴을 졸였어." "어머니한테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었는데도 어머니는 딸을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딸이 전선에서 돌아온 일을 모욕으로 생각하셨지. 적과 싸우지 않는 것을.” 



전쟁은 이처럼 끔찍한데도 사람들은 왜 기꺼이 그 지옥에 갔을까? "우린 어렸을 때부터 '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어.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선으로 가기로 결정한 거야. 내가 안 가면 대체 누가 가겠어? 나는 반드시 가야 했지....." "나는 '전선으로 갈 거예요, 전선으로 보내줘요! 전선으로!'라고 날마다 '전선, 전선' 노래를 부르며 고집을 꺾지 않았어. 실은, 포스터 글귀들의 영향이 컸어. '모국이 그대들을 부른다!' '전선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눈만 뜨면 사방에 보이는 게 그 글귀들이었으니까. 노래는 또 어떤 줄 알아? '일어나라, 위대한 나라여...... 일어나서 죽기까지 싸우라......“
















상호주관인 시대사상은 낭만주의처럼 오랜 기간 서서히 형성될 수 있지만, 특정 권력의 선전과 선동으로 아주 단기간 내에 '세뇌'될 수도 있다.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는 선전과 선동이 인간을 '도취'시켜 비인간화하고, 이는 비윤리적이라고 말합니다. "도취는 하나의 기만이며 사기이다. 감정이입을 핵심으로 삼는 일은 일상적인 삶을 격하시킨다. 니체의 '디오니스적 도취'는 감정이입 반응의 극단적 형태이며, 개인 인격을 균열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는 세계와 인간관계를 공허하게 만든다. 선전과 선동은 인간을 기만하는 위장된 오만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