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믹서’  6월 모임 후기


나쁜 유전자


정우현 지음


5장 범죄 유전자

 



홍대 독립서점 책방연희에서 이번 달에 진행한 과학책 읽기 모임 사이언스 믹서에서는 정우현 교수님의 나쁜 유전자5범죄 유전자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번 장은 범죄자는 유전자로 결정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과학이 어떻게 답변해 왔으며, 사회가 어떻게 수용해 왔는지에 관한 짧은 역사라고 정리해볼 수 있겠네요.

 


이번 장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인간이란 스스로의 호기심만큼이나 세계에 대한 무지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서 발견되는 모든 대상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함으로써 불완전함에도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해온 셈이죠. 나쁜 유전자에서 되풀이하여 확인할 수 있듯이, 과학은 나쁜 유전자라는 관념이 실체 없는 것임을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런 관념에 대해 지배층과 언론에 의해 왜곡된 시선을 관철해온 결과의 부작용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20세기의 역사만 들여다보아도 금방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나쁜 유전자는 그 자체로 모호하고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조건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쯤 되면 인간이란 이름은 부조리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순덩어리 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지인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벽에 붙어 있는 수배자 명단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명단에 공개된 인물들의 사진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머그샷이 없다보니 그저 평범해 보이는 살인자부터 눈빛이 무서워 보이는 사기범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제 눈에 비친 인물들의 느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사실 대부분은 그저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도 유럽에서는 두개골에 범죄의 본성을 지닌 부위가 있다는 믿음이 공기처럼 퍼져있었던 모양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에밀 졸라가 오랜 시간 집필한 루공-마카르 총서의 대표작인 <목로주점>이나 <제르미날>과 같은 작품만 보더라도 인간의 빈곤 문제가 알코올 중독과 폭력성과 더불어 되물림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는 범죄자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며 타고난 악마는 결코 교화될 수 없다는 결정론적인 믿음이 너무나 확고한 나머지 사형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는 겁니다.


 

이러한 믿음은 영국에서 다윈의 사촌형인 프랜시스 골턴의 우생학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우생학이 꽃핀 곳은 미국이었죠. 우생학은 보다 많은 지배층의 지지를 받으며 법제화되고 이른바 열등한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을 개선한다, 혹은 대를 잇지 못하도록 불임시술을 하는 등의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곧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미묘하게 굴절된 시선을 통해 현실에서 실천되며 특정 인구 집단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탄탄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무솔리니가 제정한 인종법과 같은 구체적인 탄압의 장치가 마련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세계의 역사는 독일에서 채택되어 인류사에서 참혹한 재앙을 낳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뚜렷하게 기억합니다. 이른바 유전자 결정론의 선조격인 이 견해는 단순히 이웃을 견제하고 고발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었죠. 이른바 타고난 악마는 결코 교화될 수 없다는 믿음이 수치화, 혹은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구실과 얽혔을 때 인류 공동체에 어떤 재앙을 야기했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은 빈 서판과 같다는 견해도 존재했습니다. ‘인간에게 적절한 환경이 주어진다면 어떤 행동이든 원하는 대로 빚어낼 수 있다는 극단적인 견해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죠. ‘내게 건강한 아기 12명만 데려다 달라. 나는 이들을 변호사, 의사, 심지어 범죄자로 길러낼 수 있다.’라는 주장을 한 행동주의 심리학의 창시자 존 왓슨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적절한 환경(조건)과 교육이라면 새로운 인류도 창조할 정도의 자신감이 아닌가요. 특히 행동주의 심리학을 이야기할 때 들 수 있는 사례는, ‘파블로프의 개실험이나 보상을 통해 특정 행동의 빈도를 늘리는 실험이었던 스키너 박스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1940-50년대에 특히 유행했던 전기 충격 요법은 이른바 정신질환자에게 많이 시도되었던 방법입니다. 이 시술은 특히 인간의 기계적측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정인이 가진 정신 질환은 뇌를 (전기 충격을 통해 하드디스크를 포맷하듯) 백지화한 후 새롭게 교육을 하여 교화할 수 있다고 보았던 셈이죠.


 

여기서 주목해보는 것은 현실에 개입하고 나아가 통제하려는 인간의 충동입니다. 이런 관점은 <신기관>등을 저술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른바 자연을 조작하고 변형하여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말입니다. 나아가 이런 관점은 자연의 조건을 실험실 안으로 가져와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는 조건을 구성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관점이 지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우리는 나치 독일 내과의사 요제프 멩겔레의 생체(인체) 실험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을 듯합니다. 인간이 야기한 이런 재앙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을 실험용으로 보고 인간이 개입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만들어낸 결과와 그리 동떨어져 있지는 않아 보입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시선이 사전에 저지되었더라면 40만 명이 수용소에서 생체 실험으로 사라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물학/유전자에 의한 영향력을 이야기할 때 유전자의 힘이라고 하지만 이번에 읽은 5장에서는 유전자가 환경과 맺는 상호작용이 훨씬 중요하다는 입장에서 서술합니다. 이른바 유전 vs. 환경논쟁에서 유전자는 환경의 영향 없이 논의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특정 형질을 유발할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라도 환경과 조건에 따라 그 형질이 발현될 수 있는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절대 다수의 유전자는 다면발형성’, 곧 하나의 유전자가 다양한 표현형에 영향을 주는 멀티 플레이 유전자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멘델의 유전 법칙에서 나오는, 하나의 유전자가 그대로 하나의 또렷한 형질 발현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말이죠. 여기에 우리는 아직도 어느 특정 형질에 어떤 유전자가 관여하는지에 대해 극히 일부만 알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할 것 같네요. 따라서 특정 형질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유전자가 장차 유해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정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이 유전자가 관여하는 다른 형질 발현 과정에 교란을 일으킬지 모르기에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유전보다 환경에 더 방점을 두는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핑커가 지닌 견해의 기반은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이 책의 주요 논지인 인간의 폭력성이 점차 감소해왔다는 주장을 전개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로 핑커는 환경적 측면, 그러니까 이성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의 진전, 교육의 역할 등을 꼽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매우 빈약/취약해 보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인류의 역사 무대에서 대량 학살을 비롯한 인간의 범죄나 폭력성이 재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한 번이라도 대량 학살이 발생한다면 이 주장은 폐기될 수밖에요. 개인적으로는 핑커가 인류의 역사에서 폭력성이 감소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통계자료를 사용한 방식이 설득력이 매우 약해보인다는 점입니다. 물론 정우현 교수도 비슷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비판합니다.


 

폭력을 주로 전쟁과 살인에 의한 사망자 수로 다소 편협하게 제한해 정의함으로써 통계적 착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과거 특정 시대의 폭력을 지나치게 과장했고, 반대로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현대의 수많은 참상은 애써 축소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테러, 내전, 국가폭력 등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사실은 아예 고려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빈곤이 결국 범죄와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으며, 인신매매, 성범죄, 사이버 폭력, 언어폭력, 환경 파괴 등 수치화하기 어려운, 그러나 대량의 물리적 폭력 못지않게 큰 고통을 유발하는 요인들을 (아마 의도적으로) 누락한 것도 문제다. 그의 책은 마치 인류는 진보하고 있다라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이를 입증할 만한 통계자료만 선별해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235-236)


 


제가 놀랐던 점은 많은 매체나 독자들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호평 일색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책에서 납득이 가지 않거나 불만스러웠던 점들을 이처럼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비판한 글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던 것이죠. 단지 내 생각과 맞아서만이 아닙니다. 세계 최고의 학자가 자신의 책에 적용한 논리가 일개 독자도 납득시킬 수 없는, 문제적인 논리임을 그동안 아무도 지적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대한 리뷰/독후기를 남긴 사람들은 왜 이런 점들을 지적하고 있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듯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핑커의 책에 담겨 있는 그의 역사관/인간관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에 실었기 때문이죠. 정리해보자면, 핑커의 역사관도 유전 보다는 환경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상황에 있지만, 자신의 주장에 도움이 되는 통계자료만을 취사선택함과 동시에, 중요한 사례의 누락을 학자적인 양심에서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히 비판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지난 세기에 계몽주의적 이성에 대한 신뢰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무너진 상황에서, 핑커의 계몽주의적 이성에 대한 낙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아무튼 핑커의 책과 관련한 사항은 이렇습니다.

 


이번 모임에 읽은 범죄 유전자를 정리해보면, 유전자는 단독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유전자가 환경, 곧 특정 상황과 맥락 아래에 놓여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기 쉬운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환경의 영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죠. 맥락, 바로 그 유전자가 놓인 맥락 혹은 환경이 어떤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과학은 언제든 새로운 발견과 사실에 의해 기존의 것이 수정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가능성을 지닌 유연한 존재로서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는 저자의 말이 이번 장인 범죄 유전자를 읽으면서 인상에 남았습니다.


 

이번 여름인 7-8월에는 과학책 읽기 모임이 방학에 들어갑니다. 9월 모임에서는 동성애 유전자에 대한 내용을 다룰 예정입니다. 아주 이야기 거리가 풍성한 주제가 될 것입니다. 나쁜 유전자의 참고문헌에 나오는 책 한권 씩 골라서 읽어 오시면 더 좋겠네요. 9월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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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가족에 관한 글쓰기 - 가족 가면 벗기기
양혜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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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노는 마당이 필요하다


박완서 가족에 관한 글쓰기

: 가족 가면 벗기기

 

양혜원 지음 [책읽는고양이] (2026)

 




가족이란 어휘처럼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을까. 박완서 연구자, 여성학 연구자, 번역가, 교수 등 다양한 역할로 활동을 해온 양혜원 작가의 글을 읽으며 처음 든 생각이었다. 저자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한 편씩 읽으며 작가의 출발점이자 글쓰기의 모태가 된 가족에 대한 글과 시선에 주목한다.

 


전쟁이나 시대의 불운과 같은 불가항력이 불시에 가져다주는 불행과 고통 다음으로 깊은 고통과 시련을 던져주는 것이 가족은 아닐까. 그만큼 제도로서의 가족은 인생사에서 개개인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원천이기도 하다. ‘노력하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인내하고 양보해라와 같은 말은 집안 어른들의 덕담이나 결혼식 주례사에서 늘 듣는 말이 아니던가. 이러한 덕목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삶에 자신을 던져 넣어야 했던 부모님 세대 혹은 그 이전의 여성들은 대부분 이러한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현실에서의 삶은 늘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한 가족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린다. 저자는 이 불완전한 가족 신화의 이면을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통해 들여다본다. 이 책은 가족이라는 자장 속에 있던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한편으로 후배 작가/독자로서 박완서 작가의 노는 마당을 다시 방문하고 그의 글을 읽어온 기록이다.


 

애초에 가족이란 제도는 왜 생겼을까, 의문이 들다가도 고라니와 같은 다른 동물들을 떠올려본다.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일어서서 걸어 다니고 곧이어 뛰어다닐 수 있는 고라니 새끼들과 달리, 너무나 미숙한 존재로 태어나는 인간은 보살핌을 제공하는 안식처가 오랜 기간 필요했다. 굳이 억지로라는 수식어를 붙이려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기간이 걸리는 육아를 책임지는 최소한의 공동체로서 가족은 어쨌거나 필요할 수밖에. 하지만 가족의 구별짓기를 위한 필요는 어쩌면 더 큰 공동체의 출현, 그리고 이 작은 공동체의 연합을 연결하기 위한 행정적 필요가 어느 시기에는발명되어야 했을 법하다. 제로도로서의 가족이 탄생한 시기가 있지 않았을까.


 

현대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제도가 지닌 문제점들을 일일이 열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제도 이전의 본질적인 기능을 일부러 무시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는 지금껏 외로움이란 감정에 강한 편이라고 스스로 평가를 내리곤 했지만, 웬걸, 시간이 지나면서 나라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참으로 고독한 존재구나 싶다. 심지어 어떤 날은 아직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심각한 외로움이 불쑥 찾아올까봐 두렵기까지 하다. 인간이라는 글자에 담긴 의미만큼이나 서로에게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 울타리로서의 가족이 온전히 기능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으련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은가보다.


 

제도 그 자체로 많은 문제를 양산하기도 하는 가족을 낭만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인간은 지극히 문화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스스로 만들어 낸 모든 인공적인양식(문화)에 익숙해지고 심지어 중독되는 존재다. 문화는 결코 혼자 이루어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다. 말 그대로 인간은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온 존재가 아닌가. 박완서 작가의 작품 중에서처럼 볼품없이 늙어버린 남편의 모습에 극한 혐오감을 느끼는 부인처럼, 선택에 의해 구성되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공간을 점유하는 현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은 쳐다보기도 싫어진 구성원을 돌보아야한다는 의무에 얽매여 지옥이 되기도 하니까. 가족이란 제도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인간은 한편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할 수 있는 존재다. 모기 물린 자국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앙상한 남편의 정강이에도 손을 뻗어 쓰다듬어 보기도 하는 존재다. 저자는 모순적인 가족에 대해 쓴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따라가면서, 가부장의 사회적 의무에 얽매인 인간의 초상을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도 읽어낸다.


 

인간은 사회의 규범과 제도의 지배 아래 살아간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에는 각각의 인간이 사회에서 나름의 역할을 부여받고, 이 역할을 잘 해내도록 요구받는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 속 어느 남편처럼 부부의 정도 사라진지 오래된 터에 가족을 위한 역할에 얽매인 인간으로 살다가 생을 마치게 되는 가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품 속 인물에 대한 묘사 이긴 하지만, 작가가 남긴 작품은 대부분 본인이 겪은 일들이 작품에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여성들이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면 삶이 몇 배나 더 고달파지던 시대에 남편들 역시 가부장의 의무에 얽혀 평생을 살아갔던 모습을 보노라면 인간의 삶이 이게 다인가, 싶기도 하다. 결혼은 일이기에, 현실이기에 더욱더 상대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순서가 뒤바뀐(?) 듯한 표현에 더 공감하게 되는 이유다.


 

한편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 속의 한 남편은 부인의 혐오가 담긴 시선을 받으면서도 가부장의 의무에 집착한다. 아무리 공감력이 떨어지는 남자라 해도 혐오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감지하지 못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쩌면 이시대의 많은 남편은 이러한 사회적 역할에서만이 스스로의 쓸모와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반문해본다. 저자가 어머니가 되는 것은 학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28)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편 되기도 사회적 의무와 가정에서의 역할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워야할 일이다. 결국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남편과 부인 되기의 공간과 시간이 각자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면 남편들도 가족의 외부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야 문제가 많은 제도로서의 가족에 최소한 숨 쉴 틈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이 책에서 감지할 수 있는 박완서 작가의 가족에 대한 태도는, 가족이라는 제도의 모순을 또렷하게 감각해내면서도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세심하게 견지하는 모습 같은 것이다. 또한 의연하고 한편으로는 가족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찰자에 가깝다. 어쩌면 박완서 작가에게 가족의 문제는, ‘철저한 개별성을 지닌 현상으로 보았던 죽음의 문제처럼, 지극히 개별적인 사정으로 이해되었을 법하다. 그렇기에 글쓰기라는 절차를 통해 결국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관점을 볼 수 있는 또다른 에피소드가 <저물녁의 황홀>에 등장하는 화초 할머니이야기다. 그녀는 가족이라는 지극히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에 어느 날 침투한 불청객이었다. 반면 화초 할머니는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케빈 스페이시가 해낸 역할 뺨치는 연기로 가장의 임종을 지킴과 동시에 유산도 받고 이 가족으로부터 유유히 떠나는 인물이다. 그 과정의 장면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그려져 보였던 것이다. 화초 할머니는 불완전하고 모순적 제도인 가족의 맹점 한 군데를 파고든다. 그녀의 역할은 모순적인 제도에 대한 통쾌한 업신여김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저자의 인물 해석에도 공감이 갔다. 자녀나 본처가 생의 마지막까지 가장에게 주지 못한 역할을 화초 할머니가 연기를 하면서도 해냈다는 점 말이다.


 

더 나아가 화자의 친할머니와 화초 할머니 사이의 관계를 여성 사이의 연대와 인류애로 읽어낸 시선 역시 인상 깊다. 이런 마음은 어쩌면 우리 세대 이후에 더 발견하기 힘든 덕목으로 남을 것 같다. 누구는 화초 할머니 캐릭터 혹은 혼신의 힘을 다한 그녀의 연기를 비난할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비루한 연기나마, 결과적으로는 한 인간(할아버지)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었던 화초 할머니야말로 유산을 받을 만하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아무리 눈속임 연기라고 해도, 연기란 그 역할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과 진정성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립된 한 인간의 마음과 처지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마음을 나도 배우고 싶다.


 

저자는 박완서 연구자이면서 후배 작가로서 박완서 작가의 유산을 되짚어보고 다시 읽기를 했다. 이어지는 에필로그에서는 저자 본인의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방향을 들려준다. 특히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할 때, 저자는 글이 서툴더라도 AI를 사용하기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진실하게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요즘 이 AI 시대에 진실함이 없다면 글쓰기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차였다. 저자의 글쓰기 이야기를 듣게 되니 이 글을 쓰는 나도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다. 누구나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아무나 자신의 진실한 목소리를 발견하고 글로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AI는 이 과정을 초보 작가로부터 빼앗아가기 쉬운 까닭이다. 저자는 박완서 작가가 평생 피와 땀으로 쓴 글을 정성껏 읽으며 발견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 책의 독자와 나누고자 한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박완서 작가를 다시 읽어내며 놀았던 저자의 또 다른 마당임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작은 목소리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가족과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넘어서 보다큰 이야기를 남겨준 박완서 작가를 모범으로 삼을 수 있겠다. 나 역시 서툴더라도 나의 목소리를 찾아내기까지 계속 읽고 쓸 수 있길 바란다. 저자처럼까지는 아니고, ‘이라도 흘릴 수 있는 나의노는 마당에서 말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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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지구 - 기후위기를 넘어서는 지구와 인간 공부
김추령 지음 / 종이와빵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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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어진 지구에서 함께 잘 살기위한 공부


낯선 지구

: 기후위기를 넘어서는 지구와 인간 공부


김추령 지음 [종이와빵] (2026)

 




우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AI에 대한 신기술이 발표되고 인류의 달 거주 계획이나 화성 탐사에 대한 전망을 접하는 시대에 산다. 어느 과학자의 예언 같은 선언처럼, 기술적인 특이점이 이제 곧 시작될 것만 같다. 너무나 빠른 발전 속도와 생산성, 그리고 인류의 운명에 대한 우려는 반기술주의자라는 오명을 얻기 쉬운 형국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위를 올려다보는 동안, 이들이 발을 딛고 있는 대지와 발아래의 세계는 어느덧 꽤나 낯설어져 버렸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제는 새로운 현실 세계로 편입되어버린 가상공간이나 우주 공간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자연과 본래의 현실 세계로부터 오히려 더 소외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낯선 지구>에서 저자는 인간에 의해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얼굴을 갖게 된 지구에 주목한다. 곧 이어 인간이라는 존재로 향하는 저자의 시선이 담긴 글쓰기는 지구와 인간 사이의 느슨해진 연대를 확인하고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전망을 담고 있다. 결국 저자는 인간에 주목하지만, 과거의 검은 하늘(우주)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물질계의 역사에 관해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딘가 익숙한듯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낯설었다. 달이 없던 태초의 지구를 상상해본 적이 없거니와 인류가 달이 생겨나는 순간을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낯선 지구의 모습이다. 물론 과학자들의 상상은 지금껏 인류가 축적해온 모든 지식과 보다 많은 파라미터를 사용한 시뮬레이션에 기반하고 있지만 말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생소한 지구의 모습은 지금껏 단 하루도 같은 얼굴을 하지 않았다. 특히 지구와 달의 형성과정에서 우연히 삐딱해진 지구의 자전축이 오늘 지구가 갖춘 모습에 이토록 큰 영향력을 주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다만 인간은 너무나 짧은 시간에 칙칙한 회색빛 얼굴을 지구에게 안겨 주고 말았다. 인간이 기후 및 자연 환경의 변화 때문에 나무 아래로 내려와 발을 딛고 살아가기 시작한 터전을 무심하고 거침없이 파헤치고 이용해온 결과다. 인류는 과거에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지구와 또 다른 지구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도록 안내한다.


 

우선 지구의 부단한 지질활동이야말로 질소나 탄소 같은 주요 원소들의 순환을 견인했다. 이로 인해 빙하기와 해빙기의 순환도 이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물질계의 흐름과 상호작용과 부단한 변화들은 생명의 출현과 이들과의 상호작용으로 더욱 극적인 국면을 맞게 되었다. 우연히, 한편으로는 필연적으로 대기 산소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질학적 시간에서 말하는 다섯 번의 대멸종과는 차원이 다른 대멸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내 주변의 모든 존재들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나의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특히 나의 존재가 지질시대의 대멸종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1%의 존재에 빚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의 역사로부터 나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흐름에 대한 이해의 놀라움은 나를 연대와 새로운 부채의 감각으로도 이끌어주었다.


 

내 피부에 와 닿도록낯설게느껴지면서도 연대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었던 대상은 바로 의 존재였다. 내 몸 안에 무척이나 다양한 개체(미생물/바이러스/남세균 등의 흔적)가 들어와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 내가 혼자만의 고립된 단독자가 아니라는 의미다. 이건 감각이 새롭게 환기되는 경험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개체들이 내 몸 안에서 각자 자리를 잡고 상호작용하고 유전자도 교환하며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내 몸의 세포보다 100배나 많은 유전자가 비인간 생명체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은유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서로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이 언급한 것에서 더 나아가 내 몸이 정말로소우주라고 부를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저자가 초기 지구에서 현재에 이르는 기나긴 역사를 들려주는 동안 내가 주목했던 부분 한 가지는, 어느 영국 시인의 말대로 인간은 누구도 고립된 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모든 생명체 역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바다 밑 수 km 아래, 저 심해 바닥의 열수공 주변은 수백 기압의 압력과 수백 도의 극한 환경이지만, 이런 곳에서도 혐기성 생물들은 열수공에서 분출되는 광물질에 의존해 살아간다. 무엇보다 이 세균들마저 나와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가 새삼 낯설게 다가온다.


 

이 책은 우리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현재 기후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한 가득 안겨준다. 이를 테면 물질계와 생명계가 서로 촘촘하게 얽혀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진화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반면 인간은 지구의 다양한 순환 시스템에 상당한 교란을 일으키는 아마도 거의 유일한 종이다. 오늘날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드게임 젠가(Jenga) 위에 올라가 있는 존재처럼 상상해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의 발밑에 놓인 나무토막을 하나씩 계속 빼고 있다. 멈추지 않고 호기심에서든 혹은 관성 때문이든 나무토막을 계속 빼려 한다. 다만 그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음에도 발아래 다가온 위험을 직시하거나 멈추기 위한 행동에 옮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의 운명은 분명하다. 다만 언제 그 운명이 닥쳐올지 모르는 것뿐이다. 많은 이들이 기후위기를 이야기하지만, 인류 공동체는 이전과 달리 행동하거나 변화를 시도하는 데 여전히 더디다.


 

인류 대부분은 이러한 위기감을 분명 알고 있다. 다만 발아래에 있는 이 위기를 당장은 살짝 눈감고 싶은 불안 정도로만 치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생물학적인 이해에 더하여 과거와 현재의 몇몇 공동체의 모습들, 사회적인 인간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은 여기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저자는 작은 공동체에 존재했던 작은 전통들을 이야기하며 시작했다. 이를 테면 캐나다 서부 선주민의 포틀래치전통이나 멜라네시아의 쿨라 링의 전통이 그렇다. 저자는 이런 전통들에서 인간이 움직이는 동기가 경제적인 것만 있지 않음을 역설했다. 특히 공동체를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에 주목했다. 저자가 여러 공동체의 전통과 관습에서 읽어내는 것은 구성원 사이의 명예나 존경심, 연대의 가치다. 다만 이러한 가치들이 규모가 훨씬 큰 현대 사회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지의 문제는 좀 더 고심해볼 문제다.


 

이 책의 제목 낯선 지구는 인간의 편리함, 나아가 성장 위주의 탄소 소비 문명이 지질학적 시간에 비해 얼마나 짧은 시간 만에 지구-자연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분명한 점은 지구상의 어느 종이든 영원히 살아남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인류 문명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문명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이 과정을 얼마나 빨리 앞당길 것인가는 분명 인류의 손에 달려 있을 터다. 저자는 오래 전 지구 곳곳의 선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연대의 문화에 주목하고 여기에서 일말의 희망을 본다. 지구는 인류에게, 나아가 모든 존재들에게 유일한 공유지이다. 기후위기와 같은 지구적인 문제가 너무 거대하게 느껴진다면 작은 공동체의 사례로부터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실마리로부터 내가 속한 공동체에 맞는 방안을 마련하고 실천해가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낯선 지구와 다시 연결되어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며, 작지만 공존을 위한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우리가 지구상의 모든 존재와 함께 잘 살기위해 이제는 낯설어진 지구에게 손을 내미는 작은 제스처이다.

 

 


 

 


[책속으로]

[1] "지구의 삐딱함이 바로 테이아(달을 만든 외계 천체)와 텔루스(원시 지구)의 충돌로 인한 결과입니다. 테이아와 텔루스의 우연한 충돌로 만들어진 지구의 삐딱함은 지구에 거주하는 많은 생명체의 진화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물론 오늘날 인류의 등장도 그 영향을 받았지요." - P16

[2] "지의류, 땅의 옷이라는 뜻입니다. (...) 지의류는 보통 곰팡이와 광합성을 하는 녹조류나 남세균의 공생체예요. (...) 지의류의 특성을 소개할 때 빠질 수 없는 표현이 ‘극한 미생물’입니다." - P54

[3] "지의류는 기후변화가 심화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한계점을 넘을 수도 있는 지구 시스템과 닮았어요. 지의류는 공생이라는 방법으로 슈퍼 생물이 되었습니다." - P59

[4] "1905년 러시아의 생물학자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메레슈코프스키는 한 가지 가설을 주장합니다. ‘진핵세포가 지구에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세포 내에서 공생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 1960년대 세포내공생설을 주장했던 린 마굴리스의 발견(세포내공생설)의 원천이 되는 발견을 한 러시아 생물학자 메레슈코프스키의 발견. - P62

[5] "우리는 말 그대로 슈퍼유기체가 아닐까요? 다양한 생물들이 네트워크를 만들고 작동하고 유지되고 번성하는 초유기체 인간. 인간이라는 정의 자체가 공생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 P72

[6] "진화는 생물과 물질적 환경이 서로 얽혀 추는 정교한 춤이며, 그 춤에서 ‘가이아(지구)’라는 존재가 탄생한다."
- 데이지꽃 행성 개념을 만든 제임스 러브록의 말 - P92

[7] "모스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오로지 경제적인 동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의 명예, 자존심, 그리고 사회적 약속이 경제적 이윤보다 더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가 지구의 여러 공동체로부터 발견한 전통(쿨라 링)과 의미 - P141

[8] "오스트롬이 발견한 작은 공동체의 복작복작하고 시시비비로 시끌벅적한 그 회의장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마을공동체의 자율적인 관리 체계에서 우리가 잘 모르는 우리 자신의 모습, 낯선 인류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희망이라 불러봅니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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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 읽기 사이언스 믹서’ 5월 후기

나쁜 유전자

: 세계사를 뒤바꾼 문제적 유전자 바로 읽기




 

올해 네 번째 과학책 읽기 모임 사이언스 믹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날은 맑았지만 아침부터 햇볕이 강하게 느껴져서 그런지, 부쩍 여름이 온 것만 같네요. 이번 달에는 나쁜 유전자의 제4열등한 유전자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4장은 많이 들어보셨을 우생학의 역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분야의 짧은 역사에 비해 세계에 미친 영향력을 견주어보면 실로 믿기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어느 날 오스트리아의 한 백수 청년이 독일 군인으로 입대했습니다. 그는 그림을 좀 그릴 줄 알았고 특히 웅변에 재주가 있었죠. 또 어느 날은 무장청년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수감되기도 했죠. 그는 비록 실패했지만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 덕분에 얻은 유명세와 그의 유대인 혐오에 힘입어 정권을 잡게 됩니다. 이어서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대인 제거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시작했죠. 짐작하시겠지만 이 청년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이번 읽기에서는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와 말살 정책이 무엇보다 우생학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2차 대전 당시에 유대인만 희생당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뉘른베르크법에 의해 일탈자로 규정되었던 혼혈아, 장애인, 동성애자, 정신질환자들, 그리고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집시들도 모두 살 가치가 없는 생명으로 분류되어 희생되었습니다. 여기에 나치의 우생학은 좋은 혈통을 낳는데 부적격인 판정을 받은 여성 수십만 명에게 불임수술을 강제하기도 했습니다. 신체 기형 혹은 백치 판정을 받은 어린이의 운명은 훨씬 가혹했습니다. 이들 어린이들은 약 20만 명 정도가 안락사를 당해야 했습니다. 더 섬뜩한 사실은 나치가 사회에서 제거 대상이 된 이들에 대한 대량 말살 프로젝트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도록 고안된 것이 바로 가스실과 독가스 치클론 B라는 점이죠.

 


이처럼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는데 핵심적인 이론이었던 독일의 우생학은 이미 20여년 동안 미국 사회의 지도층 사이에서 널리 인정과 지지를 받던 이론이기도 했습니다. 철도왕 해리먼, 철강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씨리얼의 왕 켈로그의 이름도 보이고, 룰루 밀러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학문적 일대기가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던 스탠퍼드대 총장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나 하버드대 총장 애벗 로렌스 로웰도 우생학의 핵심 지지자였습니다.


 

우생학을 지지했던 인물 중 우리를 더 놀라게 하는 이는, 당대에 존경받던 대통령 플랭클린 루즈벨트, 진보 여성운동가 마거릿 생어, 흑인 인권운동가 듀 보이스를 비롯하여 소설가 H.G. 웰스나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스, 작가이자 사상가 조지 버나드 쇼 등도 있었네요. 실로 수많은 지도층 인사가 우생학을 지지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산아 제한을 원하던 영국의 여성단체도 우생학에 관심을 보이며 단종법을 지지하기도 했다고 하지요. 이처럼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수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우생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정황이 보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오늘날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생학을 다시 보게 합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2500여년 전의 플라톤 철학(<국가>)에도 이미 우생학적 사고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우생학의 기본 논리가 우리의 건강 추구 욕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점입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자손을 낳고자하는 부모의 마음을 안다면 사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지점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논리가 사회 혹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나 공감의 여지없이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될 때 발생하지요. 특히 사회의 관리 주체에 의해 단점으로 규정된 특징을 지닌 구성원들을 사회에서 격리/제거하려는 위생학적인 욕망이 과도할 때 심각한 재앙을 낳게 되는 것 같네요.


 

이에 더하여 유럽의 식민권력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던 우생학의 역사로부터 인류가 큰 희생을 치르고 배운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생학의 전통에서 이제 자유로운 걸까요? 과학기술의 발전은 빠르게 발전해 왔지만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윤리적 문제들도 심심치 않게 드러납니다. 이미 현실에서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도록 유전자를 교정한 아이가 태어났고, 형제의 유전자 치료에 골수를 공여할 수 있도록 기획된 구세주 동생과 같은 존재가 태어난 바 있습니다. 고통 받는 생명을 돌보고 주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들의 복지를 위해 또 다른 생명이 이용되는 관계 나아가 희생되는 구도는 분명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생학의 흔적과 논리는 여전히 우리의 현살 한 가운데에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우리는 대화에서 농담이나 우스개로 우월한 유전자’, ‘열등한 유전자라는 표현은 망설임 없이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생명의 세계에서 어느 유전자가 우월하다거나 열등한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대 유전학/생물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우리가 일일이 예측하지 못하는 것만큼 한때의 유리한 유전자가 다른 장소, 혹은 다른 시기의 환경에서는 치명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저자는 나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게 우월하거나 열등한 구성원이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힙니다. 유전자는 우월함이나 열등함의 원인이 될 수 없으며, 그저 다양함의 원천이라고 말이죠. 우리 모두는 그저 다양한존재이기에, 모든 존재의 다양성을 무시하거나 획일화하는 조건에 저항하고 다양함을 지켜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이번 독서 모임에서는 우생학의 역사를 중심으로 우리 주변에 잔존해 있는 우생학의 잔재를 발견하고, 다양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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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감정의 여행 사진들과 주시성에 대해

 

박상우의 포톨로지

: 베르티옹에서 마레까지 19세기 과학사진사


 

박상우 지음 [문학동네] (2019)

 




세상에 나온 지 70년도 더 된 카메라, 그리고 표면에 코팅 없이 80년 여 년 전에 나온 렌즈 하나를 달랑 들고 이탈리아의 도시를 산책하다 찍은 사진들이다.


 

여행 사진을 어떻게 정리할까 생각하다 단지 예쁜 사진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하나의 지배적인 감정에 맞는 사진을 골라보고자 했다각 이미지는 촬영자/감상자의 기억과 반응하여 만들어내는 감정의 결에 주목한 결과다. 따라서 일반 여행사진에서 부각되는 장소성과 역사성에 관한 정보는 최소화된다. 다만 아직 시퀀싱(순서 배열)은 마음에 들게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필름 사진을 이야기할 때 흔히 감성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피상적이고 모호한 말이다. 필름은 다분히 제약이 많은 매체다. 아쉽고 부족하다 느끼지만, 필름 사진은 나로 하여금 이런 제약과 부족함을 보완하고 좀 더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한다.

 



새로운 작업 과정과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프레임에 들어온 사물이나 인물의 이미지를 쉽게 지울 수도 있는 디지털 사진과는 매우 다른 매체다.


 

19세기 과학사진사를 전개했던 박상우의 포톨로지에서 저자는 카메라 렌즈와 눈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는데, 19세기 프랑스의 해부학자 루이 페스(Louis Peisse)가 한 말을 인용한다.

 


눈은 사물에서 주시하는 것만 본다. 그리고 눈은 정신에 관념으로 이미 있는 것만 주시한다.”(68)

 


다시 말하면 렌즈에 들어오는 빛이 나르는 모든 정보를 선별 없이 남기는 카메라-렌즈 메커니즘과 달리, 인간은 눈은 주시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가 그냥 본다와 달리 대상을 우리의 이전 기억/경험과 결부지어 인식 한다는 의미에서 보는 것을 포괄하는 말이다.

 


눈이 사물을 주목할 때, 인간은 배경에 대해 인식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반면 특정한 사물에 눈길이 가지 않은 상태라면, 그 사물이 속한 배경 전체를 비로소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나무를 보느라 숲을 보지 못한다고 누군가를 비판할 때, ‘인간의 눈은 원래 그렇게 작동한다고 말해줄 수 있겠다. 그러니 너도 그렇다라고,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말해주면 된다.

 





















[선별한 사진들 슬라이드 보기]

https://blog.naver.com/close2i/224257675652






@munhakdongne

#박상우의포톨로지 #슬라이드필름 #눈의주시성 #필카사진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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