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 문명의 종말에 대한 성찰
로이 스크랜턴 지음, 안규남 옮김 / 시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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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지혜를 기억하고, 문명의 죽음을 직관하라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 문명의 종말에 대한 성찰

로이 스크랜턴(Roy Scranton) 지음 | [시프] | (2023)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기후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30년 이상 추적 기록된 자료를 기반으로 1980년대 후반에 세계적으로 과학적 합의가 이루어진 주제다.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가 지질학적 힘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한 인류는 이전의 환경으로 되돌아갈 길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구온난화는 우리의 실존을 크게 흔들 정도로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그 이유는, 단지 온도가 1-2°C 올라가는 현상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모한활동으로 인하여 모든 동·식물 종의 생존 역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 지구적인 식량과 에너지 환경의 혼돈을 필연적으로 예비한다.


 

우리가 매일 먹는 과일이 식탁에서 영영 사라진다고 생각해보자.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럼 기후변화로 우리가 자주 먹는 채소를 구하기 힘들어 졌다고 생각해보자. 대신 육식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고? 에너지의 관점에서만 보아도 동물은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에너지 소비자다. 에너지 소비자는 에너지 생산자를 찾아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재료를 섭취해야 한다. 이 세계에서 공짜란 없다. 식물이 바로 에너지 생산자다. 식물은 태양의 에너지와 대기 및 토양 속의 성분을 매개로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 저장한다. 식물과 동물로 분류되지 않는 균류는 어떨까. 균류 역시 동물처럼 양분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에너지 소비자다. 외부의 다른 존재에게 의지해야만 양분을 얻을 수 있다. 에너지의 관점에서 균류 역시 에너지 생산자에 의존해야 한다. 동물이나 균류가 에너지 생산자를 섭취하지 못하면 생존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럼 인간은? 식물과 동물이 사라지고 죽어갈 때, 인간만 살아갈 수 있는 방도는 없다. 모든 종류의 식량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게 스트레스를 줄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협한다. 식량이 자판기처럼 돈을 낸다고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닌 이상, 돈을 가진 이들이라고 가난한 이들보다 상황이 조금 더 나을지 모르나 얼마나 더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지구온난화 문제는 빈부나 계급의 차이가 무색함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고려할 때,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의 저자 로이 스크랜턴이 전 지구적 기후변화가 어떤 위협보다도 강력한 위협이라고 경종을 울리며 시작하는 이유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기후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지구의 극지 주변 바다 혹은 내륙의 빙하나 빙상이 녹아내리는 양상은 앞으로 계속 녹아내리는 일 외에 되돌릴 길이 보이지 않는다. 국제 사회에서도 이 문제에 주목하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대처 방안을 고민해왔지만, 지금까지 얻은 답은 답이 없음뿐이다. 그 이유는 지구적 탈탄소화가 지구적 자본주의와 사실상 양립 불가능”(63)하다는 데 있다. 기업과 정부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는 탈탄소에 대한 노력과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탄소(석탄과 석유)에 기반 한 자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까닭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러 청정에너지기술을 제시하지만 이는 현재 우리가 기반하고 있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지구 경제를 탈탄소화 하는 일은 전 세계 전력의 80%가량을 대체해야하는 일이다.


 

어느 정치가도 현재 작동하는 전 세계의 경제활동 방식에서 석탄과 석유를 대체하기 위해 저렴한 탄소에 대한 의존을 끊으면서까지 자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위험에 노출시키는 상황을 감수할 이는 없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여기에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48%를 차지하는 미국, 러시아, 중국은 탄소세 도입마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엄혹한 무한 경쟁 구도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서 이렇게 국가의 근간을 흔들면서 무리하게 탈탄소화를 이룰 수 있는 국가는 없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암울한 미래가 있다. 우리는 기후 정책에 있어서 언제나 경제 성장 논리가 승리한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국가의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보자. 인류의 대다수는 지구 전체의 환경적 위기를 인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현대인의 다수는 이미 안락한 소비 생활에 길들여져 있다.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하고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이동 전화기나 노트북, 대형 TV등을 모두 없애고, 여름에 에어컨을 폐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저자는 현대의 정보 사회 역시 탄소에 의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이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는 지구의 온도를 올리는 데 참여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처럼 기후 변화 문제는 너무나 방대하고 우리의 생활양식과 깊숙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한 사람만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지 않으며, 다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 그리고 되돌릴 길이 없다는 것만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시점에서 탈탄소를 외치는 일은 그저 순진한 구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일은 모순 속에서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일일뿐이다.


 

이 책은 이처럼 우울한 진실을 담담하게 전한다. 심지어 저자는 이 모든 문제의 문제는 바로 우리라고 일침을 놓는다. 그럼 우리는 이 허무하고 공허하게 예비 된 미래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문제의 본질을 직시한 다음,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묵시록적 의미로 개인의 죽음에 대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문명의 죽음을 숙고해야한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탄소에 기반 한 문명의 종말이라는 운명과 마주하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배움으로써 이를 더 잘 맞이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죽음이란 현상은 전대미문의 사태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 배우고 성찰하고자 대화체로 철학서 파이돈을 썼다. 뿐만 아니라 미셸 몽테뉴도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격언에 주목했다. 몽테뉴가 자신의 수상록 에세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154)이라 언급하지 않았던가. 죽음은 언제나 삶의 주변에서 서성이던 현상이며,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 필연적 현상이다. 저자 로이 스크랜턴의 말처럼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할지 모른다. 죽는 법을 배우고자 하더라도 실제로 겪지 않는 한, 그 때마다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배우라고 해놓고 이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니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 저자는 죽음을 배우고자 하는 부단한 실천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지혜라고 말한다.


 

말장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저자가 스토아 철학자의 말에 주목하고, 여기에서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까닭을 생각해볼 수 있다.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죽음이라는, 이 불가항력의 사태로부터 피할 길은 없다. 그렇다면 이 필멸의 현상을 정면으로 직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탄소에 기반 한 현대 문명은 종말을 구할 수밖에 없고, 이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문명이 영원할 것이라는 자기기만과 거짓된 욕망을 걷어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 문제임을 인정하는 데서 다시 출발한다. 이때 지구온난화가 사실인지의 여부나 이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대신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 문명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 세계에서의 삶에 어떻게 적응해나갈 것인가를 성찰하는 일이다.


 

암담하고 충격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인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문명의 죽음을 숙고하기는커녕,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기만 할 것이다. 이련 논의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저자는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물론, “인류는 화석 연료 문명이 끝난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 폐허 속에서 어떤 폭정, 어떤 야만 상태가 출현하든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다. (...) 아마 우리의 후손들은 지구의 나머지가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이고 찌는 듯한 밀림이 되더라도 북극해의 해안에 새 도시를 건설할 것.”(183)이라고. 대멸종이라고 해도 인류의 일부는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문제로부터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고 해도 우리의 운명이 변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숙고해야만 한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현실적으로 남아 있지 않다.



저자는 인류세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유일한 것으로 기억을 제시한다. 먼저 살다 간 인류의 지혜가 담긴 기록들, 죽은 자의 유산을 기억하는 일이 죽음을 고하는 우리 문명에 대한 성찰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어떤 기술적인 해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 최고의 두뇌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찾아내자고 촉구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은 다시 말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오히려 저자는 죽음을 배우기위해 인류가 남긴 유산, 인문학적인 전통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 새롭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인용문으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이 인상 깊어 인용해 본다.


 

모든 사유가 기억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기억도 응결, 정제를 통해 개념적 사유의 틀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스스로를 더욱 단련시킬 수 있지 않을 경우에는 안전하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험들 그리고 사람들이 행하고 겪는 것에서 만들어지는 사건과 사고에 관한 이야기도 거듭해서 언급되지 않으면 생활 세계와 생활 행위에 내재하는 덧없음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진다. 유한한 인간의 일을 그 본질적인 덧없음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것뿐이지만, 이러한 끊임없는 언급도 만일 그로부터 미래의 기억을 위한 그리고 순전히 참고용으로라도 쓰일 만한 개념들, 지침들이 생겨나 떠오르지 않는다면 결국 덧없는 것이 되고 만다.”(한나 아렌트, 혁명론)(168)

 


다시 말해, 우리가 받은 유산을 단순히 기억 장치나 도구에 저장해놓는다고 끝이 아니다. 이 유산을 끊임없이 호명하고 이를 기억하고자 시도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지혜의 유산은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저자는 이러한 기억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말하고 이를 가공할 것을 주장한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문명의 죽음과 마주하여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기술적인 방주를 건설하는 것에서 나아가 지혜를 실어 나를 문화적 방주를 건설해야한다. 앞서 죽은 이들의 지혜가 우리에게 전달되었던 것처럼, 여기에 우리의 지혜를 더하여 미래 세대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이어지는 저자의 말에 계속 주목해보자.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류세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 자신을 기억 없는 삶의 덧없음 속으로 침몰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엄청난 역경과 싸워 힘들게 얻어낸 수천 년 동안의 지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을 버려서는 안 된다.”(183)


 

한나 아렌트의 말과 저자 로이 스크랜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떠오른 소설이 있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수도원 내의 장서관은 전 세계의 지혜를 모두 담고 있는 지식의 보고였고, 장서관이 바로 세계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인류의 지혜를 품은 책들은 비밀스러운 공간에 은폐되어 있었고, 접근도 제한되었다.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의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수도원의 책들은 여러 필경사들에 의해 필사되고 복제되었지만, 이는 소수의 관심사를 위한 기계적인 기억 저장용 활동이었을 뿐이다. 인류의 방대한 지식이 비밀스러운 공간에 저장되기만 하고 공유되지 못했다. 사람들에 의해 거듭 이야기 되거나 기억되지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인류의 지식은 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미약한 촛불에 거침없이 불타올라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은폐되었던 인류의 과거는 구원되지 못하고, 하나의 세계 전체가 덧없이 소멸되었던 것이다.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는 80대인 화자가 10대 소년 수도사 시절 겪었던 사건을 회고한 기록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소설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생각났던 이유는 소설의 마지막에 있다. 화자는 수도원의 장서관이 화마에 사라져버리고 수도원이 폐허로 된 사건을 기억해내면서 다음과 같은 알쏭달쏭한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이 소설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소설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삶과 죽음을 성찰한 것과 관련이 있다. 존재가 사라질 때, 이름도 함께 사라질 수는 있다. 단 우리가 존재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 남기 마련이다. 다만 명예는 덧없는 것일 뿐이다. ‘장미의 이름이 덧없게 여겨지는 이유는 장미의 이름을 기억할 사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로이 스크랜턴의 말처럼, 우리는 죽음을 배우는 일에 결코 성공하지 못할 테지만, 누군가는 시도하고 실패해도 또 다시 시도할 것이다. 그게 우리의 삶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장미는 삶과 죽음이라는 우주적 진리를 일깨워주는 존재이자 생명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소설 장미의 이름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에서 하는 이야기는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모두 죽음혹은 존재의 필멸을 진지하게 고찰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저자 본인은 실천의 하나로서, ‘죽음을 배우기 위해 스토아 철학의 죽음에 대한 철학을 호명하고, 다시 이야기하며, 우리의 현재에 맞게 이 철학을 가공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다. 저자는 죽음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신념을 붙들고 있다. 그러므로 문명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문명의 거듭나기를 상상하는 시도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책 속으로]

[1] "지구온난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구온난화와 관련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던 때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 분명해 보인다. 많은 정책 전문가, 기후학자, 국가 안보 관료의 견해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지구온난화가 사실인가 혹은 지구온난화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이 뜨겁고 급변하는 세계에서의 삶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다."(18)

[2] "인간의 세대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나
운명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의 모습은 변함없이 영원히 그대로다."(20)
- 윌리엄 블레이크의 글 재인용.

[3] "문제는 지구적 탈탄소화가 지구적 자본주의와 사실상 양립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63)
- 저자는 대체 에너지원 없이 지구 경제를 탈탄소화 한다는 것은 전 세계 전력의 80%가량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언급한다.

[4] "자국의 경제에서 대놓고 석유와 석탄을 몰아내려는 정치가는 어떤 종류의 민주 정부나 과두 정부에서도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 더욱이 값싼 탄소에 대한 의존을 종식시키기 위해 긴축과 재분배를 강요한 지도자는 자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약하고 고립된 처지로 내몰게 될 것이다."(83)

"(문제는) 오늘날 전 세계의 많은 나라가 긴밀하게 통합된 하나의 경제로 연결되어 있는 거이 석탄과 석유 덕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84)

[5] "누구도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수단과 강력한 영향력과 개념적 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 위험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할 만한 계획을 떠올리지 조차 못하고 있다. 문명을 위한 어떠한 ‘리셋’ 단추도 없고, 향후 10, 20년 안에 전 지구적 인프라, 농업, 에너지 네트워크를 바꿔놓을 실행 가능한 계획도 없다."(108)

[6] "전 지구적 정보·소통 생태계는 석탄에 의지하고 있다. 당신이 이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당신은 지구의 온도를 올리고 있다. (...) 우리는 멈출 수 없다. 그리고 멈추려 하지 않을 것이다."(109)

"문제는 기후변화 문제가 너무 거대하다는 데 있다. (...) 문제는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이다."(110)

[7] "석탄 및 석유회사와 그들의 정부 내 대리인은 자신들을 지키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군사력도 기꺼이 사용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노동 전쟁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수십 년 동안 자국민을 상대로 벌인 전쟁은 셸과 셰브론의 노골적인 지원으로 시작된 것이었다."(126)

[8] "적은 바깥 어딘가에 있지 않다. 우리 자신이 적이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우리, 시스템, 벌집이."(141)

[9] "우리는 어떤 것을 실제로 행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를 정말로 알지는 못하므로 우리가 사는 동안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마지막 날까지 끊임없이 실천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실천 자체가 지혜다. 도겐 선사의 말로 하면, ‘그 길을 올곧게 실천하는 것 그 자체가 깨달음’이다."(156)

[10] "인간이 살아 있는 시간은 순간에 불과하고, 실체는 흐름 속에 있으며, 인식은 무디고, 육신은 썩게 마련이며, 영혼은 혼란 속에 있고, 운은 예측하기 힘들고, 명예는 덧없다. 한마디로 말해 신체에 속한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고, 영혼에 속하는 모든 것은 꿈과 공상이며, 삶은 전쟁이고 잠시간의 체류이며 사후의 명성은 망각이다."(157)
-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

[11] "(우리는) 최고의 보물이자 가장 강력한 적응 기술을 가져왔다. 이미 죽은 자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류세에 우리를 구원해줄 유일한 것을 가져왔다. 바로 기억이다."(161)

[12] "모든 사유가 기억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기억도 응결, 정제를 통해 개념적 사유의 틀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스스로를 더욱 단련시킬 수 있지 않을 경우에는 안전하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험들 그리고 사람들이 행하고 겪는 것에서 만들어지는 사건과 사고에 관한 이야기도 거듭해서 언급되지 않으면 생활 세계와 생활 행위에 내재하는 덧없음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진다. 유한한 인간의 일을 그 본질적인 덧없음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것뿐이지만, 이러한 끊임없는 언급도 만일 그로부터 미래의 기억을 위한 그리고 순전히 참고용으로라도 쓰일 만한 개념들, 지침들이 생겨나 떠오르지 않는다면 결국 덧없는 것이 되고 만다."(168)
- 한나 아렌트, 《On Revolution》에서 재인용

[13] "인문학 연구의 오랜 전통을 살아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비판적 사고, 명상, 철학적 토론을 통해 사회적 자극의 스트레스를 중지시켜야 하고, 과거를 계속 살아 있게 하고, 아카이브의 정보를 가꾸고, 저장되어 있는 기억을 읽고 해석하고 분류하고 돌보고 특히 재가공함으로써 현재에 대한 집착을 중단해야 한다. (...) 디테일에 대한 관심, 논증에서의 엄밀성, 주의를 기울여 읽기, 깊이 있는 성찰 등을 가르침으로써 인간이라는 동물 안에 사색의 진동을 주입시켜야 한다. 죽은 자들과의 교감을 지속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는 죽은 자들이듯 그들이 곧 우리이기 때문이다."(182)

[14]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류세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 자신을 기억 없는 삶의 덧없음 속으로 침몰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엄청난 역경과 싸워 힘들게 얻어낸 수천 년 동안의 지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을 버려서는 안 된다."(183)

[15] "우리는 방주를 건설해야 한다. 멸종 위기에 놓인 유전적 데이터를 실어 나를 생물학적 방주만이 아니라 절멸의 위기에 놓인 지혜를 실어 나를 문화적 방주를 건설해야 한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를 이루고 있는 모든 언어로 된 사유의 구체적 기록은 미래에 이루어질 우리의 지적 성장을 위한 씨앗이자 토양, 원천, 자궁이다. 현대 문명의 종말을 대면하고 있는 지금, 인문학의 운명은 다름 아니라 인류의 운명이다."(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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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을 중심으로 시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 영화 <오펜하이머>의 개봉을 앞두고



 

지난 20세기에 일어났던 제2차 세계대전은 과학자, 특히 물리학자들의 전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원자폭탄 개발과 레이더 기술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원자폭탄 개발은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나치의 핵개발 움직임에 대항하기 위해 두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와 아인슈타인이 당시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보낸 청원 편지로부터 추진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수장을 맡은 이가 물리학자 줄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였다. 그는 원자 폭탄 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원자 폭탄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인물이다.


 

이번 달 15, 그러니까 일본의 패전일이면서 우리에게는 해방일이 되는 날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제작한 영화 <오펜하이머>의 개봉을 앞두고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78년 전 오늘(86)은 인간이 인간에게 최초의 원자 폭탄을 사용했던 날이다. 이날 미군은 길쭉한 모양의 원자 폭탄 리틀 보이를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우리는 제대로 실감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원자 폭탄 피해자 후손과 더불어 역사 속의 오늘을 기억하는 행사가 진행될 것이다. 한 가지 더 생각해볼만한 것은 원폭 피해자에는 일본인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 도시에 살았던 조선인을 비롯한 여러 국적의 사람들도 있었음을, 원자 폭탄은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45년 7월 16일에 시행되었던 트리니티(Trinity Test) 핵실험 당시의 폭발 모습. 실험 후 휘어진 철근 구조물 앞에 서있는 오펜하이머.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모자를 쓰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에 투하 된 두 종류의 원자 폭탄. 처음 투하된 폭탄이 길쭉한 모양의 '리틀 보이'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3일 후인 8월 9일에 럭비공 모양의 '팻 맨'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맨해튼 프로젝트는 20세기 과학사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 역사에서도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내외의 과학자들을 비밀리에 한데모아 국가의 중대사를 추진했던 거대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과학사에서 많이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이는데, 오펜하이머를 비롯하여, 엔리코 페르미, 닐스 보어, 한스 베테, 존 휠러, 리처드 파인먼, 필립 모리슨(오펜하이머의 제자), 에드워드 텔러 등등의 쟁쟁한 과학자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다. 주목해볼만한 또 다른 점은 이 프로젝트에 크게 기여했던 과학자들 상당수는 유럽에서 나치를 피해 건너온 이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그러니 순수한 독일인보다는 유대계 과학자, 혹은 유대계 이민자의 후손이 큰 역할을 맡기도 했다. 오펜하이머 본인 역시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계 이민자의 후손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역시 유대계 독일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두 사람을 동시에 다룬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며도 이런 맥락에서 흥미롭다. 이 책의 저자 실번 슈위버는 물리학자이자 과학사가이기도 하다. 두 천재 과학자를 비교하며, 이 책에서 이제는 다소 진부해 보이기도 하는 천재성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기도 하다. 그는 또 다른 유대계 미국인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과 교류하며 그를 인터뷰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역사 속의 인물들과 직접 교류했던 저자의 경험과 폭넓은 인터뷰를 통해 인물을 이해해볼 수 있는 책으로 기대된다.



















 































이달에 개봉될 영화의 원작이자 영감을 준 도서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처음에 빨간색 띠가 들어간 하드 커버 판이 나왔고, 최근에 영화 <오펜하이머> 개봉에 맞추어, 소프트커버 판의 특별판(검은 표지)이 나왔다이 책의 저자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은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받기도 했다. 영화에는 오펜하이머 외에, 과학사에서 등장하는 여러 과학자들의 모습도 등장할 것으로 기대해본다. 그 중 한 명은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다. 그는 원자 폭탄 실험이 진행되어 충격파가 도달했을 때, 떨어지는 종이 조각의 낙하 시간과 거리에 관한 정보만으로 원자 폭탄의 폭발력을 추산했다고 하는 에피소드가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이론과 실험 모두에 두각을 나타냈다고 하는데, 영화 속에서 그의 모습도 볼 수 있을까 궁금하다.




(엔리코 페르미. 이론과 실험 분야 모두에서 탁월한 과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뿐만 아니라 젊은 대학원생으로 이론 개발 분과에 참여했던 리처드 파인먼의 모습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기밀문서를 보관해놓은 금고를 모두 열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 에피소드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원자 폭탄 실험이 진행되기 직전에 아내가 사망하는 아픔을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파인먼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정황에 대한 에피소드는 올해 출간된 제임스 글릭의 파인먼 평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이 책에서 한 가지 기억나는 장면은 미국 뉴멕시코 앨러모고도(Alamogordo)의 사막 한 가운데에서 시행된 최초의 원폭 실험인 트리니티(Trinity) 테스트 당시, 이 장면을 유일하게 맨 눈으로 지켜 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단순히 젊은이의 치기로 결정한 행동이 아니라, 빛과 열의 물리적 특성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생생하게 예측하고 내린 결정이었던 셈이다. 또 이 책은 원자 폭탄 개발 전후,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직후에 물리학자들이 갖게 된 권력과 권위에 대해 저자는 저널리스트로서 평가하며 이를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역시 보다 궁금한 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다. 지난 겨울(202212) 어느 신문 기사에서 원자폭탄의 아버지로버트 오펜하이머가 68년 만에 소련 스파이혐의를 완전히 벗었다는 내용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과학자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한 대가를 국가는 어떤 식으로 갚았으며, 역사에 오점을 남겼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참고기사: https://v.daum.net/v/20221218171232607)




(1946년 당시의 로스 앨러모스 연구 그룹. 사진 가운데 가장 어두운 상의를 입고 있는 이가 로버트 오펜하이머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인물이 엔리코 페르미이며, 페르미의 뒤쪽, 오펜하이머의 왼쪽 자리에 앉아 뭔가 몰두하는 젊은이가 리처드 파인먼이다. 얼굴은 가려졌으나 오펜하이머의 오른쪽 자리에 훗날 안보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에드워드 텔러가 앉아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다시 오펜하이머의 평전으로 돌아 가본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다. 인간에게 금지된 불을 가져다 준 죄로 제우스에게 미움을 받고 벌을 받았다. 프로메테우스는 커다란 바위에 끊어지지 않는 쇠사슬로 손과 발이 결박된 채, 독수리에게 끊임없이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라는 이름이 미리 생각하는 자라는 의미임을 고려할 때,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도 인간에게 불을 비롯한 문명을 가져다준 존재로도 여겨진다. 사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신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물과 흙으로 인간을 빚은 다음, 제우스 몰래 회향풀의 줄기에 불을 감추어 두었다가 인간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배경 속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왜 인간에 대한 애정을 지닌, 인본주의적인 신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는지 말이다. 곧 프로메테우스는 신화에서 인간의 창조자였다. 기독교의 등장 이전에 물과 흙으로 인간을 빚은 모티프는 유대교의 골렘 신화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골렘은 카발라(Cabala)라는 전통적 유대교 신비주의의 산물이며, 종교적 마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생명을 얻은 인공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모티브가 결국 기독교 신의 인간 창조 신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노아의 대홍수 모티브가 훨씬 이전의 수메르 문명에 빈번했던 대홍수와 관련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참고 도서: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프로메테우스의 야망)





 

























이런 의미에서 인류에게 원자폭탄이라는 공멸의 가능성을 지닌 원자폭탄을 가져다준 인간으로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 이름이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최초의 원자 폭탄이 투하되어 민간인 수십 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후 오펜하이머가 보인 행보다. 그는 가공할만한 원자 폭탄의 파괴력을 확인하고, 이 무기가 지닌 잠재력과 정치적 의미를 간파한다. 이후 계획되었던 수소 폭탄 개발 계획에 반대하여, 미 군부 집단의 눈 밖에 나게 된다. 50년대에 미국 전체를 흔들었던 매카시 광풍의 여파로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으나 이후 원자 폭탄의 사용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던 과학자들을 뒷조사하고 사상검증을 하는 등 후폭풍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 프로젝트의 수장이었던 오펜하이머에게 큰 생채기를 남겼다. 그는 비밀인가 취급 권한을 박탈당했고, 공식적인 자리로부터 모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청문회에서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군부가 좋아할 수소 폭탄 개발을 적극 지지했던 에드워드 텔러와의 행보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이런 민감한 문제들이 얽혀있기에, 이번에 개봉되는 영화 <오펜하이머>가 과학사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현재 미 정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두툼한 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속에는 20세기 인류사의 한 획을 그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수장의 절정기와 내리막길이 오롯이 담겨 있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으로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으나, 그는 거대한 집단 속에서 자신이 한 일의 의미를 되묻고 검토하였으며 멈춰 설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 여기에 거대한 흐름에 맞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나는 유례없는 이 인물에 매력을 느낀다. 나는 앞서 제2차 대전은 물리학자들의 전쟁이기도 했다고 언급했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 진실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과학기술은,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양날의 검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원자 폭탄을 투하할 것이냐의 결정은 정치의 영역이다. 물론 그렇다고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개발로 사망하게 된 피해자와 파괴된 도시와 전혀 무관해지는 것은 아닐 테다. 이들도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검토하고, 책임 있는 의식도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은 때로 잘못된 길을 가기도 하고 실수도 하지만,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자신이 가는 길을 되짚어 가거나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펜하이머의 행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줄 수 있다.


 

이번에 영화 개봉으로 읽어볼 만한 관련 도서들을 떠올려보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논픽션 작가 리처드 로즈의 원자 폭탄 만들기수소 폭탄 만들기가 있다. 특히 원자 폭탄 만들기1988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분을 수상했고, 전미 도서 비평가협회상 및 도서상(1987)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은 바로 오펜하이머가 수장으로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반면 수소 폭탄 만들기는 원자 폭탄 보다도 더 강력한 수소 폭탄을 개발하는 과정을 담고 있어서, 오펜하이머 이후의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다. 원자 폭탄의 위력을 실감하고도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냉전 시대의 포문을 연 수소 폭탄 시대를 조망하고 있다. 이 두 가지 큰 기획을 집요하게 담아낸 작가 리처드 로즈의 문제의식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로스 앨러모스에서 ID사진으로 사용했던 오펜하이머의 사진과 수소 폭탄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군부의 편에 섰던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 오펜하이머는 '원자 폭탄 개발'을, 텔러는 '수소 폭탄 개발'을 이끌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또 원자 폭탄 개발에 큰 기여를 한 물리학자로 엔리코 페르미를 들 수 있다. 엔리코 페르미 평전의 저자 지노 세그레는 페르미의 제자이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에밀리오 세그레의 조카라고 한다. 또 다른 저자 베티나 호엘린은 독일계 미국인으로, 물리학자인 아버지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의 자녀다. 이 책의 저자들은 페르미의 면모를 누구보다도 더 가까운 거리에서 재구성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페르미에 관한 또 다른 책으로 엔리코 페르미, 모든 것을 알았던 마지막 사람을 주목해본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슈워츠 역시 눈에 띄는 배경을 지니고 있다. 저자의 아버지 멜빈 슈워츠는 198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항한 과학자인데, 아버지는 페르미의 제자가 될 뻔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유품에서 발견한 페르미에 관한 글로 이 작업을 시작했다는 설명이 호기심을 더한다. 엔리코 페르미 평전이 과학자가 쓴 과학적 평전이라면, 엔리코 페르미, 모든 것을 알았던 마지막 사람은 정치학자로서 페르미의 유산에 주목한 인물 평전의 성격으로 볼 수 있겠다. 특히 기존에 공개되지 않았던 새로운 기록 자료나 인터뷰 등이 담겨 있어 주목해볼만한 책이다. 두 저작 모두 페르미에 대해 보다 친밀하게 알고 있던 이들에 대한 접근성을 잘 활용한 저작으로 볼 수 있겠다.

 



저널리스트의 입장에서 원자 폭탄 투하 전 116일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카운트다운 1945도 함께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탐사 보도를 해온 저널리스트 크리스 월리스와 미치 와이스의 결과물이다. 이 책에 따르면, 최초의 원자 폭탄 투하 직전의 상황은 불황실성 그 자체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 최초의 원자 폭탄 투하 시에는 한 달 전(716)에 이루어 졌던 트리니티 테스트 실험에서 사용되었던 둥근 모양의 내폭형 원자 폭탄(플루토늄 사용)이 아니라, 실제 작동조차 불확실했던 총류형(혹은 포신형)리틀 보이’(우라늄235 사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기술로는 폭탄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 농축기술이 아직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인가했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프랭클린이 4월에 갑자기 사망한 사건은 당시의 급박하고 안개 속 같은 정국을 보여주는 불안한 징후였다. 프랭클린 대통령 이후, 부통령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어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던 것도 또 하나의 불확실한 변수였다. 이 책은 원자 폭탄이 최초로 투하되기 전 약 4달 간의 기간에 워싱턴 정가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정황을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여기에 더하여 원폭 투하라는 모티브에 관계된 여러 작품들을 더 모아볼 수 있겠다. 우선 201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창백한 언덕 풍경가 떠오른다. 이 소설은 원자 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진 사건(194589)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의 특징은 원자 폭탄의 참상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보다 절제된 서술이 인간 내면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 존 허시의 1945 히로시마가 있다. 194586, 히로시마 상공에서 원자 폭탄이 터진 사태로 순식간에 8만 명 가까운 사망자를 냈다고 한다. 저널리스트로서 존 허시는 원폭 투하 1년 후 파괴된 도시를 방문하여 생존자 여섯 명을 만나 증언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앞서 언급한 도서들은 주로 과학사적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한 셈이지만, 문학과 논픽션/다큐멘터리 결과물의 관점에서는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옮겨, 피해당자사의 입장을 들여다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특히 이 점에서 서경식 교수가 어느 칼럼과 책에서 상상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올해 기상이변과 집중 호우로 남부에 피해자가 속출하고 상당한 재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인원이 적어 기준에 미치지 못하므로재난 선포하기가 어렵다는 정부의 대응은, 관련 책임자들의 도덕적 무책임과 공감력의 빈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 피해자 수는 그저 정보로만 여겨졌을 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경식 교수가 반복해서 글로, 말로 이야기해주는 것은 바로 피해자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말이다. 이 작업은 고통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래야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참고기사: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25406.html)



마르그리트 뒤라스의히로시마 내 사랑이라는 책도 눈에 들어온다. 이 소설은 동명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으로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히로시마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원자폭탄 투하라는 참상을 모티브로 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 프랑스 여인의 비극적 기억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에 또 실타래처럼 떠오르는 책은 20세기 일본의 지성으로 여겨지는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양의 노래. 자신의 회고를 담은 이 책에서 의사이기도 한 저자는 히로시마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고, 일본의 패전을 지켜보았던 지식인이었다. 한쪽에서는 원자 폭탄을 개발한 이야기와 투하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면, 다른 쪽에서 원자 폭탄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책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에 아직은 번역이 되어 있지 않으나국내에도 여러 권의 저서가 번역 출판 된 물리학자이자 과학 저술가 짐 배것(Jim Baggott)의 The First War of Physics(미국판), Atomic: The First War of Physics and the Secret History of the Atom Bomb 1939-49(영국판)이라는 과학사 서적도 주목해본다. 그 밖에 원자 폭탄을 주제로 한 역사서나 과학기술서등은 훨씬 많을 것이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관심에 이어 다양한 관점의 책이 번역되어 나오면 흥미로울 것이다.



 

처음에 생각했던 도서 소개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항상 옆길로 새어 버린다. 여전히 두서가 없다. 하지만 최근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기대를 받고 있는 영화의 개봉을 기회로 함께 읽어볼만한 책들을 모아보았다. 원자 폭탄 개발과 투하라는, 인류사에서 전대미문의 이 사태에 대해 이를 단순한 정보로서만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이 국면을 상상해보는 일은 앞으로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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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8-06 1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엄청난 글이네요 ㅋ 오펜하이머 영화도 보고 싶고 이 책도 읽고 싶네요.
초란공님의 소개책 중 <창백한 언덕풍경> 만 읽어봤네요 ㅋ

멘하튼 프로젝트에 이런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군요. 완전 흥미롭네요 ㅋ

초란공 2023-08-06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른 유명 과학자들도 영화에 등장할지,... 유명 배우들이 많이 등장하더라구요~!!
 
죽음의 도시 브뤼주
조르주 로덴바흐 지음, 임민지 옮김 / 미행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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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최초로 사진을 접목한

죽음의 도시 브뤼주를 읽고 - [단상]


 

조르주 로덴바흐(Georges Rodenbach) 지음

임민지 옮김 | [미행] | (2023)



 

소설에 최초로 사진을 접목한 벨기에 작가. 죽음의 도시 브뤼주저자 초상 사진을 찍은 나다르라는 사진작가가 초기 사진 역사에 등장하는 나다르라면, 저자는 그와 같은 당대의 초기 사진가들과 교류하며 문학에 그림대신사진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해 보았음직하다. 당대의 프랑스 예술가들의 세계는 이미 일본 판화의 새로운 구도와 일상 소재로부터 받은 신선한 충격으로부터, 그리고 사진의 등장으로 새로운 분위기가 뒤섞어 묘한 흥분으로 뒤섞여 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화가는 세계를 그대로 복제하는 듯한 결과물을 내놓음으로써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고민하던 중이었을 것이며, 문인들은 회화를 자신의 글에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바로 이런 새로운 예술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직전, 끓는점 직전의 분위기에 소설의 저자 조르주가 태어났으리라.


조르주가 파리의 문학 모임에 나가 문인들과 교류했다는 사실이 조르주가 자신의 초상사진을 찍으면서 나다르를 비롯한 초기 사진의 선구자들과 교류했을 법한 가능성을 더해준다. 세계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기술적 도구로서 더 나아가 새로운 가능성을, 이 벨기에 몽상가는 틀림없이 주목했을 것 같다. 다만 프랑스인들이 벨기에인들이 쓰는 불어를 조롱하던 행위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 벨기에는 프랑스의 어설픈 변방으로 취급되었을 것 같다. 프랑스인들이 벨기에 프랑스어라고 구별해서 표현하기에 이런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벨기에 작가의 소설은 프랑스어로 쓰였다. 옮긴이의 설명을 읽고 상상할 수 있는 작가는 엉뚱하기도 했지만 문학에 진심이고 그만큼이나 성실했던 작가다. 이런 벨기에인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프랑스 지식인들의 시선을 작가도 느꼈던 것일까? 사진가 나다르가 찍었다는 그의 초상 자신에 남은 눈매를 볼 때마다, 저자의 몽상가다우면서도 슬픔을 어딘가에 숨기고 있을 법한 눈망울이 느껴진다.


 

소설에 실린 사진 속 도시의 건물들은 견고하고 육중하다. 남성적이고 견고한 문명과 관습의 흔적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그만큼이나 견고하게 유지되어 온 도덕의 감옥같이 느껴진다. 흔들림 없이 이 풍경들을 반영하는 고요한 호수 혹은 강은, 이 문명의 폭력을 견디며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사진은 이러한 진실을 담아내지 못하나, 소설가의 진실을 뒷받침하고 재구성한다. 19세기 당시 사진은 기술적인 이유로 긴 노출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 결과 고정된 풍경 속의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흔적은 지워져버린다. 마치 외젠 앗제의 파리 골목 사진처럼 말이다. 소설에 수록된 브뤼주의 풍경 사진 역시 덩그러니 건물만 보여주고 있다. 혹은 그나마도 희미한 인물들의 형상만 남아 있는 것이다. 사진에 희미하게 남은 사람의 흔적은 유령의 그것처럼 보인다. 이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존에 대한 증거이면서 동시에 죽은 이의 귀환이라 할 수 있다. 젊은 아내의 죽음으로 주인공 위그는 벨기에의 도시 브뤼주에 살게 되었다. 그에게 도시는 그 자체가 바로 아내나 다름없었다. 이 죽음의 도시는 끊임없이 위그에게 아내를 소환한다.


 

도시, 문명, 종교, 관습, 도덕, 규범, 죄의식,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필멸성, ‘죽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영원하고자하는 갈망, 행복을 무한히 연장하고픈 세속적 욕망, 앞으로도 영원히 살 것만 같은 오늘 하루에 대한 미련, 한여름 내내 울부짖던 매미 소리가 잦아들 즈음의 아찔한 시간 감각. 반대로 이 모든 건 존재가 어김없이 죽음으로 향할 뿐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니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규범과 죄의식은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이 이라는 일종의 광기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에 던져진 수많은 이들에게 이러한 사태는 편집증과 우울증을 낳기도 하고, 때론 혹은 언제나 흑백사진의 무채색으로 사람들의 어께를 무겁게 짓누른다. 흑백사진과 소설의 글쓰기는 모두 인간과 모든 존재의 필멸성을 명상하게 해주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아마도 저자 조르주 로덴바흐가 발견한 사진의 가능성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영원은 오직 찰나에서만 반짝이는 법이라고 말이다. 시인의 이 말은 최초의 사진이 접목된 죽음의 도시 브뤼주에서 정말 적절하게도 반짝인다. 세계의 일부만을 프레임 안에 고착시킨 사진만으로도 저자 조르주 로덴바흐는 사진이 주는 분위기와 잔상을 자신의 소설에 훌륭하게 접목하여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 냈다











[책속으로]

(저자 서문)
[1] "우리가 기꺼이 선택한 이 브뤼주라는 도시는 현실에서는 거의 인간처럼 보인다... 도시가 가진 어떤 영향력이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발휘되는 것이다. 이곳의 경치와 종소리에 의해 사람들이 형성된다."(9)


[2] "브뤼주의 배경이 에피소드들에 가담하기 때문에 책의 페이지 사이에 끼워 넣어 재현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9)


[3] "늦은 오후의 브뤼주 역시 어찌나 슬픈 도시인지! 위그는 그런 도시를 사랑했다! 그는 바로 그 슬픔 때문에 이 도시를 선택했고, 그런 큰일을 겪은 후 이곳에 와서 살게 된 것이다."(22)

[4] "죽은 도시는 곧 죽은 아내임이 틀림없었다. 그가 지닌 엄청난 슬픔의 감정이 그런 환경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가 견뎌낼 수 있는 삶은 이곳에서의 삶뿐이리라."(23)

[5] "이제 이 도시는 유독 ‘여신도’의 얼굴을 갖게 되었다. 도시의 양로원과 수녀원 담벼락,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돌로 된 소백의를 입고 무릎을 꿇은 듯한 모습의 교회에서 발산되는 것은 바로 신앙과 금욕에 대한 충고였다. 도시는 위그를 지배하고 그에게 복종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113)

[6] "위그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며 교회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죄에 대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맴돌았고 또 못 박혔다."(124)

[7] "아름다운 행렬은 끝난 것이다.... 존재했던 모든 것, 삶의 광경, 아침의 부활과 같이 노래했던 모든 것이 모두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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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의 야망 - 자연의 완전성을 탐구하는 연금술의 역사
윌리엄 뉴먼 지음, 박요한 옮김 / 길(도서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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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학혁명을 이끈 연금술의 전통 들여다보기

- 프로메테우스의 야망를 읽고


 

윌리엄 뉴먼 지음 | 박요한 옮김 [도서출판길] | (2023)




 

이 책 프로메테우스의 야망은 연금술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학술적 성격의 책이지만, 이 분야에 대해 궁금한 독자라면 읽기에 난해한 것은 아니다. 다만 연금술의 전통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데 작은 벽이 될 수는 있겠다. 이번에 이 책을 읽고 무엇보다 주석을 포함하여 꼼꼼하게 번역한 역자를 한 명 알게 된 듯하다. 이 책이 첫 번째 번역서라고 하는데, 성실한 젊은 학자를 알게 된 것 같아 반가웠다. 또 상당수의 국내 논픽션 도서가 흔히 간과하는 한글 색인 작업까지 추가로 정리한 노력이 눈에 들어와서, 비전문가 독자로서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독서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과학을 전공하긴 했으나 연금술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어쩌면 이 점 때문에 이 책이 나의 관심을 끌었던 셈이다. 읽고 나니 연금술의 전통이 근대, 특히 근대 화학이 탄생하는 데 실천적인 학문으로서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약간의 감을 잡게 해주었다고 평가해본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신으로 알려져 있다. ‘야망을 가진 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지니고, 인간에게 불을 비롯한 이성과 지식을 가져다준 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내게는 프로메테우스라는 신이 대표하는 성격은 인본주의적인 신, 인류에게 문명을 가져다 준 신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저자 윌리엄 뉴먼은 오히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생물의학 연구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앗아갈 것을 경고하며 언급한 프로메테우스의 야망이란 표현을 이 책의 제목으로 차용했다고 말한다. 과학과 종교의 오랜 대립과 갈등의 역사를 암시하는 표현을 과학사 도서의 제목으로 가져온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거칠게 정리해보자면, 연금술이 (아랍 과학을 동양의 전통에 넣을 수 있다면) ·서양의 오랜 전통으로서, 그리고 오랜 시간 엄연히 존재했던 문명의 기예로서 그 자체로 분명한 자리가 있음을 독자에게 설득하는 책이다. 저자가 펼치는 논의가 적용되는 시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인 기원전 4-5세기 즈음부터 과학 혁명 즈음까지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물론 연금술의 기원을 기원전으로 보고는 있지만, 이 전통은 주로 아랍 학자들이 연구하고 기록에 남긴 것에서 비롯된다. 중세(대략 9세기) 서양에서 학자들이 아랍어 저작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럽에 재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유럽에 연금술과 관련한 논쟁이 격화되었던 것은 12세기 즈음으로 보인다.

 


연금술이라고 하면 우리는 구리나 철 같은 일반 금속을 으로 바꾸고자 했던 전통을 말한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사이비 과학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이 전통은 진지한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의가 되었던 것이 알려져 있다. 일례로 아이작 뉴튼과 로버트 보일이 교환한 서신에서 연금술의 전통과 관련된 현자의 돌을 논의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주의해야할 것은 이 때 이들이 주로 주목했던 연금술의 영역은 신비주의적인 주술의 영역보다는 실천적인 비법, 시행착오를 다룬 실험 화학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초등학생들이 해볼 수 있는 화학실험 가운데 연금술의 전통을 떠올리게 하는 실험이 있다. 이를테면, 유황소금을 물에 녹여 검은 색의 유황소금 용액을 준비한다. 이 용액에 은으로 만든 반지나 은장신구를 넣고 30초에서 1분 정도 기다리면, 백색광이 나던 반지의 표면에서 유황성분과 결합하여 표면이 노란색으로 변색된다. 변색이 적절하게 잘 되면, 정말 금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 반지가 은반지인지 금반지인지 판단해볼 수 있는데, 방법은 금과 은이 가진 고유의 특성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고, 이 것이 정말 금인지 은인지 판단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물질 고유의 특성인 밀도가 다르다는 정보, 혹은 은반지의 부피와 질량을 이용하여 밀도가 다르다는 점을 파악해내면, 색이 변한 은반지가 금아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변색된 은반지를 원래 색으로 되돌리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소금물에 알루미늄 호일을 넣고 끊인 물에 다시 넣으면 변색된 은반지가 원래의 은색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이번에는 금속 원소의 이온화 경향차이에 따라 변색된 은반지의 표면에 결합된 유황성분이 떨어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이 실험이야말로 실천적이고 시행착오를 거쳐 형성된 연금술의 경험으로부터 알게 된 지식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연금술이란 우선 저급한 금속 재료를 금과 같이 귀한 금속으로, 질적으로 변환시키는 것을 추구했던 방법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을 모방하고자 시도해보고, 수없이 실패하면서 조금씩 탁월함에 이르는 과정이었던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에 대한 모방을 넘어 자연을 변형시키고, 보다 나은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던 셈이다. 은반지 변색 과정 실험은 연금술의 역사가 과학과 맞닿아 있는 지점을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자연에 대한 모방(미메시스)’로서의 시도는 이 책에도 여러 번 언급되는 화가 제욱시스에 관한 이야기에서 잘 볼 수 있다. 이 제욱시스에 관한 에피소드는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도 언급되고 있다. 제욱시스가 어느 날 동료 화가와 사실적인 그림그리기 내기를 하는 에피소드다. 그림 내기는 자연의 사물을 실제처럼 그려낼 수 있는 지, 누가 더 가깝게 자연을 묘사할 수 있는지로 승자를 결정하는 내기였다. 제욱시스가 벽에 진짜 포도나무처럼 그림을 그리자 새가 날아와서 앉으려다 부딪쳐 죽었다고 한다. 이건 자연에 대한 모방기예를 겨루는 작업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제 이 사례는 회화의 전통에서 자연을 실제처럼 실감나게 그려내는 문제와 이어져 있다. 아마 이러한 전통 혹은 논쟁에 확실히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은 아마도 19세기 초(1820년대)에 이루어진 사진의 발명이 아닐까 싶다.

 


사진의 발명으로 이제 자연에 대한 화가들의 모방작업이 더 이상의 논쟁이 되지 못했을 테다. 이후 화가들의 관심은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나 세계를 어떻게 그리고 표현해야 하는가가 아니었을까. 이 때 화가들이 주목했던 것이 마침 유럽에 들어와 있던 새로운 전통, 특히 일본의 호쿠사이가 작업한 판화그림 같은 것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명 우키요에 판화의 전통을 통해 유럽인의 색채에 대한 관심, 빛에 대한 묘사에 주목한 인상주의에 영향을 주게 된 것으로 확장해볼 수도 있겠다. 여기에 은을 이용한 사진의 현상·인화술에 관계된 화학 역시 연금술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근대 사회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연금술의 전통을 단순히 마녀 과학’, ‘미신으로 치부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연금술의 전통이 무엇보다 실천적 기예로서 화학의 역사와 전통에 분명히 자리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의학공부를 했던 연금술사 파라켈수스에 특히 주목한다. 파라켈수스는 의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지만, 정통 의학의 길에서 벗어나 당시에는 보다 천하게 여겨졌던 일종의 실험 의학(외과)’에 참여했다. 그리고 당대에 전통적인 의학의 권위로 영향력을 발휘하던 4원소설의 아리스토텔레스나 그 맥을 잇는 4체액설(병의 원인이 체내의 체액 사이에 발생하는 불균형에 따름)의 갈레노스의 의학적 견해를 비판하고 병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입장에 섰다.


 

문외한의 관점에서 정리해보자면, 갈레노스의 의학은 오히려 체내 기관의 기능 불균형에서 병의 원인을 찾는 관점을 고려할 때 한의학의 관점을 닮았다. 반면 외부에서 유입된 병의 원인을 퇴치하려는 관점에서 볼 때 파라켈수스의 의학적 견해는 오히려 현대 약리학의 전통에 맥이 닿아 있다고 보인다. 따라서 파라켈수스의 주장과 실천 중에서 주목할 만 한 점은 병을 유발하는 원인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사용하는 것, 특히 이를 위해 금속 성분을 약으로 처방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매독을 치료하기 위해 수은을 처음으로 처방했다 것이다. 저자가 연금술 역사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주목하는 파라켈수스의 연금술에 대한 내용은 매우 흥미로웠다. 다만 파라켈수스가 흥미로운 인물이긴 하지만, 연금술을 반대하는 학자와 교회 세력에 의해 파라켈수스를 비롯한 연금술사들이 마법사들과 함께 불경스럽고 미신적인사람들로서 악마화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에서 출발하여 모든 존재의 근원을 입자로 보는 질료입자론에 도달하는 데 연금술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는 것 같다. 좀 더 자세히 부연하면, 실험과학으로서 얻은 지식의 축적을 통해 연금술사, 과학자들은 점차 물질에 대한 입자설로 구체화해갔다는 관점이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입자설의 전통에서 출발한다는 점이 다르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자설에서는 모든 질료를 무한히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은 진공을 혐오한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관점에서 모든 질료를 무한히 나눌 수 있다고 본다면, 세계는 무한히 잘게 쪼개져서 빈틈을 가질 수 없고, 결국 이 세계에 진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설명할 수가 있게 된다. 어쩌면 반대로 자연에는 진공이 없다라는 명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물질의 입자는 무한히 쪼개질 수 있다는 이른바 연속설을 주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주장이 기원 후 초기의 카톨릭 교부들(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형성된 스콜라 철학이 권위로 작용하여 중세를 지배했다는 사실이다. 반면 카톨릭 세력,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지지하는 세력의 견제와 비판을 받은 이 이론과 달리,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로 대표되는 원자설의 전통을 고려해볼 수 있다. 이 원자설은 모든 질료가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아이스토텔레스의 연속설과 출발점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차이점은 이 입자를 작게 쪼개다보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원자(atom)’를 가정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의 주요 토대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속설(연속입자설)’에 기반을 둔 반면, 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이론이 바로 원자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원자설의 관점에서 보면 갈릴레이의 제자이기도 했던 토리첼리가 발견한 진공개념도 설명할 수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비전공자로서 여기에 주목한 이유는, 이 책 프로메테우스의 야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에서 근대 과학의 주춧돌을 놓은 보일, 라부아지에 등의 질료입자론전통에 연금술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반면 내 견해는 조금 다르다. 나는 고대 그리스에는 이미 두 가지 입자설의 전통이 있다고 보는 것에서 이해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속설이라고 표현한 입자설의 전통에 이미 기대고 있었다고 이해했다. 반대로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등의 맥을 잇는 관점에 따른 입자 이론은 원자설에 해당한다. 결국 입자를 무한히 작게 나눌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자개념은 연속설, 데모크리토스의 입자개념은 원자설로 나뉜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입자설이 건전하게 대립과 경쟁을 통해 각자의 견해를 입증하고자 했다면, 세계의 질료에 대한 이해가 몇 세기는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속설은 스콜라철학의 교리 형성, 교황 세력의 비호아래 중세에 지배적인 관념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하지만 데모크리토스로 대표되는 원자설의 전통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 전통을 지지하는 과학자들 물의 전기 분해와 같은 화학 실험을 통해 원자의 존재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근대 화학 혁명의 핵심이라 볼 수 있고, 이 위상 변화에 결정적으로 연금술이 영향을 미쳤다고 이해해보는 것이다. 다시말해 연금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속설전통에서 (근대 화학의 기원이 된) 데모크리토스로 대표되는 원자설전통에 결정적으로 힘을 실어 주는 역할을 했다고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이 부분은 과학사 전공자가 이를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다시 분명히 확인해보고 싶은 점이기에 내가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겨둔다. 이 분야의 대가가 쓴 책을 오독했을 확률이 99%이긴 하나, 조금 다르게 읽어보는 재미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에서는 특히 흥미로운 주제인 호문쿨루스에 관한 이야기가 할애되어 있다. 이 부분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은 사람이면 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호문쿨루스에 대한 주제는 SF작가 테드 창의 당신의 인생 이야기에 실린 단편 일흔두 글자와 관련지어 흥미롭게 읽었다. 이 소설에서 호문쿨루스와 유대 신비주의 전통에서 나온 골렘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진흙으로 빚은 존재에게 생명력을 주는 것은 문자()’라는 모티브가 매우 생소한 소설이었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의 야망에서 이야기해주는 골렘의 전통에 관한 내용을 읽고서야 비로소 테드 창의 이 단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단편은 유대 신비주의에서 나온 골렘에 관한 믿음을 충실하게 자신의 소설에 적용하고 있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기회에 보다 자세히 현재적인 주제나 관련 도서와 함게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책 프로메테우스의 야망은 연금술이 과학혁명, 특히 화학 분야에 미친 영향을 암시하는 선에서 끝나지만, 화학사의 관점에서 연금술의 전통이 과학혁명기에 미친 영향의 단면을 살펴보려면 장하석 교수의 물은 H2O인가?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연금술은 우리가 자연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인류의 역사에서 자연을 알고자 오랫동안 이루어진 도전 과정을 담고 있다. 보다 거칠게 말하면, 오래 시행착오를 거친 실천적인 방법론으로 이해해볼 수 있겠다. 이점은 연금술이 기여한 역할 가운데 하나로서, 근대의 과학혁명에 주도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물론 중요한 점은 화학분야의 과학혁명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며, 이미 중세시대에 큰 변화, 내지는 혁명이 이루어질 발화점 아래에서 만만치 않은 논쟁이 부글거리며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하면 안 될 것이다.


 

또 다른 영향은 연금술의 전통이 여전히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연금술의 현재성이다. 여기에는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연과 인간에 대한 왜곡된 태도를 낳은 부정적인 측면도 포함된다. 정통 카톨릭 교리에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문제부터, 악마의 개입에 대한 논쟁, 이후의 마녀 사냥에 미친 영향, 우생학의 씨앗을 낳은 문제,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 생명 공학과 인공지능에 까지도 연금술의 영향은 미치고 있다.


 

최근, 논문 조작으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황우석 박사가 현재 국내를 떠나 아랍에미리트(UAE)에 정착하여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다. 그는 낙타를 비롯하여 150마리 이상 동물 복제를 한 상태라고 한다. 이 기사를 보면서 생명을 복제하고 자연을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과 도전이 연금술의 전통으로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특히 중세에 연금술 논쟁을 일으킨 거대한 자료의 보고였던 아랍지역에서 동물 복제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뉴스가 연금술의 역사를 고려할 때 상징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메테우스의 야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전통이다. 다만 우리는 저자가 이 책에서 의도한 대로, 연금술을 단순히 사이비 지식으로만 뭉뚱그려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책을 덮으면서 다시금 느끼는 점은, 연금술이라는 전통은 인류의 문명 속에서 도도히 흐르고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기예, 혹은 인간의 의식 및 삶과 공진화해온 인류의 기예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1] "자연에 기반을 둔 기예는 자연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아지도록 사물을 이끌거나, 아니면 자연을 그저 모방한다."(65)
-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학》에서 언급한 내용.

[2] "이전의 저작들 대부분과는 달리 《역학 문제들》은 자연을 강력하게 정복하는 것을 오히려 바람직한 목표로 설정한다. 기계를 만드는 것은 더 이상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향해 실질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75)
-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담은 어느 후대 학자의 저서에 담긴 내용.

[3] "회화와 조각, 살아 있는 듯 보이는 오토마타를 제작하는 기예와는 달리 연금술은 자연적 생산물을 재생산하되 그 안에 포함된 모든 내부 성질까지도 재생산하기를 추구했던 기예였다."(78)

[4] "이처럼 확신 있는 표현들(‘자연적인 것보다 더 나은 것’, ‘참으로 은보다 더 나을 것’)은 대(大)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나타난 태도와 동일한데, 그는 인간이 만든 향료와 염료가 그것들이 따랐던 자연의 원본을 ‘정복했노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83)

[5] "마법은 천상의 힘을 물리적 물ㅊ에 이식함으로써, 의학은 인간의 몸을 병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건강함으로 이끎으로써, 농업은 씨앗을 정성 들여 지배하고 경작함으로써, 자연적인 것을 더욱 탁월한 완전성으로 이끌 수 있다고 여겨졌다."(93)

[6] "다른 어떤 주제와도 다르게 연금술은 중세와 근대 초 사람들 모두에게 자연과학과 기술의 도덕적이고 존재론적인 한계를 깊이 성찰하게끔 하는 초점을 제시했다."(94)

[7] "연금술이 서유럽에 유입된 시기는 대개 로베르투스 케테넨시스가 유명한 아랍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했던 1144년으로 추산된다."(108)

[8] "마법의 기에는 신으로부터 허락된 악마의 능력과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작용한다."(111)
- 중세 연금술 논쟁에서 반대했던 알베르투스의 맥을 잇는 페르투스의 언급.

[9]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상학》 제4권에서 종이 변성될 수 없음을 연금술의 기예가로 하여금 알게 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악마들은 [종을 변성시킬]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오로지 기예를 통해서만 일하기 때문이다."(112)
-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논증(연금술 비판/반대의 입장).

[10] "우리의 의도는 이러한 연금술 토론문제들을 일일이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연금술이 기예-자연 논쟁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탐색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표본이 될만한 가장 중요한 몇 가지 문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140)

[11] "실제로 《헤르메스 서》를 비롯한 중세의 여러 연금술 문헌이 채택한 인공-자연 구별의 경험주의적 접근법은 베이컨과 그의 17세기 후예들인 로버트 보일, 존 로크의 입장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141)

[12] "기본 금소의 황금변성에 관해 게베르는 원소들이 상호 변성된다는 질료형상적 설명을 입자론적 설명으로 대체했다. 그의 전복적인 사고는 17세기에 이르러 다니엘 제네르트와 로버트 보일의 입자론적 화학을 통해 그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160)

[13] "가장 중요한 계기는 교황 요한 22세가 연금술을 정죄하는 교서 <그들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한다>를 반포했던 사건이었는데, 이 교서는 변성이 ‘사물의 본성 안에 있지 않다’고 논증함으로써 연금술사들에게 위조범이라는 딱지를 붙였다."(170)

[14] "스위스의 주목할만한 의학 및 종교 저술가이자 파라켈수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테오프라스투스 폰 호헨하임(1493-1541)은 자연마법 및 비의적 실천과 깊게 연결된 근본 과학으로서의 연금술을 옹호했던 갑작스러운 인물이었다."(209)


"파라켈수스의 연금술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기술을 의학에 적용했을 뿐만 아니라 실험실 기술로 생명의 여러 과정을 설명하는 진정한 화학적 생리학으로 확장되었다. (...) 파라켈수수스의 우주론적 의화학에 필적할 만한 포괄적인 사상이 중세에는 없었다고 말해야 정당할 것이다."(210)

[15] "비링구치오가 활동했던 1520년대 후반의 피렌체는 연금술을 향한 관심이 집중된 도시였다."(245)

[17]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모든 광물과 돌은 하루 동안에 만들어졌으며, 그 가운데 어느 것도 불완전하지 않았다. 신은 각각의 모든 종을 온전하게 창조했으므로 그것을 변성시키려는 시도는 불경한 것이다."(270)

[18] "인공 생명에 관한 고대 후기 및 중세의 이론은 두 가지 주요 범주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 저작들이 제시해놓은 개요에 따른 자연 발생 이론에 기초한 범주이고, 다른 하나는 주엣 유대교의 골렘처럼 창조주 신의 우주론적 신화에 기초한 범주다."(298)

[20] "정자는 형상이고 생리혈은 질료라는 관점으로 태아의 발생을 설명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이후로 도전을 피할 길은 없었을 테지만, 그의 이론은 중세 전체를 지배하는 규범이 되었다."(305)

[21] "조시모스는 기원후 1세기에 성립했던 그 유명한 철학 및 종교 대화 모음집인 《헤르메스 전집》의 저자로 알려졌던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를 추종했던 인물이다. 《헤르메스 전집》에서 눈에 띄는 주제는 몸이 영혼의 감옥이라는 영지주의적 아이디어였다. 헤르메스에 따르면, 물질적 세계는 영혼으로 채워져 활성화되었지만 타락에 의해 오염되었다."(307)

[22] "살라만-압살 설화가 이미 보여주었듯이, 인공적인 인간 생명이라는 주제는 이슬람 문명권에서 열정적으로 채택되었다. 특별히 아랍 문화에서 이 주제는 서로 구별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겹치는 두 가지 전통으로 계승되었다. 하나는 비의적 성질을 다루는 가장 뛰어난 분야, 즉 라틴 중세에서 자연마법(magia naturalis)이라고 불리던 분야다. 다른 하나는 물론 연금술이다."(316)

[23] "유대교 학자들이 생각했던 인간 생명 복제의 작업 방식은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해왔던 어떤 전통들과도 전혀 다르다. 골렘(Golem)은 종교적 마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생명을 얻은 인공 인간이다."(324)


"골렘은 카발라(Cabala)라는 다소 막연한 이름으로 불리는 전통적인 유대교 신비주의의 산물이다. 카발라는 가장 오랜 출발점에서부터 히브리어 단어와 문자의 의미를 강조해왔다."(326)

[24] "유대학자 게르숌 숄렘과 파라켈수스 연구자 발터 파겔은 골렘이 16세기 파라켈수스의 호문쿨루스를 미리 보여주었다고 논증한다."(329)
- 게르숌 숄렘은 유대계 독일학자 발터 벤야민의 절친이었음.

[25] "발생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창조주와 평범한 피조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파라켈수스의 호문쿨루스는 히브리 골렘과 가장 먼 대척점에 서 있다. 파라켈수스의 호문쿨루스는 유대교의 골렘과는 달리 공격적이지도 않고 위협적이지도 않기에 파괴될 필요가 없다. 벙어리가 된 존재로서 말을 하지 못하는 골렘은 어떤 점에서는 열등한 하위 인간이다."(330)

[26] "오늘날과 비교하는 것이 경솔한 일이 아니라면 어쩌면 골렘은 보통의 생물학적 과정이 비-생물하적 방법에 의해 제거되거나 복제되는, 로봇공학이나 사이버네틱스, 인공지능의 세계와 같은 ‘딱딱한’(hard) 인공 생명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에 진정한 의미의 호문쿨루스는 생물학을 제거하기보다는 변화시키는, 즉 시험관 수정이나 클로닝, 생명공학과 같은 ‘축축한(wet)‘ 세계의 소산이다."(331)

[27] "1957년 파올로 로시의 탁월한 연구서 《프랜시스 베이컨: 마법에서 과학으로》가 출판된 이래, 이 고명한 대법관 베룰람 남작(베이컨)이 연금술 문헌으로부터 의미 있는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 책에서 로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베이컨의 주제가 연금술 및 자연마법 저작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437)

[28] "베이컨이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확장해 실험으로부터 도출된 지식에 우선권을 부여했던 것은 기예-자연 논쟁에서 기예를 지지하는 입장의 주된 근간이 되었던 ‘제작자의 지식’ 개념으로부터 그가 빚을 졌음을 보여준다."(458)

"베이컨이 기예를 자연에 동화시킨 것은 전혀 새로운 시도가 아니었지만, 그의 견해는 실험을 향한 그의 빈틈없는 태도와 결합해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주목할 만한 결실을 맺었다. 아마도 베이컨주의적 태도를 지녔던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이제 우리가 살펴볼 ‘자연주의자’ 로버트 보일일 것이다."(459)


[29] "과거 한태의 인식과는 달리 최근에는 보일이 연금술로부터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애에 걸쳐 기본 금속을 금으로 변성시키려고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수수께끼 같은 스승이었던 아메리카 망명자 조지 스타키를 비롯한 연금술사들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게다가 보일은 자신의 물질 이론의 상당 부분을 연금술적 화학으로부터 비롯된 아이디어 위에 세워두었다."(460)

[30] "더 흥미로운 사실은 보일이 기예-자연 구별에 대한 자신의 수정된 입장을 가지고 스콜라주의의 질료형상론을 공격하는 무기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보일이 보기에 기계론의 가장 큰 적은 실체적 형상 이론이었다."(461)

[31] "물질적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접근 불가능한 실체적 형상이라는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름 아닌 이러한 접근 가능한 속성들이다. 로크 자신이 직접 변성 연금술에 관여했다는 점, 그리고 보일이 죽을 때까지 현자의 돌이라는 주제로 아이작 뉴턴과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점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473)
- 로크가 연금술적 의화학에 관여했다는 증거도 연구되어 있다.

[32] "그(괴테)의 작품 가운데 연금술이 가장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다름 아닌 《파우스트》 제2부 제2막에서다. 여기서 우리는 파우스트의 현학적인 조수 바그너가 환상적인 연금술 실험실에서 편히 앉아 호문쿨루스를 만드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과 마주치게 된다."(497)

[33] "1829년 겨울, 괴테는 에커만에게 《파우스트》 제2부 제2막을 들려주었다. 괴테는 호문쿨루스가 단지 조수 바그너 혼자만의 피조물이 아니라 그 제작 과정에 메피스토펠레스도 능동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 관객들에게 충분히 분명하게 전달되지 못한 것 같다면서 걱정하고 있었다. 호문쿨루스의 기원에 악마적 요소도 포함된다는 강조점에도 불구하고, 괴테는 자신이 공감했던 지점에 어떠한 의심도 남겨두지 않았다."(501)

[34] "우리 시대의 신문 삽화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여전히 15세기에 토스타도가 염려했고 16세기에 파라켈수스의 후계자들이 즐거워했던 수많은 이슈에 의해 에워싸여 있다. 체외 발생과 복제, 여성의 ‘대리모’, 유전 공학이 불러오리라 예견되는 결과들은 근대 이전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결과들 속에 이미 나타나 있다."(506)

[35] "뉴먼에 따르면, 중세 후기 연금술사들은 질료를 입자로 이해하는 구체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연금술사들의 이른바 질료입자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되어 중세 스콜라주의를 지배했던 이념인 질료형상 이론과는 대척점에 놓여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질료형상 이론 또는 실체적 형상 이론이 근대 초 화학자들의 등장으로 극복된 것이 아니라 이미 중세에서부터 만만치 않은 경쟁자와 대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미 있는 관점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549)
- 옮긴이 해제

[36] "뉴먼은 연금술사들의 실험 행위야말로 중세 후기의 입자론을 고대 그리스 및 헬레니즘 시대의 원자론으로부터 구별해주는 핵심적인 단서가 된다고 주장했다."(549)
- 옮긴이 해제
-내가 이해하는 관점은 뉴먼과 달리, 연금술의 실험 행위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되어 중세를 지배했던 ‘연속적 입자론’으로부터 고대 그리스 및 헬레니즘 시대의 ‘원자론’을 재발견하고 그 맥을 화학 혁명으로 이어지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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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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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이상 열정적으로 책을 읽어온 노학자의 독서론



독서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



 


장마철 폭우로 걱정하다가 밖에서 맹렬히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듣고는 정신을 차린다. 아파트 뒤에 있는 조그만 숲에서 어느 날부터 울어대기 시작했다. 매미들의 절규처럼 들리는 이 합창을 듣노라면,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지나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요새는 눈이 부쩍 나빠진 것 같은데, 읽고 싶은 책은 끝이 없다. 하여, 나의 책읽기는 언제나 아쉽고 부진하다.

 


잠시 눈을 돌려 책 더미에서 아담한 책 두 권을 찾아냈다. 한국학의 대가 김열규 교수의 독서론을 담은 독서공부. 저자의 생애는 대한민국 근대사에 모두 걸쳐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소학교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처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해방이 되어서야 조선어를 국어로 배우게 되었다는 저자. 그에겐 일제 강점기의 잔재인 일본식 이름도 있다. 그가 대학교 신입생이던 1950년 여름에는 이른바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서울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기차를 간신히 얻어 타고 부산으로 귀향했다는 이야기는 소설에서나 들어볼 법한 경험담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누구에게나 어려웠던 시기를 견딜 만 하게 해준 것은 무엇보다 독서였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들이 급하게 버리고 간 책들을 구하여 읽고, 또 읽으면서 독서의 기본을 익히기 시작했다. 학교가기 전부터 시작하여 반세기 이상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이 바로 책이었다. 저자의 삶은 바로 독서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에게 독서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이렇게 답변할 것 같다. ‘독서는 앎이고 배움이자, 그 자체로 인간의 성숙 과정에 이르게 하는 삶이었다고.


 

어린 저자에게 최초의 독서는 할머니의 옛 이야기였다. 그의 읽기인생은 바로 듣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실감나게 들려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던 경험이 온몸으로 책읽기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러 번이고 들려주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저자가 귀로만 들었던 것이 아니라 살갗이 움찔대고 눈이 빛나며 입이 달아오르면서 가슴이 동동거리는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추억하는 최초의 책읽기는 바로 할머니의 이바구듣기였던 셈이다. 저자는 유년 시절의 듣기가 읽기, 나아가 쓰기로 이어질 수 있었던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기억한다.


 

여기서 온몸으로 책읽기는 단순히 텍스트를 읽을 때 나타나는 몸의 생리적 반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에게 온몸으로 책읽기변신하기였다. 읽는 자신이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가 되고,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가 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읽기란 나의 재창조였고, 신생(新生)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특히 그가 어린 시절부터 흥미를 보였던 문학읽기는 무엇보다 변신하고 둔갑하기였던 셈이다.


 

책읽기 과정에서 독자에게 요구되는 온 몸으로 책읽기마음의 변신모두는 공통적으로 책읽기에 참여하는 독자의 상상력을 요한다. 상상력은 이제 신경가소성이 가져다주는 신경 네트워크 형성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책읽기 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으로 되어간다. 말 그대로 독서를 통해 는 거듭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평생 지속한 책읽기는 변신의 독서였다고 정리해볼 수 있다.


 

온 몸으로 책을 읽으며 마음의 둔갑을 수행할 때 필요한 마음가짐이 하나 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그건 파우스트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이 정신은 단테의 정신혹은 두이노의 비가에 담긴 정신이기도 한데, 이를테면 방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다. 방랑하다보면 길을 잘못 들어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선택하여 탐색하다가도 되돌아 나오는 등의 시행착오를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정해지지 않은 길을 가보는 것. 그리고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파우스트의 정신과 비슷하지 않을까. 여기에서 파우스트에 언급되는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는 말은 떠올리게 된다. 그건 이 말이 바로 방랑과 시행착오, 그리고 순례의 과정을 겪어내는 인간의 정신을 말하고 있는 까닭이다. 나는 이를 불완전한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성숙의 과정을 끌어안는 책읽기의 정신이라 이해해보았다. 평생에 걸친 저자의 독서 편력기를 읽으며 함께 찾아낸 그의 공부론’, 공부도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게으름 피우는 중년의 책읽기 여정에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요즘 청소년들은 학원에서 각 교과 과목을 매우 세분화해놓은 수업을 듣곤 한다. 국어과목을 예로 들면, 학교에서 나가는 진도에 따라 교과내용을 예습, 복습할 수 있는 수업, 그리고 독서 및 글쓰기또는 독서 논술이란 이름으로 별도의 분야를 제공하는 사교육에 의존하는 모양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학원에서, 나아가 가정에서까지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노골적인 요구도 받는 모양이다. 이 과정은 효율성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진 학습이 아닌가 싶다. 책읽기든 공부든 주도적으로 선택하여 시행착오를 겪어볼 겨를 없이 잘 닦인 포장도로를 따라가도록 요구하고, 이런 시스템에 적응하길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학생에 따라 어느 정도는 이런 시스템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에 너무 의존하게 된 나머지, 개인의 주도권을 넘겨주고 이런 시스템에만 익숙해지는 경우다. 이런 방식은 결과가 좋지 않으면 곧바로 좋지 않은 방식으로 폐기되곤 한다. 이른바 시행착오의 과정이 부족하다. 당사자가 현상을 개선하고 극복할 기회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김열규 교수의 독서 편력기를 읽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뿐만 아니라 균형 잡힌 감성과 지성을 갖춘 인간으로 성숙해가는 일임을 깨닫는다. 아이들에게 책 선택의 주도권을 주고, 시행착오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는 일은 주도적인 독서가뿐만 아니라, 만족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독자들에게 반세기가 넘는 저자의 독서 경험을 풀어낸 독서를 통해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한 단초도 얻을 수 있다. 저자는 유년시절 글자를 처음 만난 후 소년과 청년 시기를 거치며 폭넓은 삶의 기초를 독서로부터 다졌다. 장년과 노년에 이르러서는 형성된 자신만의 독서 기술을 통해 자유자재로 변신하기도 하고, 무언가가 될 수도 있었다. 수잔 손탁이 독서는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라고 했던가. 이 말도 결국 같은 맥락의 독서 예찬이 아닐까 싶다. 독서란 어제의 나, 낡은 나를 죽이고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저자의 독서론을 정리해볼 수 있는 대목을 인용하면서 마칠까 한다.


 

읽는다는 것은 아는 것아는 짓도 아니었다. 그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나 아닌 다른 뭔가가 되는 것. 그렇게 나만의 세상이 만들어지는 걸 실감하곤 했다. 그것은 문학 읽기에서만 얻어낼 수 있는 위대한 경험이 아닐까 한다. 문학 작품은 새로운 인격이나 인성의 탄생을 위한 모태일지도 모른다.”(85)





  

[1]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그 이야기를 내 정서 속에 몽땅 녹아들게 하는 것이었다. 내 감각으로 남김없이 그 이야기를 집어삼키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 속의 모든 사건, 등장인물의 모든 움직임이 내 몸속의 뼈마디며 근육줄기 속에서 살아 약동하는 것이었다. 나는 온몸으로 들었다. 귀만이 듣고 있었던 게 아니다. 물론 처음엔 귀가 열리지만 이내 살갗이 따라서 움찔대고 눈이 빛나고 입이 달아오르면서 가슴이 동동거린다. 그 모든 과정이 바로 할머니 ‘이바구’ 듣기였다."(29)

[2] "읽는다는 것은 ‘아는 것’도 ‘아는 짓’도 아니었다. 그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나 아닌 다른 뭔가가 되는 것. 그렇게 나만의 세상이 만들어지는 걸 실감하곤 했다. 그것은 문학 읽기에서만 얻어낼 수 있는 위대한 경험이 아닐까 한다. 문학 작품은 새로운 인격이나 인성의 탄생을 위한 모태일지도 모른다."(85)

[3] "그것(읽기)은 단순한 정서적인 또는 지적인 성장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건 새로이 무엇으론가 바뀌는 것이었다. 변신(變身)이었다. 나는 크눌프가 되고 토니오 크뢰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읽기는 나의 재창조였다. 아니 신생(新生)이었다."(86)

[4] "문학 읽기를 통해 나는 홍길동처럼, 손오공처럼 변신하고 둔갑했다. 마음의 둔갑. 문학 읽기란 그런 것이다. 희망, 동경 같은 낱말들이 나를 매혹하기 시작한 것도 그 덕분이다."(99)

[5] "릴케는 짙푸른 아드리아해가 내려다보이는 두이노성에서 창작에 몰두하곤 했는데, 이 시집의 제목은 거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괴테 《파우스트》의 주인공이나 단테 《신곡》의 주인공처럼 방랑과 시행착오와 순례를 겪어내는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153)

[6] "괴테는 일찍이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사람은 무엇인가를 구하는 동안 잘못에 빠진다’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파우스트의 정신’ 이고, 더 나아가 어느 정도는 ‘단테의 정신’ 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이노의 비가》의 정신이기도 하고."(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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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7-19 1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미가 벌써 우나요? 저의 동네는 아직입니다. 조만간 울것 같긴한데 그러면 얼추 올장마도 끝나가는구나 하는데 아직 울지않는 걸 보면ᆢㅠ
저도 몇년 전 이 책 읽었습니다. 참 좋더군요. 공부도 읽으면 좋은데 걍 다음 생에서 읽어야 할 것 같아요. ㅋ ㅋ

초란공 2023-07-19 12:22   좋아요 1 | URL
저희 동네 매미는 지난 주부터 울었던 것 같은데 성질이 좀 급한 녀석들인가 봅니다. ^^;; 짝 찾느라 숫기 충만한.... <공부>는 찾아놓은 김에 설렁설렁 읽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