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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 문명의 종말에 대한 성찰
로이 스크랜턴 지음, 안규남 옮김 / 시프 / 2023년 1월
평점 :
인류의 지혜를 기억하고, 문명의 죽음을 직관하라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 문명의 종말에 대한 성찰
로이 스크랜턴(Roy Scranton) 지음 | [시프] | (2023)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기후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30년 이상 추적 기록된 자료를 기반으로 1980년대 후반에 세계적으로 과학적 합의가 이루어진 주제다.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가 지질학적 힘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한 인류는 이전의 환경으로 되돌아갈 길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구온난화는 우리의 실존을 크게 흔들 정도로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그 이유는, 단지 온도가 1-2°C 올라가는 현상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모한활동으로 인하여 모든 동·식물 종의 생존 역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 지구적인 식량과 에너지 환경의 혼돈을 필연적으로 예비한다.
우리가 매일 먹는 과일이 식탁에서 영영 사라진다고 생각해보자.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럼 기후변화로 우리가 자주 먹는 채소를 구하기 힘들어 졌다고 생각해보자. 대신 육식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고? 에너지의 관점에서만 보아도 동물은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에너지 소비자다. 에너지 소비자는 에너지 생산자를 찾아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재료를 섭취해야 한다. 이 세계에서 공짜란 없다. 식물이 바로 에너지 생산자다. 식물은 태양의 에너지와 대기 및 토양 속의 성분을 매개로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 저장한다. 식물과 동물로 분류되지 않는 균류는 어떨까. 균류 역시 동물처럼 양분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에너지 소비자다. 외부의 다른 존재에게 의지해야만 양분을 얻을 수 있다. 에너지의 관점에서 균류 역시 에너지 생산자에 의존해야 한다. 동물이나 균류가 에너지 생산자를 섭취하지 못하면 생존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럼 인간은? 식물과 동물이 사라지고 죽어갈 때, 인간만 살아갈 수 있는 방도는 없다. 모든 종류의 식량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게 스트레스를 줄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협한다. 식량이 자판기처럼 돈을 낸다고 바로 나오는 것이 아닌 이상, 돈을 가진 이들이라고 가난한 이들보다 상황이 조금 더 나을지 모르나 얼마나 더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지구온난화 문제는 빈부나 계급의 차이가 무색함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고려할 때,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의 저자 로이 스크랜턴이 ‘전 지구적 기후변화가 어떤 위협보다도 강력한 위협’이라고 경종을 울리며 시작하는 이유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기후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지구의 극지 주변 바다 혹은 내륙의 빙하나 빙상이 녹아내리는 양상은 앞으로 계속 녹아내리는 일 외에 되돌릴 길이 보이지 않는다. 국제 사회에서도 이 문제에 주목하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대처 방안을 고민해왔지만, 지금까지 얻은 답은 ‘답이 없음’ 뿐이다. 그 이유는 “지구적 탈탄소화가 지구적 자본주의와 사실상 양립 불가능”(63)하다는 데 있다. 기업과 정부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는 ‘탈탄소’에 대한 노력과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탄소(석탄과 석유)에 기반 한 자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까닭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러 ‘청정에너지’ 기술을 제시하지만 이는 현재 우리가 기반하고 있는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전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지구 경제를 탈탄소화 하는 일은 전 세계 전력의 80%가량을 대체해야’ 하는 일이다.
어느 정치가도 현재 작동하는 전 세계의 경제활동 방식에서 석탄과 석유를 대체하기 위해 저렴한 탄소에 대한 의존을 끊으면서까지 자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위험에 노출시키는 상황을 감수할 이는 없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여기에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48%를 차지하는 미국, 러시아, 중국은 탄소세 도입마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엄혹한 무한 경쟁 구도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서 이렇게 국가의 근간을 흔들면서 무리하게 탈탄소화를 이룰 수 있는 국가는 없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암울한 미래가 있다. 우리는 기후 정책에 있어서 ‘언제나 경제 성장 논리’가 승리한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국가의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보자. 인류의 대다수는 지구 전체의 환경적 위기를 인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현대인의 다수는 이미 안락한 소비 생활에 길들여져 있다.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하고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이동 전화기나 노트북, 대형 TV등을 모두 없애고, 여름에 에어컨을 폐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저자는 현대의 정보 사회 역시 탄소에 의지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이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는 지구의 온도를 올리는 데 참여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처럼 기후 변화 문제는 너무나 방대하고 우리의 생활양식과 깊숙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한 사람만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어느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지 않으며, 다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 그리고 되돌릴 길이 없다는 것만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시점에서 ‘탈탄소’를 외치는 일은 그저 순진한 구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일은 모순 속에서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일일뿐이다.
이 책은 이처럼 우울한 진실을 담담하게 전한다. 심지어 저자는 이 모든 문제의 문제는 바로 우리라고 일침을 놓는다. 그럼 우리는 이 허무하고 공허하게 예비 된 미래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문제의 본질을 직시한 다음,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묵시록적 의미로 개인의 죽음에 대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문명의 죽음’을 숙고해야한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탄소에 기반 한 문명의 종말이라는 운명과 마주하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배움으로써 이를 더 잘 맞이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죽음’이란 현상은 전대미문의 사태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 배우고 성찰하고자 대화체로 철학서 《파이돈》을 썼다. 뿐만 아니라 미셸 몽테뉴도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격언에 주목했다. 몽테뉴가 자신의 수상록 《에세》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154)이라 언급하지 않았던가. 죽음은 언제나 삶의 주변에서 서성이던 현상이며,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 필연적 현상이다. 저자 로이 스크랜턴의 말처럼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죽는 법을 배우고자 하더라도 실제로 겪지 않는 한, 그 때마다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배우라고 해놓고 이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니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일까. 저자는 죽음을 배우고자 하는 부단한 실천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지혜라고 말한다.
말장난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저자가 스토아 철학자의 말에 주목하고, 여기에서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까닭을 생각해볼 수 있다.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죽음’이라는, 이 불가항력의 사태로부터 피할 길은 없다. 그렇다면 이 필멸의 현상을 정면으로 직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탄소에 기반 한 현대 문명은 종말을 구할 수밖에 없고, 이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문명이 영원할 것이라는 자기기만과 거짓된 욕망을 걷어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 문제’임을 인정하는 데서 다시 출발한다. 이때 지구온난화가 사실인지의 여부나 이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대신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 문명의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 세계에서의 삶에 어떻게 적응해나갈 것인가’를 성찰하는 일이다.
암담하고 충격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인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문명의 죽음을 숙고하기는커녕,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기만 할 것이다. 이련 논의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저자는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물론, “인류는 화석 연료 문명이 끝난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 폐허 속에서 어떤 폭정, 어떤 야만 상태가 출현하든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다. (...) 아마 우리의 후손들은 지구의 나머지가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이고 찌는 듯한 밀림이 되더라도 북극해의 해안에 새 도시를 건설할 것.”(183)이라고. 대멸종이라고 해도 인류의 일부는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문제로부터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고 해도 우리의 운명이 변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숙고해야만 한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현실적으로 남아 있지 않다.
저자는 인류세에서 우리를 구원해줄 유일한 것으로 ‘기억’을 제시한다. 먼저 살다 간 ‘인류의 지혜가 담긴 기록들, 죽은 자의 유산’을 기억하는 일이 죽음을 고하는 우리 문명에 대한 성찰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어떤 기술적인 해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 최고의 두뇌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찾아내자고 촉구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은 다시 말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오히려 저자는 ‘죽음을 배우기’ 위해 인류가 남긴 유산, 인문학적인 전통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 새롭다.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인용문으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이 인상 깊어 인용해 본다.
“모든 사유가 기억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기억도 응결, 정제를 통해 개념적 사유의 틀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스스로를 더욱 단련시킬 수 있지 않을 경우에는 안전하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험들 그리고 사람들이 행하고 겪는 것에서 만들어지는 사건과 사고에 관한 이야기도 거듭해서 언급되지 않으면 생활 세계와 생활 행위에 내재하는 덧없음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진다. 유한한 인간의 일을 그 본질적인 덧없음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것뿐이지만, 이러한 끊임없는 언급도 만일 그로부터 미래의 기억을 위한 그리고 순전히 참고용으로라도 쓰일 만한 개념들, 지침들이 생겨나 떠오르지 않는다면 결국 덧없는 것이 되고 만다.”(한나 아렌트, 《혁명론》)(168)
다시 말해, 우리가 받은 유산을 단순히 기억 장치나 도구에 저장해놓는다고 끝이 아니다. 이 유산을 끊임없이 호명하고 이를 ‘기억’하고자 시도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지혜의 유산은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저자는 이러한 기억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말하고 이를 가공할 것을 주장한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문명의 죽음과 마주하여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기술적인 방주를 건설하는 것에서 나아가 ‘지혜를 실어 나를 문화적 방주를 건설해야’ 한다. 앞서 죽은 이들의 지혜가 우리에게 전달되었던 것처럼, 여기에 우리의 지혜를 더하여 미래 세대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이어지는 저자의 말에 계속 주목해보자.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류세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 자신을 기억 없는 삶의 덧없음 속으로 침몰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엄청난 역경과 싸워 힘들게 얻어낸 수천 년 동안의 지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을 버려서는 안 된다.”(183)
한나 아렌트의 말과 저자 로이 스크랜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떠오른 소설이 있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수도원 내의 장서관은 전 세계의 지혜를 모두 담고 있는 지식의 보고였고, 장서관이 바로 세계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인류의 지혜를 품은 책들은 비밀스러운 공간에 은폐되어 있었고, 접근도 제한되었다.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의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수도원의 책들은 여러 필경사들에 의해 필사되고 복제되었지만, 이는 소수의 관심사를 위한 기계적인 기억 저장용 활동이었을 뿐이다. 인류의 방대한 지식이 비밀스러운 공간에 저장되기만 하고 공유되지 못했다. 사람들에 의해 ‘거듭 이야기 되거나 기억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인류의 지식은 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미약한 촛불에 거침없이 불타올라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은폐되었던 인류의 과거는 구원되지 못하고, 하나의 세계 전체가 덧없이 소멸되었던 것이다.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는 80대인 화자가 10대 소년 수도사 시절 겪었던 사건을 회고한 기록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소설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생각났던 이유는 소설의 마지막에 있다. 화자는 수도원의 장서관이 화마에 사라져버리고 수도원이 폐허로 된 사건을 기억해내면서 다음과 같은 알쏭달쏭한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다.
“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이 소설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소설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삶과 죽음’을 성찰한 것과 관련이 있다. 존재가 사라질 때, 이름도 함께 사라질 수는 있다. 단 우리가 존재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 남기 마련이다. 다만 명예는 덧없는 것일 뿐이다. ‘장미의 이름’이 덧없게 여겨지는 이유는 장미의 이름을 기억할 사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 로이 스크랜턴의 말처럼, 우리는 죽음을 배우는 일에 결코 성공하지 못할 테지만, 누군가는 시도하고 실패해도 또 다시 시도할 것이다. 그게 우리의 삶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장미는 ‘삶과 죽음’이라는 우주적 진리를 일깨워주는 존재이자 생명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소설 《장미의 이름》과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에서 하는 이야기는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모두 ‘죽음’ 혹은 ‘존재의 필멸’을 진지하게 고찰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저자 본인은 실천의 하나로서, ‘죽음’을 배우기 위해 스토아 철학의 ‘죽음’에 대한 철학을 호명하고, 다시 이야기하며, 우리의 현재에 맞게 이 철학을 가공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다. 저자는 ‘죽음’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신념을 붙들고 있다. 그러므로 ‘문명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문명의 거듭나기를 상상하는 시도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책 속으로]
[1] "지구온난화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구온난화와 관련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던 때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 분명해 보인다. 많은 정책 전문가, 기후학자, 국가 안보 관료의 견해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지구온난화가 사실인가 혹은 지구온난화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이 뜨겁고 급변하는 세계에서의 삶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다."(18)
[2] "인간의 세대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나 운명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의 모습은 변함없이 영원히 그대로다."(20) - 윌리엄 블레이크의 글 재인용.
[3] "문제는 지구적 탈탄소화가 지구적 자본주의와 사실상 양립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63) - 저자는 대체 에너지원 없이 지구 경제를 탈탄소화 한다는 것은 전 세계 전력의 80%가량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언급한다.
[4] "자국의 경제에서 대놓고 석유와 석탄을 몰아내려는 정치가는 어떤 종류의 민주 정부나 과두 정부에서도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 더욱이 값싼 탄소에 대한 의존을 종식시키기 위해 긴축과 재분배를 강요한 지도자는 자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약하고 고립된 처지로 내몰게 될 것이다."(83)
"(문제는) 오늘날 전 세계의 많은 나라가 긴밀하게 통합된 하나의 경제로 연결되어 있는 거이 석탄과 석유 덕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84)
[5] "누구도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수단과 강력한 영향력과 개념적 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 위험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할 만한 계획을 떠올리지 조차 못하고 있다. 문명을 위한 어떠한 ‘리셋’ 단추도 없고, 향후 10, 20년 안에 전 지구적 인프라, 농업, 에너지 네트워크를 바꿔놓을 실행 가능한 계획도 없다."(108)
[6] "전 지구적 정보·소통 생태계는 석탄에 의지하고 있다. 당신이 이메일을 확인할 때마다, 당신은 지구의 온도를 올리고 있다. (...) 우리는 멈출 수 없다. 그리고 멈추려 하지 않을 것이다."(109)
"문제는 기후변화 문제가 너무 거대하다는 데 있다. (...) 문제는 누구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이다."(110)
[7] "석탄 및 석유회사와 그들의 정부 내 대리인은 자신들을 지키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군사력도 기꺼이 사용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노동 전쟁은 이를 잘 보여준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수십 년 동안 자국민을 상대로 벌인 전쟁은 셸과 셰브론의 노골적인 지원으로 시작된 것이었다."(126)
[8] "적은 바깥 어딘가에 있지 않다. 우리 자신이 적이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우리, 시스템, 벌집이."(141)
[9] "우리는 어떤 것을 실제로 행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를 정말로 알지는 못하므로 우리가 사는 동안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마지막 날까지 끊임없이 실천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실천 자체가 지혜다. 도겐 선사의 말로 하면, ‘그 길을 올곧게 실천하는 것 그 자체가 깨달음’이다."(156)
[10] "인간이 살아 있는 시간은 순간에 불과하고, 실체는 흐름 속에 있으며, 인식은 무디고, 육신은 썩게 마련이며, 영혼은 혼란 속에 있고, 운은 예측하기 힘들고, 명예는 덧없다. 한마디로 말해 신체에 속한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고, 영혼에 속하는 모든 것은 꿈과 공상이며, 삶은 전쟁이고 잠시간의 체류이며 사후의 명성은 망각이다."(157) -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
[11] "(우리는) 최고의 보물이자 가장 강력한 적응 기술을 가져왔다. 이미 죽은 자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인류세에 우리를 구원해줄 유일한 것을 가져왔다. 바로 기억이다."(161)
[12] "모든 사유가 기억으로 시작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기억도 응결, 정제를 통해 개념적 사유의 틀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스스로를 더욱 단련시킬 수 있지 않을 경우에는 안전하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험들 그리고 사람들이 행하고 겪는 것에서 만들어지는 사건과 사고에 관한 이야기도 거듭해서 언급되지 않으면 생활 세계와 생활 행위에 내재하는 덧없음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진다. 유한한 인간의 일을 그 본질적인 덧없음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그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것뿐이지만, 이러한 끊임없는 언급도 만일 그로부터 미래의 기억을 위한 그리고 순전히 참고용으로라도 쓰일 만한 개념들, 지침들이 생겨나 떠오르지 않는다면 결국 덧없는 것이 되고 만다."(168) - 한나 아렌트, 《On Revolution》에서 재인용
[13] "인문학 연구의 오랜 전통을 살아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비판적 사고, 명상, 철학적 토론을 통해 사회적 자극의 스트레스를 중지시켜야 하고, 과거를 계속 살아 있게 하고, 아카이브의 정보를 가꾸고, 저장되어 있는 기억을 읽고 해석하고 분류하고 돌보고 특히 재가공함으로써 현재에 대한 집착을 중단해야 한다. (...) 디테일에 대한 관심, 논증에서의 엄밀성, 주의를 기울여 읽기, 깊이 있는 성찰 등을 가르침으로써 인간이라는 동물 안에 사색의 진동을 주입시켜야 한다. 죽은 자들과의 교감을 지속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는 죽은 자들이듯 그들이 곧 우리이기 때문이다."(182)
[14] "인간이라는 사실이 인류세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 자신을 기억 없는 삶의 덧없음 속으로 침몰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엄청난 역경과 싸워 힘들게 얻어낸 수천 년 동안의 지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을 버려서는 안 된다."(183)
[15] "우리는 방주를 건설해야 한다. 멸종 위기에 놓인 유전적 데이터를 실어 나를 생물학적 방주만이 아니라 절멸의 위기에 놓인 지혜를 실어 나를 문화적 방주를 건설해야 한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를 이루고 있는 모든 언어로 된 사유의 구체적 기록은 미래에 이루어질 우리의 지적 성장을 위한 씨앗이자 토양, 원천, 자궁이다. 현대 문명의 종말을 대면하고 있는 지금, 인문학의 운명은 다름 아니라 인류의 운명이다."(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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